사(구, 랑, 망)
안제
끄트머리가 날카로운 찰나는 기억이 된다. 때때로 기억은 평생을 깊게 긁으며 흔적을 남기고,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라 부르기로 약속했다.
그해 7월 9일은 전례 없는 폭염을 기록했다. 그날로부터 딱 18년 전쯤 태어난 이샹은 저마다의 소리가 웅웅 울려대는 관람석 한가운데서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저를 버려두고 간 누나를 찾았다. 왕이쥔! 누나 소리 없이 이름 석 자만 달랑 불렀다는 것을 들키면 이샹은 팔이며 등을 두들겨 맞겠지만, 주변이 워낙 시끄러워 이샹의 목소리는 처참히 묻혀 사라진다. 결국 이샹은 끈적한 플라스틱 좌석에 털썩 앉는다. 타이밍 좋게 배트에 공 맞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리고, 이샹은 그게 빈 깡통 차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시시한 감상을 남긴다.
이샹의 생일로 끝나는 딱 사흘짜리 한국 여행, 여기저기 돌아보기도 바쁜 일정에 고교야구대회 관람을 끼워 넣은 것은 오로지 이쥔의 의사였다. 원래 고교야구가 더 재미있는 거라고, 보장된 미래를 걸고 뛰는 경기가 지루할 리 없다고 일장 연설을 하던 목소리가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린다. 다 좋은데, 한국까지 와서 야구를 또 봐야겠냐고. 암만 재미있다고 말해봤자, 쉴 틈 없이 빠르고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이샹에게 야구는 완전히 상극이었다. 라켓으로 셔틀콕을 치고받아 빠르면 10분 안에 승패가 결정되는 배드민턴이면 몰라. 배트로 공을 치고, 세 개의 베이스를 거쳐 홈 베이스로 들어와야 겨우 1점이 나는 야구는 러닝타임이 너무 길었다. 적어도 이샹에게는.
극성맞은 야구팬으로 정평이 난 이쥔이 옆에 있었더라면 어느 팀의 누굴 눈여겨봐야 하는지 먼저 묻지 않아도 줄줄 늘어놓았을 텐데, 그마저도 없으니 이샹은 야구고 뭐고 그저 덥고 지친 열여덟 살 외국인이 되었다. 덥다고 우는 소리를 내는 동생의 입을 막기 위해 이쥔이 사 준 콜라는 한참 전 녹아 버린 얼음과 섞이면서 텁텁한 시럽 맛만 남긴다. 기계적으로 빨던 빨대에서 텅 빈 소리가 나기 시작할 때쯤, 경기는 어느새 9회 말에 접어든다. 목적을 잃어버린 플라스틱 컵을 버리고자 자리에서 일어난 이샹의 시야에 마운드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마무리 투수의 얼굴이 걸린다. 다른 선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조금 마른 체형. 꽤 긴장한 얼굴로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다가 글러브를 몇 번 툭툭 치기도 하고. 관람석 한참 뒤에 있는 쓰레기통을 찾으며 무심코 생각했다. 엄청 잘할 것 같은데. 이샹은 마지막 남은 시럽 방울을 한 번 더 쪽 빨아 없앤 뒤 새파란 쓰레기통 안으로 컵을 골인시킨다. 차라리 농구 경기였다면 조금 더 흥미를 붙였을지도 모르겠다.
야, 어디 갔었어! 30분도 넘게 자리를 비운 건 이쥔인데 혼은 이샹이 났다. 한국말이라고는 ‘안녕’, ‘감사합니다’ 정도밖에 모르는 동생을 두고 먼저 사라진 건 누나가 아니냐며 따지려다 제풀에 지쳐 입을 오므리고 만다. 이샹은 한껏 불량한 자세로 미끄러지듯 앉았다.
오른손에서 벗어난 야구공이 긴장감을 가르며 포수의 글러브에 안착한다. 스트라이크. 전광판에 찍히는 투수의 구속은 152. 거의 누울 것처럼 앉아 있던 이샹이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고쳤다. 와, 빠르다. 이쥔의 설명이나 전광판의 숫자를 보고 인지한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느낀 감상이다. 앞선 투수들과 확실히 달랐다. 오른 어깨를 가볍게 돌린 투수가 다음 투구를 준비한다. 발을 끌어 자세를 잡는 일련의 과정이 조용하고 차분했다. 두 번째도, 볼 것도 없는 스트라이크. 무난하게 삼진이겠네. 이쥔이 중얼거렸다. 잘할 것 같았어. 이샹답지 않게 말을 얹자 이쥔이 의아하게 쳐다본다.
이샹의 말처럼 투수는 두 번째 타자까지도 무난히 삼진을 잡았다. 쟤 진짜 잘한다. 좀처럼 나오지 않는 안타에 경기장 내 분위기가 다소 느렸다. 경기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샹뿐이었다. 모두가 당연히 마지막 타자까지 뻔하게 아웃될 거라 예상했다. 스트라이크, 그다음도 스트라이크. 그러다가,
“어? 볼이네?"
등을 기대고서 핸드폰을 뒤지던 이쥔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구속은 비슷한데 위치가 틀어졌다. 어깨를 한 번 더 돌린다. 이번엔 영 불편한 기색이다. 두 번째도 볼. 세 번째도, 그리고 네 번째도. 결국 볼넷이 나왔다. 듬성듬성 차 있는 관람석에서 누군가는 탄식을, 누군가는 화색을 보였다. 물에 젖은 것처럼 흘러내린 땀을 급하게 닦아내는 손과 그 짠 기운 때문에 찡그린 표정. 결연할 정도로 꾹 다문 입술을 하고서 손목을 턴다.
그 이후에도 투수의 자책점이 계속되었다. 또 볼넷이 나오고, 안타를 얻어맞으면서. 9회 말 전까지 2점 앞서고 있던 백마고등학교 야구부는 마무리 투수의 연속 실점으로 처참하게 역전당했다.
눈이 빠질 것처럼 선명한 초록색 위에 경기를 망친 투수만 우뚝 서 있다. 이쥔은 꽤 진지한 목소리로 우승팀의 어떤 선수들이 다음 달에 있을 드래프트에서 선발될 것 같은지 예측하기 시작했다. 처음 들어 보는 한국 이름이 머리를 잠깐 스치곤 그대로 흩어진다. 덥다. 그냥 더운 정도가 아니라 뜨겁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러 옷이 다 젖는 그런 날. 저 투수는 얼마나 더울까? 툭 떨어진 왼쪽 손은 여전히 글러브를 끼고 있고, 오른쪽 손으로는 떨어지는 땀을 닦아낸다. 그러다 남색 야구모자를 벗어 한번 휙 털고, 다시 꾹 눌러쓴다. 그러다 고개를 들면, 이샹은 뚝뚝 흐르는 것의 시작점이 눈이라는 것을 알아채 버린다. 아, 땀이 아니라 눈물이구나. 저 투수는 울고 있구나, 아무도 모르게. 눈과 입이 일그러지며 눈물을 저지하지만 마구잡이로 흐른다. 결국 야구모자를 더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가려야 할 정도로.
“저 선수 이름은 뭐야?”
“쟤?“
변의주.
아마 너랑 나이가 같을걸. 원랜 에이스야. 입에 잘 붙지도 않는 세 글자짜리 한국어를 억지로 발음해 본다. 팀을 패배로 이끈 13번 변의주는 데일 정도로 달궈진 그라운드에서 분노하고 자책한다. 경기 내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야구공을 던지던 그 투수가, 대체 어떤 마음으로 마운드에 섰길래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잔상처럼 새겨진다.
