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ver Be My

콜라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응... 아니 뭐?”

“니콜라스, 네가 내 첫사랑이야.”

“나... 나? 내가? 내가 의주 첫사랑이라고?”

“...몰랐어?”


아니 니콜라스, 나는, 네가 알고 있는 줄 알았지... 의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말을 더듬는 것까지 정말 진짜처럼 자연스러워서, 그걸 넋 놓고 보느라, 순간 다음 대사를 진행하는 걸 잊어버린 니콜라스를 위해 의주가 손끝으로 대본을 툭툭 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며 당황스러워 갈 곳 잃고 헤매는 시선. 의주의 감정선엔 단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의주의 손짓에 간신히 눈을 돌려 다음 대사를 확인한 니콜라스가 어렵게 대사를 내뱉었다. 미안. 나 몰랐어...


“난 진짜 몰랐어. 미안해.”

“그... 그랬구나. 알고 있는 줄 알았어. 착각해서 미안.”

“아. 아냐. 그럴 수 있지. 내가 미안해. 내가 괜히 의주 헷갈리게 했나 봐.”

“아냐. 그게 왜 니콜라스 잘못이야.”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보지만 웃는 얼굴이 처연하고 애처로웠다. 분명 연기인 걸 아는데 니콜라스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니콜도 제대로 몰입했네... 의주가 테이블 밑에서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니콜라스는 그래도 이번엔 대사를 놓치지 않고 상황을 이어갔다. 미안. 난 우리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어. 정말 미안해. 의주가 숨을 고르곤 굳게 마음먹은 듯 단단한 눈빛으로 물었다. 지금부터라도 생각해 볼 마음은 없어? 니콜라스가 결국 시선을 피하고야 만다.


“미안. 의주는 나한테 진짜 너무 소중한, 좋은 친구야. 나는… 의주가 없는 미래를 상상해 본 적 없어.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래... 알겠어. 고마워.”

“...진짜 고마워?”

“이럴 때 그런 거 묻는 거 아니야, 니콜.”


의주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마른 세수를 하는 의주를 바라보며 니콜라스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영원과도 같은 찰나가 흐르고 의주가 고개를 들었다. 온화한 얼굴이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니콜라스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니콜라스, 잘하는데? 나랑 같이 연기해도 되겠다. 헉. 진짜로?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잘했어. 의주가 씩 웃으며 니콜라스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대사 놓칠 뻔한 것만 빼고. 니콜라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 그거는.


“그거는? 무슨 이유 있었어?”

“그거는. 의주가 너무 연기를 잘해서... 나도 모르게. 의주 완전 배우 다 됐네. 대단하다.”

“그럼 내가 배우지. 지금 몇 년을 활동했는데. 너 이럴 때만 내가 배우로 보여?”

“아니이… 그런 건 아니고.”


니콜라스가 부끄러운 듯 코를 막 찡긋거렸다. 꼭 어린아이처럼 솔직한 표정 변화에 의주가 결국 두 손 들고 항복했다. 알겠어. 그만 놀릴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들뜬 얼굴의 니콜라스가 종알거렸다. 근데 의주 진짜. 처음 나왔던 영화에선 완전 어색했었는데 지금 엄청 늘었어. 의주도 알지? 나 진짜 의주한테 고백받은 것 같아서 좀 설렜잖아. 니콜라스의 뺨이 붉었다. 의주가 장난스럽게 니콜라스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았다. 진짜 설렜나 봐? 니콜 너 지금 얼굴 엄청 빨개졌어. 어?


“진짜? 진짜 그래?”

“그럼 가짜겠어? 거울 보고 올래?”

“의주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아. 들켰다.”


좀 전까지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기하던 배우 변의주는 어디로 갔는지, 티 나게 과장된 태도로 놀라는 시늉을 하는 의주를 니콜라스가 째려보았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니콜라스는 니콜라스대로 해외 투어를 돌고 오느라 바빴고, 의주는 의주대로 영화 막바지 촬영에 임하느라 바빴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던 게 아마 두 달 전이었던가. 물론 의주가 아이돌을 포기하고 배우의 길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니콜라스와 함께 데뷔를 준비하던 회사를 나갔을 때에 비하면 자주 보고 있긴 하지만. 아. 의주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냈다. 오랜만의 만남이다. 굳이 좋지 않은 기억에 잠기고 싶지 않았다. 주주 뭐 하는 거야. 의주의 이상행동을 보며 니콜라스가 킥킥거렸다. 의주가 표정을 갈무리하며 물었다. 니콜. 시간 괜찮아? 응? 아마도?


“그럼… 자고 갈래?”

“안 그래도 의주 집에서 자고 가려고 왔는, 아. 오늘?”

“응. 싫으면 그냥 자고 가도 괜찮아. 난 상관없어.”

“에. 거짓말. 의주 원래 먼저 제안 잘 안 하면서.”

“알면 좀 넘어가 주지.”

“귀여우니까! 귀여워서 그랬어. 알았어, 의주. 나 그럼 얼른 씻고 올게. 조금만 기다려?”


니콜라스가 음흉하게 웃으며 놀리려 드는걸, 의주는 얼추 니콜라스가 좋아할 법한 반응을 보여주며 대처했다. 마침내 욕실로 향한 니콜라스가 신이 나서 샤워하는 물소리를 들으며, 의주가 다시금 마른세수했다. 아까가 연기였다면 지금은 진심이다. 그래. 이 정도면 됐지. 연습생 시절 땀내 나는 남자아이들이 모여 살던 비좁은 숙소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됐다. 아직 멤버들과 함께 숙소 생활을 하는 중인 니콜라스가 특히 더 좋아한다는 점은 조금 더 플러스 점수를 줄 수 있고. 누구 눈치 볼 필요 없이 둘이서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도 좋다. 그러니까 이 정도면 됐다. 진심이다.


니콜라스는 모를 것이다. 조금 전의 의주가, 단지 대본을 읽은 게 아니라는 것을. 어쩌다 보니 그런 대본을 받아 니콜라스와 함께 리딩해본 거긴 하지만 사실 그 말들엔 일정 부분 의주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알 필요도 없다. 아니, 몰라야만 한다. 그래야 지금 같은 관계라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다 씻었는지 니콜라스가 한껏 촉촉해진 얼굴을 빼꼼 내밀고 속삭였다. 의주 나 옷 좀. 의주가 웃으며 다가갔다. 필요 없지 않아? 으응? 그렇게 빨리? 의주 그렇게 급,


“으아, 주주!”

