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gaji




*


눈을 뜨면 니콜라스가 있는 게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한 지도 벌써 석 달이 넘어간다. 방 두 개짜리 구축 빌라가 둘이 살기 딱 알맞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이사 나갈 것 마냥 휑뎅그렁 하던 거실이 조금씩 훈기를 띄었다. 매일 바닥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려 2인용 소파도 사고, 다리 하나가 시원찮던 상을 버리고 작은 식탁도 샀다. 빌린 노트북을 갖다주러 온 친구 놈이 달라진 집 안 꼴을 보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야. 너 살림 차렸냐?


계약 끝날 때 ... 골치 아프겠네. 의주는 제법 산뜻해진 집구석을 보며 드는 생각했다. 모든 게 다 두 배가 됐다. 식기도 두 배, 전기세도 두 배, 생필품도 두 배. 당장에 옷장을 열면 보이는 게 전부 니콜라스의 것이다. 버클이 주렁주렁 달린 레자 자켓과 배꼽까지 보일 기세로 찢어진 티셔츠 같은 것들. 딱히 의주의 취향은 아닌 옷들.


딱히 쫓아낼 생각이 없어서 나가라고 하질 않았더니 이렇게 됐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다 보니, 이렇게 침대 옆자리에 누운 모습이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의주는 코 앞에 떡하니 버티고 누운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미끈한 뺨 위로 노란 햇살이 가득 쏟아져 내린다. 그럼에도 니콜라스는 기척 하나 없이 자는 중이다. ... 고양이 같다. 의주는 태평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니콜라스와 처음 만난 것은 늦겨울이었다. 약간 따뜻해지나 싶다가도 눈물 나도록 칼바람이 불어오던 때. 그 이상한 계절의 초입에 마주한 그는 지금보다 조금 더 마르고, 덜 웃었다. 엇비슷한 꼴의 또래 남자애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날카롭게 잘난 이목구비와 새빨간 머리카락 탓이기도 했고, 한눈에 봐도 틈에 섞여들지 못 하고 겉도는 분위기 역시 한몫했다.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 낯선 경쟁자. 모두가 탐탁지 못 해 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인물이었다.


불행히도 당시 의주는 저만의 출구를 찾느라 차마 주변을 넓게 살필 정신 머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제 몸 하나 건사하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벌써 3년이나 이어진 그의 연습생 생활에 서서히 끝이 보이고 있었다. 좋은 의미로 연습이 쫑나는 것이 아니다. 길거리 캐스팅으로 처음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 곳은 꽤나 규모가 큰 중대형 소속사였지만 데뷔 조가 꾸려지며 쫓겨나듯 이적했고, 다음 회사는 도저히 스타일이 맞지 않아서 제 발로 나왔다. 그쯤에서 의주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대학 진학과 연습생 생활 사이에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때마침, 고요히 방황하던 의주를 지금의 회사에서 재빠르게 낚아챈다. 어쩌면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떠밀려 온 곳이 현재 변의주가 연습생 신분으로 지하에서 푹푹 썩어가고 있는 마포구의 한 연예 기획사. 밴드만 하던 곳에서 보이 그룹을 내려고 준비 중이었다.


이만 학교로 돌아가려던 의주를 몇 번이나 설득해서 겨우 데려와 놓고는. 막상 발을 들인 회사는 제대로 된 레슨 선생 하나 구해주지 못 할 정도로 경영 상황이 악화된 데다 기존 연습생 풀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이대로 데뷔를 하게 된다고 해도 허접한 데뷔 싱글이나 발매하고 파묻히게 될 것이 선연히 그려졌다. 의주는 어떻게든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려보려 애썼고, 어쨌든 지난 몇 년을 쏟아부은 이 바닥에서 성공하고 싶은 야망 또한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모든 이의 인생이 유명 팝스타처럼 술술 풀리지는 않는 법이다. 고로 그는 이 빠그라지기 직전의 통통배를 언제, 어떤 식으로 탈출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벌써 몇 달째 다른 연습생들을 뒤로 한 채 회사 어른들과 거취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이번에는 정말 데뷔가 코앞이라며 또 다시 붙잡는 소리에 약간이나마 흔들렸다가, 레슨 선생이 임금 체불 문제로 관두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날이 이어졌다. 의주는 늘 온화하고 침착하려 애쓰는 제 테두리가 조금씩 깎여 나가는 것을 느꼈다. 머리를 비워내기 위해 땀으로 몸이 흠뻑 젖을 때까지 춤을 추고서도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언제나 뿌듯하게 여기던 밑창 닳은 운동화도 지저분해 보일 뿐이었다. 어느새 졸업식이 코앞이다. 같은 반 친구들이 하나둘 원하던 학과에 합격 했다며 이곳저곳 자랑하는 것이 아주 딴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같이 연습하는 놈들과 으쌰으쌰 해가며 사기를 충전할 수도 없었다. 쥐뿔도 없는 것들께서 뒤늦게 입사한 의주를 은근히 배척했다. 질리게 얼굴 마주 보는 놈들 중에 제대로 된 인간이라곤 없었다. 착하게 굴면 맞먹으려 드는 예의 없는 잔챙이들은 물론이고 허파에 바람이 들어 대강대강 설렁설렁 거리는 양아치도 싫었다.


