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작품의 내용은 허구이며 실제 인물, 사건과 무관합니다.
소재 주의: 가정불화, 폭력
의주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옷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바스락거리는 얇은 겉옷. 내가 드디어 미쳤지.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옷의 촉감이 더 분명해졌다.
이 옷은 언젠가 너의 살결에 닿았을 옷. 그리고 지금은 나의 손에 닿아 있는 옷.
그러니까,
내가 너의 날개옷을 훔쳤다.
너를 좋아하게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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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옷과 날개뼈
비누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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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되어 아무리 해가 많이 길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밤은 일찍 찾아왔다. 의주는 일찍 찾아온 밤에 집에 일찍 들어가지 않았다. 모의고사를 친 날은 괜히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으슥한 계단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갔다. 성적 스트레스 때문이니 뭐 그런 건 전혀 아니었다. 그냥 머리를 식히는 시간. 모의고사 친 날은 너무 오랫동안 학교에 있다 보니 진이 다 빠져서 조금 식히고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의주는 오늘도 으슥한 지하 주차장 계단에 걸터앉아 있다. 그리고 조금 심심해져서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어 아빠,”
의주는 목소리가 작은 편이라 다행이었다. 아빠는 의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의주는 멀찍이서 아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행복한 얼굴. 설레는 얼굴. 아빠의 옆에 여자가 있다. 처음 보는 여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표정에서 바로 티가 난다고 누나가 그랬다. 그래서 의주는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저 여자와 사랑에 빠졌구나.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와. 의주는 말없이 그들을 지켜봤다. 키스도, 포옹도, 심지어 손을 잡지도 않고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어디론가 가버렸다.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도 저렇게 사랑에 빠질 수 있구나. 의주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금 이 상황이 너무 거짓 같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변의주. 착하고 말 잘 듣고 순하고 친절하고 성실한 의주는 고작 열여덟 인생 중에서 제일 큰 난관에 부딪혔다. 아빠의 불륜을 목격했다. 의도치 않게.
지금 의주의 감정은 뭐라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휘몰아치고 있다. 감정이 태풍이라면 그 한 가운데, 유일하게 고요한 태풍의 눈에서 의주의 이성이 속삭인다. 방금 본 건 아무것도 아닌 거야. 그냥 둘이 친구일 수도 있잖아. 하다못해 그냥 잠시 스쳐 지나간 사이일 수도 있잖아. 태풍의 눈은 고요하게 의주를 동요시켰다. 그래서 의주는 우선 굳은 몸을 겨우 움직여 천천히 돌아섰다. 계단을 오르려는 그 순간, 자신보다 몇 칸 위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깜짝 놀라서 짧은 비명을 뱉었다. 그러자 그 누군가도 덩달아 어깨를 움찔했다. 의주는 귀가 화끈해진 것을 숨기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면서 시선을 살짝 올려다봤다. 같은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 교복은 의주네 학교 옆에 있는 남고의 교복이었다. 그 교복을 보자 의주는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남자애를 마주 봤다.
“… 방금… 봤…”
의주는 차마 말을 끝까지 똑바로 할 수 없어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자 남자애가 입을 열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이신데.”
의주는 다시 한번 더 마른침을 삼켰다. 옆 학교 교복을 입은 남자애. 사실 저 교복은 그냥 단순히 옆 학교의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이신 의주의 아빠가 근무하는 학교의 것이었다.
“우리 담임쌤이랑 아는 사이야?”
남자애가 묻자 의주는 헛웃음이 나왔다. 별의별 우연이 다 있네 참.
“… 우리 아빠야.”
의주가 어쩔 수 없이 뱉자 남자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진다. 아주 오래. 사실 아주 오래는 아니다. 한 2분 정도. 하지만 지금 이 두 사람에게 2분의 침묵은 200년의 세월과 같다. 그 어색한 2세기를 뛰어넘고 남자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반응 보니까 옆에 있는 사람은 너네 엄마가 아닌가 봐?”
정곡을 찔린 의주는 눈동자를 괜히 굴리다가 결국 말을 토하듯 뱉었다.
“아직 확실하진 않잖아. 그래서 말인데…”
의주의 이성이 다시 한번 의주를 동요시킨다. 동요시키는 이성은 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성의 이름을 한 혼란이 의주를 밀어붙인다.
“나 좀 도와줘.”
“어?”
사실 더 놀란 건 이 남자애보다 도와달라고 뱉어버린 의주 본인이었다. 일단 그래 도와달라고 외쳐버렸다. 그런데 뭘 어떻게? 다시 한 세기의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변의주는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는데. 왜 도와달라는 말이 튀어나왔을까.
“…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 확실해질 때까지… 증거를 모을 수 있게 좀 도와줘.”
“어…? 증거…?”
“… 정말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아빠랑 저 여자랑 손도 안 잡고 갔단 말이야. 그러니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잖아? 그런데 벌써 엄마한테 얘기했다가는 괜히 일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고 그래서… 좀 더 지켜보면서 증거 모으는 걸 좀 도와줄 수 있냐는 말이야. 사진이라든가… 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본다는 거라든가…”
의주는 자기가 뱉고도 이상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보는 이름도 모르는 남자애한테 별 부탁을 다 하고 있다. 사실 방금 그 충격적 장면을 열 여덟짜리가 감당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뱉었을 수도 있다. 의주는 이 사실을 혼자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일단 앞에 있는 사람이라도 붙잡는 것이었다. 물론 의주조차 이 사실을 전혀 모르지만.
“… 그냥 매일 우리 둘이 같이 쌤을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렇… 지? 만날 시간을 정해야 하는데 그건… 일단 내일은 오늘이랑 같은 시간에 만나.”
의주의 말에 남자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순조로운 협조에 의주는 안심했다.
“그럼 연락처 주고받자. 전화번호 줄게.”
의주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을지 모를 추진력으로 남자애와 빠르게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난 변의주야. 넌 이름이 뭐야?”
“니콜라스.”
“…어?”
예상 못 한 이국적인 이름에 의주가 눈을 끔뻑거렸다.
“진짜 이름이 니콜라스…?”
“나 한국인 아니야.”
“어?”
의주의 출처 모를 추진력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소진되기 시작한다.
“대만에서 왔어. 근데 한국어 할 줄 아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니콜라스라고 불러.”
“어…”
원래 대만에서 영어 이름 쓰나? 예전에 아빠가 보던 홍콩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에게도 영어 이름이 있었으니 대만도 비슷하겠지. 의주는 니콜라스라는 네 글자를 입력했다.
“아 잠시만, 근데 몇 살이야? 나 2학년인데 설마 형인 거 아니지?”
“아냐, 나도 2학년이야.”
다행이다. 의주가 홀가분하게 니콜라스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렸다. 지금 친구 사귀고 있을 노릇이 아닌데.
“일단… 일단 내일 다시 봐. 여기서 같은 시간에. 아무한테도 말 안 하겠다고 약속해.”
니콜라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주는 일단 니콜라스를 믿기로 했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때 조금 무섭긴 했는데 그래도 착한 애 같았다. 니콜라스가 착한 애든 아니든 지금 의주는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집에 올라갔을 때 아빠가 있을까? 아니면 아까 그 여자랑 아직 같이 있느라 없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니콜라스가 간 줄도 모른 채 집에 도착했다.
“어 의주 왔어?”
거짓말처럼 들리는 아빠의 목소리. 집안이 평온하다. 방금 본 장면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가?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역시 그렇게 쉽게 보일 리 없는 걸까? 의주는 복잡한 심경으로 신발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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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같은 시각 같은 장소. 의주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니콜라스를 발견했다.
“진짜 와 줬네.”
의주가 말하자 니콜라스가 답했다.
“와 달라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솔직히 나는 우리 아빠라서 그렇지만 넌… 아무 상관 없잖아.”
“상관은 있지. 우리 담임 쌤이니까.”
“아 맞다, 그랬지.”
의주가 어색하게 말하고는 니콜라스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내밀어 지하 주차장 쪽을 유심히 살펴봤다. 오늘 아무런 일도 없을 수도 있는 거야. 어제는 그냥 우연히 마주쳤던 순간인 거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일 수도 있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던 찰나, 의주의 아빠와 그 여자가 나타났다. 둘은 역시나 서로를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하다 사라졌다. 의주도 역시나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냥 보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 정적 속에서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덕분에 의주는 살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어?”
“증거를 모으고 싶다며. 그러면 뭐 사진을 찍는다거나… 뭔가 해야되는 거 아니야?”
니콜라스의 말은 전부 다 맞는 말이었다. 이렇게 바라보기만 하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내일… 내일부터는 사진도 좀 찍어야겠다…”
“그리고 왜 이 시간에 만나는지도 알아야 되는 거 아니야?”
“어? 그러네… 이 시간에 무슨 의미가 있나”
“쌤이, 그러니까 너네 아빠한테 뭔가 특별하게 바뀐 부분이 있다거나 그런 것도 좀 알아보고”
의주는 니콜라스의 말을 신중하게 새겨들었다. 메모라도 해야되나 싶은 찰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이렇게 잘 알아. 무슨 탐정이야?”
“어?”
니콜라스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의주만 영문을 몰랐다.
“왜 웃는데…?”
“증거 수집하겠다고 한 거 치고는 의주 네가 너무 허술한 거 아니야?”
그런가. 의주는 멋쩍은 듯 대답을 얼버무렸다.
아무튼 이렇게 잠복 수사 둘째 날이 끝났다.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로. 니콜라스와는 어색하게 내일 보자고 하고 헤어졌다. 그러고 보니 의주는 니콜라스도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을 이제서야 인식할 수 있었다. 어제는 워낙 정신없었으니까. 그래도 니콜라스의 조언을 토대로 집에서 추가 조사를 이어 나갔다. 아빠의 서재에 들어갔지만 딱히 달라진 건 없었고,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그러다가 하나 발견한 것이 있었으니,
“의주야, 아빠 폰 좀 갖다줄래?”