“그거 진짜 오랜만에 듣는다. 좋네.”

“오늘 주주 진짜 이상하다… 알겠어. 내가 오늘 많이 불러줄게.”


니콜라스를 이렇게 들어보는 건 또 얼마 만의 일이더라. 빡빡했던 스케줄 때문인지 살이 좀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주주, 는 급한 마음에 튀어나왔을 어릴 적 애칭이다. 틈을 놓치지 않고 목덜미를 깨물었더니 니콜라스가 꺄르르 웃었다. 죄책감 같은 건 버린 지 오래였다. 항상 뻔뻔하게 굴었다. 니콜라스는 의주가 다른 마음이라는 걸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 의주가 니콜라스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자세가 안정되기 무섭게 목에 팔이 감겨왔다.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깔고 맞물려오는 말랑한 입술을 느꼈다. 이대로 세상이 멈추어도 좋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


“아이스크림 먹을래?”

“어? 좋아. 무슨 맛?”

“알면서.”


주주 사랑해! 반질반질한 얼굴의 니콜라스가 벌떡 일어났다. 체력도 좋아. 같이 연습생을 하던 시절에도 니콜라스 쪽이 체력이 월등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니콜라스는 매일 운동과 춤 연습을 병행하는 반면 의주는 몸 관리용 운동만 겨우 하는 상황이라서, 체력 차이가 더 극심해졌다. 냉동실을 뒤져 원하던 걸 찾아낸 니콜라스가 히히 웃으며 숟가락을 꺼내왔다. 의주가 괜히 타박했다. 너는 사랑이 쉬워? 니콜라스가 대수롭지 않단 듯 대꾸했다. 에이. 아니지. 의주니까 사랑하는 거지.


“거짓말.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너 사랑하는 사람 많잖아. 내가 너 다른 사람한테 사랑한다는 소리 하는 거 본 것만 몇 번인데.”

“들켰네. 나를 너무 잘 알아.”

“참나…”

“그래서 서운해?”


의주가 흠칫했다. 니콜라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가끔 한 번씩 저렇게 툭 던진 말로 정곡을 찔렀다.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건 직업이 이렇게 되고 일한 게 몇 년이 되니 감정 숨기는 일엔 도가 트였다는 거다. 응. 엄청 서운해. 이럴 땐 좀 장난을 치는 게 낫다. 과장되게 대꾸하니 니콜라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 변의주 짜증 나.


“인터뷰 봤어. 내 얘기 했더라.”

“어. 봤어? 미안. 미리 얘기했어야 되는데.”

“아냐. 뭐 다들 아는 일이고. 딱히 비밀도 아니잖아.”

“그래도.”

“좀 놀라긴 했지. 변의주 배우는 같이 연습생 시절을 보냈던 친구예요. 제일 힘들었을 때 같이 먹고 자고 고생했어서 아직도 보면 좀 애틋해요. 지금도 가끔 집에 놀러 가서 자고 오는데 엄청 성공했더라고요. 집이 좋아요. 하하.”

“아 뭐야. 그걸 다 외웠어? 부끄럽게.”

“외우는 게 습관이 돼서. 아무튼 난 니가 나랑 옛날에 잤고 지금도 잔단 얘기를 인터뷰로 할 줄은 몰랐어.”

“그거야… 야. 그걸 어떻게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

“그런 뜻 맞잖아.”


아니거든? 사실이잖아. 내가 틀린 말 했어? 아이씨. 야. 변의주. 아무튼 아니거든? 결국 목소리를 높이고야 만 니콜라스를 보며 의주가 키득거렸다. 딸기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퍼먹던 숟가락을 깨문 채로 의주를 노려봤다. 의주가 실실 웃으며 인터뷰 내용을 다시 읊었다. 제일 힘들었을 때 같이 먹고 자고 고생했어서 아직도 보면 좀 애틋해요. 니콜 내가 애틋해? 야! 너 진짜. 계속 놀릴래? 응. 재밌는데. 씩씩거리는 얼굴이 마냥 귀여웠다.


됐어. 너랑 말 안 해. 흥, 하고 고개를 돌린 니콜라스가 아이스크림을 아예 제 쪽으로 가져다 놓고 퍼먹기 시작했다. 안 뺏어 먹을 건데. 심통 난 다람쥐처럼 구는 니콜라스가 귀엽고 애틋했다. 사실 난 네가 먹는 모습만 봐도 좋은데. 넌 모르지. 아이스크림을 푹푹 퍼먹더니, 달달한 게 들어갔다고 기분이 풀린 모양인지 니콜라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손가락을 내민다. 그만 놀린다고 약속하면 용서해 줄게. 나 용서 안 받아도 되는데? 야 변의주. 알겠어. 약속할게. 의주가 웃으며 손가락을 걸었다. 너도 먹어. 특별히 용서해 주는 거야. 그제야 니콜라스가 아이스크림을 테이블 가운데로 가져다 놓았다. 의주가 웃음을 참으며 숟가락을 움직였다. 달고 차갑다. 머리가 쨍했다.


“그치. 맛있어. 오랜만에 단 거 먹는 거야.”

“회사에서 못 먹게 해? 너 이제 그럴 연차 아니잖아.”

“내가 참았지. 그래도 외국까지 가는데 예뻐야 되잖아.”

“헐. 니콜 완전 프로네?”

“뭐 이런 걸로.”


으쓱거리는 니콜라스의 표정이 사랑스러워서, 의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마터면 니콜라스에게 넋 놓고 웃는 모습을 보일 뻔했다. 애써 표정을 관리한 의주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래서. 재밌었어? 이번엔 대만도 갔다 왔다면서. 아 맞아. 주주 선물도 사 왔는데! 다음에 가져와야겠다. 깜빡했어. 뭐야. 어딨어. 아아 미안해애. 이럴 때만 꼭 깜빡하더라. 기억력도 좋은 애가. 에에. 주주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였을걸? 말은 잘해. 참.