개중에서도 이름을 외웠으니, 어찌 보면 니콜라스는 처음부터 의주의 눈에 띄었을 지도 몰랐다. 가장 먼저 얼굴과 이름을 매치 시킨 애였다. 나이는 저와 같은 열아홉. 대만에서 왔고 연습생 기간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의주보다 고작 몇 주 일찍 입사한 것 뿐이었다. 니콜라스는 대표가 현지 축제에서 직접 데려온 놈이라고 했다. 요즘 AI니 뭐니 떠들어대는 것처럼 아주 잘 다듬어진 외형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말도 안 통하는 애를 냉큼 데뷔 조에 끼웠겠지. 의주는 레슨 시간 마다 끄트머리에 서 있는 그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밖은 쌀쌀한데 벌써부터 에어컨을 틀자고 했다. 분위기가 축축 늘어졌다. 염치도 없는 놈들이 연습을 빼먹고 놀자판을 만든다. 저들끼리 멋대로 화이트보드에다 사다리 타기를 그렸다. 그 끝에 당첨된 것은 당연하게도 변의주였다. 모두가 이럴 때만 열심히 단합했다. 아이스크림이며 음료수를 사달라는 돌림 노래가 끝 없이 이어진다. 정신 머리 빠진 것들 천지였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의주가 한숨을 쉬며 연습곡을 껐다. 사주자. 사주고 ... 이 새끼들을 조용히 시켜버리자.


" 어. 그 ... "


지갑을 챙겨 나가려던 의주가 연습실 귀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 그쪽을 바라본다. 조용히 거울 앞에 서 있던 니콜라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음, 있지 ... 의주가 머뭇대며 잠시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 니콜라스.


" 니콜라스. 잠깐 같이 ... 갈까? "


두 눈을 천천히 꿈뻑인 니콜라스가 잠자코 연습실을 나서는 의주를 따라나섰다.



괜히 다른 놈 이름을 잘 못 불렀다가 쪽팔릴까 봐. 그렇다고 혼자 가자니 아이스크림이다 뭐다 가득 사 오기가 버거울 것도 같아서. 그래서 고른 게 니콜라스다. 의주가 유일하게 정확히 외운 이름. 빨간 머리를 한 남자애. 연습생이라기엔 적지 않은 열 아홉이라는 나이에, 누구든 위태롭게 흔들릴 때에 대뜸 타지에서 맨땅에 헤딩을 하고 있는 놈.


" … "


니콜라스는 잠자코 의주의 옆을 따라 걸었다. 가끔 목을 쭉 빼고 주변을 쳐다보기도 했다. 맨날 천날 걷는 길일 텐데 신기하다는 양 시선이 한 군데를 따라간다. 자세히 보니 저 멀리 산책 중인 강아지를 쳐다 보는 것 같았다.


" 어, ... 니콜라스. "


의주가 음료 매대 앞에 서서 이름을 불렀다. 편의점에 들어와서도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걸 나 몰라라 내버려 두기엔 여기까지 데려온 죄가 컸다. 알록달록한 패키지를 구경하다가 손을 뻗어 조심스레 니콜라스의 허연 티셔츠 자락을 잡았다. 뭐 마실래? 물었더니 가만히 쳐다 보기만 한다. 의주는 그제야 그가 한국에 온 지 몇 달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 해냈다. 간식 하나도 맘대로 안 사주는 영세한 회사에서 제대로 된 한국어 레슨을 해 줄 거라는 믿음은 들지 않았다.


" 어 … 왓 … 왓 두유 …… "

" … "

" 음료수가 ... 영어로 ... "


계속해서 눈만 깜빡. 와중에 새카만 눈은 송곳처럼 뾰족한 시선으로 제 이목구비를 샅샅이 훑는다. 답답해진 의주가 가까이 다가가 다시 물었다. 음, 너, ... 니콜라스. 유, 뭐 좋아해? 아, 왓 두유 라이크? 드링크 할 거. 다가온 의주를 가만히 바라보던 니콜라스가 그제야 입술을 달싹였다.


" … coke. "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듣기 좋게 나지막하다. 유창한 발음으로 듣는 단어는 굉장히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코크? 잠시 고민하던 의주가 빨간 캔을 집었다. 니콜라스는 거기다 한 마디 덧붙였다. zero, please.