의주가 아빠의 폰을 집어 든 순간, 잠금 화면의 낯선 것을 발견하였다. 처음 보는 위젯. 의주는 아빠에게 폰을 건네주고는 재빨리 자신의 폰을 확인하여 같은 위젯을 찾았다. 일출 및 일몰 시각. 보통 사람들이 이런 걸 위젯으로 하나? 의주는 오늘의 일몰 시각을 확인했다. 정확하다. 아빠와 그 여자, 의주와 니콜라스가 만난 시간과. 이 네 사람은 일몰 시각에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의주는 당장 니콜라스에게 연락했다. 사실 어제 전화번호를 주고받았지만, 정작 연락은 처음 하는 것이었다. 네 말이 맞았어. 아빠 핸드폰 잠금화면에 처음 보는, 아 이건 말이 너무 길다. 썼다가 도로 다 지운다. 그리고 간결하게 한 문장만 보낸다. 매일 일몰 시각에 만나. 자세한 설명은 내일 만나서 하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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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심지어 주말에도 의주는 일몰 시각에 나가 아빠를 미행했다. 이제는 니콜라스의 말 대로 나름 사진도 찍었다. 물론 사진은 그냥 아빠와 그 여자 둘이 바라보고만 있는 게 다였다. 이쯤 되면 의주는 본인이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근데 언제까지 증거를 모을 거야?”
매일, 심지어 주말에도 나와서 옆에 있는 니콜라스가 의주에게 물었다. 의주는 길게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고민을 한 이유가 없는 대답이었다.
“평생 이렇게 해야 하면 어떡해?”
“그럴 리는 없어.”
“혹시 모르지. 너랑 내가 졸업하고 대학교 가서도 계속 이러고 있을지.”
니콜라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의주는 계속해서 고민이 됐다. 정말 언제까지 이래야 될까. 아빠와 그 여자는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고, 그런 그 둘을 의주 역시 가만히 바라보고. 어쩌면 그런 의주를 니콜라스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영원히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면 어떡하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그저 가만히.
“심심하니까 대화나 하자.”
역시나 정적 속에 불쑥 튀어나온 니콜라스의 목소리였다.
“무슨 대화?”
“솔직히… 우리 이렇게 밤에 몰래 만나서 쌤 지켜본 것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는데… 서로에 대해서 하나도 아는 게 없잖아?”
니콜라스의 말에 의주가 다시 고민에 잠겼다. 듣고 보니 정말이네. 아빠의 불륜 현장에 정신이 나간 나머지 니콜라스를 그저 옆에 두기만 해버렸다.
“어… 그러네. 뭐부터 알아야 되지?”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니콜라스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의주는 머리를 천천히 굴렸다. 궁금한 거 없다고 하면 싫어하겠지.
“아, 넌 대만 사람인데 왜 한국에 있어?”
너무 진부한 질문인가. 하지만 궁금한 게 없다고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엄마가 한국 사람이랑 재혼했어.”
재혼이라는 단어에 의주가 흠칫했다. 니콜라스는 말을 끊었다가 한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에는 작년에 왔어. 그때는 한국어 진짜 잘 못했는데. 엄청 노력했어.”
“그래 보여…”
니콜라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의주의 신경은 아까 니콜라스가 뱉은 재혼이라는 단어에 집중되어 있었다.
“저기 니콜라스… 이런 거 물어봐도 돼?”
“어떤 거?”
“재혼을 하신 거면… 부모님이 이혼하셨던 거야? 그러면… 어때?”
의주의 물음에 니콜라스가 의주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의주는 차마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눈을 피하고는 다급하게 수습했다.
“미안, 미안해 말하고 싶지 않으면,”
“솔직히 잘 몰라. 난 우리 아빠가 누군지 모르거든.”
“어…?”
“미안해, 의주. 난 그게 어떤 기분인지 잘 몰라.”
니콜라스가 그런 말을 하자 의주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 모를 수도 있지 괜찮아.”
“어떤 기분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들 거야.”
의주는 가만히 니콜라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대화 몇 마디만 나눴는데 해가 무서운 속도로 져서 금방 어두워졌다. 센서 등 하나에 의존한 니콜라스의 눈이 희미하게 빛났다.
“미안해.”
“… 니콜라스 네가 왜 미안해.”
의주가 대충 대답하고는 꺼진 센서 등을 향해 팔을 휘휘 저어 불을 다시 켰다.
“야 근데, 근데 엄마 따라서 갑자기 한국에서 살게 되고 많이 힘들었겠다!”
어색한 말투와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고자 하는 의주의 노력을 니콜라스도 알았는지 금세 밝은 분위기로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 엄마 따라서 워낙 여기저기 많이 다녀봐서. 나 미국에서도 살아본 적 있어.”
“아 진짜? 그럼 너 영어 잘해?”
“당연하지.”
“잘 됐다. 나 영어 수행평가 준비해야 하는 거 있는데 좀 도와주라. 내일 가져올게.”
의주는 이렇게 말을 뱉고는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다행이다. 수행평가 덕분에 아예 대화 주제를 바꿀 수 있어서. 괜히 가정사를 들추면 안 되겠구나. 의주는 다시 한번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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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는 정말로 다음날 니콜라스에게 수행평가 준비를 도와달라 했다. 니콜라스는 진짜 부탁할 줄은 몰랐다며 살짝 당황했지만, 의주는 딱히 빈말을 즐겨 하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둘은 잠복 수사는 뒷전이고 일단 수행평가 준비에 들어갔다.
“근데 진짜 웃기지? 뭐 이런 희한한 수행평가가 다 있어. 우리나라 전래동화를 영어로 번역하래.”
“전래동화?”
“응. 어… 페어리테일?”
“와 웃기다.”
의주와 니콜라스가 키득거리느라 센서 등이 꺼졌다 금방 다시 켜지곤 했다.
“선녀와 나무꾼이라고 한국 전래동화가 있는데, 이게 무슨 내용이냐면… 선녀가 날개옷이 있어야 하늘로 날아갈 수 있는데, 그 날개옷을 선녀를 보고 반한 나무꾼이 훔쳐 가게 된 거야. 그래서 그 사실을 숨기고 둘은 결혼하는데…”
“뭐야, 스토리 제정신 아닌데?”
“옛날얘기니까 뭐… 아무튼 그렇게 살다가 선녀가 나무꾼이 숨겨둔 날개옷을 발견해서 그 옷을 입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게 된다는 얘기야.”
“결혼까지 했는데 그냥 돌아간다고?”
“원래 사기 결혼이니까 뭐…”
“그 나무꾼은 선녀 안 붙잡았어?”
“붙잡았을걸? 근데 떠난다고 하는데 어떡하겠어. 놓아줘야지.”
“근데 그 선녀는 왜 바로 떠난 거야? 사기 결혼이긴 해도 어쨌든 나무꾼 사랑했던 거 아니야?”
“그게…”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계속 설명하다가 어렵다는 듯이 머리를 털었다.
“모르겠어. 운명이 아니었겠지, 뭐.”
니콜라스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의아함이 남아 있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서 그 이야기를 영어로 써야 해?”
“응. 솔직히 다른 문장은 번역기 돌려서 어색한 것만 고치면 되는데… 단어가 있잖아? 선녀는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선녀?”
“응. 선녀를 뭐라고 번역해야 하지.”
의주의 물음에 니콜라스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근데 사실 선녀가 뭔지 몰라.”
“어? 방금까지 얘기 잘 들었잖아.”
“그냥 사람 이름인 줄 알았어.”
“어… 선녀는…”
이번에는 의주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음…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야. 갑자기. 엄청 아름다운 모습으로. 막 마법도 쓸 수 있을걸? 아무튼 그래서 막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드는 존재인 거야. 날개옷을 입어야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날개옷을 훔쳐서라도 같이 있고 싶은 거지.”
“뭐야, 쉽네.”
의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니콜라스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Angel이잖아.”
“뭐?”
니콜라스의 자신만만한 답에 의주가 황당한 듯 답했다.
“엔젤… 천사? 음… 천사랑 약간 느낌은 다른데… 비슷한가?”
“아름다워서 붙잡고 싶은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면 맞지, 뭐.”
물론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의주는 니콜라스의 말에 묘하게 설득이 되는 듯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소중한 존재. 천사.
“근데 천사면… 천사는 여자든 남자든 다 있는 거 아니야? 선녀는 여잔데? 남자 선녀도 있나?”
의주의 물음에 니콜라스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내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 있네.”
니콜라스가 실실 웃으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뭐?”
의주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니콜라스는 갑자기 오른팔 교복 셔츠를 걷어 올려 의주의 앞에 대뜸 내밀었다.
“여기 이 흉터 보여?”
의주는 니콜라스의 팔에 있는 큰 흉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꽤 크네. 아팠겠다. 굳이 말로 뱉지는 않았다.
“이건 갑자기 왜,”
“이거 하늘에서 내려오다가 떨어져서 생긴 상처야.”
“뭐?”
의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자, 니콜라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야 진짜…”
“진짠데? 내가 갑자기 한국에 그것도 의주 앞에 뚝 떨어진 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건…”
니콜라스는 여전히 웃어댔다. 결국 의주도 같이 웃었다. 뭐가 중요해 그런 거. 네가 진짜 하늘에서 떨어졌든 아니면 열심히 비행기 타고 왔든.
“근데… 진짜 왜 생긴 거야 그 흉터?”
“어? 아… 어릴 때 친구랑 놀다가 넘어졌어.”
“그냥 넘어진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좀 세게 다쳐서? 근데 지금은 안 아파.”
“다행이다.”
“만져봐도 돼.”
“어?”
의주는 니콜라스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 이걸 굳이 왜 만져봐. 하지만 손은 이미 니콜라스의 흉터로 향하고 있었다. 인간의 호기심이 이렇게 무섭다. 사실 별로 특별한 촉감은 아니었다. 그냥 주변의 피부에 비해 좀 이질적인 느낌일 뿐이었다. 다만 센서 등이 꺼졌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손끝에 닿은 니콜라스의 흉터만 느껴지니 기분이 이상했다.
“… 간지럽지 않아?”
의주의 물음과 동시에 니콜라스가 왼쪽 팔을 휘휘 저어 센서 등을 켰다. 의주는 왜인지 모르게 니콜라스의 흉터를 만지던 손을 황급히 치웠다.