***


눈을 떴을 때 니콜라스는 없었다. 의주의 품 안엔 안고 있던 따끈하고 단단한 몸 대신 푹신하고 길쭉한 바디필로우가 안겨져 있었다. 아... 잠시 중얼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탁자 위의 메모는 익숙한 글씨체였다. 스케줄 때문에 먼저 가. 다음에 또 봐. 연락할게. 짧은 쪽지 옆에 시무룩한 얼굴의 고양이 그림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니콜라스는 잠이 많아서, 같이 살 땐 거의 항상 의주가 먼저 일어나는 편이었다. 최근에 와서는 같이 잠들면 니콜라스가 먼저 일어나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의주는 촬영이 끝나면 그래도 한가해지는 편이지만 니콜라스는 활동이 끝나고도 행사며 해외 투어를 도느라 쉬는 날이 거의 없는 탓이었다. 개인 활동도 종종 하고.


아침으로는 간단히 토스트를 만들어 우유를 곁들였다. 촬영이 다 끝난 게 얼마 전의 일이고 개봉 날짜가 확정되면 아마 홍보를 위해 여기저기 나가게 될 것이다. 이번에 촬영한 영화는 규모가 꽤 컸다. 한때 로맨스 코미디의 퀸이라고 불렸지만 결혼으로 한동안 작품 활동을 쉬었던 인기 여배우의 복귀작이었다. 전작에서 반응이 좋긴 했지만 남자 주인공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게 아직도 조금은 얼떨떨했다. 감독도 천만 영화를 두 편이나 연출한 감독이고 여주인공의 이름값도 있으니 영화는 잘될 것이다. 토스트를 천천히 씹으며 의주는 앞으로의 일정을 대충 예상했다. 지금 주어진 잠깐의 휴식이 끝나면 숨 쉴 틈 없이 휘몰아칠 게 뻔했다. 아, 더 바빠지기 전에 한 번 더 만나야겠다.


[주주]

[일어났지]

[내 memo 봤지]

[왜 연락 안해]


풉. 설거지하던 도중이었다. 옆에 세워뒀던 핸드폰에서 카톡 미리보기가 계속 업데이트되는 걸 보며 의주가 키득거렸다. 설거지할 양이 많진 않아 다 하고 답장하려고 미뤄두니 니콜라스가 심통이 난 듯 화난 얼굴의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의주 또 미리보기로 보고 답장 안 하고 있지. 느긋하게 장갑을 벗은 의주가 답장했다. 설거지하고 있었어. 미안. 곧장 전화가 걸 려왔다.


"주주 언제 일어났어?"

"얼마 안 됐어. 조금 전에 겨우 아침 먹었어. 니코는? 뭐 촬영하러 간 거야?"

"아, 나 오늘 오디션. 잘 되면 나도 드라마 할 수 있어. 조연이지만."

"우와. 대단하다."

"영혼 없는데."

"야. 내가 무슨 로봇이야?"


완전 영혼 있었거든? 에, 거짓말. 니콜라스가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그런데 안 바빠? 지금 이렇게 통화해도 돼? 나 잠깐 대기하고 있었어. 오래는 통화 못 할 거야. 근데 왜 전화까지 했어. 바쁜데. 아이, 의주 진짜. 눈치 왜 그렇게 없어. 내가? 그럼 나겠어? 당연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당당한 니콜라스의 목소리에 의주가 잠시 말문을 잃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너 그런 말 해도 돼? 주변에 사람 없어? 겨우 대답한 말은 제 성에도 안 차는 말이었다. 니콜라스가 뭐 어때, 나랑 너랑 친한 거 다 아는데. 태연하게 대꾸했다. 의주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투덜거렸다. 니콜라스, 제발.


"넌 좀 조심할 필요가 있어."

"내가 뭘. 아무튼 의주, 내일 저녁에 시간 있지."

"내일 저녁? 응. 괜찮을 것 같은데."

"좋아. 오랜만에 데이트하자. 집 앞으로 갈 거니까 예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뭐? 갑자기?"

"응. 여섯 시? 더 늦어지면 전화할게. 아, 나 이제 가봐야 돼. 끊을게!"


완전히 제멋대로다. 그런데 그게 싫지 않다. 니콜라스에게 휘둘리는 일은 니콜라스를 안 이래로 항상 즐거웠다. 전화가 끊긴 핸드폰 화면을 멍하게 들여다보던 의주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바쁜 애가 어떻게 또 시간을 만들었대. 제 스케줄은, 음. 매니저 형도 당분간은 쉬라고 했으니 내일 저녁이면 문제없을 거다. 그럼 내일은 그전까지 운동도 잠깐 다녀오고, 책도 한 권 읽고. 그래야지. 니콜라스의 기준으로 예쁘게 입은 것처럼 보이려면 뭘 입고 있어야 될까. 나 마치 여우가 된 것처럼 설레. 네가 내일 저녁에 온다고 해서 나는 지금부터 행복해졌어. 의주가 작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연습생이었던 시절, 언젠가 니콜라스와 같이 평가를 진행했던 노래였다.




***


"저기 앉아서 먹을까? 오랜만에."

"그래. 옛날 생각나네."


한강에 왔다. 평일이라 그나마 사람이 없는 날일 텐데도 의주와 니콜라스를 알아보는 사람이 몇 있었다. 수군거리는 소리와 은근히 향하는 카메라들. 둘 다 어느 정도 유명해지고서부터는 보통 의주의 집에서 만나는 편이었지만 가끔 이렇게 밖에 나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싸인이나 사진 요청은 항상 있는 일이었다. 그나마 오늘은 니콜라스가 검은 머리에 무난한 패션을 입고 와서 시선을 덜 끄는 편이었다. 컨셉상 빨간 머리나 백발처럼 눈에 확 띄는 머리를 하고 있을 땐 조금 더 심했다.


그나마 사람들이 좀 없는 쪽에 자리를 잡았다. 니콜라스가 돗자리를 펼치는 동안 의주는 음식을 들고 얌전히 기다렸다. 전에 니콜라스가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 몰래 먼저 한 입 먹었다가 불호령이 떨어졌던 게 기억나서 의주가 잠시 킥킥거렸다. 대번에 니콜라스가 고개를 번쩍 들어 의주를 쳐다봤다. 의주 왜 웃으셨어? 응? 아냐. 안 웃었어. 나 다 들었는데 거짓말하네. Bad Juju. 아니... 별 건 아니라 그냥 옛날 생각나서 그랬어. 의주가 머쓱한 얼굴로 변명하는 걸, 니콜라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봤다.