고작 그 몇 마디로 비약적인 관계의 발전이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짧은 대화를 시작으로 말을 트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다. 니콜라스는 종종 귀가하려는 의주를 붙잡고 연습 중 헷갈리는 걸 물어 보거나, 의주는 그를 데리고 편의점에 들려서 1+1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러한 사사로운 상호 작용에서 알게 된 것은 별로 없었다. 니콜라스가 짐작 보다는 한국말을 잘한다는 것, 대만에 가족을 두고 혼자 이곳에 왔다는 것, 좁아 터진 숙소에 부대껴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끔 웃으면 매서운 눈이 가늘고 부드럽게 접힌다는 것. 의주가 그에 대해 아는 건 그게 전부였다.



깊이 알지 못 하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 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의주는 니콜라스가 종종 레슨 시간에 겉돌거나, 다른 이들이 은근히 그를 무시하는 소리를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아직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럴 거라 생각했고, 니콜라스가 "병신"이라는 말을 알아 듣지 못 할 거라 믿어서 그랬다. 이미 똘똘 뭉쳐 있던 놈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 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의주 조차도 몇 번이고 붕 뜬 제 존재를 뼈저리게 느껴 기분이 상할 때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 해 줄 문제일 뿐이다. 봄이 지나 여름이 오고, 가을이 되면. 그때 즘엔 더 이상 니콜라스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어 주는 이가 슬슬 락커를 정리하려는 변의주가 아닐 테다.


그렇기에 예상치 못 한 전개는 당황스러웠다. 사정이 있어 한 주 수업을 빼 먹고 돌아온 연습실이 난장판이었다. 회사가 휘청거렸다. 먼저 데뷔했던 5인조가 드러운 스캔들에 엮인 것이다. 원래도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닌 터라 회사는 무지막지한 부채를 떠안게 됐다. 자연스레 남은 이들의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막연히 무탈하게 풀려 나가리라 짐작 하던 연습생들의 데뷔가 완전 무산됐다.


그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제법 주워들었건만 세상에 연습실 에어컨에 빨간 딱지가 붙는 회사는 처음이었다. 의주는 제 락커 안에 넣어 두었던 헤드셋을 도둑 맞았다. 당황스럽고 짜증 나는 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묘하게 속이 시원했다. 연습생 생활을 그만두게 된 것이 제 의지가 아니라고 얄팍하게나마 자위할 수 있게 되었다. 저는 거친 현실을 뒤로한 채 꿈을 좇던 선량한 아이돌 지망생일 뿐이고, 애석하게도 이러한 "회사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연습생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좋은 기회로 더 큰 회사로 옮긴 행운아도 있고, 현실을 받아 들이지 못 하고 실장네 집 앞에서 죽치고 있는 인간도 있었다. 회사 소식을 전하자마자 의주의 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재수 학원 팜플렛을 몇 부씩 내밀었다. 늘 물심양면으로 그를 거뜬히 지지해주시던 부모님께서는 이제라도 막내아들이 정신을 차렸다고 여겨 은근히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의주는 그들을 거스를 이유가 없었기에 잠자코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


그 사이에서 니콜라스는 생각보다 담담해 보였다. 텅 빈 캐비넷을 마주한 의주를 말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자주 입는 이상한 핑크색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 차림이었다. 왔으면 왔다, 가면 간다 일언반구 없이 묵묵히 보고만 있다. 주렁주렁 귀걸이를 하고, 새빨갛던 머리는 어느새 뿌리가 손가락 한 마디 만큼 자라난 채로. 제 몸뚱이 만한 캐리어를 쥔 채로 니콜라스가 의주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 … 왜. "


니콜라스는 묵직해 보이는 그것을 잘도 끌고 의주의 옆에 따라붙었다. 터벅터벅 걷는 그의 걸음을 맞춰 걸었다. 지하철까지 쫓아 탔다. 뭐해 ... ? 의주가 물어도 별 말이 없었다. 묵묵히 그렇게, 집 앞까지 쫓아 왔다. 드르륵 거리며 좁은 복도를 긁어 대던 캐리어 소리가 멈췄다.


" 너 ... 갈 데 없어? "

" … "


이제 영어로 되묻는 짓은 하지 않는다. 제대로 뜻을 전달 할 줄도 모를 뿐더러, 니콜라스는 외지에 있는 사람 특유의 눈치가 늘어 이 쯤은 빠릿빠릿 알아 들었다. 의주가 말을 잇지 않고 보고만 있으려니 니콜라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옆에 뒀던 캐리어를 질질 끌어 디밀었다.


" 집. 없어요. "

" … 대만 가면 되잖아. "


의주의 말에 또 묵묵부답. 그렇게 한참을 눈싸움 하듯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슬슬 더워지려는 날씨라 그렇게 있으려니 숨이 콱 막혔다. 니콜라스의 눈은 흔들림조차 없다. 가끔씩 깜빡이며 여전히 의주를 집요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의주는 한숨을 내쉬려던 걸 참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른다. 도중에 들어가게 되는 탓에 학원의 기숙사 코스는 빈 자리가 없었다. 게다가 남들과 살 부대끼고 사는 건, 몇 년 전 첫 기획사에서 짧게 겪으며 생활 전반 퀄리티를 지나치게 떨어뜨린다는 것을 몸소 느꼈으므로 ... 본가에서는 등하원이 어려워 부모님께서 학원 근처에 급히 거처를 구해주신 참이었다. 변의주네 양친께서는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뭐든 다 해줄 기세였다. 당장 다음 주부터 아침부터 밤까지 꽉꽉 들어찬 재수 학원 시간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 들어 와. 의주가 니콜라스가 캐리어를 들여놓도록 문을 크게 열며 말했다.