“응. 나 간지럼 잘 안 타.”
니콜라스가 셔츠 소매를 바로 하며 말했다. 의주는 고개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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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의주가 증거를 좀 모았느냐? 솔직히 거의 못 모았다. 굳이 따지자면 사진이 몇 장 있기는 한데, 이마저도 확실히 불륜을 증명할 만한 사진은 아니었다.
사실 의주의 잠복 수사는 전혀 의미 없는 짓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심지어 이제는 본질은 잊고 니콜라스와 놀다 집에 들어가는 정도가 되어버린 수준이었다. 의주는 아빠와 같이 잠금 화면에 일몰 시각 위젯을 설정해 놓았다. 그리고 그 시간에 맞춰 니콜라스를 만나러 갔다. 의주가 가족 중 제일 닮은 사람이 아빠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마냥 웃을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어쨌거나, 의주는 니콜라스를 만나러 간다.
의주와 니콜라스는 꽤 오랜 시간 만났다. 중간고사 기간에도 잠복 수사를 핑계로 공부 안 하고 만나서 놀았고, 수학여행 시기가 며칠 차이 나는 바람에 거의 일주일 동안 만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의주네 학교는 제주도에 갔는데 니콜라스네 학교는 오사카에 가서 서로 사 온 선물을 나누기도 했다.
이제 이 일몰 시각의 밀회는 의주네 아빠와 그 여자의 것만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아무튼 그렇게 성큼 여름이 찾아왔다. 기말고사가 코앞인데도 둘은 만나서 놀았다. 이 시간에 잠깐 노는 건 머리를 식히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합의를 봤다. 그리고 무엇보다 명분이 있었다. 증거 수집. 의주는 그 와중에도 틈틈이 사진을 찍어놨다. 언제 어떤 식으로 엄마에게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몰라서 프린트도 해 놓고 방에 꼭꼭 숨겨뒀다. 너무 음침한가. 하지만 이건 아빠 잘못이니까. 그리고 아직도 엄마에게 말 안 한 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의주가 여전히 아빠를 믿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주주 이거 먹을래? 오늘 급식에 나온 건데.”
의주의 깊은 고민도 잠시, 니콜라스가 태평하게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어 의주에게 건넨다.
“뭐야? 당근 케이크?”
“어. 나 당근 싫어해.”
“고마워 잘 먹을게…”
가끔 니콜라스는 싫어하는 디저트가 나오면 의주에게 떠넘기곤 했다. 의주는 이것도 나름의 선물로 생각하기로 했다. 상하진 않았겠지 날이 더워서.
“근데… 주주? 라고 부르는 거야 나를?”
“아, 왜? 싫어?”
“싫… 다기보다는 뭔가 애들 보는 공주 캐릭터 같고 좀 웃긴데… 무슨 뜻인데?”
“뜻? 별거 없어. 그냥 변의주라서 주주.”
정말로 별 뜻 없는 내용에 의주는 황당했다. 가끔, 아니 자주 니콜라스는 의주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그럼 나도… 니콜라스니까 스스? 이상한데 니콜이니까 콜콜? 아니 더 이상한데… 너 진짜 이름이 니콜라스야? 너도 나처럼 세 글자 이름 있을 거 아니야. 아님 뭐 두 글자거나 네 글자거나…”
“이름?”
니콜라스가 가만히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나는 그냥 니콜라스야.”
“어? 그런 게 어딨어. 성이 있을 거 아니야. 나처럼 뭐 변 씨라던가…”
“어 나도 네 성 쓸까? 변니콜라스.”
“그거는 진짜 이상하다.”
의주와 니콜라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의주는 생각했다. 이렇게 웃으면서 넘어가려고 하는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구나. 왜 본명을 말하고 싶지 않은 걸까. 솔직히 조금 억울한 감도 있었다.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치명적인 가정사를 들킨 거나 다름없는데. 하지만 꼭 세상이 주고받는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이야기하기 싫어하는데 억지로 입을 열게 하는 것은 의주도 싫었다. 아무튼 의주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니콜라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어. 너한테만 알려줄게. 내 진짜 이름.”
“뭐? 진짜 그래도 돼?”
“응. 왕이샹이야.”
“왕이샹?”
의주가 니콜라스의 이름을 따라 읊을 때 니콜라스는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어 무언가를 휘갈겼다.
“자. 이렇게 써.”
니콜라스가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써서 의주에게 보였다. 의주는 종이가 뚫어져라 한자를 바라봤다.
“와… 나 왕 자만 읽을 수 있어.”
“나도 한국어로는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어.”
의주는 폰을 꺼내어 니콜라스의 이름 한자를 찾아봤다.
“어… 혁… 클 혁에 날 상. 혁상이다. 왕혁상.”
“혁상?”
“응. 한자 엄청 멋있네.”
“주주는 한자 뭔데?”
“나? 나는… 잠만 나 내 이름 한자로 못 쓰는데 있어봐.”
의주는 또 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더니 니콜라스의 노트에 자신의 한자 이름을 적었다. 邉義州.
“이거야.”
“오 완전 의주 같아.”
“어울린다고 나랑?”
“응.”
니콜라스가 의주의 한자 이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다 펜을 집어 들고 날 상(翔) 자에서 羽 부분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게… 이게 날개야. 여기 이 부분.”
“날개?”
“응. 그리고 의주의 주는… 마을이니까… 땅.”
“땅?”
“나는 날고 있고 의주는 땅에 있네. 진짜 우리 같아.”
니콜라스가 해맑게 의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의주는 눈을 끔뻑이며 니콜라스를 바라보다 다시 노트로 시선을 옮겼다. 땅에 발붙이고 사는 변의주, 크게 날아가는 왕혁상. 너는 이름에도 날개가 있네. 진짜 하늘에서 떨어진 걸까.
“아무튼 나는 왕이샹이야.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알겠어.”
“그리고 샹샹이란 별명은 꼭 나를 정말로 많이 사랑해 주는 사람만 부르게 할 거야.”
“뭐? 왜?”
“이름 끝 글자는 함부로 두 번 부르는 거 아니거든.”
“야 잠시만 앞뒤가 안 맞잖아. 너는 그렇게 나를 쉽게 부르면서.”
“그거야…”
니콜라스가 눈을 굴렸다. 의주는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튼! 엄마도 나를 샹샹이라고 부르지 않아. 오직 내가 세상의 전부일 사람만 나를 샹샹이라고 부르게 할 거야.”
“그래라, 그럼…”
결국 의주는 또 니콜라스를 이해하기보다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
땅에 발붙이고 사는 변의주, 크게 날아가는 왕혁상. 의주는 한동안 이 문장이 자꾸 생각났다. 어쩌면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 왕혁상. 자꾸만 왜 이런 걸 생각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여름이 되니 확실히 해가 길어져서 일몰 시각이 늦어졌다.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조금 더 일찍 만나자고 얘기해 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면 정말 본질을 잊는 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말았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만나려는 것이 아니다. 아빠의 불륜 증거를 수집하려는 것이다.
그래도 이런 생각은 들었다. 만약 이 모든 것들을 혼자 했으면 어땠을까. 아빠의 불륜을 몇 달간 혼자서 몰래 지켜봤으면 어땠을까. 혼자서 이 모든 걸 다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의주의 앞에 불쑥 떨어진 니콜라스가 고맙게 느껴졌다. 의주에게 니콜라스는 착하고, 소중한 좋은 친구였다. 굳이 특이한 점이 있다면 한 번도 낮에 만나본 적이 없다는 것 정도. 그런 것 말고는 평범한, 좋은 친구였다.
어쩌면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 니콜라스. 의주는 자신보다 몇 칸 아래의 계단에 걸터앉아 있는 니콜라스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 팔을 쭉 뻗었다. 니콜라스의 등에 의주의 손이 닿았다. 날개뼈가 만져진다. 여름이라 얇은 원단의 하복 아래로 니콜라스의 날개뼈가 희미하게 만져진다. 그다지 뾰족하지도 뭉툭하지도 않은, 자세히 만져보지 않으면 모를 날개뼈.
“주주 왜 자꾸 내 날개뼈 만지는 거야.”
니콜라스가 돌아보지 않고 계속 앞을 보며 말했다. 평소 같으면 의주는 놀라서 손을 떼 버리고 말았겠지만 오늘은 왠지 놀라지 않았다.
“자꾸 이렇게 만지면 이 안에 묻혀 있는 날개가 돋아날까 해서.”
의주는 스스로 이런 말을 뱉어놓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어이가 없었다. 정말 니콜라스가 천사일까 봐 그러는 건가.
“주주 바보. 치킨 안 먹어봤어?”
“응? 갑자기?”
“치킨 날개 보면 끝이 뾰족하잖아. 이렇게 뭉툭한 뼈에서 날개가 어떻게 돋아나.”
니콜라스가 의주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그런가. 이렇게 뭉툭한 뼈에서는 날개가 돋아날 수 없는 걸까.”
의주는 니콜라스의 말에 괜히 날개뼈를 더 꾹꾹 눌렀다. 그러자 니콜라스가 등을 앞으로 굽히며 말했다.
“간지러워.”
“거짓말. 간지럼 안 탄다며.”
“그래도… 그래도 간지러워.”
의주는 그제야 손을 뗐다. 이렇게 뭉툭한 뼈에서는 날개가 돋아날 수 없다. 조금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니콜라스는 나름의 복수를 했다. 이번에는 의주가 니콜라스의 앞에 앉아 있을 때, 니콜라스 역시 의주의 날개뼈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의주는 괜히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츠렸다. 자세히 느껴보니 그냥 쿡쿡 찌르는 게 아니라 뭔가를 적고 있었다.
“뭐라고 쓰는 거야?”
의주가 묻자 니콜라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바보 주주”
“거짓말”
획 수가 너무 많은데. 의주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뒤돌아보자 니콜라스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
기말고사가 끝난 날은 니콜라스의 생일이었다. 니콜라스는 생일 선물로 의주의 아빠에게서 한국사 시험 정답을 빼돌려 달라 했지만 의주는 당연히 거절하였다. 대신 의주는 케이크를 하나 사 갔다. 고등학교 2학년짜리 용돈으로는 꽤 큰 지출이었지만.