"다 했으면 이제 앉을까? 얼른 먹자. 배고프다."

"하. 알았어. 내가 한 번 넘어가 줄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 여전히 못마땅한 듯 샐쭉한 눈초리다. 의주가 모르는 척 자리를 잡고 들고 온 것들을 내려놓았다. 전에 왔을 땐 라면이랑 핫바 정도나 겨우 샀는데 이젠 훈제 삼겹이랑 닭꼬치랑 타코야끼까지, 차린 음식이 푸짐해졌다. 그래도 라면은 샀지만. 우리 이거 다 먹을 수 있어? 왜? 의주 다이어트 해? 니콜라스가 해맑게 눈을 깜빡거렸다. 의주가 이번엔 티 나게 웃음을 터트렸다. 니콜라스가 대번에 씩씩거렸다. 주주, 자꾸 나 놀려! 지금 나 많이 먹는다고 비웃은 거지! 의주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니야.


"진짜 맹세. 안 그랬어."

"웃지나 말고 말하지?"

"나 지금 웃고 있어?"

"주주. 너 대체 어떻게 연기를 해?"


와. 방금 그거 좀 쎘어. 알아? 몰라. 주주가 연기 못 했어. 잠깐의 투닥거림이 지나가고 젓가락을 들었다. 라면 아직 안 뿔었네. 맛있다. 천천히 먹어. 너 점심은 먹고 왔어? 주주랑 맛있는 거 먹을 거니까 점심엔 닭가슴살 먹었어. 의주는? 나도 간단하게 먹고 왔어. 그 이후론 둘 다 별말 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볼이 빵빵해지도록 입안 가득 음식을 집어넣고 오물거리는 니콜라스의 얼굴이 제법 진지했다.


잘 먹었다. 둘이서 다 먹을 수 있는 양일까 걱정한 게 무색하게 깔끔하게 해치웠다. 삼겹살은 좀 느끼했어. 다음엔 먹지 말자. 그래. 쓰레기를 정리하는 손이 분주했다. 쓰레기를 한 곳에 다 모아놓곤 니콜라스가 벌렁 드러누웠다. 다 했으니까 이제 의주가 버리고 와. 뭐? 나 혼자? 왜애. 한 사람은 자리 지켜야지. 얼른 갔다 와. 근데 왜 나야. 가위바위보 해. 나 외국인이라서 어디다 버리는지 잘 몰라. 주주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뭐래... 한국에만 몇 년을 살았으면서."

"일만 해서 몇 년 살았어도 의미 없어."

"그러는 것치고 한국말을 너무 잘하시는데요, 니콜라스 씨."

"아이씨. 중국어 써줘? 영어 해? 얼른 갔다 와."


결국 인상을 확 찡그린 니콜라스의 일갈에 의주가 순순히 항복했다. 니콜라스가 히히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의주 올 때 아이스크림! 아까 그 철판 아이스크림 궁금했어. 야. 그거 여기서 꽤 멀리 있었잖아. 아 얼른 갔다 와. 난 딸기로. 그래, 난 쉬다 나왔고 넌 일하다 왔으니까, 내가 한 번 봐준다. 아싸. 주주 섹시해. 뭐 이런 걸로 섹시하대. 화나진 않았지만 버럭하는 의주를 보며 니콜라스가 즐거워했다.


니콜라스의 소원대로 아이스크림을 사서 돌아갔을 때 니콜라스는 팔자 좋게 늘어져 눈을 감고 있었다. 멀찍이서 니콜라스를 흘끔거리며 핸드폰을 들고 있는 여자아이들이 몇 보였다. 니콜라스를 알아보긴 했지만 저렇게 쉬고 있는 걸 건드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의주가 니콜라스의 옆에 앉았다. 의주가 온 걸 눈치챌 법도 한데 요지부동인 걸 보면 깜빡 선잠이라도 든 듯했다. 의주는 가만히 니콜라스가 깨지 않게 숨을 죽이고, 고른 숨을 색색 내뱉고 있는 니콜라스의 얼굴을 구경했다. 평화롭다. 그 어린 날 의주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앳된 얼굴이 겹친다.


의주가 고개를 조금 숙인다. 니콜라스의 얼굴이 가까웠다. 이대로 거리를 좁혀 니콜라스의 입술 위로 입술을 맞대고 싶단 생각을 했다. 보는 눈만 아니었더라면 정말 그렇게 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니콜라스만 있을 땐 없던 사람들도 의주를 알아본 듯 슬그머니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의주가 니콜라스의 뺨에 아이스크림 컵을 가져다 댔다. 니콜라스가 차가움에 화들짝 놀란 듯 눈을 번쩍 떴다. 뭐야! 뭐긴. 아이스크림 배달 왔지. 의주가 몸을 일으키며 능청을 떨었다.


"주주 거는? 내 것만 사 왔어?"

"아. 뺏어 먹으려고 했는데."

"뭐?"

"농담이니까 그렇게 째려보지 마."

"아니야. 나도 장난이야. 같이 먹어."


니콜라스가 배시시 웃었다. 앙 물고 있던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조금 퍼서 의주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어. 왜? 나랑 같이 숟가락 쓰는 거 별로야? 아니. 너랑 나랑 더한 걸 몇 번을 했는데 새삼스럽게 그런 게 별로겠어. 야! 밖에서 그런 말 하면 어떡해! 괜찮아. 안 들렸을걸. 그리고 들리면 뭐 어때. 넌 인터뷰로도 그랬잖아. 변의주 배우는 같이 연습생 시절을 보냈던 친구예요. 제일 힘들었을 때 같이 먹고 자고 고생했어서 아직도 보면 좀 애틋해요. 지금도 가끔 집에 놀러 가서 자고 오는데 엄청 성공했더라고요. 아 진짜. 인터뷰 괜히 했네. 암기력 그런 거로 써먹지 마. 니콜라스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삐죽거렸다. 알았어. 미안해. 의주가 잽싸게 아이스크림을 떠서 니콜라스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니콜라스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받아먹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나서, 니콜라스는 의주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동그란 머리통이 의주의 허벅지를 조금은 아프게 짓눌렀다.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너 아까도 자고 있더니. 많이 피곤했어? 다정한 목소리에 니콜라스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조금?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많이는 아니고. 그럼 다음에 만나자고 하지. 난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하긴 니가 더 바쁘니까 그렇긴 해. 그런 것도 있는데. 그것만 있는 건 아니고. 니콜라스가 잠시 망설이더니 의주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주주. 응, 니콜.