내년 봄 까지는 다시 대만으로 돌아 가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이돌이 되겠다며 한국으로 떠나는 걸 극구 반대하던 가족들에게, 차마 회사가 폭삭 망해서 돌아가게 되었다는 충격을 줄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애초에 한국행을 택하며 다니던 학교도 자퇴했고, 이젠 휴지 조각이 돼 버린 연습생 계약도 딱 그때까지라고 했다. 그가 전해 들은 계획대로라면 올해 연말이 데뷔였다. 실장은 니콜라스에게 데뷔를 약속하고서 한국행 티켓을 내민 것이다.


도대체 뭘 믿고 덥석,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온 건지. 의주가 씻고 나와 해끔해진 니콜라스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이러고 있으니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먹을 게 없어 대충 컵라면을 꺼내 줬다. 의주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며 골똘히 생각했다.


일단 당장 오늘은 ... 니콜라스가 뭔 짓 할 사람으론 보이지 않으니까, 하룻밤 쯤이야. 그쯤이야 기꺼이 이 썰렁한 집에서 머물게 해줄 수 있다. 가져온 캐리어는 또 어찌나 크고 무거워 어떻게 들고 다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뭣도 모르는 외국인이 그나마 아는 얼굴이랍시고 덜컥 저를 따라 온 것도 좀 … 함부로 내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고.


" 이거 밖에 없는데 ... "


의주가 니콜라스의 컵라면에 물을 부어 주며 말했다. 그는 서서히 퍼져 나가는 면을 뚫어져라 보며 얌전히 기다렸다. 축축한 머리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 니콜라스. "


푹 숙여져 있던 머리통이 단번에 들린다. 컵라면이 다 익을 동안 이어지던 영겁 같은 침묵이 간신히 부서졌다. 의주가 먹으라는 듯 니콜라스에게 턱짓을 해 보였다. 그는 요상하게 쪼개진 젓가락으로 면을 한꺼번에 가득 집어 먹었다.


" ... 너 진짜 갈 데 없어? "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창 집어 먹은 라면에 매끈한 양 볼이 금세 빵빵해졌다.


" 아무 데도? "


뭐라 대답을 하려는데 얼굴이 시뻘게진다. 순간 의주는 그에게 엄청나게 매운 라면을 줬다는 걸 깨달았다. 누나랑 같이 장을 보며 실수로 집었다가 처박아 둔 것이었다. 모르는 척 태연하게 생수 페트병을 내밀었다.


" 근데 ... 왜? 나를 ... "

" … 음? "

" 희연이 있지. 걔 어엄청 부자래. 너, 니콜라스, 같이 연습 한 애. "


이왕이면 그런 애들한테 붙는 게 ... 낫지 않나? 니콜라스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의주의 말을 천천히 이해했다. 입 안에 맴도는 말을 정리 하듯 몇 번 달싹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 you look handsome. "

눈을 뜨면 니콜라스가 있는 게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한 지도 벌써 석 달이 넘어간다. 방 두 개짜리 구축 빌라가 둘이 살기 딱 알맞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이사 나갈 것 마냥 휑뎅그렁 하던 거실이 조금씩 훈기를 띄었다. 매일 바닥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려 2인용 소파도 사고, 다리 하나가 시원찮던 상을 버리고 작은 식탁도 샀다. 빌린 노트북을 갖다주러 온 친구 놈이 달라진 집 안 꼴을 보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야. 너 살림 차렸냐?


계약 끝날 때 ... 골치 아프겠네. 의주는 제법 산뜻해진 집구석을 보며 드는 생각했다. 모든 게 다 두 배가 됐다. 식기도 두 배, 전기세도 두 배, 생필품도 두 배. 당장에 옷장을 열면 보이는 게 전부 니콜라스의 것이다. 버클이 주렁주렁 달린 레자 자켓과 배꼽까지 보일 기세로 찢어진 티셔츠 같은 것들. 딱히 의주의 취향은 아닌 옷들.