그날 저녁 대만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이샹은 4개월 전의 전반기 고교야구 영상을 들췄다. 13번을 단 투수를 찾기 위해 3시간이 훌쩍 넘는 영상들을 속속들이 뒤지다 겨우 발견했다. 3월의 변의주. 어김없이 덤덤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투구를 준비하는 변의주. 나왔다 하면 삼진을 잡는 변의주. 변의주를 스무 번쯤 돌려 봤더니 어느새 타이베이였다. 투수만 나오는, 그것도 변의주만 나오는 야구를 3시간 내내 봤다는 소리다. 잠에서 깨어난 이쥔은 눈에 묻은 졸음을 간신히 이겨내고 있는 이샹을 보고 경악했다. 너 여태 야구 본 거야? 이샹은 긍정하지 않는다. 야구를 본 게 아니라, 변의주가 하는 야구를 본 거라서.
야구를 하겠다고? 이미 마음먹은 거라면 한번 전력으로 해 보라는 부모님의 반응과 달리, 이쥔은 말 그대로 이샹을 뜯어말렸다. 취미로 하는 방법도 있는데, 굳이 삶의 방향을 통째로 돌릴 필요까지 있냐고. 만약에 기적적인 확률로 재능이 있을지라도, 결정적일 때 잘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너도 봤잖아. 그 한국인 남자애 우는 거.”
그 남자애 때문에 야구라는 게 좀 궁금해졌다고 말하면 뜯어말려지다 못해 찢어질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밤낮으로 이샹을 설득하던 이쥔은 가을 학기가 시작되면서 정신없이 바빠졌고, 이샹은 그 틈에 야구부 입단 테스트를 거쳤다. 결과는 당연히 탈락. 야구공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않은 이샹이 두 달 만에 남들의 몇 년을 따라잡기란 불가능이었다.
하지만 이샹은 해낸다. 열여덟에 야구를 시작해 스물셋에 프로로 데뷔한 왕이샹. 어떤 계기로 야구선수를 꿈꾸게 되었냐는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이샹은 5년이라는 시간에 깎여 흐려진 한 투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누나에게 끌려간 한국 여행, 마찬가지로 끌려간 고교야구대회, 그곳에서 우연히 보게 된 투수. 지금 이샹의 손에 글러브가 끼워져 있었다면 그 긴 이야기를 다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샹의 손에는 글러브가 아니라 배트가 있다.
이샹의 타고난 유연성은 투수보단 타자일 때 빛을 발했고, 이샹은 자기가 뭘 잘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때는 막연하게 이런 생각도 했다. 타자가 되었으니 언젠가는 변의주와 공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고. 비록 그 이후 변의주에 대한 새로운 소식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로부터 다시 한 해가 지났다. 스물넷의 이샹은 한국 프로야구 A구단의 외국인 타자로 영입되게 된다. 짧은 경력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2년 연속 20홈런을 넘긴 이샹의 장타 능력을 높게 산 것이다.
캐리어에 이것저것 담는 이샹을 물끄러미 보던 이쥔은 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한국에 가긴 가네. 이쥔의 말뜻을 한 번에 알아채지 못한 이샹이 되물었다. 왜, 너 한국 가서 야구 보고 이렇게 된 거잖아. 이샹은 딱히 부정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본 어떤 투수 때문에 이렇게 됐지. 뒤에 붙어야 할 말은 굳이 하지 않는다. 우연히 마주치면 좋은 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지.
‘우연’에 얼마나 많은 상황이 해당될 수 있나. 소식 하나 없던 변의주가 알고 보니 A구단의 투수로 있는 상황. 아니면 다른 구단에 있던 변의주와 경기 중에 스쳐 지나가는 상황. 하물며 길을 가다 부딪치는 것 또한 우연이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은 도저히 우연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사고의 중첩에 가깝다.
“숙여, 왕이샹.”
녹슨 쇠공이 의주의 오른손으로부터 빠르고 강하게 벗어난다. 이샹의 뒤로 다가오던, 되살아난 시체의 머리를 깨트리며. 경기였더라면 사구 판정이 났을 투구. 되살아난 시체는 완전한 시체가 되어 쓰러진다.
7년 전보다 훨씬 뜨겁지만 아무도 폭염주의보를 내리지 못하는 땅, 오늘은 한국이 망한 지 27일쯤 되는 날이다.
●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이상 행동은 빠르게 퍼졌다. 현재까지 알려진 감염 경로는 감염자의 타액이 체내에 들어오는 경우로, 이런 경우 감염자는 짧게는 몇십 분에서 길게는 하루 이틀까지 발작성 기침을 지속하다 사망에 이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명 활동이 영구적으로 정지된 채 괴사하는 몸을 이끌고 무엇인가를 물어뜯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에게 달려든다. 당국은 바이러스에 대한 추가적인 공식 발표가 있기 전까지 '좀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삼가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초기 조치가 빨랐던 덕에 여느 영화나 드라마처럼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하루에 네다섯 명, 많으면 열댓 명까지 천천히 퍼지던 바이러스는 일련의 사건 때문에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발단은 대형 교회 뒤에 있던 창고용 컨테이너였다. 예배 도중 사망한 신도를 숨겨 오던 컨테이너 두 개가 감당 가능 선을 넘어가면서 문이 헐거워지기 시작했다. 장 권사님, 창고 문 좀 확인해 주시겠어요? 목사의 말에 주춤거리던 권사가 목사의 으쓱임에 겨우 발을 옮긴다. 자, 기도합시다. 저희를 하나님의 친백성 삼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고통으로 가득 찬 고함이 기도의 허리를 잘라 먹었다. 어리둥절한 사람들의 귓전에 들려오는 것은 교회 건물 전체를 울릴 것 같은 뜀박질이다. 불안한 눈동자가 교회 출입문을 향한다. 문고리를 돌려 민 권사의 손에는 피가 막 나기 시작한 잇자국이 선연했다. 교회 안은 아수라장이 된다. 컨테이너 하나에 약 40명, 총 80명 남짓의 감염자가 수백 명의 교인에게 달려들었다. 그 뒤는 예견된 전개. 그렇게 서울은 일주일 만에 봉쇄된다.
27일 전, 그러니까 서울에 있는 그 교회가 피바다가 되던 그 시간에 이샹은 타자석에 서 있었다. 이샹은 안타를 쳐달라고 노래까지 불러가며 싹싹 빌지 않아도 유효타를 날리는 선수다. 지난 시즌 우승의 주역이자, 몇 번이고 재계약을 해서라도 묶어 놓고 싶은 A구단의 효자 외인. 입에 든 딸기 맛 풍선껌을 두어 번 질겅거린다. 어느새 단물이 다 빠져 옅은 딸기향만 겨우 느껴졌다. 배트를 휙 돌리고, 오른 손목을 푼다. 더운 공기 사이로 공을 쥐는 투수의 모습이 보인다. 혀로 볼을 한번 훑고서 배트를 들었다. 아, 항상 이 공백이 참 기다리기 힘들다는 생각 사이로 비명이 비집고 들어와 집중력을 깨 놓는다. 뭐야? 앞에 선 투수의 얼굴이 천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고개를 돌리자 관람객들이 이리저리 엉켜 도망가는 광경이 펼쳐진다. 초점 없는 눈알이 그라운드를 훑는다. 그러다 그라운드 위로 덜그럭거리며 떨어지는 움직이는 시체들. 이샹은 배트 몸통을 쥔 채 질주한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뛰어. 살고 싶으면.