"주주. 오늘 어땠어?"

"음. 옛날 생각도 나고. 좋았지. 생각보다 시끄럽지도 않고."

"그게 다야?"

"왜? 뭐 있어?"

"없지 않지."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니콜. 의주가 니콜라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니콜라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주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난 설렜어. 으응? 난 의주 보러 와서 설렜다고. 의주랑 같이 있어서... 심장이 막, 뛰었어. 의주의 손이 멈칫했다. 의주가 아까 내 얼굴 구경했던 거 알아. 오늘만 그런 것도 아니잖아. 니콜, 지금. 니콜라스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의주.


"오늘 이 얘기 하려고 만나자고 했어. 의주만 나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라고."

"니콜, 나는, 그게."

"나도 알아. 의주가 왜 고백 안 했는지, 내가 왜 몰라. 우리 지금 여기서 키스라도 하면 난리 날 거야. 그치."


의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니콜라스가 눈을 감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이렇게 엉망인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게 참 다행이다. 머리가 새하얘져서 그대로 굳어있는 의주에게 니콜라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폭탄과도 같은 공격을 계속했다. 확실히 말할게. 나도 의주 좋아해. 이제 애매한 사이 그만하고 싶어. 물론 우리 직업 때문에라도 완전히 다 알리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리끼리는 솔직해지자. 니콜라스가 천천히 눈을 뜬다. 어떻게 생각해? 시선이 마주친다.


그 순간. 눈이 마주친 그 짧은 순간. 니콜라스와 의주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더 많아져 있음을 의주는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거리도 꽤 있고 의주와 니콜라스의 목소리는 둘만 들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누군가 입 모양이라도 알아챘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두 손으로 저와 니콜라스의 얼굴을 가린 건 정말 최소한의 방지책이었다. 충분하지 않으리란 건 알겠지만, 대한민국의 나이브함이 둘을 보호해 주길 기원하며. 결정적인 사진만 찍히지 않으면 어떻게든 우겨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서, 의주는... 니콜라스의 콧등에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빠르게 떼어냈다. 둘만 있을 땐 이보다 더한 것도 해 봤는데 이게 뭐라고 부끄러워지는지. 마찬가지로 얼굴이 빨개진 니콜라스와 눈이 마주쳤다. 주주. 응. 여기서 뽀뽀하면 어떡해... 저기서 다 찍고 있는데... 괜찮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 안 할 거야. 아니라고 하면 돼.




***


의주의 생각은 적중했다. 그날의 사진은 급속도로 퍼져나갔지만 두 사람이 그 순간 사랑을 확인했다고까지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니콜라스 씨는 저의 오랜 친구예요. 저도 촬영이 끝나고 니콜라스도 투어가 끝난 덕분에 오랜만에 둘이 시간이 맞았어요. 옛날 생각 겸 어렸을 때 같이 갔던 한강에 놀러 갔는데 바람이 엄청 불더라고요. 니콜라스 눈에 뭐가 들어가서 봐주려고 잡았는데 사진이 그렇게 찍혀버려서, 저희도 보고 엄청 놀랐어요. 신작 홍보를 위한 인터뷰 도중 말이 나온 탓에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의주에게 그 이상의 의심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 놀림거리가 되긴 했지만.


오히려 니콜라스의 회사 쪽에선 상황을 반겼다. 의주가 최근 작품 성적도 좋고 인기를 끌 요소가 다분한 신작 개봉을 앞둔 배우이기 때문이다. 원래도 아이돌 산업에 비즈니스 게이 퍼포먼스는 불가피했으니 그런 쪽으로의 거부감도 없었고. 홍보가 되는 걸 마다하지 않고 마케팅으로 쏠쏠하게 써먹었다. 그러니 다른 건 문제가 될 게 없었다. 두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그랬는데. 지금 의주는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힌 상태다. 니콜라스와 마음을 확인했고, 주변에서도 딱히 문제 삼지 않았으니, 다 잘될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몸을 섞은 것도 셀 수 없이 많았고.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왔으니까, 당연히 연애도 순탄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니콜라스의 저 차가운 얼굴. 분명 우리 조금 전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왜지. 왜 니콜라스가 기분이 안 좋아졌을까.


"니코올... 왜 화났는지 얘기라도 해주면 안 돼?"

"아닌데? 나 화 안 났어. 의주 걱정 안 해도 돼."

"거짓말... 내가 널 모를 리가 없잖아."

"의주가 날 모를 리가 없어서 화났다고 생각했는데 화난 이유는 모르겠다고? 의주, 앞뒤가 안 맞잖아."


그야 니가 지금 날 의주라고 부르고 있잖아. 사귀기로 한 이후로 니콜라스는 의주를 항상 주주, 하며 달콤하게 부르곤 했다. 의주가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퍽퍽 두들겼다. 니콜라스 앞에 거울이라도 가져다 놔 주고 싶다. 어떤 표정인지 보여주지 않는 이상 니콜라스는 인정하지 않을 태세였다. 지금 네 주변에서 찬 바람이 불어, 니콜. 의주가 울상이 된 채 니콜라스의 팔을 붙들었다. 니콜, 나 진짜 한 번만 알려주면 안 돼? 내가 앞으론 진짜 신경 쓸게. 응? 니콜라스의 싸늘한 얼굴은 의주가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속이 탔다. 한참을 달랜 끝에 어렵게 니콜라스의 입을 열었다. 사실 의주가 잘못한 건 아니야.


"의주는 잘못 안 했어."

"근데 왜. 니콜 지금 화 났잖아."

"화는 안 났다니까. 화난 게 아니고 나는."

"응. 니콜."

"난 그냥... 보기 싫어서 그랬어."

"응? 뭐를?"