딱히 쫓아낼 생각이 없어서 나가라고 하질 않았더니 이렇게 됐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다 보니, 이렇게 침대 옆자리에 누운 모습이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의주는 코 앞에 떡하니 버티고 누운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미끈한 뺨 위로 노란 햇살이 가득 쏟아져 내린다. 그럼에도 니콜라스는 기척 하나 없이 자는 중이다. ... 고양이 같다. 의주는 태평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니콜라스와 처음 만난 것은 늦겨울이었다. 약간 따뜻해지나 싶다가도 눈물 나도록 칼바람이 불어오던 때. 그 이상한 계절의 초입에 마주한 그는 지금보다 조금 더 마르고, 덜 웃었다. 엇비슷한 꼴의 또래 남자애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날카롭게 잘난 이목구비와 새빨간 머리카락 탓이기도 했고, 한눈에 봐도 틈에 섞여들지 못 하고 겉도는 분위기 역시 한몫했다.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 낯선 경쟁자. 모두가 탐탁지 못 해 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인물이었다.


불행히도 당시 의주는 저만의 출구를 찾느라 차마 주변을 넓게 살필 정신 머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제 몸 하나 건사하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벌써 3년이나 이어진 그의 연습생 생활에 서서히 끝이 보이고 있었다. 좋은 의미로 연습이 쫑나는 것이 아니다. 길거리 캐스팅으로 처음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 곳은 꽤나 규모가 큰 중대형 소속사였지만 데뷔 조가 꾸려지며 쫓겨나듯 이적했고, 다음 회사는 도저히 스타일이 맞지 않아서 제 발로 나왔다. 그쯤에서 의주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대학 진학과 연습생 생활 사이에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때마침, 고요히 방황하던 의주를 지금의 회사에서 재빠르게 낚아챈다. 어쩌면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떠밀려 온 곳이 현재 변의주가 연습생 신분으로 지하에서 푹푹 썩어가고 있는 마포구의 한 연예 기획사. 밴드만 하던 곳에서 보이 그룹을 내려고 준비 중이었다.


이만 학교로 돌아가려던 의주를 몇 번이나 설득해서 겨우 데려와 놓고는. 막상 발을 들인 회사는 제대로 된 레슨 선생 하나 구해주지 못 할 정도로 경영 상황이 악화된 데다 기존 연습생 풀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이대로 데뷔를 하게 된다고 해도 허접한 데뷔 싱글이나 발매하고 파묻히게 될 것이 선연히 그려졌다. 의주는 어떻게든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려보려 애썼고, 어쨌든 지난 몇 년을 쏟아부은 이 바닥에서 성공하고 싶은 야망 또한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모든 이의 인생이 유명 팝스타처럼 술술 풀리지는 않는 법이다. 고로 그는 이 빠그라지기 직전의 통통배를 언제, 어떤 식으로 탈출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벌써 몇 달째 다른 연습생들을 뒤로 한 채 회사 어른들과 거취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이번에는 정말 데뷔가 코앞이라며 또 다시 붙잡는 소리에 약간이나마 흔들렸다가, 레슨 선생이 임금 체불 문제로 관두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날이 이어졌다. 의주는 늘 온화하고 침착하려 애쓰는 제 테두리가 조금씩 깎여 나가는 것을 느꼈다. 머리를 비워내기 위해 땀으로 몸이 흠뻑 젖을 때까지 춤을 추고서도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언제나 뿌듯하게 여기던 밑창 닳은 운동화도 지저분해 보일 뿐이었다. 어느새 졸업식이 코앞이다. 같은 반 친구들이 하나둘 원하던 학과에 합격 했다며 이곳저곳 자랑하는 것이 아주 딴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같이 연습하는 놈들과 으쌰으쌰 해가며 사기를 충전할 수도 없었다. 쥐뿔도 없는 것들께서 뒤늦게 입사한 의주를 은근히 배척했다. 질리게 얼굴 마주 보는 놈들 중에 제대로 된 인간이라곤 없었다. 착하게 굴면 맞먹으려 드는 예의 없는 잔챙이들은 물론이고 허파에 바람이 들어 대강대강 설렁설렁 거리는 양아치도 싫었다.


개중에서도 이름을 외웠으니, 어찌 보면 니콜라스는 처음부터 의주의 눈에 띄었을 지도 몰랐다. 가장 먼저 얼굴과 이름을 매치 시킨 애였다. 나이는 저와 같은 열아홉. 대만에서 왔고 연습생 기간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의주보다 고작 몇 주 일찍 입사한 것 뿐이었다. 니콜라스는 대표가 현지 축제에서 직접 데려온 놈이라고 했다. 요즘 AI니 뭐니 떠들어대는 것처럼 아주 잘 다듬어진 외형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말도 안 통하는 애를 냉큼 데뷔 조에 끼웠겠지. 의주는 레슨 시간 마다 끄트머리에 서 있는 그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밖은 쌀쌀한데 벌써부터 에어컨을 틀자고 했다. 분위기가 축축 늘어졌다. 염치도 없는 놈들이 연습을 빼먹고 놀자판을 만든다. 저들끼리 멋대로 화이트보드에다 사다리 타기를 그렸다. 그 끝에 당첨된 것은 당연하게도 변의주였다. 모두가 이럴 때만 열심히 단합했다. 아이스크림이며 음료수를 사달라는 돌림 노래가 끝 없이 이어진다. 정신 머리 빠진 것들 천지였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의주가 한숨을 쉬며 연습곡을 껐다. 사주자. 사주고 ... 이 새끼들을 조용히 시켜버리자.