라커룸에서 일주일을 버텼다. 시작은 6명이었다. 이샹을 포함한 A구단 선수 3명과 B구단 선수 2명, 함께 딸려 들어온 일반인 1명. 처음부터 그 긴 시간을 버티려던 건 아니었다. 구석에 쌓아 놓은 생수와 온갖 주전부리를 확인한 A구단의 주장은 구조를 기다려 보자고 했다.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많은 감염자가 우르르 들어올 정도였다면 이 주변도 전부 위험한 상태일 거라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핸드폰은 언젠가부터 먹통이 되었고,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는 비극적인 확신이 섰다. 그래서 밖으로 나오게 됐다. 야구장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주변에 있던 고등학교며 상가가 전부 죽어 인기척이라고는 팔이나 다리를 물린 채 기침을 토해내는 사람들뿐이었다. 꼭 삐라 같은 종이가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서울이 봉쇄되었음을 알리는 전단이었다.
한 달 가까운 시간 동안 둘은 감염되었고, 하나는 도망쳤으며, 나머지 하나는 스스로 손목을 끊었다. 팔뚝을 물린 채 이틀 내내 기침을 하던 주장은 이샹의 배트를 붙잡고 제발 머리를 깨달라 부탁했다. 당연히 못 했다. 수개월을 함께 뛴 동료다. 주장의 동공이 빛을 잃고, 죽은 사람의 것처럼 꺼질 때까지도 이샹은 배트를 꽉 쥐고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동료가 죽지 못한 시체가 되어 이샹에게 달려들기 전까지.
18미터 뒤에서 나타난 변의주가 그 동료의 머리를 대신 깼다. 머리에 처박힌 쇠공을 태연히 뽑아 허벅다리에 문질러 닦아낸다. 대체 몇 번이나 닦은 건지, 새하얬을 오른 다리의 유니폼은 이미 검붉게 얼룩진 상태였고 왼다리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멍하니 서 있던 이샹은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낀다.
"욱, 으욱... "
속을 다 게워낼 것처럼 밀려오던 이샹의 헛구역질을 막은 것도 의주였다. 토하면 어지러울걸. 사실이다. 그동안 먹은 거라곤 조금의 물과 사탕, 단백질 바 같은 자잘한 것들이라, 여기서 속을 다 토했다간 정말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다. 의주는 저벅저벅 걸어 조금 뒤에다가 내려놓았던 선수용 더플백을 뒤적인다. 그러다 아직 따지 않은 생수를 꺼내 이샹에게 건넨다.
"아, 열어 주고 싶은데... 손이."
의주의 손은 감염자의 피로 범벅되어 있다. 따로 알려진 건 없지만 입안에 들어갔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샹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손으로 겨우 물병을 땄다.
통성명을 했다. 나는 변의주. 너는... 왕이샹, 맞지. 이샹은 의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혹시 이것이 꿈은 아닐지 의심했다. 어쩌면 타자석에 섰던 그날, 3주도 더 지난 그날부터 아주 오랜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변의주의 영상을 모조리 찾아봤던 그 대만행 비행기에서 그대로 잠든 건 아닐까. 하지만 자신에게 달라붙던 주장을 피하다 부딪힌 어깻죽지가 끔찍하게 욱신거리며 모든 것이 현실임을 일깨운다.
의주의 상황도 이샹과 다르지 않았다. 친선 경기 중에, 투구를 준비하다 관람석 상황을 보게 되었다. 의주는 며칠 전 동기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이야 감염자가 적으니까 신고받는 족족 격리하는데, 만약에 어디서 우르르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조용히 웃고만 있던 의주는 이제 답할 수 있다.
"...이렇게."
라고. 의주는 어떤 주춤거림도 없이 라커룸으로 향했다. 까맣고 각진 더플백에 생수 같은 것들을 담고, 훈련용으로 쓰던 쇠공도 챙겼다. 라커룸 밖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렇게 버텼다. 한 손에는 배터리가 절반도 남지 않은 핸드폰을 쥔 채. 서울 일대의 인명을 구조하는 데 총력을 다하겠다던 정부의 발표는 일주일을 채 가지 못했다. 더 이상 어떤 중계방송도, 구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의주의 핸드폰은 고요한 알림창을 끌어안고 방전됐다.
의주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뉴스는 지하철역 등의 대피소를 기준 삼아 비감염자를 우선적으로 확인하여 구조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라커룸에서 나온 의주는 짧으면 몇십 분, 길면 한두 시간을 달려 주변의 지하철역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수확은 없었다. 이미 버려진 지하철역이거나, 감염자들만 득실거리거나. 헛걸음의 의미를 굳이 찾자면 감염자의 특성 몇 가지를 알아냈다는 것이 전부다. 환한 빛과 소리에 반응하고, 물을 극도로 피하며, 머리에 손상을 입을 시 다신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
이번이 벌써 열일곱 번째 지하철역. 되는대로 찾아가느라 세지 못한 지하철역까지 합하면 아마 그보다 훨씬 많겠지만, 열일곱으로 치기로 한다. 한 달 가까이 그래왔듯 기계적으로 역내를 확인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다 감염되지 않은 사람은 기약 없는 구조대를 기다리며 천천히 죽어가는 이 서울에서, 이제 막 일어나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감염자를 상대로 피하기만 하는 야구선수를 발견했다. 배트 뒀다 뭐하지? 아, 잠깐. 아래턱에 힘을 주어 이를 악문 남자는 의주가 아는 얼굴이다. 대만에서 왔다는 야구 천재 왕이샹. A구단의 효자 용병. 의주는 기척 없이 더플백을 풀어 쇠공을 꺼냈다. 숙여, 왕이샹.
둘은 자연스럽게 함께 걷게 되었다. 이샹은 이제 막 혼자가 되었고, 의주는 처음부터 혼자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가만히 있다간 굶어 죽거나, 감염되어 죽지 못하는 시체가 되는 세상이다. 멀쩡히 구조되어 서울을 나갈 가능성만 있다면 그 선택지에 사활을 거는 게 정답이다. 의주와 이샹은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달리는 데에 물릴 정도로 익숙해져 있다.
의주는 이샹이 들고 있는 배트를 힐끔 쳐다봤다. 써 본 적은 있지? 이샹은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의주... 나 알잖아?"
몇 초 동안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던 의주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불쾌한 적막에 소음이 조금 섞여 있던 공기 사이로 의주의 웃음이 울린다. 이샹은 그게 꼭 나직한 종소리 같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알지. 왕이샹."
"...그치?"
"나 직관도 자주 갔어. 너네 구단 팬은 아니지만... 난 두산 좋아하거든."
그래도 자주 찾아봤어. 너 잘하잖아.
이샹의 미소에는 조금의 수줍음과 뿌듯함이 담긴다. 나도 너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내가 야구를 하기까지 의주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아냐고 물으려다 대학 로고가 박힌 의주의 가슴팍을 보곤 말을 무른다. 누나 이쥔이 알 정도로 유망한 고등학생이었던 의주가 어쩌다 대학 야구팀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아마 그 과정에는 몇 번의 실패와 좌절이 있었을 것이다. 이샹이 보았던 열여덟의 의주처럼.
의주는 딱 반만 빨간색 칠이 되어 있는 이샹의 배트를 살핀다. 손잡이부터 배트 머리까지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다. 빨간 부분에 묻은 것은 잘 분별이 되지 않아 깔끔하게 보일 정도. 아마 무언가를 막거나 밀어내는 데 쓰인 것이 전부일 것이다.
"사람한테 써 본 적 있냐고, 물어본 거야."
"아..."
"앞으로는 써야 할지도 몰라."
내가 방금처럼 못 도와줄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 이샹의 배트는 빠르게 날아오는 야구공이 아니라 달려오는 시체를 치게 될 것이다. 야구공은 멀리 날아가 점수를 내지만, 시체는 눈앞에서 터져 온갖 끔찍한 것을 보여줄 게 빤했다. 다시 속이 울렁거려도, 의주의 말마따나 언제까지고 의주를 기다릴 순 없으니 억지로 고개를 끄덕인다. 해 볼게.