니콜라스는 말 대신 마우스를 움직여 영상을 몇 분 전의 장면으로 되돌렸다. 화면 속 의주가 상대역의 여배우와 다정하게 스킨쉽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둘이 의주의 작품을, 니콜라스의 뮤비 등을 같이 모니터링하는 일이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둘이 3년 동안 같이 데뷔를 준비했던 회사에서 둘 다 데뷔하지 못했을 때, 니콜라스는 다른 회사로 이적해 다시 아이돌을 준비했고 의주는 아이돌을 포기하고 잠시 쉬다가 배우로 전향했다. 먼저 데뷔한 건 당연하게도 니콜라스였다. 의주가 단역 신세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분량이 있는 조연을 꿰차기 시작하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회사가 갈린 뒤 끊어졌던 연락은 의주가 처음으로 조연으로 참여한 영화가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면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론 매번 작품이 나올 때마다 모니터링을 함께 했다. 가끔 시간 여유가 될 때면 둘이 다시 만나기 전 찍었던 작품들을 다시 돌려보기도 했다. 몸을 맞대기 시작하고도 모니터링은 계속됐고, 그 중에선 지금보다 훨씬 수위 높은 스킨쉽을 촬영한 작품도 있었다. 그런 걸 다 같이 봤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정도로... 고작 고백한 뒤 손을 잡는 장면 정도로 니콜라스가 불쾌하게 느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깨달음을 얻은 의주가 잠시 굳었다. 니콜라스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조금 풀어진 얼굴로 저도 당황스럽다며 중얼거렸다. 짜증 나. 근데 의주 잘못 아닌 거 나도 알아.


"나도 이렇게까지 기분 나쁠 줄 몰랐어. 의주 미안해하지 마."

"아냐. 내가 생각했어야 됐어. 미안해."

"미안해하지 말라니까... 그렇다고 바로 손잡는 거야?"

"응... 저런 거 신경 쓰지 말라고. 저건 일이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고. 난 지금 니콜라스랑 손 잡고 있는 게 더 좋아."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니 니콜라스의 표정이 천천히 돌아온다. 아, 지금은 부끄러운 얼굴.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삐죽거리는 저건 확실히 알고 있다. 기분 좋아하는, 부끄러워하는 표정이다. 의주가 빙그레 웃으며 니콜라스의 허리를 감쌌다. 니콜라스, 미안해서 애교부리는 거야? 내가 애교를 부렸다고? 언제? 지금. 너 입 그렇게 하는 거 되게 귀엽잖아. 내가 그거 귀엽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무슨 소리야 주주. 이건 애교가 아니라 표현이거든. 그래? 내 눈엔 애교 같은데. 참나. 의주 그거 그냥 콩깍지야.


"아무튼. 다시 틀어도 돼?"

"...꼭 이 장면에서?"

"아니. 아니지. 애초에 여기 내가 튼 장면도 아니잖아."


왜 그래 진짜. 그냥. 몰라. 입술을 삐죽거리던 니콜라스가 영상을 다시 마지막으로 봤던 곳이 되게끔 되돌렸다. 계속 보자. 근데 저런 장면 나오기 전에 나한테 먼저 알려줘야 돼. 알겠어. 미안해. 나도 찍은지 좀 된 장면이라 까먹고 있었어. 둘이 모니터링하고 있던 건 6개월 전 방영한 드라마였다. 촬영 시점으로 따지자면 그것보다도 더 오래된 장면이었다. 방영될 당시엔 당연히 본방을 챙겨 봤는데, 둘 다 바빴던 탓에 같이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화면이 다시 돌아가자, 니콜라스의 눈이 진지해진다.


다행스럽게도 그 이후론 딱히 신경 쓸 만한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 조금 안도하면서, 의주가 니콜라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댔다. 곧 컴백할 앨범의 컨셉트 포토 촬영을 위해 니콜라스도 얼마 뒤 염색할 예정이라고 했다. 염색 언제 한다고? 다음 주. 정확히는 모르겠어. 이번엔 핑크색이래. 솔직히 좀 아쉬운데. 지금 머리도 예쁘고 잘 어울리고. 근데 니콜라스의 들뜬 얼굴에 대고 아쉽다는 소리를 할 순 없었다. 의주가 작게 중얼거렸다. 잘 어울릴 거야, 진짜. 진짜? 응. 핑크색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아. 흑발을 볼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게 아쉬운 것과는 별개로 분홍 머리의 니콜라스를 보는 게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기분이 좋은 듯 입술을 오물거리던 니콜라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 잘 안 어울리는 색깔 있나? 의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니콜라스는 얼굴이 하얘서 웬만한 색이 다 잘 받았다. 염색할 일도 많지 않지만 염색해 봐야 갈발, 어쩌다 어두운 적발이 한계인 저와는 달랐다. 짧은 고민이 끝나고 산뜻한 대답이 떨어졌다.


"너 다 잘 어울리지."

"갑자기? 갑자기?"


아, 또 입술 삐죽거린다. 기분 좋은 티를 내는 니콜라스는 언제 봐도 사랑스럽다. 의주가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싸늘하게 굴었던 니콜라스는 다른 세계의 사람인 것처럼 금세 표정이 풀어진 니콜라스가 의주의 품에 폭 안겼다. 아. 좋다. 의주 방금 그 말 진심이지? 그냥 하는 말 아니지? 니콜 나 마음에 없는 말 못 하는 거 알잖아... 다 진심이지. 피부도 하얗고 이목구비도 화려한 니콜라스는 확실히 어떤 스타일링이든 다 잘 어울렸다. 의주에게 걸쳐놓으면 과하다 싶을 옷도 니콜라스가 입으면 패션이었다. 아이돌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니콜라스 아닐까.


부끄러운 말이지만 잠시나마 그 사실에 질투했던 시절이 있다. 아이돌 연습생 시절의 의주는 뭐든 잘 어울린다는 평의 니콜라스와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곤 했다. 컨셉이 너무 한정적이다, 교복은 잘 어울렸는데 정장은 아빠 옷 훔쳐 입은 애 같다, 무난한데 너무 평범한 느낌이다, 등등. 결국 그 회사에선 의주도 니콜라스도 데뷔하지 못했지만, 그땐 그 평가가 그렇게 간절했어서, 의주는 니콜라스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면서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은은한 열등감을 가지고 살았다. 평범함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단 걸 알게 된 건 배우가 되면서였다. 뭐든 그릴 수 있는 도화지 같은 배우, 다음엔 어떤 걸 보여줄지 기대가 되는 배우라는 호평. 그러니 지금은 니콜라스에게 질투를 느끼지도, 아이돌을 포기하겠다 마음먹었던 순간을 후회하지도 않지만, 조금 돌아온 끝에 맞는 자리를 찾아온 거라고 생각하지만.