" 어. 그 ... "


지갑을 챙겨 나가려던 의주가 연습실 귀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 그쪽을 바라본다. 조용히 거울 앞에 서 있던 니콜라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음, 있지 ... 의주가 머뭇대며 잠시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 니콜라스.


" 니콜라스. 잠깐 같이 ... 갈까? "


두 눈을 천천히 꿈뻑인 니콜라스가 잠자코 연습실을 나서는 의주를 따라나섰다.



괜히 다른 놈 이름을 잘 못 불렀다가 쪽팔릴까 봐. 그렇다고 혼자 가자니 아이스크림이다 뭐다 가득 사 오기가 버거울 것도 같아서. 그래서 고른 게 니콜라스다. 의주가 유일하게 정확히 외운 이름. 빨간 머리를 한 남자애. 연습생이라기엔 적지 않은 열 아홉이라는 나이에, 누구든 위태롭게 흔들릴 때에 대뜸 타지에서 맨땅에 헤딩을 하고 있는 놈.


" … "


니콜라스는 잠자코 의주의 옆을 따라 걸었다. 가끔 목을 쭉 빼고 주변을 쳐다보기도 했다. 맨날 천날 걷는 길일 텐데 신기하다는 양 시선이 한 군데를 따라간다. 자세히 보니 저 멀리 산책 중인 강아지를 쳐다 보는 것 같았다.


" 어, ... 니콜라스. "


의주가 음료 매대 앞에 서서 이름을 불렀다. 편의점에 들어와서도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걸 나 몰라라 내버려 두기엔 여기까지 데려온 죄가 컸다. 알록달록한 패키지를 구경하다가 손을 뻗어 조심스레 니콜라스의 허연 티셔츠 자락을 잡았다. 뭐 마실래? 물었더니 가만히 쳐다 보기만 한다. 의주는 그제야 그가 한국에 온 지 몇 달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 해냈다. 간식 하나도 맘대로 안 사주는 영세한 회사에서 제대로 된 한국어 레슨을 해 줄 거라는 믿음은 들지 않았다.


" 어 … 왓 … 왓 두유 …… "

" … "

" 음료수가 ... 영어로 ... "


계속해서 눈만 깜빡. 와중에 새카만 눈은 송곳처럼 뾰족한 시선으로 제 이목구비를 샅샅이 훑는다. 답답해진 의주가 가까이 다가가 다시 물었다. 음, 너, ... 니콜라스. 유, 뭐 좋아해? 아, 왓 두유 라이크? 드링크 할 거. 다가온 의주를 가만히 바라보던 니콜라스가 그제야 입술을 달싹였다.


" … coke. "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듣기 좋게 나지막하다. 유창한 발음으로 듣는 단어는 굉장히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코크? 잠시 고민하던 의주가 빨간 캔을 집었다. 니콜라스는 거기다 한 마디 덧붙였다. zero, please.




고작 그 몇 마디로 비약적인 관계의 발전이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짧은 대화를 시작으로 말을 트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다. 니콜라스는 종종 귀가하려는 의주를 붙잡고 연습 중 헷갈리는 걸 물어 보거나, 의주는 그를 데리고 편의점에 들려서 1+1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러한 사사로운 상호 작용에서 알게 된 것은 별로 없었다. 니콜라스가 짐작 보다는 한국말을 잘한다는 것, 대만에 가족을 두고 혼자 이곳에 왔다는 것, 좁아 터진 숙소에 부대껴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끔 웃으면 매서운 눈이 가늘고 부드럽게 접힌다는 것. 의주가 그에 대해 아는 건 그게 전부였다.



깊이 알지 못 하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 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의주는 니콜라스가 종종 레슨 시간에 겉돌거나, 다른 이들이 은근히 그를 무시하는 소리를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아직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럴 거라 생각했고, 니콜라스가 "병신"이라는 말을 알아 듣지 못 할 거라 믿어서 그랬다. 이미 똘똘 뭉쳐 있던 놈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 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의주 조차도 몇 번이고 붕 뜬 제 존재를 뼈저리게 느껴 기분이 상할 때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 해 줄 문제일 뿐이다. 봄이 지나 여름이 오고, 가을이 되면. 그때 즘엔 더 이상 니콜라스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어 주는 이가 슬슬 락커를 정리하려는 변의주가 아닐 테다.


그렇기에 예상치 못 한 전개는 당황스러웠다. 사정이 있어 한 주 수업을 빼 먹고 돌아온 연습실이 난장판이었다. 회사가 휘청거렸다. 먼저 데뷔했던 5인조가 드러운 스캔들에 엮인 것이다. 원래도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닌 터라 회사는 무지막지한 부채를 떠안게 됐다. 자연스레 남은 이들의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막연히 무탈하게 풀려 나가리라 짐작 하던 연습생들의 데뷔가 완전 무산됐다.