텅 빈 상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 이틀 정도는 머물 만한 곳이 적어도 하나 정도는 있다. 5층짜리 상가의 3층, 조금 오래된 커피숍에는 수족관 속 관상어만이 살아있다. 의주는 바깥을 향해 활짝 열려 있던 출입문을 당겨 닫고서 팔을 뻗어 잠금장치를 돌렸다. 이샹은 느리게 흘러가듯 헤엄치는 관상어를 보다가 수족관 위에 올려진 사료통을 열어 몇 번 흔든다.
의주는 신기한 눈으로 커피숍 안을 돌아다니는 이샹을 본다. 생각보다 밝은 애구나. 경기만 봤을 땐 조용하고 무거운 편일 줄 알았다. 이샹의 타구가 딱 그런 스타일이다. 빠르고 묵직하게 날아가는 공. 유연함 속에 숨긴 공격성. 이샹의 뒤에 붙는 수식어가 그러했다. 입안이 쓰다. 의주가 애써 외면하며 묻어 둔 절망감에서는 쓴맛이 난다.
의주한테는 중요한 한 방이 없다고들 했다. 오히려 마지막에 미끄러지는 편이지. 경기를 완전히 망친 7년 전의 여름처럼. 그날따라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몸이 안 좋아서, 관람석이 시끄러워서... 전부 말도 안 되는 핑계. 그날의 경기는 오로지 의주의 오른손으로 망친 것이 맞다. 그날의 패배가 꼭 징크스처럼 남았다. 중요한 순간마다 공이 휘기 시작했다. 의주의 마지막 투구는 항상 탄식을 낳았다. 너 이런 식이면 프로 못 가, 변의주. 주변의 걱정 담긴 쓴소리는 현실이 되었고, 같이 훈련하던 선배와 동기와 후배가 프로로 데뷔하는 동안 의주는 아마추어 야구선수로 잔류했다. 뻐근하게 당기는 오른 어깨를 돌린다.
마땅한 수첩이 없었다. 그래서 의주의 왼쪽 팔뚝에는 볼펜 낙서 같은 것들이 얼룩덜룩하다. 가 본 지하철역을 지우고 앞으로 가 볼 지하철역을 적어 내리던 중이다. 꼭 문신 같네... 팔뚝에 쓸 공간이 부족해지기 전에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한다. 기절하듯 잠든 이샹은 소파 팔걸이에 다리를 걸친 채였고, 의주는 팔걸이를 지지대 삼아 반 정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수족관의 물소리와 이샹의 숨소리를 비집고 낯선 인기척이 들린다. 고개를 돌려 출입문을 확인하자 무게를 실어 문을 열려는 실루엣이 보인다. 의주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이샹을 흔들었다. 의주가 입술에 손을 댄 채로 이샹을 깨운 덕에 이샹도 별다른 소음 없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유리로 된 출입문이 깨지지 않는 이상 둘은 안전할 것이다. 그렇다고 맘 놓고 잠을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의주는 출입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이샹의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손에는 얼룩진 쇠공을 들고서. 배트를 바닥에 꽂아 지탱하던 이샹의 옆에서 쇠공을 왼손에 탁탁 던지는 소리가 났다.
"그거 훈련용이지?"
"아, 응. 생각보다 쓸 만해."
"의주도 배트 같은 거 들어야겠다."
"아무래도... 근데 아직은 이게 편하네."
공만 잡았어서 그런가. 나도 야구를 좀 오래 했거든.
잠이 덜 깬 눈을 깜박이던 이샹은 불편하게 잔 탓에 뭉쳐버린 뒷목을 주무르다 자기도 모르게 알아, 하고 답해 버린다.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지으려던 의주는 이샹이 자신의 유니폼을 보고 짐작했을 거라 단순히 납득하곤 고개를 돌렸다.
유리문이 규칙적으로 덜컹거린다. 미처 죽지 못한 시체가 쿵쿵 온몸을 박아대는 탓이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이샹은 보이는 것보다 숫기가 없는 편이었다. 어색한 공기를 환기한 건 의외로 의주였다.
"야구 늦게 시작했다고 들었어."
"응? 맞아. 고등학교 때..."
"대단하다. 진짜 천재구나."
"진짜 아니야. 그냥..."
야구엔 관심도 없다가, 어느 차분한 투수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야구를 시작했다고 말하면 의주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샹이 말을 아끼는 사이 쇠공을 던지는 의주의 손이 점점 느려졌다. 나는 열 살 때부터 했어.
"그땐 타자도 해 보고 그랬는데."
"왜 투수가 됐어?"
"글쎄... 내 공으로 경기가 시작된다는 게 좋았거든."
시작을 할 수 있고, 끝을 낼 수도 있는 자리잖아.
채 꺼지지 못한 네온 불빛이 들어오는 탓에 얼룩덜룩하고 어스름한 시야였지만, 의주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의주는 항상 그런 마음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 아래에 그런 의미를 단단히 받치고서.
맥없이 흔들리던 유리문은 동이 틀 때쯤 잠잠해졌다. 의주는 다시 이샹의 건너편 소파에 몸을 뉘었고, 이샹은 겨우 떨쳐냈던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가만가만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의주를 봤다. 이 이상한 일들이 모두 해결되면 뭐부터 하고 싶어?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경계에서 의주가 그렇게 물었다. 한 달 전이었다면 이것저것 떠올랐을 텐데 지금은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 남았다. 가족이 보고 싶어. 이샹의 말을 듣고서도 한참 말이 없던 의주는 이샹의 눈이 거의 감겼을 때 읊조렸다. 난... 경기를 잘 끝내 보고 싶어. 보글보글 수족관 소리가 의주의 목소리 뒤로 흩어진다.
커피숍 벽에 달린 시계는 약이 다해 오후 2시에서 움직이지 않고 머무른다. 조심스럽게 문을 당겨 열자 몸이 부딪힌 모양대로 핏자국이 남아 있다. 이샹은 또 울렁거리려는 속을 겨우 잠재우고서 의주의 뒤를 따랐다.
길거리는 전부 멈춰버린 지 오래다. 2주 전까지만 해도 의주나 이샹과 같은 비감염자들이 많았다. 빈 건물을 쉘터 삼아 서로 돕고 경계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의미다. 물이나 통조림 같은 것을 구하려 돌아다니다 보면 적게는 한두 명, 많으면 대여섯 명까지도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때를 기점으로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전염성이라는 특성은 바이러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울과 절망, 거기서부터 오는 허망함과 전부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 비감염자 무리에 자의든 타의든 희생자가 생기면 그때부터 아주 빠른 속도로 와해가 찾아왔다. 이샹이 혼자 남겨졌듯이.
의주는 주인 없이 버려진 차라면 꼭 한 번씩 확인했다. 대부분 차 키와 함께 방치된 차량이었지만, 운전석이나 조수석, 뒷좌석에 시체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몰 만한 차는 몇 대 안 되었다. 거기다 길 위에 깔린 것들을 넘어가려면 웬만큼 큰 차여야 했고. 이게 괜찮겠다. 은은하게 회색빛이 도는 지프 랭글러의 문을 덜컥 열어 더플백부터 싣는다. 옆에 타려던 이샹이 멈칫했다.
"의주, 근데 차 소리가..."
"몇 번 해 봤는데, 괜찮았어. 따돌리면 돼."
"운전할 줄 알아?"
키를 돌리던 의주가 힐끔 이샹을 쳐다봤다. 음... 건조하던 입꼬리가 어색하고 둥글게 말려 올라간다. 할 줄은... 알지. 뻔뻔하고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엑셀을 밟자 거친 속도감이 붙는다. 이샹은 오로지 살기 위해 천장 손잡이에 매달렸다. 너 라이센스 없지-! 제대로 된 신호도, 교통경찰도 사라진 도로 위로 의주의 낮은 웃음소리만 남았다.