"니콜."

"으응."

"내가 그때 포기 안 하고, 너랑 같은 팀으로 데뷔했으면 어땠을까?"

"에, 갑자기?"

"그냥. 너 핑크색으로 염색한다니까 생각났어. 우리 데뷔할 뻔했을 때 나도 핑크색 머리 했었잖아."

"아... 맞네. 그랬지."


그냥, 그런 생각은 든다. 그때 포기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니콜라스랑 같이 회사를 옮겨 데뷔에 성공했으면 어땠을까. 혹은 그때 그 회사에서 운 좋게 한 번에 데뷔에 성공했으면 어땠을까. 처음 해 본 탈색은 머리가 따끔거리고 아팠다. 완성된 결과물을 보고 어색함에 몇 번이고 거울을 들여다봤던 기억이 있다. 사진까지 찍고 나서 엎어졌었는데 그때 그 분홍 머리로 니콜라스와 함께 데뷔했으면 어땠을까. 지금에 와선 별 의미 없는 가정들일 뿐이지만. 잠시 고민하던 니콜라스가 대답했다. 아마 우리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었겠지. 맞는 말이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다른 사람들 눈치 엄청 봐야 했을 거고."

"그것도 맞네."

"아마 사귀기 힘들었겠지?"

"...그런가?"

"아마 의주 날 안 받아줬을 거야."

"아니거든? 왜 그렇게 확신을 해. 서운해."

"의주가 서운할 줄도 알아?"


야. 정색하고 노려보는 의주에게 니콜라스가 보란 듯이 키득거렸다. 왜. 의주 감정 없잖아. 아, 진짜. 나 로봇 아니라고오. 옷자락을 붙잡고 흔드는 남자친구의 목소리가 귀여웠다. 애교로 넘어가려는 건 의주면서 맨날 나한테만 애교 많다고 해. 어이없어. 뭐? 이게 무슨 애교야. 나도 똑같이 생각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치는 니콜라스를 보곤 결국 표정을 풀고야 만다. 스물다섯 남자 둘의 다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유치한 말싸움이었다. 우리 뭐 하다가 또 이 얘기 했더라? 몰라. 의주가 갑자기 아이돌 했으면 어땠을 것 같냐고 물어봤다가 이렇게 됐어. 기억하면서 뭘 모른대. 야. 또 의미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튼. 우리가 사귀긴 힘들었겠지만 의주, 아마 잘했을 거야."

"갑자기? 너무 좋은 말만 안 해줘도 돼. 나도 엄청 후회하고 있거나 그러진 않아. 지금도 만족하고."

"아냐. 이건 진짜. 내가 5년 일하면서 겪은 거 생각하면 그래. 의주는 성실하잖아. 여기도 똑같아. 성실한 사람들이 잘해."

"...그래?"

"응. 이건 아이돌 니콜라스가 하는 말. 의주 애인 니콜라스 아니고."

"어... 고마운데. 그런 말은 안 해도 돼."

"응? 뭐가?"

"그런 말 안 해도 믿을 거니까... 내 애인 아니고 그런 말 하지 마."


니콜라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의주, 지금 뭐라고 하셨어? 아 몰라. 부끄러우니까 물어보지 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의주가 손으로 마구 부채질을 했다. 덥다. 에어컨 틀까? 신난 니콜라스가 의주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종알거렸다. 그랬어, 의주, 애인 아니라고 해서 서운하셨어? 의주 완전 Baby네? 애교 많네? 그만 좀 해... 왜애. 좋아서 이러는 건데. 난 원래 연애하면 이렇게 해. 그런 말도 하지 마. 난 니가 처음인데. 어? 니콜라스가 멈칫한 틈을 타 의주가 붉어진 얼굴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난 니가 처음이라고. 니콜라스, 니가 내 첫사랑이야. 의주...


"그동안 연애해 본 적 없어? 안 했어?"

"안 했지! 당연히, 너랑 그런... 거 하면서 누굴 만나, 내가."


허어. 니콜라스가 입을 틀어막았다. 의주가 니콜라스를 째려보며 말했다. 알아. 넌 연애한 거. 이제 와서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에... 뭐라고 해도 되는데."

"...어?"

"그냥. 그렇다고."


할 말 다 해놓곤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는 니콜라스를 의주가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니콜라스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아. 야! 이거 안 놔? 니콜라스가 짜증스럽게 소리 질렀다. 뭐라고 해도 된다면서? 그건 질투해도 된단 뜻이지, 괴롭히란 말은 아니었거든? 난 원래 질투 나면 괴롭히는데. 야. 변의주. 안 되겠다. 진짜 괴롭혀야겠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무릎 밑으로 손을 넣는다. 씩씩대는 니콜라스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어, 지금? 화를 내던 것도 잊은 니콜라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응. 지금 할래. 지금 하자.


"엑. 변태 주주. 어디서 흥분했어?"

"나 지금 섹시 주주 아니고 변태 주주야?"

"...내가 주주를 너무 곱게 키운 것 같아. 주주 입으로 섹시 주주란 말을 다 하고."

"받아들여. 이미 이렇게 돼서 못 물러. 환불 절대 불가능."


으앗, 빠르게 침대로 이동 당한 니콜라스가 얼떨떨한 눈으로 의주를 바라보았다. 픽 웃으며 다가오는 의주의 목을 끌어안았다. 주주, 오늘 계속 이런 생각만 했어? 언제부터? 몰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방금 전이긴 한데. 사실 너 오늘 온단 얘기 들었을 때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에. 진짜 변태 주주네. 응. 니콜라스가 책임져야 돼. 내가 왜? 주주가 알아서... 입술이 맞물리자 자연스럽게 눈을 감은 니콜라스의 목에서 으응, 하고 작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의주의 손이 자연스레 니콜라스의 옷 안으로 들어가 살결을 더듬었다. 흐... 의주가 실눈을 뜨고 니콜라스의 얼굴을 살폈다. 투덜댈 땐 언제고 잔뜩 기분 좋은 얼굴이다. 다른 사람은 저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게 만족스럽다.




***


[내가 희원 씨한테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요?]

[말로는 안 했죠. 근데 보여줬잖아요.]

[…난 그런 적 없어요.]

[거짓말. 지금도 그렇게 흔들리고 있으면서.]