그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제법 주워들었건만 세상에 연습실 에어컨에 빨간 딱지가 붙는 회사는 처음이었다. 의주는 제 락커 안에 넣어 두었던 헤드셋을 도둑 맞았다. 당황스럽고 짜증 나는 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묘하게 속이 시원했다. 연습생 생활을 그만두게 된 것이 제 의지가 아니라고 얄팍하게나마 자위할 수 있게 되었다. 저는 거친 현실을 뒤로한 채 꿈을 좇던 선량한 아이돌 지망생일 뿐이고, 애석하게도 이러한 "회사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연습생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좋은 기회로 더 큰 회사로 옮긴 행운아도 있고, 현실을 받아 들이지 못 하고 실장네 집 앞에서 죽치고 있는 인간도 있었다. 회사 소식을 전하자마자 의주의 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재수 학원 팜플렛을 몇 부씩 내밀었다. 늘 물심양면으로 그를 거뜬히 지지해주시던 부모님께서는 이제라도 막내아들이 정신을 차렸다고 여겨 은근히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의주는 그들을 거스를 이유가 없었기에 잠자코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


그 사이에서 니콜라스는 생각보다 담담해 보였다. 텅 빈 캐비넷을 마주한 의주를 말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자주 입는 이상한 핑크색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 차림이었다. 왔으면 왔다, 가면 간다 일언반구 없이 묵묵히 보고만 있다. 주렁주렁 귀걸이를 하고, 새빨갛던 머리는 어느새 뿌리가 손가락 한 마디 만큼 자라난 채로. 제 몸뚱이 만한 캐리어를 쥔 채로 니콜라스가 의주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 … 왜. "


니콜라스는 묵직해 보이는 그것을 잘도 끌고 의주의 옆에 따라붙었다. 터벅터벅 걷는 그의 걸음을 맞춰 걸었다. 지하철까지 쫓아 탔다. 뭐해 ... ? 의주가 물어도 별 말이 없었다. 묵묵히 그렇게, 집 앞까지 쫓아 왔다. 드르륵 거리며 좁은 복도를 긁어 대던 캐리어 소리가 멈췄다.


" 너 ... 갈 데 없어? "

" … "


이제 영어로 되묻는 짓은 하지 않는다. 제대로 뜻을 전달 할 줄도 모를 뿐더러, 니콜라스는 외지에 있는 사람 특유의 눈치가 늘어 이 쯤은 빠릿빠릿 알아 들었다. 의주가 말을 잇지 않고 보고만 있으려니 니콜라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옆에 뒀던 캐리어를 질질 끌어 디밀었다.


" 집. 없어요. "

" … 대만 가면 되잖아. "


의주의 말에 또 묵묵부답. 그렇게 한참을 눈싸움 하듯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슬슬 더워지려는 날씨라 그렇게 있으려니 숨이 콱 막혔다. 니콜라스의 눈은 흔들림조차 없다. 가끔씩 깜빡이며 여전히 의주를 집요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의주는 한숨을 내쉬려던 걸 참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른다. 도중에 들어가게 되는 탓에 학원의 기숙사 코스는 빈 자리가 없었다. 게다가 남들과 살 부대끼고 사는 건, 몇 년 전 첫 기획사에서 짧게 겪으며 생활 전반 퀄리티를 지나치게 떨어뜨린다는 것을 몸소 느꼈으므로 ... 본가에서는 등하원이 어려워 부모님께서 학원 근처에 급히 거처를 구해주신 참이었다. 변의주네 양친께서는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뭐든 다 해줄 기세였다. 당장 다음 주부터 아침부터 밤까지 꽉꽉 들어찬 재수 학원 시간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 들어 와. 의주가 니콜라스가 캐리어를 들여놓도록 문을 크게 열며 말했다.



내년 봄 까지는 다시 대만으로 돌아 가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이돌이 되겠다며 한국으로 떠나는 걸 극구 반대하던 가족들에게, 차마 회사가 폭삭 망해서 돌아가게 되었다는 충격을 줄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애초에 한국행을 택하며 다니던 학교도 자퇴했고, 이젠 휴지 조각이 돼 버린 연습생 계약도 딱 그때까지라고 했다. 그가 전해 들은 계획대로라면 올해 연말이 데뷔였다. 실장은 니콜라스에게 데뷔를 약속하고서 한국행 티켓을 내민 것이다.


도대체 뭘 믿고 덥석,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온 건지. 의주가 씻고 나와 해끔해진 니콜라스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이러고 있으니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먹을 게 없어 대충 컵라면을 꺼내 줬다. 의주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며 골똘히 생각했다.


일단 당장 오늘은 ... 니콜라스가 뭔 짓 할 사람으론 보이지 않으니까, 하룻밤 쯤이야. 그쯤이야 기꺼이 이 썰렁한 집에서 머물게 해줄 수 있다. 가져온 캐리어는 또 어찌나 크고 무거워 어떻게 들고 다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뭣도 모르는 외국인이 그나마 아는 얼굴이랍시고 덜컥 저를 따라 온 것도 좀 … 함부로 내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고.