“너 딸기 좋아한다고 했는데 딸기 케이크는 없더라, 여름이라서.”
“괜찮아. 나 초콜릿케이크도 좋아해.”
니콜라스가 웃으며 말했다. 의주는 안심했다. 왜 긴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사실은 주주가 내 생일인 거 알고 있을 줄 몰랐어.”
“그럴 리가. 네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래도 까먹을 줄 알았는데!”
“나를 뭘로 보고. 자 아무튼 축하하자”
의주가 성냥을 꺼내어 불을 붙이려 했다. 첫 번째 성냥은 꺾여버려서 실패. 두 번째 성냥은 켜서 초에 불을 붙이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불어서 끌 때 뒤에 있는 촛불까지 다 불어버려서 실패.
“아 큰일이다. 어떡하지.”
“주주 내 생일 촛불 뺏었다.”
“야 방금은 무효야, 무효. 잠시만… 성냥 더 없나? 두 개밖에 없네…”
의주는 머리를 굴리다 결국 가방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이건 진짜 안 꺼내려 했는데. 왜냐하면 분명히 니콜라스는 이걸 보고,
“잠깐만, 너 왜 라이터 들고 있어? 주주 담배 피워?”
라고 할 테니까.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 솔직하게 말할게. 아빠랑 다른 여자랑 있는 거 본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때 너무 기분이 좀 그래서 아빠 라이터랑 담배 하나 훔쳤어.”
“그래서 피웠어?”
“아니! 결국 못 피웠어. 양심에 찔려서. 그래서 담배는 그대로 버렸고… 라이터는 혹시나 쓸 일 있을까 싶어서…”
“안 돼. 내놔, 주주.”
니콜라스가 단호한 표정으로 의주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결국 의주는 니콜라스의 손 위에 라이터를 올려놨다.
“그래도 초는 켜야,”
“내가 할게, 주주. 이거 압수야.”
자기가 뺏어가봤자 어디에 쓴다고. 의주는 이 말을 덧붙이려 했으나 그래도 니콜라스의 생일이니 참았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생일 케이크의 초가 드디어 다 켜졌다.
“나 대만 말로 생일 축하 노래 외워 왔어.”
“뭐 진짜?”
“쭈어… 니… 셩리,”
“生日”
“셩르… 콰이러~”
“快樂~”
“아 콰일러~”
의주가 서툰 중국어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자 니콜라스가 틀리는 발음을 고쳐주며 웃음을 참았다. 니콜라스의 웃음 참는 소리를 화음 삼아 의주는 겨우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
“와 주주 너무 감동인데? 완전 최고의 생일이야.”
“그 정도까지라고…?”
“응. 완전.”
“그럼 다행이네… 이제 소원 빌고 촛불 꺼.”
“소원… 먼저 이번 여름에 모기 많이 안 물리게 해주세요.”
“그게 생일 소원이야?”
“그리고 의주가 제 소원에 참견 안 하게 해주세요.”
“어? 소원을 그렇게 써버린다고?”
“세 번째 소원이 진짜야. 이건 나만 알 수 있어.”
니콜라스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한참을 있다가 촛불을 껐다.
“뭔지 알려주면 안 돼?”
“안 돼 마지막 소원은 나만 알 수 있다니까?”
“대만 인심 후하네, 세 개나 빌 수 있게 해주고.”
의주가 플라스틱 포크를 니콜라스에게 건네며 말했다. 니콜라스는 웃으며 케이크를 한 입 퍼먹었다.
지하 주차장의 계단이니 밖보다는 훨씬 서늘했지만, 그래도 바깥의 습하고 찌는 더위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땀이 많은 의주는 하복 셔츠가 금방 젖기 일쑤였다. 니콜라스네 학교는 하복 셔츠가 완전히 흰색이라 젖으면 금세 비쳤지만, 다행히 의주네 학교의 하복 셔츠는 칼라 부분이 짙은 남색이라 젖어도 티가 잘 나지 않았다.
“더워.”
니콜라스가 결국 금기어를 뱉어버렸다. 한 명이 덥다고 말하는 순간 미친 듯이 더워진다. 더위는 전염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케이크 다 먹었으니까… 이제 집에 갈까? 아빠도 지금 간 거 같은,”
의주가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급하게 안으로 숨어들었다.
“왜 왜 그,”
순식간에 의주는 케이크 상자를 계단 뒤편의 안쪽으로 밀어 넣어 숨긴 뒤 니콜라스 역시 계단 뒤편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니콜라스의 뒤에서 니콜라스의 입을 틀어막은 채 좁은 곳에 붙어 숨었다. 바로 뒤에 걸음 소리가 들렸다. 의주는 고개를 아주 살짝 빼서 바라봤다. 아빠와 그 여자가 갑자기 이 계단으로 올 줄은 몰랐다. 원래라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바라보기만 하다가 헤어져야 하는데.
그리고 의주는 아빠를 믿고 싶었던 마지막 마음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바라보기만 해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증명하듯이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바라보기만 하던 그 둘은, 오늘 갑자기 의주와 니콜라스의 성역에 침범해서 입을 맞췄다. 의주는 아빠가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와 입을 맞추는 것을 차마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그러다 자신의 숨이 잘 죽여지지 않아서 괜히 니콜라스의 입을 더 세게 틀어막았다.
니콜라스가 너무 가까이 붙어 있다. 점점 숨을 가쁘게 쉬는 게 느껴진다. 알면서도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몸이 그대로 굳어버려서. 왜 몸이 이대로 굳어버렸을까. 아빠가 다른 여자랑 키스하는 걸 봐서? 그게 아니면, 니콜라스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그렇게 고민하던 사이에 아빠와 여자는 사라졌다. 의주는 그제야 니콜라스의 입을 틀어막은 손을 뗄 수 있었다. 푸하. 니콜라스가 숨을 몰아쉬었다. 의주는 가만히 니콜라스를 바라보았다. 시뻘게진 귓바퀴와 목덜미. 어깨가 크게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아빠와 다른 여자의 키스를 봐서, 그 와중에 니콜라스는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괜, 괜찮아?”
의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니콜라스를 살폈다. 니콜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근데 방금 왜 그랬어?”
“… 아빠랑 그 여자가 키스했어, 이 계단에서.”
니콜라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의주 역시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둘은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내내 의주는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웃긴 점은, 아빠보다 니콜라스에 관한 생각을 먼저, 그리고 더 많이 했다는 점이다. 왜 이런지는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아빠와 다른 여자의 키스 장면을 목격했고, 그 와중에 소중한 친구를 질식시킬 뻔했다는 사실이 한 번에 뒤섞여서 그런 것 같다. 스스로 그렇게 합리화했다. 공기는 너무 후덥지근했고, 그래서 니콜라스와 맞닿아 있는 내내 피부가 끈적거리면서 달라붙어 있었고, 그 와중에 니콜라스의 숨소리가 점점 거세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의주는 자신의 심박수가 계속해서 올라갔다는 사실을 니콜라스에게 들켰을까 걱정이 됐다.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왜인지 모르게 걱정이 됐다.
아무튼 정신을 차려야 한다. 사실은 아빠가 꼭 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니라고 계속 믿고 있었다. 이제는 확실히 봤으니까 그 믿음을 끊어내야 한다. 확실히 증거를 모아서 최대한 엄마가 상처받지 않게 조심스럽게 알려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또 니콜라스에게 도와달라고 할까? 니콜라스가 어떻게 도와주지? 무엇보다
나는 왜 힘들면 니콜라스를 먼저 떠올리지.
-
그날 이후 아빠와 여자는 좀 더 확실한 스킨십을 했다. 덕분에 의주는 사진으로 확실하게 남길 수 있었다. 사진으로 찍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지만.
방학이 되어도 의주의 마음은 여전히 힘들었다. 단순히 아빠의 불륜을 확실하게 목격해서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의주가 가족 중에서 제일 닮았고,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아빠였으니까. 그런 사람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열여덟이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일이다.
그래서 의주는 자꾸만 니콜라스에게 기댔다. 심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자주 계단에 걸터앉아 니콜라스에게 기대어 있었다. 그냥 이렇게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이런 부질없는 말도 뱉었다. 의주는 니콜라스가 정말 좋은 친구라고 생각한다. 정말 착하고 소중한 좋은 친구. 천사 같은 내 친구 니콜라스.
방학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짧기도 했고, 덥기도 했고. 장마가 심할 때는 침수 위험 때문에 지하 주차장을 통제해서 니콜라스를 며칠간 못 만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전화하면서 놀기도 했다. 그렇게 방학이 흘러갔고, 7월과 8월이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9월. 거짓말처럼 니콜라스의 생일을 뒤집은 의주의 생일이 있는 9월에 다다랐다.
의주의 생일을 이틀 남겨둔 날이었다. 그냥 평소에 만나던 일몰 시각보다 일찍 지하 주차장 계단으로 향했다. 딱히 큰 이유는 없다. 시간도 남고,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의주는 딱히 깊이 생각하는 편이 아니었다. 니콜라스를 빨리 보고 싶어서?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냥 빨리 가고 싶은 날이었다.
그리고 모든 재난은, 이유 없는 사소한 변화에서 비롯된다.
의주는 평소와 같이 계단을 내려갔다. 하나씩 하나씩. 니콜라스가 언뜻 보인다. 그리고 그의 옆에 누군가 서 있다. 알 수 없는 언어로 대화하는 두 사람. 중국어인 것 같았다. 의주는 천천히 계단을 더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니콜라스와,
“어 주주 왜 이렇게 일찍,”
“… 어?”
마침내 마주한 니콜라스와 아빠의 그 여자.
분명히 니콜라스의 옆에 아빠와 입을 맞추고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 여자가 서 있다. 아주 가까운 듯이. 중국어로 대화하면서. 의주는 몸이 굳어서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의주에게 상냥한 인사를 건넨다.
“반가워요. 친구예요? 저 이샹 엄마예요.”
의주는 니콜라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제야 깨달았다. 너무 닮았다. 두 사람. 의주가 의주의 아빠를 닮았듯이, 니콜라스는 니콜라스의 엄마를 닮았다.