번화가에 있는 R역이라면 비감염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흘러내리듯 계단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피해 조용히 내려가자 가만히 서 있는 감염자들 수십이 보였다. 감염 전 난투가 있었는지 감염자들의 상태는 물론이고 시선이 걸리는 곳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텄다. 지하철역 안 상황이 궁금해 의주를 뒤따르던 이샹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없어? 뻐끔거리는 입 모양을 향해 한 번 더 고개를 저으려다 이번엔 끄덕인다. 응, 버려진 역이야. 이샹의 어깨를 잡아 방향을 돌린다. 왕이샹이 저걸 봤다간 또 한참을 힘들어할 게 뻔하기 때문에.
지하철역을 몇 개나 확인했냐는 이샹의 물음에 의주는 핸들을 잡은 채 고민했다. 이샹과 마주친 그 지하철역이 열일곱 번째였으나, 주변에 비감염자라고는 이샹이 유일했기 때문에 더 확인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이번이 열여덟 번째. 열여덟 번째에 넣지 못한 지하철역까지 합하면 절대 적은 수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이젠 정말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창에 걸친 왼손으로 마른 입술을 가볍게 뜯던 의주가 이샹의 되물음에 선뜻 생각에서 깨어난다. 몇 개나 확인했냐고?
"응. 방금 것까지."
"......여섯 개?"
"에, 앞으로 확인할 곳이 더 많이 남았네."
"...맞아."
빨리 찾고 싶다. 이샹의 혼잣말에 핸들을 쥔 손이 움찔 떨렸다. 찾을 수 있을 거야.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 뒤에는 어쩌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비관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비관이지 이샹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나는 못 찾았어도, 왕이샹은 찾을 수도 있지. 야구선수 변의주는 실패했지만, 야구선수 왕이샹은 성공했듯이.
감염자와 비감염자 둘 중 어느 쪽도 없는, 완전히 버려진 지하철역이라면 차라리 나았다. 운이 좋으면 상태가 괜찮은 역무실에서 밤을 지낼 수도 있었고, 역마다 하나씩은 놓인 자판기에서는 생수는 물론 초콜릿 같은 것을 꺼내 먹을 수 있었다. 금이 간 자판기 유리에 배트를 휘두르자 파편이 산산이 깨지며 내려앉는다. 와장창하는 소리에 의주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의주와 눈이 마주친 이샹이 어색하게 웃다가, 날카로운 유리조각 사이에서 엠앤엠즈 한 봉지를 꺼내 흔들었다. 초콜릿 먹을래...? 의주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이샹보다 낮고 조용한 웃음소리가 플랫폼에 울린다. 하나만 줘. 다 부서진 자판기 앞에 나란히 앉아 입안에서 동그란 초콜릿을 굴리고 있는 모습이 영 웃겼다.
문제가 되는 지하철역은 감염자들이 몰려 있는 경우였다. 조명이 고장 나 빛이 잘 들지 않는 곳은 감염자들이 가만히 선 채 움직이지 않아 큰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괜찮다. 감염자들과의 대치는 내부가 환하고, 지상과의 거리가 멀지 않은 얕은 지하철역에서 발생한다. 그런 지하철역을 확인해야 할 때, 의주는 웬만하면 홀로 내려가 상황을 살폈다. 이샹은 의주의 상상보다 물렁한 편이어서, 그런 이샹이 감염자와 맞닥뜨렸을 때 동요하지 않고 배트를 휘두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의주가 보는 이샹은, 자판기는 부숴도 감염자는 못 죽일 착한 애다.
이런 의주 덕에 다섯 곳의 지하철역을 더 확인하는 동안 이샹이 감염자를 향해 배트를 쥘 일은 없었다. 보통 이샹은 조수석에 앉아 의주가 돌아오길 기다리거나, 차를 댈 곳이 여의찮으면 의주가 지하철역에 내려갔다 오는 동안 그 주변에서 서성이면 되었으니까. 이샹도 의주의 생각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이샹이 감염자와 마주할 가능성을 최선을 다해 없애고 있다는 것. 의주가 처음 목격한 이샹은 감염자 한 명도 제대로 떨쳐내지 못하는 장면이었으니 당연한 거였다.
이샹, 만약에 감염자를 만나면... 머리부터 노려. 마땅히 지낼 곳을 찾지 못해 텁텁한 차 안에서 밤을 보냈던 날이었나. 앞뒤로 뻥 뚫린 도로는 불길할 정도로 고요했고, 바깥과 통하는 틈이라고는 덜 닫힌 창문이 전부인 차 안은 시트가 소음을 전부 먹어 먹먹했다.
"머리가 제일 확실해. 만약에 못 하겠으면 다리라도..."
동그랗게 찢어진 눈이 어둠 속에서 의주를 빤히 본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를 멍하니 보던 의주가 이샹과 눈이 마주치자 눈에 띄게 움찔한다. 첫 번째는 이샹과 자신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두 번째는 설명이 좀... 비윤리적이었나, 싶어서.
의주라고 처음부터 의식 고장 난 사람이나 다름없는 감염자를 깨고 부수는 데 태연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무뎌졌을 뿐이다. 의주는 여러 면에서 뭉툭하고 둥그렇게 태어나, 일단 한 번 부딪히기만 하면 남들보다 몇 배는 빠르게 생각을 마모시킬 수 있었다. 감염자를 처음 마주했을 땐 의주도 이샹과 같았다. 두 번째, 세 번째 감염자까지도. 언제부터 의주는 무던해졌던가. 감각이 닳은 탓에 이젠 기억도 조금 흐리다.
이샹은 그런 의주를 민감하게 만든다. 자신이 한 말이 이샹의 기분을 끔찍하게 만들진 않았는지 자기도 모르게 되짚어 볼 정도로. 하지만 이샹은 의주의 예상보다 복잡한 사람이 아니다. 이샹은 다리 옆에 눕혀 놓았던 배트를 세워 문에 기대어 놓는다.
"걱정마. 나 왕이샹이잖아."
뻔뻔한 표정에 또 웃음이 터진다. 그래, 왕이샹이지.
그 대화를 나눈 게 12시간 전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래됐나. 아니...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나? 모르겠어. 의주, 나 네가 했던 말이 기억이 잘 안 나. 항상 건조하던 손이 축축하게 젖어 든다. 이러다 배트가 손에서 미끄러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배트 손잡이에 손 모양 물 자국이 남았다. 오랜 습관 때문에 꼭 입안에 딸기 맛 풍선껌이 씹히고 있는 기분이다. 오른 손목을 한 번 돌리고, 의주가 혼자 있을 지하철역 끝을 본다.
발단은 언제나와 같았다. 의주가 혼자 지하철역으로 걸어 내려갔고, 이샹은 지하철역 밖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대학가에 있는 X역은 다른 지하철역보다 주변이 훨씬 한산했다. 감염자가 돌아다니지도 않고, 감염자나 비감염자의 시체도 없는 이상한 곳. 들리는 소리라고는 바람 소리와 이샹의 배트 소리가 전부인 곳. 이샹은 고개를 돌려 아득하게 이어져 있는 지하철역 입구를 본다. 느낌이 안 좋아. 의주가 들어간 지 얼마나 됐지?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를 콱콱 밟아 내려갔다. 끝에 가까워질수록 발을 질질 끄는 소리나 짐승 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들이 들린다. 모국어로 된 욕이 샜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스물은 족히 넘어 보이는 감염자들 사이를 피해 달리고 있는 변의주. 이샹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배트를 기둥에 내리쳤다. 높고 가벼운 소리가 지하철역 안을 가득 채운다. 의주에게 향했던 눈들이 전부 이샹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사람에게 배트를 써 본 적이 있냐고 묻던 흐린 목소리를 겨우 곱씹었다. 나무로 된 묵직한 배트가 썩어가는 머리통을 하나둘 깨고, 딱딱 부딪히는 이 사이를 비집고서 턱을 아작낸다. 부패하기 시작한 몸들은 약하고 물렀다. 더 달려드는 감염자가 없을 때쯤 의주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벽에 기댄 채 이샹을 보고 있다. 너 진짜... 안도감으로 풀려버린 어깨 때문에 배트가 땅에 질질 끌렸다. 땀으로 젖었던 배트가 다른 체액으로 젖는 바람에 이샹이 지나온 자리마다 붉다.