[내가 무슨 흔들린다고 그래요.]

[이리 와요. 다 괜찮을 거예요.]


머뭇거리던 여자가 한 발 가까이 다가서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친다. 남자가 마른 팔로 여자의 몸을 세게 껴안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다.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린 이제 영원히 함께일 거니까… 남자의 눈이 붉게 빛나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난다.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오며 화면이 어두워진다.


니콜라스가 참고 있던 숨을 뱉어냈다. 뭘 숨까지 참고 그래. 진지한 얼굴이 귀여워서 의주는 니콜라스 모르게 웃었다. 어땠어? 소곤소곤 물은 의주에게 니콜라스가 진지한 얼굴로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이따가, 나가서 말해줄게. 영화 다 끝났는데. 니콜라스는 꼿꼿하게 앉은 채 마지막의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니콜라스가 보기엔 어때. 괜찮았어?”

“응. 재밌고 연출도 좋고… 의주 되게 잘생기게 나왔더라. 여기 있는 주주랑 다른 사람이던데?”

“뭐? 야, 니콜라스.”

“한 3kg 빼고 찍었어?”

“귀신이야? 어떻게 그걸 다 알아? 딱 그 정도 유지하면서 찍었어.”

“어쩐지. 내 주주는 저렇게 날카롭지 않은데. 귀여운 동그라민데.”


참나. 의주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니콜라스가 배시시 웃으며 의주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장난이야. 의주 너무 잘생기고 나 좀 질투 나서 나쁘게 얘기했어. 지금은 별로야? 지금도 귀여워. 잘생기진 않았고? 음… 저 때랑 비교하면 별로? 야. 의주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에, 주주 애교 부리는 거야? 이건 애교가 아니고. 아니면? 몰라, 너한테 옮았나 봐. 그럼 애교지. 주주 내가 입술 이렇게 할 때마다 애교라고 하잖아. 그런 거야? 그런 거지.


그래도 첫 주연 영화인데 같이 봐야 되지 않을까 싶어서 어렵게 시간을 맞춘 보람이 있었다. 인파가 몰리는 걸 피해 심야 영화로 예매했더니 스케줄을 소화하고 온 니콜라스가 들어가기 직전까지 피곤함에 꾸벅꾸벅 졸았다. 계속 자는 모습만 보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니콜라스는 영화가 시작되고 의주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부터 완전히 집중해 영화에 빠져들었다. 의주는 뭐, 그 옆에서 니콜라스의 표정을 구경하기나 했다. 모니터링이야 이미 수도 없이 했으니까. 나 스포 없이 보려고 일부러 아무것도 안 보고 왔어. 잘했어.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줬다. 이씨. 니콜라스가 싫은 티를 냈다. 의주가 땀을 삐질 흘리며 변명했다. 지금은 머리 안 하고 온 거잖아. 하고 온 거거든? 난 주주 만날 때 맨날 신경 쓰거든? 아, 미안…


그래도. 의주가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어놔서 화가 나도. 손을 뻗으면 얌전히 잡혀준다. 의주를 흘겨보면서도 깍지까지 단단하게 끼며 손을 꽉 잡는다. 주주, 내가 봐주는 거야. 네에. 고마워요. 처음 만났던 때엔 열여섯이었다. 그 때는 말랑했던 손에 굳은 살이 배겼다. 그렇게 손이 단단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을 지나왔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달리기만 하던 날을 기억한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실패만 한 인간이 되어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던 날을 기억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해 비겁한 방법으로 곁을 지키려 했던 날을 기억한다. 한없이 작고 치졸하고 초라해졌던 날들. 스스로를 사랑해 주고 싶어 수없이 마음을 먹어도 마음처럼 되지 않던 날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목표까지 다다르지 못했어도, 이룬 것 없이 처참하게 실패했어도, 비겁하게 마음을 숨겼어도, 그 모든 날이 의미 없지 않았다는 것을. 결국 그 모든 순간이 모여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언젠가, 괜찮은 척 애를 쓰며 인터뷰했던 날을 기억한다. 저는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자기 자신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돕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말도 안 될 만큼 큰 꿈이라고 해도 좋아요. 그 꿈을 향해 달려가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일을 만나기도 하고 새로운 목표를 갖기도 하죠. 처음 꿨던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꿈이 생기기도 하고요.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계속 나아가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말은 그렇게 그럴듯하게 했지만 사실 그때도 속은 말이 아니었는데. 진짜 그런 사람인 척 연기하며 살다 보니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물론 아직 완벽하진 않다.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단 것도 알고 있고. 그래도. 지금은. 최소한 니콜라스의 옆에서 괜히 저 혼자 작아지지는 않는다. 의주가 깍지 낀 손에 힘을 줘서 니콜라스의 손등을 꾹 눌렀다. 뭐야? 의주를 돌아보는 얼굴이 사랑스럽다. 이제서야, 덧붙일 것 없이 마냥 사랑스러워할 수 있게 됐다. 정말 이제서야. 겨우. 의주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請多多愛我。어? 니콜라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請多多愛我。어… 표정이 왜 그래? 나 발음이 좀 이상해? 많이 연습했는데.”

“뭐야, 주주. 갑자기… 갑자기?”

“그냐앙. 내 진심이야.”

“뭐야. 그럼 나도 我最最最最最最最最最喜歡你. 야.”

“어….”

“의주 설마 못 알아들었어? 에, 뭐야. 중국어 공부한 줄.”

“아냐. 알아들었어.”

“그럼 의주도 해봐. 我最最最最最最最最最喜歡你.”

“我最最最最最最最最最喜歡, 니콜.”

“진짜 알아들었네. 응용은 좀 이상하게 하긴 했는데.”

“진짜라니까. 나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해.”


니콜라스가 피실피실 웃는다. 본인은 황당해서 웃는 거라 해도 저 웃는 얼굴이 좋다. 내가 잘할게, 니콜. 언제까지라도 네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서. 먼저 뻗어준 네 손을 놓치지 않고 잡고 있기 위해서. 그런, 조금은 유치하기까지 한 다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웃는 얼굴 뒤로 감춘다. 니콜라스에게는 언제든 멋진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 연기를 하다 보면 또 언젠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더 좋은 사람이 될게. 그러니까 나를 많이 사랑해 줘. 깍지 낀 손이 달랑달랑, 가볍게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