“주주 그게,”
의주는 니콜라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바로 계단 위로 올라갔다. 계단을 박차고 올라가는 소리가 탁탁 울렸다. 머리가 복잡해서 터질 것 같았다. 거의 반년 동안, 같이 숨어서 지켜보던 아빠의 그 여자가 니콜라스의 엄마라고? 반년 동안 그걸 숨겼다고? 왜? 알면서도 왜 내 옆에 있었던 거지? 왜 니콜라스는 나를 속인 거지? 나는 한 번도 그 애를 속인 적이 없는데.
그렇게 도망치듯 달려온 의주는 일단 집으로 향했다. 숨을 몰아쉬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곧장 집 앞으로 갔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른다. 괜히 실수가 나서 문이 안 열린다. 다시 한번 더 비밀번호를 쳐서 집으로 들어간다. 집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당장 방으로 향한다. 텅 빈 거실과 부엌을 지나 도착한 의주의 방은, 유일하게 텅 비어 있지 않다. 방에 사람이 있다. 방에 엄마가 있다. 엄마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엄마의 옆에 사진이 보인다. 의주가 숨겨놨던 사진. 아빠와 그 여자, 그러니까 아빠와 니콜라스의 엄마가 사랑에 빠진 사진들. 그 사진들을 주변에 흩뿌려둔 채 엄마가 주저앉아 있다.
“의주야 이게 뭐야…?”
의주는 마침내 재난의 한복판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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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빨리 흘러야 하는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과, 느리게 흘러야 하는데 빨리 흘러가는 시간이 있다.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은, 세상을 조금 더 슬프게 살아간다.
니콜라스는 슬프게도 이걸 아는 사람이었다. 니콜라스는 의주와 함께 있는 그 모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길 바랐고, 엄마와 의주의 아버지가 함께 있는 시간이 빨리 흘러가길 바랐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들은, 니콜라스가 바란 것과 정확히 반대의 속도로 흘러갔다.
니콜라스의 엄마는 쉽게 정착해 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계속해서 여기저기로 옮겨가며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니콜라스는 엄마와 함께 여기저기로 옮겨가며 살아갔다. 대만에서 태어났고, 대만에서 살다가 언젠가는 홍콩으로, 또 언젠가는 중국으로, 그러다 미국, 다시 대만에 돌아왔다가, 이번에는 한국이다. 니콜라스의 짧은 인생에서 비행기에서 보낸 시간을 모으면 꽤 긴 시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왕이샹은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엄마의 유일한 정착지라고 믿었던 사람. 그 사람이 정작 떠났다. 아주 멀리 우리가 한참 뒤에나 찾아갈 수 있는 곳. 아무리 엄마가 이렇게 빙빙 돌려서 설명해 봤자 니콜라스는 아빠가 죽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더더욱 여러 사람들에게 옮겨 다니며 정착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니콜라스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아빠가 니콜라스에게 남긴 것은 이름과 쏙 빼닮은 얼굴형이 다였다. 엄마는 니콜라스의 작은 턱을 어루만지며 아빠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샹, 내가 머물 곳은 이제 네가 된 거야. 니콜라스는 그 말을 믿지 못해서 왕이샹이라는 이름을 잘 쓰지 않았다. 태어날 때 같이 지은 영어 이름인 니콜라스라는 이름을 계속 쓰게 됐다. 왕이샹이라는 이름은 이상하게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엄마는 실제로 니콜라스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가족이 자주 바뀌었다. 어떨 때는 눈이 파란 누나가 생기기도 하고, 어떨 때는 삼촌 같은 형이 생기기도 했다. 물론 니콜라스는 이들 중 그 누구도 가족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니콜라스의 유일한 가족은 야속하게도, 엄마뿐이었다.
한국에 오게 됐을 때, 니콜라스는 열다섯, 한국 나이로 열여섯이었다. 곧 해가 넘어가는 12월에 한국에 도착했다. 처음 겪는 한국의 추위는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미국에서도 이 정도로 춥진 않았다. 사람이 많고, 눈이 많이 쌓여 있고, 차가 많은 길거리를 지나고 또 지나서 도착한 한 아파트에 새로운 아저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니콜라스는 저 아저씨가 엄마와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은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 아저씨의 아파트는 깔끔하고 좋았다. 나름 좋은 직장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니콜라스는 겨울 내내 한국어 공부에만 몰입해야 했다.
한국인 아저씨는 나름 좋은 사람이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 편했다. 니콜라스의 한국어 공부도 꽤 열심히 도와줬다. 니콜라스는 엄마의 남자들이 바뀔 때마다 늘 고분고분하게 따랐기에 이번에도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괜히 반항해 봤자 안 좋은 결과만 생길 뿐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 남자에게도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국어 공부를 꽤 하고 단기간에 어느 정도 대화는 될 정도까지 완성한 뒤에 니콜라스는 한국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성격이 좋은 편이라 금방 친구들과 어울렸고 선생님들과도 잘 지낼 수 있었다. 학교생활은 꽤 즐거웠다. 친구들과 축구를 자주 했는데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다쳐서 팔뼈가 부러질 정도였다. 엄마는 가뜩이나 오른팔에 큰 흉터도 있는데 왼팔에도 흉터가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뼈가 부러진 것이라 흉터가 남지는 않을 것이었다.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에 다치는 바람에 깁스가 꽤 번거로웠다. 그나마 오른손은 괜찮아서 나았지만, 그래도 머리 감는 게 오래 걸려서 아침에 시간이 없으면 대충 모자를 눌러쓰고 학교에 갔다. 그날도 모자를 눌러쓴 채 학교에 갔고, 하굣길에 땀이 찬 깁스를 빨리 풀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아래를 봤더니 신발 끈 한쪽이 풀려 있었다. 그걸 보고 괜히 짜증이 확 솟구쳤다. 한쪽 손을 못 쓰는 상황이라 묶을 수 없으니 그냥 무시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앞에는 근처에 있는 다른 학교 남자애들이 모여서 가고 있었다. 그냥 빨리 비키지 하는 생각을 하며 비집고 지나가던 찰나,
여기서부터 니콜라스의 모든 소원이 출발한다.
다른 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한 남자애가 꽤 멀어진 니콜라스에게 달려와 숨을 잠깐 고르고는 어깨를 톡톡 쳤다.
“저기 신발 끈…. 풀렸는데…”
니콜라스는 갑자기 무슨 의도인지 몰라서 눈만 끔뻑거렸다. 남자애는 멋쩍은 표정이었다.
“아… 알고 있어.”
내 신발 끈 풀린 게 뭐 어쩌라는 거지. 니콜라스는 살짝 무심하게 말했다. 뒤에서 남자애의 친구들이 걸어와 니콜라스를 지나쳐 앞으로 갔다. 남자애는 무안한 듯 목덜미를 만지면서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걸어갔다. 니콜라스는 멍하니 그 애를 보다가 신발 끈을 내려다봤다. 뭔 상관이야 자기가. 괜히 더워서 짜증이 났다. 그때 갑자기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경쾌한 발걸음 소리. 니콜라스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 남자애가 다시 니콜라스의 앞에 마주 섰다.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그 남자애는 갑자기 풀썩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니콜라스의 풀린 신발 끈을 묶어주기 시작했다.
“팔을 다쳐서 못 묶고 있는 거 같아서… 조심해!”
남자애가 천천히 일어나며 말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입꼬리가 예쁘다. 키가 큰 편이네. 니콜라스는 그 남자애를 계속 바라봤다. 눈망울도 크다. 동그랗게 생겼어. 잔잔한 초여름 바람과 잘 어울리는 애. 햇살이 사람이 된다면 이렇게 생겼을 것 같다.
니콜라스가 감사 인사도 전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던 사이에 남자애는 앞에 있는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에 금세 달려가 사라져 버렸다. 니콜라스는 그날 집에 가는 내내 고개를 숙여 그 남자애가 묶어준 신발 끈을 바라보며 걸었다.
잊히지 않는다. 햇살과 초여름 바람을 닮은 애. 니콜라스는 그 애의 입꼬리를 곱씹어 생각했다. 그 큰 눈망울도. 뭔가 닮은 거 같은데. 아 波妞! 한국어로는 뭐지.
“포뇨.”
풉. 그러다 결국 웃음을 크게 터뜨리고 말았다. 이름 모를 그 남자애를 포뇨라고 불러야지. 아무튼 니콜라스는 그날 만난 포뇨에 대해 자꾸만 생각했다. 키다리 포뇨. 몇 살인지, 이름은 뭔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니콜라스는 자꾸만 그 애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그 애는 니콜라스의 얼굴을 제대로 못 봤을 테니 니콜라스를 다시 봐도 못 알아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다시 보고 싶다. 그래서 일부러 옆 학교를 기웃거리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엇갈려서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의 인연은 신기해서, 니콜라스는 포뇨의 정체를 금방 알 수 있었다. 2학년이 되고 새로운 반이 되어 담임 선생님이 바뀌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한국에서 라인 대신 많이 쓴다는 카톡의 프로필을 확인했을 때, 니콜라스는 침대에 누워 있다 벌떡 일어났다.
“포뇨다.”
새로운 담임 선생님의 카톡 프로필 사진에 포뇨가 있다. 선생님이랑 둘이 찍은 사진. 옆에 있는 여자는 누나인 것 같다. 셋이 똑같이 생겼네. 특히 담임 선생님과 포뇨가 닮았다. 입꼬리가 똑같다. 니콜라스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담임 선생님의 첫인사에서 자신도 우리와 동갑인 아들이 있다고 한 걸 보면 포뇨는 니콜라스와 동갑이 분명했다. 그럼 변 씨인가? 변포뇨. 니콜라스는 한참을 웃었다.
아무튼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나 신기하다. 게다가 담임 선생님은 니콜라스와 같은 아파트에 산다고 했으니 포뇨와도 충분히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였다. 담임 선생님한테 말이나 해볼까. 아들이랑 친구 하고 싶다고. 좀 웃긴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정말 담임 선생님이 아파트 단지에서 보였다. 그래서 천천히 따라가 봤다. 혹시 포뇨가 나타나면 어떡하지? 말도 안 되지만 기억하냐고 물어볼까? 지금은 팔 다 나아서 혼자 신발 끈을 묶을 수 있다고 말해줘야지.