"의주."
"...미안, 이렇게 될 줄 몰랐,"
이샹은 온몸을 실어 의주를 끌어안았다. 역한 냄새로 범벅이었지만 의주는 이샹을 마주 안았다. 가슴팍에 닿은 이샹의 심장이 불안하고 공포스럽게 뛰어대고 있었다. 그건 의주도 마찬가지였다. 둘이 된 이후 처음으로 마주친 현실이었다. 둘이 되어버린 바람에 그들도 모르게 잊고 있었던 현실.
의주가 들어올 때만 해도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감염자 전부가 가만히 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단 말이다. 벽에 가까이 붙어 서 있던 감염자가 툭툭 부딪혀 누전차단기를 건들지만 않았어도 의주가 감염자들 사이에 갇힐 일은 없었다. 한순간 불빛이 켜지며 감염자들이 고개를 들어 의주를 쳐다봤다. 수십 개의 무른 눈알이 의주에게 향한다. 의주로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우연이었다. 어쩌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 그럼 이샹은 어떡하지?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도 왕이샹 생각이 나는 게 조금 의아했다. 서울을 나갈 때까지, 그전에 만약 무엇인가 잘못되면 죽기 직전까지 함께 있을 동료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의주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그러다 정말 이샹이 나타났다. 꼭 울 것 같은 얼굴로 배트를 고쳐 쥐며.
사실 이샹은 그냥 도망갈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더라도 의주는 이샹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샹은 오로지 의주를 위해 감염자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의주는 틈 하나 없이 자신의 품을 안고 있는 이샹을 다독인다. 그 안에는 단순히 문장 몇 개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담겨 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차창 위로 계속해서 빗물이 고였다가 흐른다. 서울이 봉쇄되고 내린 첫 비였다. 죽어버린 정신 속에서도 부패하고 싶지는 않은 것인지, 감염자들은 최대한 물에 닿지 않으려 했으므로 비가 온다는 것은 곧 비가 멎을 때까지는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의미였다. 평소와 다르게 입술을 꾹 문 채 밖을 보고 있는 이샹을 힐끔 확인한 의주는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X대학교는 의주도 두어 번 와 본 곳이었다. 학교 간 친선 경기를 치른 적이 있어서 그랬다.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보이는 대운동장,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마운드가 의주의 자리였다. 의주는 차 문을 덜컥 열고 나가 후두둑 떨어지는 빗속에 섰다. 얼이 반쯤 빠진 채 창밖만 보고 있던 이샹의 시선이 의주에게 닿았다. 의주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힌 채 온몸으로 쏟아지는 비를 받았다. 피와 흙으로 얼룩졌던 것들이 씻겨 내려간다. 의주를 따라 차에서 내린 이샹의 머리 위에도 차가운 빗줄기가 흘러내렸다. 차 옆에 우뚝 선 채 의주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좇던 이샹은 의주가 운동장 잔디 사이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의주, 뭐해?"
말투가 무겁다. 평소였다면 곧바로 대답했을 의주도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서 발에 채이는 것이 없는지 확인할 뿐이다. 뭐하냐니까. 이샹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의주가 허리를 숙여 동그랗고 무거운 것을 손에 쥔다. 왕이샹, 이거 봐. 의주가 손에 든 것은 야구공이다.
오래전 버려져 흙으로 범벅이 된 야구공은 몇 번의 문지름으로 새것처럼 깨끗해졌다. 의주는 너무 익숙하게 타자와 마주하는 그 위치에 섰다. 이샹의 배트 끝에 붉고 투명한 빗물이 고였다 떨어졌다. 의주는 글러브 없는 맨손에 공을 치대다 턱을 살짝 내리고서 이샹을 본다. 배트를 달랑 들고서 가만히 서 있던 이샹은 마지못해 두 손으로 배트를 고쳐 들었다. 휙휙 배트를 돌릴 때마다 배트에 묻었던 것들이 지워진다.
"이샹-!"
"......"
"왕이샹-!"
"왜!"
"홈런은 안 돼-!"
주워 오기 힘들어-!
피식 웃음이 샜다. 그냥 홈런 쳐야지. 완전 멀리 쳐 버려서 의주한테 갔다 오라고 해야지. 지하철역에서 나온 이후 쭉 의주를 잃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던 이샹의 머릿속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차분해졌다. 질리도록 반복해 체화되어 버린 일련의 행동들이 이샹을 관객이 가득찬 야구장 한가운데로 되돌려 놓았다. 어디서 환호성이라도 들리는 기분이다. 왕이샹의 이름을 부르고, 야구 천재라는 낯부끄러운 수식어를 붙이는 소리가. 눈앞에는 얼굴로 흐르는 빗물 탓에 눈을 살짝 찡그린 의주가 서 있다. 이제는 꿈같은 7년 전의 여름처럼.
어쩌면 이샹이 상상한 우연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의주가 자신을 향해 투구하고, 그 공을 멋지게 쳐 내고, 경기가 끝난 후 사실 네가 나를 이 자리까지 데려왔다고 웃으며 털어놓는 우연. 휘어짐 하나 없는 의주의 곧은 궤도가 이샹에게 향한다. 이샹이 의주를 처음 봤던 그때처럼.
타자석에서 본 의주는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빨랐다. 이샹은 몇 번은 안타를 치고, 몇 번은 공을 흘렸다. 이샹이 던진 공을 받는 의주의 웃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 시원하게 벌어진 입꼬리와 휘어진 눈, 이샹은 그게 좋아서 따라 웃는다. 발을 쓱 밀며 땅에 다리를 지지한 이샹이 다시 한번 날아오는 의주의 공을 쳐 냈다. 이번엔 가만히 서 있는 대신 흔적도 없는 1루를 향해 달린다. 가볍게 뛰어 운동장을 구르는 공을 잡으려던 의주도 이샹을 보고서 자세를 바꿨다. 허상의 1루를 밟은 뒤 2루를 향해 달리는 이샹에게 질주하기 위해.
"아!"
의주가 이샹을 안은 채 굴렀다. 의주 이러기 있어? 축축한 팔에 감긴 채 뒹구는 바람에 온몸이 흙투성이였다. 내리는 빗소리 사이로 가쁜 숨소리가 섞여 든다.
"이렇게 막 잡아도 되는 거야?"
"너 아웃이야."
"왜?"
이샹의 눈앞에서 흔들리는 의주의 손안에는 야구공이 있다. 태그 아웃, 왕이샹. 이샹은 앓는 소리를 내며 의주의 팔을 베개 삼아 축 늘어지고, 의주도 이샹이 베지 않은 한쪽 팔을 풀어 하늘을 바라보는 자세로 눕는다. 좋다.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잠깐 잊을 정도로. 비록 하늘은 흐리고 비가 쏟아지지만. 감염자를 피하면서 부딪힌 팔다리가 욱신거리지만. 얼굴을 적시는 비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과, 팔 위에 누운 왕이샹이.
크게 부풀었다 꺼지며 숨을 고르던 이샹의 가슴이 잔잔하게 잦아들 때쯤, 이샹은 고개만 돌려 의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의주, 지금 아니면 말 못 할 것 같아서. 먹먹하게 울리는 이샹의 목소리에 의주도 이샹과 눈을 맞췄다.