그렇게 기대에 부푼 채 담임 선생님을 따라 간 니콜라스는 포뇨 대신 의외의 인물을 목격했다.
엄마.
엄마가 이번에 머물 사람은 이 사람이야?
니콜라스는 그 둘을 말없이 지켜보다 지하 주차장 위로 올라갔다. 혹시 잘못 본 걸 수도 있잖아. 갑자기 합리화가 되기 시작했다. 그냥 학부모와 선생님으로 인사를 나눈 걸 수도 있잖아. 아무 사이도 아닐 수 있잖아. 결국 니콜라스는 다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소리가 날까 계단을 한 칸씩 조심스럽게 밟으며 내려갔다. 그리고,
드디어 그 애를 만났다. 그 모든 상황을 목격하고 있는 그 애를.
니콜라스는 그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여자가 내 엄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 애가 해달라는 대로 다 대답해 버렸다. 그 애의 이름은 의주였고, 이제 니콜라스는 의주에게 아무런 진실도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의주의 이름을 알게 될 때까지 니콜라스는 의주에 대해 아주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분명히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의주와 다시는 만날 수 없다면, 운명이 아니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슬펐던 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운명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악연이라면 어떡하지. 우리가 이렇게 아주 나쁘게 얽혀버리게 된 거라면 어떡하지.
이런 식이 아니더라도 나는 너랑 충분히 얽힐 자신 있었는데.
이런 방식으로 얽히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서 니콜라스는 더욱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매일 의주를 만날 때마다 좋았고, 동시에 괴로웠다. 의주와 함께 있는 시간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시간이 자꾸만 흘러가면 언젠가 자신이 숨기고 있는 진실에 닿아버리고 말 테니까.
진실에 닿아버리기 전까지, 1초만 더 순간이 머물렀으면 좋겠다. 의주를 마치 연인처럼 주주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은 순간이 멈추면 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었고, 그러면서도 의주가 절대 자신을 샹샹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의주에 대한 죄책감에서 그런 것이었다. 이 모든 진실을 다 알게 되더라도, 언젠가 의주 네가 나를 샹샹이라고 불러줄 날이 올까. 니콜라스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한없이 슬퍼졌다.
의주는 니콜라스에 대해 뭐라고 생각할까. 니콜라스는 자신의 날개뼈를 손끝으로 건드리고 있는 의주를 뒤돌아보지 못하고 그저 생각만 했다.
“간지러워.”
“거짓말. 간지럼 안 탄다며.”
의주의 말이 맞았다. 니콜라스는 간지럼을 잘 안 타는 편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전혀 간지럽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이 자꾸만 간지러워진다.
“그래도… 그래도 간지러워.”
마음이 몸만큼만 간지럼을 안 타면 좋을 텐데.
의주가 몰래 챙겨준 니콜라스의 생일, 세 번째 소원을 빌고 생일 케이크의 초를 불어 끈 니콜라스에게 의주가 물었다.
“뭔지 알려주면 안 돼?”
세 번째 소원은 언제나 마음속으로만 비는 거라 알려줄 수 없다. 원래는 의주와의 영원을 빌려고 했다. 그러다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소원을 바꿨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어차피 영원하지 않다면, 그렇다면 나에게만큼은 그 모든 유한한 것들이 1초만 더 머물러 주기를, 의주를 떠올리며 빌었다. 작년 여름, 의주가 니콜라스의 신발 끈을 묶어주었을 때부터 시작된 소원을 드디어 빌었다.
그렇게 여름이 끝나고, 의주의 생일이 있는 9월이 되었다. 니콜라스는 웬일로 지하 주차장 계단으로 온 엄마와 마주쳤고, 대화를 하던 중 웬일로 평소보다 일찍 온 의주와 마주쳤다.
니콜라스가 알고 있는 진실이 다시 한번 떠오른다. 의주와 둘만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야 하는데 빨리 흘러갔고, 지금, 이 순간은 빨리 흘러가 버려야 하는데 무서울 정도로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기분이 이상하다. 의주가 보고 싶다. 기분이 이상해서 의주를 찾게 된다. 그 애가 날 보면 무너질 걸 알면서도.
-
의주의 집에 태풍이 크게 왔다. 아빠는 집을 나갔고, 누나는 엄마를 챙기고, 엄마는 계속 술을 마셨다. 그 태풍 속에서 의주는 뭘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않고 살아가려 애썼다.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일상을 이어 나가려 했다. 학교에 가고, 학원에 가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늘은 그 지하 주차장에 가지 않았다. 어제 봤던 니콜라스와 니콜라스의 엄마. 이 둘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려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니콜라스에게 계속 연락이 왔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의주는 지금 아무런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은 채 멍하니 수업만 들었다. 그리고 학원을 마친 늦은 밤, 누나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왔다.
-야 변의주. 너 빨리 집에 와서 얘 좀 데려가.
“무슨 소리야…?”
-… 이 불륜녀 아들인지 뭔지 좀 데려가라고…!
“뭐…?”
의주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니콜라스가 그 여자 아들인 건 어떻게 알았지. 아 오늘 낮에 만났다고 했나. 그보다 니콜라스가 왜 우리 집에 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단숨에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집 문 앞에 서 있는 니콜라스를 발견했다.
“의주”
니콜라스의 입에서 의주의 이름이 나온 순간 의주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의주는 아무런 말 없이 니콜라스의 손목을 잡아 이끌어 지하 주차장 계단으로 향했다. 센서 등이 희미하게 깜빡이다 켜졌다.
“우리 집에는 왜 갔던 거야?”
의주가 밭은 숨을 뱉으며 말했다.
“… 보고 싶어서.”
니콜라스가 나지막이 뱉었다. 의주가 황당해서 말문이 막히는 동안 센서 등이 꺼져서 완전히 깜깜해졌다.
“그걸… 그걸 말이라고 해? 나를 왜 보고 싶은데? 속은 기분이 어떤지 물어보려고?”
의주가 동요하며 말하자 센서 등이 다시 켜졌다. 밝아진 시야 속에서 의주는 다시 한번 휘몰아치듯 말을 뱉었다.
“도대체 왜 숨긴 거야? 그 오랜 시간 동안 너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도와주는 척했던 거야? 애초에 네가 내 편이었던 적이 있긴 해?”
“난 언제나 네 편이야.”
니콜라스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센서 등이 꺼졌다.
“네가, 네가 내 편이라고? 그런데 왜… 너네 엄마가 시켰어? 너네 엄마가 나한테 일부러 접근하라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도대체 뭔데 나를 바보로 만든 건데?”
“우리 엄마… 엄마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 처음 봐서 그랬어.”
“… 뭐?”
의주는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니콜라스는 내려다보던 시선을 천천히 올려 의주를 바라봤다.
“어쩔 수 없었어.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그게 지금,”
속에서 무언가가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의주가 니콜라스를 세게 붙잡았다. 그게 지금 할 말이야? 그게 지금 할 말이냐고. 의주와 니콜라스가 점점 격하게 부딪혔다. 니콜라스가 의주의 팔을 세게 뿌리쳤다. 그 과정에서 니콜라스의 팔꿈치가 의주의 코에 세게 부딪혔다. 얼마 뒤 의주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몸싸움이 점점 더 격해졌다. 계단 끝까지 밀리던 니콜라스가 결국 뒤로 넘어졌고 의주도 그 위로 넘어졌다. 의주의 두 손이 니콜라스의 목 근처로 향했다. 의주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에 귀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니콜라스가 의주의 두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어 자기 목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힘을 주어 누르기 시작했다.
“뭐 하, 뭐 하는 거야.”
니콜라스의 뺨에 의주의 코피가 뚝뚝 떨어져 흘러내렸다. 의주의 손 위로 포개어진 니콜라스의 손에 힘이 더 실렸다. 의주는 필사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으나 니콜라스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조만간 니콜라스의 목이 부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의주는 무서워졌다. 의주의 피가 여기저기 묻어 있는 니콜라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 위로 눈물도 뚝뚝 떨어졌다. 제발 니콜 무서워 그만해. 의주가 애원하다시피 말하며 손을 빼내려 애썼다. 니콜라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의주를 똑바로 바라봤다. 시뻘게진 니콜라스의 얼굴에 의주는 더 겁을 먹었다. 이러다 진짜 죽으면 어떡하지. 아까는 분명 속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느낌이었다. 니콜라스의 손에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의주는 정신을 붙잡고 그 틈을 타 겨우 손을 떨쳐냈다. 푸하. 니콜라스가 크게 숨을 뱉어내고는 연신 콜록거렸다. 의주도 숨을 몰아쉬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코피는 멎을 생각을 안 했고, 눈물은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왜 그, 왜 그런 거야…?”’
의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니콜라스에게 물었다. 니콜라스는 겨우 기침을 멈춘 채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너 나 죽이고 싶잖아, 지금.”
“뭐…?”
“근데 너는 나를 절대 죽일 수 없을 테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내가 진짜 죽지.”
센서 등이 다시 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에 적응해서 희미한 빛에 의존해 앞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아무것도, 니콜라스의 얼굴조차도 볼 수 없다.
“… 죽지 마.”
어둠 속에서 의주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진심을 뱉어내기 시작한다.
“죽이기 싫었어 미안해.”
보이지 않는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더 무서웠고 간절하다.
“죽이기 싫어. 너를 죽이기 싫어.”
애원하는 목소리에도 니콜라스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죽지 마.”
의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까지 뱉었을 때 비로소 센서 등이 다시 켜졌다. 그제야 니콜라스의 얼굴이 보인다. 의주의 코피로 얼룩진 그 얼굴이 보였을 때, 의주는 미친 듯이 울음을 터뜨렸다.
의주와 니콜라스는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그저 등을 기대어 앉은 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은 없는데도 닿아 있고 싶어서 이렇게 있었다. 그러다 니콜라스가 뭔가를 꺼냈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환해졌다. 라이터였다. 의주가 니콜라스에게 뺏겼던 그 라이터. 니콜라스는 여전히 등을 맞댄 채 의주에게 불을 켠 라이터를 가까이했다.
“생일 축하해.”
니콜라스가 잠긴 목소리로 말하자 의주는 시간을 확인했다. 9월 7일 오전 0시. 의주의 생일이었다. 의주는 멍하니 폰 화면만 보다가 폰을 끄고는 라이터의 불을 후하고 불었다. 아무런 소원도 빌지 않았다.
우리의 날개뼈가 맞닿아 있다. 인간의 날개뼈가 뾰족하지 않고 뭉툭한 이유는 맞닿아 있을 때 서로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일까.
_
의주의 생일을 이런 식으로 축하하고 싶지는 않았다. 니콜라스는 라이터를 다시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내 생일에 그랬던 것처럼, 네 생일도 웃으며 보내고 싶었는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없이 계단을 올라 지하 주차장 밖으로 나왔다. 멀어지기 시작하는 의주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 이상 뒤돌아봐 주지 않을 것만 같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지금 전하지 않으면 영원히 닿지 않을 것만 같은 마음이 있다.
“… 알면서도 말 안 한 진짜 이유가 따로 있어.”
니콜라스가 겨우 말을 뱉자 의주가 멈춰서더니 뒤돌아봤다.
“그러니까,”
의주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니콜라스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이어 말했다.
“내가 일부러 숨겼어. 너를 좋아해서.”
이 말이 의주를 마침내 무너뜨릴 것을 니콜라스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하고 싶었다. 말해야만 했다.
“… 안 되는 거 알잖아.”
의주가 말했다. 그리 잔인하지 않은 목소리로, 그리 잔인하지 않게. 니콜라스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리고 의주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니콜라스는 계속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영원히 머물 수 없으니 1초라도 더 보고 싶었다.
그때 의주가 다시 멈춰서 뒤돌아서더니 니콜라스에게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니콜라스의 앞에 성큼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언제 풀렸는지 모를 니콜라스의 신발 끈을 묶어주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신발 끈을 묶어주고 다시 가버렸다. 니콜라스는 의주의 뒷모습을 보지 않았다. 의주가 묶어준 신발 끈만 하염없이 내려다봤다.
그제야 니콜라스는 실컷 울 수 있었다.
-
어른들의 세계는 꽤 복잡했다. 의주는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애초에 자기가 이 모든 일을 모르는 척하고 지나쳤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까. 애초에 그날 니콜라스와도 아무런 대화 없이 지나쳤다면 이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겨울이 왔고, 해가 넘어가고, 다시 봄,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 의주는 곧 스무 살을 앞둔 열아홉의 12월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단 한 순간도 니콜라스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의주는 니콜라스가 자신에게 고백했던 그 생일에 머물러 있었다. 니콜라스가 날 좋아한다. 가장 소중한 친구였던 니콜라스가. 의주는 니콜라스의 고백을 자꾸 곱씹었다. 나를 좋아해서 그 모든 것들을 말할 수 없었던 니콜라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계속 생각하다 보니 점차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니콜라스를 만날 수는 없었다.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떠나보내 줘야 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니콜라스를 생각했다.
대학 합격 발표가 나고 한동안은 정신없이 친구들과 놀기만 했다. 먼저 나서서 모임을 주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친구들이 모임에 부르면 거절을 잘 못해서 늘 나가서 놀기만 했다. 비록 대학 합격 발표가 났다고 해도 아직 12월인데 벌써 술을 마시자고 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래봤자 어차피 술집 입구에서 바로 걸려서 결국 다 같이 콜라나 마셨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소식이 궁금했다. 어느 대학을 갈 건지, 애초에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할 건지 등등.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의주의 아빠와 니콜라스의 엄마는 같이 살게 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빠가 그 집에서 니콜라스도 같이 살자고 했지만, 니콜라스가 거절하고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게 됐다고 들었다. 의주가 마음만 먹으면 니콜라스를 만나러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차마 엄마를 생각해서 그럴 수 없었다. 너랑 아빠랑 너무 닮았고, 걔랑 그 여자랑 너무 닮았거든? 그래서 너희 둘이 같이 있는 거 보면 엄마가 미쳐버릴 거 같대. 누나가 이렇게 말한 이후로 의주는 니콜라스를 차마 만나러 갈 수 없었다. 물론 니콜라스 역시 의주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영원히 궁금해하기만 하며 지내야 할까. 의주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서로의 소식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모든 궁금증은, 그러니까 어쩌면 그리움은 어떤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의주는 확인이 필요했다.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은 12월 말, 의주는 또 반 친구들이 다 같이 모여 놀러 가는 곳에 끌려갔다. 노래방을 가고, 피시방에 갔다. 그리고 저녁은 여자애들의 적극적인 의견 제시로 마라탕으로 정해졌다. 의주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하자 다들 의주를 맨 앞에 앞장세워 마라탕집으로 들어갔다.
“여기 중국인 알바생들 많은데, 다 잘생겼다?”
여자애들이 자리에 앉으며 수군거렸고 남자애들은 짓궂게 맞받아치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의주는 대화에 끼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마주쳤다. 드디어 니콜라스를.
의주는 멍하니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믿을 수가 없어서. 니콜라스 역시 놀란 눈치였다.
“야 의주야 왜? 저 알바생이랑 너 아는 사이야? 친구?”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의주에게 물었지만 의주는 차마 답할 수 없었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무슨 사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는 와중에 니콜라스는 아무런 말 없이 다시 일을 하러 가버렸다.
“야 근데 진짜 네 말이 맞다. 저 알바생도 중국인이겠지? 잘생겼어, 대박.”
“… 대만인이야.”
“어…?”
의주의 차분한 목소리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의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중국인이 아니라 대만인이야. 중국이랑 대만은 달라.”
“아… 어 그래? 어떻게 알았대…”
기분이 이상하다. 이렇게까지 말을 해주는데. 니콜라스는 의주를 바라보기는커녕 자기 일을 하느라 바빴다. 결국 의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니콜라스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시 얘기 좀 해주라.”
니콜라스가 눈을 끔뻑거리다 눈치를 살폈다. 의주는 못 참고 니콜라스의 손목을 잡고 이끌어 밖으로 데려 나왔다. 가게 뒤편 골목에 다다른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섰다.
“저… 나 일하러 가야 되는데,”
“… 미안.”
막상 데려 나온 의주가 김빠지게 사과나 했다. 니콜라스는 그런 의주를 가만히 바라보다 갑자기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의주에게 보여줬다.
“이거 봐.”
“이게 뭔데…?”
“나 알바 같이하는 형이 벗어줬어. 내가 춥다고 하니까.”
“어…?”
의주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듯한 목소리로 되묻자 니콜라스는 머뭇거리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형이야. 이 형도 나를 좋아하는 거 같아.”
“… 뭐?”
니콜라스가 겉옷을 실외기 위에 얹어 두고는 풀썩 쭈그려 앉았다.
“나 이제 너 안 좋아해.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니콜라스는 여전히 해맑은 표정으로 의주를 올려다봤다. 의주는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왜 걱정을 해.”
“… 그렇지? 의주가 내 걱정 할 필요는 없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있잖아 니콜,”
의주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가게 사장이 나타나 의주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니콜라스에게 뭐라 했다. 니콜라스 역시 의주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나 일해야 해 의주. 갈게.”
니콜라스는 정신없다는 듯이 사장과 함께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의주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멀뚱멀뚱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니콜라스가 나를 피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실외기 위에 놓여 있는 겉옷이 보였다. 니콜라스가 좋아한다는 형이 빌려줬다던 그 겉옷.
좋아한다는 게 사실일까? 그 형도 자기를 좋아한다는 게 사실일까? 그냥 해본 소리라면? 민망해지지 않으려고 괜히 한 말이라면? 그 겉옷 하나를 보면서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그때 나를 좋아한다는 말은 그냥 그때에 머물러 있는 말이구나.
의주는 천천히 그 겉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들어올려 한쪽 품에 쥐었다. 얇고 바스락거리는 겉옷. 춥다고 하는 애한테 겨우 이렇게 얇은 옷을 주다니. 의주는 그 겉옷을 더 세게 쥐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고민도 없이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의주는 숨을 몰아쉬었다. 우선은 그 겉옷을 침대 위에 얹어 두고는 머리를 식혔다. 내가 저 옷을 왜 가져왔을까. 어떤 마음으로? 홧김에? 복수심으로? 그따위 단어들로는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감정이었다.
의주는 저 겉옷을 입은 니콜라스에 대해 생각했다. 알바하면서 만났다는 그 형이라는 사람은 니콜라스와 같은 언어를 쓰겠지. 니콜라스가 한국어보다 훨씬 편하게 사용할 언어로 대화하겠지. 그리고 니콜라스는 그 형에게 어떤 표정들을 보여줄까. 또 그 천사 같은 웃음. 눈이 예쁘게 접혀 올라가는 웃음. 그 형에게도 본명을 알려줬을까? 이름에 날개가 달려있다는 걸 그 형도 알고 있을까?
그때 갑자기 의주의 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의주는 깜짝 놀라 폰을 집어 들었다. 니콜라스였다. 차마 번호를 지우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뒀는데 1년이 훨씬 넘어서야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하필 니콜라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을 때 전화가 오다니. 의주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
-혹시 아까 내가 보여준 옷 어딨는지 알아?
니콜라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의주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내가 아까 보여줬잖아. 좋아하는 형이, 형이 빌려준 옷이라고…
“그거… 나는 모르겠는데…”
의주는 거짓말에 딱히 재능이 없었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지금 정신이 없어서 쉽게 속아 넘어갔다.
-정말… 정말 몰라?
“나도 뭐 그러고 바로 집으로 가서…”
의주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희미하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 너, 너 울어?”
-그거… 그거 정말, 정말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좋아하는 형, 형이…
니콜라스가 울면서 말하느라 발음이 점점 뭉개져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다. 의주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니콜라스가 우는 소리를 듣기만 했다. 꽤 많이 운다. 이렇게 우는 건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물론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우는 애였나. 눈물이 별로 없는 애였는데. 내 앞에서 이렇게 우는 건 처음 아닌가. 기분이 이상하다. 나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에 저렇게 울고 있다. 어쩌면 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 형 때문에 저렇게 엉엉 울고 있는 것이었다. 너는 그런 목소리로 우는구나. 나 때문에 운다면 또 다른 목소리일까.