"나 야구 시작한 거 의주 때문이야."
"...응?"
"나 의주 봤었거든."
이샹은 그때 보았던 의주의 순간을 늘어놓는다. 굳게 다물린 입술과 꽉 쥐었던 주먹,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힘겹게 울던 투수. 이샹의 생일날 찾아온, 벼락같은 의주.
가만히 누워 이샹의 말을 듣고 있던 의주는 옅게 웃었다. 그날은 의주의 가능성이 서서히 꺼지기 시작한 날이었다. 시작을 할 수도, 끝을 낼 수도 있어 마운드에 올랐지만, 그날부터 영영 좋은 끝은 낼 수 없게 되었다. 마무리 투수로 불릴 때마다 시큰거리는 어깨가 엉망으로 휘는 공만 던져댔기 때문에. 그럼에도 한참 늦은 지금에서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날의 경기는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네..."
"뭐가?"
"아, 비 너무 많이 오네. 우리 좀 말려야겠다."
"뭐야. 왜 말 안 해줘?"
의주는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등판이 온통 흙이라, 둘은 유니폼을 벗어 전보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문질러 빨았다. 둘 다 받쳐 입은 것이 뻔하고 흔한 흰 티셔츠라 서로를 보고 있으면 꼭 같은 팀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의주는 생각한다. 언젠간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서울을 벗어나 이샹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경기장 위를 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꼭 그러겠다고.
그칠 것 같았던 비는 이틀을 내리 내렸다. 잘된 일이었다. 텅 빈 편의점에서 챙긴 라면을 부숴 먹으며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했다. 이샹의 누나에 대한 이야기와 의주의 대학 생활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 너무 일상적이라 이제는 비일상이 되어버린 것들 말이다. 이샹은 의주가 말할 때마다 언뜻 보이는 의주의 왼팔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유니폼을 벗은 덕에 볼펜으로 끄적인 것들이 모두 보이는 거였다. 타투야? 이샹의 물음에 의주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볼펜이야."
"왜 거기다 적어? 노트 가져올까?"
저기 있을 것 같은데...
의주는 다시 일어서려는 이샹을 붙잡았다. 나는 이게 편해. 이샹은 글자로 온통 범벅이 된 팔과 의주의 착한 얼굴이 영 안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꼭 타투 같잖아. 편하긴 하겠다. 잃어버릴 일은 없으니까. 의주 똑똑하네.
두 개 역을 더 돌았다. 스물여섯 번째 역인 Z역은 환승 구간이라 유동 인구가 많았다. 희망과 절망을 모두 걸어볼 수 있는 곳이다. Z역에 고립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구조대를 배치했거나, 다른 역보다 몇 배는 많은 사람들이 전부 감염되어 생지옥이 되었거나. 의주는 길거리에 버려진 각목을 들었다. 이번에도 아무 대비 없이 감염자들에게 둘러싸였다간 의주도 이샹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 수가 훨씬 많을 테니까.
이번에도 혼자 내려가려는 의주를 붙잡은 건 이샹이었다. 말없이 의주를 꽉 붙잡은 손이 잘게 떨리고 있다. 같이 가. 음성 하나 없는 입술이 그렇게 벙긋거렸다. 이샹의 손 위를 덮어 부드럽게 떼어낸 의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같이 가자.
역 안은 고요했다. 의주는 작은 탄식을 터뜨렸다. 몇십구의 시체가 군용 사체낭에 담겨 나란히 정리되어 있었다. 군대가 왔었구나. 차분히 둘러본 Z역에는 이곳저곳 구조대의 흔적이 있었다. 널브러진 붕대나 안정제나 마취제가 들었을 주사기, 바닥에 떨어진 탄피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정말 구조대가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Z역에서는 철수했지만, 분명히 구조대가 있다. 의주와 이샹의 눈동자가 가능성 안에서 마주쳤다.
Z역이 산업단지 중앙에 위치한 탓에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의주는 웅웅 울리는 차 시동을 끈 채 볼펜을 딸각였다. 비 때문에 번진 글씨는 다시 쓰고, 새로 확인한 역에 대해 적는다. 사람이 많은 역부터 확인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 먼저 가 봐야 할 곳이… 의주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이샹은 의주에게 손바닥을 척 내밀었다.
"뭐... 왜?"
"펜."
이샹은 의주가 내민 볼펜을 휙 가져가더니 의주의 왼팔을 끌어 자기 앞으로 가져왔다. 어지럽게 얽혀 있는 한국어 사이를 비집고 고향의 언어로 왕이샹 세 글자를 적는다. 마땅히 빈 곳이 없어 손과 손목이 이어지는 애매한 곳이 王奕翔의 자리가 되었다. 꼭 물건에 이름이라도 적어 놓은 것 같은 모양새다. 내 이름이야. 의주가 신기한듯 손목을 살폈다. 여긴 지워지기 쉬운데... 소매가 닿는 부분이다. 의주는 각막에 글자를 찍듯이 이샹의 이름을 눈에 담는다. 지워지면 다시 쓰기 위해서.
의주는 다른 산업단지 쪽으로 차를 몰았다. 남은 기름이 애매하다. 이런 도심에 주유소가 있을 리는 만무하고, 괜찮은 차가 보이면 바꿔야 할 것 같다는 어렴풋한 생각을 했다. 이샹, 밖에 보다가 맘에 드는 차 있으면 말해줘. 작게 흥얼거리며 창밖을 보던 이샹이 의주에게로 휙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말하니까 좀 섹시한데."
"어? 아, 진짜..."
비가 멎어가면서 쉴 새 없이 앞 유리를 닦던 와이퍼의 속도도 함께 느려져 갔다. 서서히 해가 나고 있다. 한 달 전이었다면 날이 맑다고 좋아했겠지만, 이곳은 더 이상 그때의 서울이 아니다. 비가 닿지 않는 처마 밑이나 깨진 건물에 숨어 있던 감염자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의주는 괜히 오른 어깨가 시린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아니, 착각이 아닐 수도. 느낌이 안 좋다.
"의주... 이거 무슨 소리야?"
맑게 개는 하늘에서부터 웅웅 울리는 기계 소리가 났다. 꼭 비행기 같은... 의주는 자세를 숙여 하늘을 주시했다. 헬기다. 빨간 구조 헬기가 의주와 이샹이 달리는 도로를 따라서 쭉 날아 사라졌다. 저 방향이면 어느 역이지?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의주의 시야에 계기판 위 빨간 경고등이 들어온다. 일단 차부터... 그러다 의주는 일순간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멈췄다.
비는 완전히 그쳤고, 헬기는 굉음을 내며 날아갔으며, 지금 주변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의주와 이샹밖에 없다. 그리고 이곳은 빌딩이 빽빽하게 들어선 산업단지. 주택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감염자들이 몰려 있을, 그런 곳. 헬기 소리에 이끌려 건물에서 쏟아져 나온 수십의 감염자가 차 주변으로 천천히 모이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이샹은 조용히 손을 뻗어 배트를 잡았다. 의주는 핸들을 쥐고서 그대로 엑셀을 밟아 길을 뚫을 수 있을지 가늠한다. 아마 안 되겠지. 설령 뚫더라도 계속해서 그 속도로 밟았다간 안전한 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차가 중간에 멈출 것이다.
의주는 경기 직전에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처럼 숨을 고른다. 차분하게 생각하자.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도 잘못되지 않을 방법. 그렇게 빠져나가서 저 헬기를 따라 달릴 방법.
"왕이샹, 우리 밖으로 나갈 거야."
"...응."
"상황만 괜찮으면 빈 차를 확인해."
문이 열리는지, 키가 있는지. 만약에 시동이 걸리면...