대화는 흐지부지 마무리되었고 의주는 별말도 못 한 채 전화를 끊어야 했다. 며칠 동안 집 밖에도 나가지 않으면서 혼자 고민했다. 이건 미친 짓이다. 그렇게까지 우는데 이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돌려줘야만 한다. 하지만 돌려주면 그 형이랑 잘 되고 말겠지. 그렇게 되면 나랑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때, 작년 내 생일 그때의 그 고백은 정말 그때에만 머물러 있는 걸까.
결국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연락을 남겼다. 할 말이 있으니 내일 만나자고. 그렇게 보낸 뒤에 다시 손에 니콜라스의 겉옷을 쥐었다. 선녀의 날개옷을 숨긴 나무꾼은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 옷만 숨기면 영영 곁에 있어 줄 것만 같은 어리석은 생각에 그랬던 것일까. 며칠의 고민 끝에 의주는 드디어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내가 너의 날개옷을 훔쳤다.
너를 좋아하게 돼서.
-
의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의주라면 충분히 그럴 사람일 것 같다. 니콜라스가 내린 결론이다. 그 옷이 없어졌을 때부터, 니콜라스는 의주가 가져갔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차분하게 이야기하려 했는데, 막상 거짓말하는 의주의 목소리가 너무 티 나서, 그래서 이성을 잃고 엉엉 울고 말았다. 내가 너를 아직도 좋아할 것 같아? 독하게 말하려 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것은,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스는 의주를 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의주의 아버지가 엄마와 같이 살자고 했을 때 거절했던 것은 의주를 위한 일이었고, 의주를 좋아하면서도 연락조차 안 했던 것 역시 의주를 위한 일이었다. 모든 일들이 의주를 위해서였다. 내가 이미 충분히 의주를 무너뜨렸으니까. 여기서 더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 기숙사에 살면서 용돈도 직접 벌기 위해 알바를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대만 사람이 운영하는 마라탕 가게를 발견해 쉽게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거기서 똑같이 대만에서 온 알바생 형을 만났고, 자연스럽게 같이 대화하다 점점 호감이 생겼다.
의주를 영영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지만. 니콜라스는 알바생 형을 보며 자신을 좋아해 줄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를 좋아해 줄 사람. 그래서 상대방이 자신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자꾸만 확인하려 했다. 춥지도 않은데 옷을 빌려달라고 하는 등. 어느 정도 먹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받지 못해 슬픈 사랑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받아서 채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필 거짓말처럼 의주가 나타났고, 결국 니콜라스는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의주가 할 말이 있다고 불러서 나왔을 때, 니콜라스는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분명히 의주가 자신의 옷을 가져갔을 것이고, 어떤 말을 하든 상처받지 않기로. 왜 가져갔는지 어떤 이유를 말하든 간에, 받아들이기로.
“… 왜 불렀어?”
니콜라스가 먼저 운을 띄운다. 의주는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연다.
“… 우리 거기 가서 이야기할래? 지하 주차장 계단.”
의주의 말에 니콜라스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걸어가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을 때, 이전보다 미묘하게 더 희미해진 듯한 센서 등이 힘없이 깜빡거리다 켜졌다.
“네가… 그렇게 많이 울 줄은 몰랐어.”
“어? 아… 놀랐지.”
“많이 속상했어?”
니콜라스는 의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쌍꺼풀 없는 저 큰 눈이 너무 착하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의주는 너무 착한 사람이라 나를 죽일 수도, 심지어 미워할 수조차 없다. 차라리 나쁜 사람이었으면 좋았을걸.
“… 응.”
“… 미안해.”
의주가 나지막이 뱉고는 부스럭거리며 가방에서 옷을 꺼냈다. 니콜라스가 애타게 찾던 그 겉옷. 그 겉옷이 사라졌을 때 그렇게 무너져서 울었던 것은, 나는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의주가 증명해 버린 것 같아서. 그래서 그렇게 속상하게 울었던 것이었다.
“의주 네가… 가져갔었어?”
니콜라스의 말에 의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겉옷을 니콜라스에게 건넸다. 니콜라스는 그 겉옷을 가만히 받아 쥐었다.
“왜… 왜 그랬어?”
의주가 가져갔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차마 그 이유는 가늠할 수 없었다. 의주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다.
언젠가 의주 네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너는 네가 직접 본 것만 믿는다며. 그래서 귀신도 안 믿는다며. 그럼 네 눈으로 보고 있는 나를 너는 믿을까. 나는 네가 눈에 안 보여도 또 너를 믿고 말 텐데.
다시 한번, 이렇게 믿고 말 텐데.
너는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니콜라스,”
너는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너는 나를
“좋아해.”
의주 너는 어쩜 그렇게 늘 내가 생각한 가장 잔인한 순간 직전에 내가 가장 간절히 바랐던 말을 해주는 건지.
“좋아하게 됐어. 그래서 그랬어. 네가 다른 사람한테 영영 가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훔쳤어.”
니콜라스는 의주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착한 눈동자를. 어디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니콜라스만을 바라보는 의주의 그 착한 눈동자를.
“… 좋아하게 됐어?”
목이 시큰했다. 시야가 일렁였다.
“드디어…?”
니콜라스가 마침내 무너진다. 간절히 바랐던 말을 들었는데도 무너진다. 돌고 돌아 드디어. 드디어 의주는 나를 좋아하게 됐다. 그 모든 세월을, 서로를 좋아했다고 믿어왔던 순간들이 무너진다. 드디어. 드디어 니콜라스는 깨달았다. 의주와 한 번도 마음이 겹친 적 없었다는 사실을.
-
12월 30일. 의주는 드디어 니콜라스에게 마음을 전했다. 그 이후로 한참 동안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단지 예전처럼 서로의 날개뼈를 맞대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서로를 다치지 않게 하도록 뭉툭한 날개뼈를 맞대고서, 이틀 뒤면 비로소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 의주의 머릿속에 이 문장이 상처를 남기듯이 스쳐 지나갔다. 어른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어른이 되면 영영 더 멀어져 버릴까.
“…. 니콜라스.”
“응?”
“대만에 가자.”
“뭐? 지금?”
“아니. 내일. 내일 밤에.”
“왜?”
“대만은 우리나라보다 한 시간 더 느리다며. 한 시간만 더 열아홉이고 싶어.”
“… 대만은 어차피 만 나이 쓰는데.”
“그래도. 한 시간만 더 올해에 머물고 싶어.”
영원할 수 없다면 한 시간만 더.
한참의 침묵 끝에 니콜라스는 의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의주에게 내일 밤 비행기 표를 구해 우체통에 넣어둘 테니 집에서 나오는 길에 가져 나오라고 했다. 의주는 대만에 대해서는 니콜라스가 훨씬 더 잘 알 테고 비행 경험도 더 많을 테니 그저 니콜라스에게만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이제는 니콜라스를 믿어야 할 때니까. 사실은, 한 번도 안 믿은 적 없었으니까.
니콜라스는 의주에게 집에서 저녁 10시쯤에 나오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긴박하게 나가야 하냐고 물었지만 니콜라스에게 다 계획이 있다고 해서 그저 알겠다고만 했다. 그래서 12월 31일, 한 해를 한 시간만 더 붙잡기 위해 의주는 짐을 챙겼다. 얼마나 머물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여행을 위해 집을 나서려는 찰나,
“의주야.”
엄마가 의주를 불렀다. 또 술을 마신 듯했다. 이혼한 지 1년 정도 지났지만, 여전히 엄마는 많이 힘들어했다.
“의주야 어디 가.”
“나…”
“너도 영영 안 돌아올 거야?”
엄마가 울먹이며 말했다. 의주는 시계를 확인했다. 엄마를 빨리 재우고 가면 늦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일단은 침대에 누워요.”
의주가 엄마를 부축하며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다. 엄마는 몸을 비틀거리며 겨우 침대에 누웠다.
“의주야, 너까지 없으면 엄마 진짜 못 버텨…”
“… 아니야 엄마 무슨 소리예요.”
의주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떠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의주 네가… 의주 네가 아빠랑 제일 많이 닮은 거 알지…?”
엄마는 자주 이런 소리를 했다. 의주는 이 말에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하지만 지금은 뭔지 모를 오기가 생겼다. 오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자신감? 아무튼 지금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아니야. 나는 아빠랑 안 닮았어.”
드디어 이 말을 뱉었다. 엄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주의 얼굴을 쓰다듬기만 했다. 의주는 계속해서 엄마의 곁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30분쯤 지났을 때 엄마가 잠에 든 것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출발이 많이 늦어졌다. 의주는 정신없이 집을 뛰쳐나와 우체통에 손을 넣었다. 종이봉투 하나밖에 없었으니 이게 분명 니콜라스가 말한 비행기 표였다. 확인할 틈도 없이 공항으로 향했다. 대중교통을 타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 사람도 많았다. 겨우 공항으로 도착했을 때는 11시가 훨씬 넘었다. 도대체 몇 시 비행기인데 이렇게 늦게 도착하라고 한 걸까. 지금 간다고 해도 대만에 도착하면 해가 넘었을 것 같은데. 의주는 공항에서 숨을 돌리며 니콜라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불안하게 통화연결음이 점점 길어지더니 결국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의주도 대중교통을 타고 오느라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여서 폰 화면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한 번 더 걸면서 비행기 표가 들어 있을 종이봉투를 꺼냈다. 의주에게. 편지도 아니고 이렇게 적어놨네. 지겹게 이어지는 통화연결음을 들으며 봉투를 열어 안에 든 종이를 꺼냈다.
전화는 끝내 연결이 되지 않았고, 종이봉투에는 비행기 표가 들어있지 않았다.
의주는 작은 종이 한 장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폰에서는 삐 소리가 울린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었지만, 의주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니콜라스가 남긴 종이 한 장만 계속해서 바라봤다.
[ 머무르지 마. 나아가야 해.
어른이 되면 다시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