이샹이 핸들을 놓지 못하고 있는 의주의 손을 차분히 잡았다. 알겠어, 무슨 생각인지 다 알았어. 의주 대신 시동을 끄고, 뒷좌석에 두었던 의주의 더플백을 끌어온다. 의주의 더플백은 꽤 무거웠다.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목을 축일 것들, 붕대, 쇠공과 각목, 그리고 왜 챙겼는지 모를 비 오던 날의 야구공. 이샹은 그중에서 쇠공과 야구공, 각목만을 남기고 남은 것들을 바닥에 털고서 의주에게 건넸다. 걱정마.
"그냥 하면 되는 거야, 의주."
우리 이런 거 해 봤잖아.
대각선으로 멘 더플백과 손에 든 각목. 손에 든 것만 제외하면 의주를 두 번째로 본 그때와 똑같았다. 둘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동시에 차 문을 발로 밀어 열었다. 문 쪽에 다가서 있던 감염자들 서너 명이 떨어져 나갔다. 이따 봐! 등 뒤에서 이샹이 그렇게 말한다. 집어먹은 겁을 애써 토해내기 위해서.
무슨 정신으로 배트를 휘두른 건지 모르겠다. 땀인지 피인지 모를 것이 손에 배어 배트가 자꾸만 미끄러졌다. 겉이 매끈하고 날카로운 구석이 없는 이샹의 배트는 수십의 감염자를 빠르게 죽이기엔 역부족이었다. 팔이나 다리를 노려 달려드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이 최선이었다. 길가에 서 있는 주인 없는 차들은 시동이 아예 걸리지 않았다. 차에 타 시동을 확인했다가 주변에 모여든 감염자를 밀어내며 피하길 반복했다. 가끔 시선을 돌리면 의주의 손에서 벌겋게 물들어 가는 각목이 보였다. 제발, 하나만 걸려라.
시동이 걸리는 차를 찾아낸 건 의주가 먼저였다. 이샹의 뒤에서부터 엔진 소리가 들렸다. 흰색 SUV가 이샹에게로 향하는 감염자를 밀고서 이샹 앞에 선다. 땀과 피로 젖은 얼굴이 창 너머로 보인다.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 핸들을 보다가, 이샹과 마주친다. 차 문을 벌컥 열고 조수석에 오른다. 이샹의 얼굴에 안도와 웃음이 번졌다. 거봐, 내가 하면 된다고 했잖아.
이상한 정적이었다. 지친 숨을 몰아쉬며 웃음기 어린 얼굴을 짓던 이샹도 묘한 분위기를 읽곤 의주를 살폈다. 의주가 말없이 몬 SUV는 사방이 뻥 뚫린 한적한 곳에 멈췄다. 의주는 주변에 감염자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차에서 내렸다.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이샹도 뒤늦게 따라 내린다. 의주, 왜...
"나 아웃이야."
"그게 무슨..."
이샹의 눈동자가 의주의 얼굴에서 팔목으로 내려간다. 오른쪽 팔뚝에 시뻘건 잇자국이 선명하다. 떨어져 나간 살점에서부터 피가 고여 손에 든 각목 끝까지 흘렀다. 이샹의 배트보다 가늘고 약한 의주의 각목은 반 정도 부러져 꼭 짧은 창 같은 모양새였다. 의주는 왼팔에 써 놓은 것들이 피나 땀 때문에 지워지진 않았는지 확인한다.
"한글 읽을 줄 알아?"
"지금 그런 거 물을 때야? 의주 지금..."
"읽을 줄 알지?"
"...응."
"내 팔을 잘라 가."
"뭐?"
"다른 데 옮겨 적고, 그러고 나서 버려."
다 썩어버리기 전에.
음절마다 끔찍해서 이해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그래. 내가 의주의 글러브 낀 왼손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 초점을 잃은 이샹의 어깨를 의주의 왼손이 붙잡는다. 혹시나 해라도 갈까 피가 떨어지는 오른팔은 이샹으로부터 멀리 떨어트리고서.
이런 상황을 상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의주는 감염자와 부딪히는 매 순간 감염되거나 죽는 결말에 대해 생각해 왔다. 하지만 평생에 걸쳐 그래왔듯 잡념을 미루고 현재에 집중했을 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의주는 살아 있었다. 이번엔 차마 밀어내지 못한 딴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던 걸까. 차가운 이가 팔뚝을 물어뜯는 순간 이제는 얼굴도 흐릿한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난 정말 마지막에 미끄러지는구나. 감염자를 떨쳐내다 이샹의 옆모습을 봤다. 나 때문에 삶이 바뀌었다는 왕이샹. 변의주가 미끄러진 길 끝에는 왕이샹이 서 있다. 7년 전에도, 지금도.
"서울 나가야 할 거 아냐. 빨리 구조돼야..."
"그럼 너는? 변의주는?"
의주는 아무 대답 없이 끝이 날카롭게 부러진 각목을 쥐여 준다.
"…나 괜찮아."
그러니까 얼른… 푹 숙인 고개 때문에 의주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오른쪽 손으로 떨어지는 땀을 닦아낸다. 하지만 이샹은 뚝뚝 흐르는 것의 시작점이 눈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아, 땀이 아니라 눈물이구나. 변의주는 울고 있구나. 7년 전처럼. 눈과 입이 일그러지며 눈물을 저지하지만 결국 흐른다.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달리는 데에는 물릴 정도로 익숙해져 있지만, 이렇게 투명한 끝은 처음이라서.
○
그냥 하면 되는 거야, 이샹...
카메라 플래시에 점멸했던 시야가 서서히 돌아온다. 열여덟에 야구를 시작해 스물여덟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왕이샹. 어떤 계기로 야구선수를 꿈꾸게 되었냐는 질문은 이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이샹이 한국에 있었던 그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체 어떤 원동력이 있었기에 그곳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는지, 이샹에게 그런 것들을 물었다. 이샹은 또다시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전혀 깎이거나 흐려지지 않은 한 남자애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샹이 스물여덟이 될 동안 영원히 스물넷에 머무르는 남자애의 얼굴을.
한국은 바이러스에 대한 손해 배상금을 물었고, 정체 모를 바이러스에는 의미도 잘 모르겠는 라틴어 이름이 붙었다. 꼬박 반년 동안 봉쇄되었던 서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왔다. 4년 전의 일은 전부 잊으려는 듯 모두가 그날의 언급을 꺼렸다. 그런 서울에서 살아 나온 이샹에게 남은 것은 여기저기 상처가 난 더플백과 피비린내가 밴 쇠공, 흙이 묻은 야구공이 전부였다.
아직도 이샹은 타자석에 설 때마다 다른 선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조금 마른 체형의 투수를 생각한다. 긴장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오르던 투수는 시원하게 벌어진 입꼬리와 휘어진 눈으로 이샹을 본다.
“왕이샹-! 홈런은 안 돼-!”
죽고 싶어질 정도로 아려 오는 눈에도 눈꺼풀을 감지 않는 이유는 앞에 선 대책 없는 투수가 한순간 사라져 버릴까 무섭기 때문이다. 그냥 홈런 쳐야지. 완전 멀리 쳐 버려서 의주한테 갔다 오라고 해야지. 그런 다음에는… 마음에 드는 차를 조금 일찍 말해 줘야지. 배트를 휙 돌리고, 입안에 있던 동그란 초콜릿을 천천히 녹인다. 그 투수만큼 곧지 못한 궤도가 이샹에게 날아온다. 앞으로 수없이 쳐야 할 낯선 공이.
변의주가 준 꿈에, 변의주가 준 미래. 모든 것이 변의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오직 변의주 하나만 존재하지 않는 왕이샹의 삶이 이어진다. 썩지도 않고 오래도록, 천천히 변의주에게 가까워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