" 이거 밖에 없는데 ... "


의주가 니콜라스의 컵라면에 물을 부어 주며 말했다. 그는 서서히 퍼져 나가는 면을 뚫어져라 보며 얌전히 기다렸다. 축축한 머리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 니콜라스. "


푹 숙여져 있던 머리통이 단번에 들린다. 컵라면이 다 익을 동안 이어지던 영겁 같은 침묵이 간신히 부서졌다. 의주가 먹으라는 듯 니콜라스에게 턱짓을 해 보였다. 그는 요상하게 쪼개진 젓가락으로 면을 한꺼번에 가득 집어 먹었다.


" ... 너 진짜 갈 데 없어? "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창 집어 먹은 라면에 매끈한 양 볼이 금세 빵빵해졌다.


" 아무 데도? "


뭐라 대답을 하려는데 얼굴이 시뻘게진다. 순간 의주는 그에게 엄청나게 매운 라면을 줬다는 걸 깨달았다. 누나랑 같이 장을 보며 실수로 집었다가 처박아 둔 것이었다. 모르는 척 태연하게 생수 페트병을 내밀었다.


" 근데 ... 왜? 나를 ... "

" … 음? "

" 희연이 있지. 걔 어엄청 부자래. 너, 니콜라스, 같이 연습 한 애. "


이왕이면 그런 애들한테 붙는 게 ... 낫지 않나? 니콜라스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의주의 말을 천천히 이해했다. 입 안에 맴도는 말을 정리 하듯 몇 번 달싹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 you look handsome. "

" … 오. 갑자기? "


그래 ...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의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저도 젓가락을 들었다. 절대 니콜라스가 제게 "핸썸"하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급한 대로 하루, 갈 데가 없다니 일주일, 길바닥에 내쫓았다 죽을까 봐 한 달. 그런 식으로 차곡차곡 쌓은 끝에 벌써 석 달이 넘어 가는 중이었다. 니콜라스는 이제 매달 전기세가 얼마 정도 나오는지, 이 집에 손톱깎이가 어디 있는지, 치약을 얼마에 한 번씩 사는지를 안다. 의주가 종종 말하는 "존나"가 무슨 뜻인지, 가끔 통화하는 친누나의 이름이 뭔지, 편의점에서 어떤 맛 삼각김밥을 사 먹는지도 알았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동거였다. 딱히 복잡 할 건 없다. 문자 그대로 "같이" 살았다. 각자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공유 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니콜라스가 얹혀사는 거지만 의주는 딱히 주인 행세를 하려 들진 않았다. 널리고 널린 2인 동거의 모습이었다.


물론, 한 없이 파고들면 예민해질 부분도 있지만. 무사 평탄한 동거에서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지점. 의주는 잠든 니콜라스만 보면 답지 않게 속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같은 침대에서 반쯤 벗고 있는 남자를 보면, 누구나 그럴 터였다.


마치 일상 같았다.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운 행동의 연속이었다. 조금의 알코올이 들어가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세상이 조금 느리고 축축했다. 니콜라스와 맥주를 나눠 마셨다. 잘 못 된 미디어의 영향이 컸다. 스트레스 받으면 겁 없이 알코올로 정신을 마비 시키는 인간들이 TV 너머로 매일 같이 등장했으니. 몇 년이고 처박아 뒀던 공부를 뒤늦게 따라잡기 위해 종일 학원에 갇혀 혹사 당하는 재수생 변의주는 그야말로 온 신경이 아주 뾰족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딱 하루 주어지는 쉬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하원길에 치킨을 사서 돌아오다가. 4캔 만원이라는 편의점 앞 큼지막한 글씨가 그날따라 유달리 뇌리에 박혀서.


보는 눈도 없는데 이깟 보리 음료 좀 마신다고 하늘이 두 쪽 날 리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홀짝이고 나니 제법 머리가 둔해졌다. 니콜라스 역시 그런 듯했다. 까만 눈을 느리게 나풀대면서 맞닿은 살에도 가만히 있었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운데 꼼짝도 않고 시선을 마주했다. 입술이 부딪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표정이었다.


키스를 시작으로 끝을 모르고 고조 된 분위기를 타고 침대로 향했다. 정신이 없었다. 벗은 살을 부대끼는 게 어색해 허둥대지 않도록 조심했다. 의주는 연습생 생활 중에 잠깐 만나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사실 제대로 몸을 섞었다기보다는 서로를 더듬고 끝 없이 입술을 맞댄 정도였지만. 어쨌든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숨이 차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 저 멀리 떨어져 있던 두 몸이 하나로 뭉치는 듯한 착각.


똑같았다. 니콜라스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의주를 받아 들였다. 자연스레 목에 팔을 감고 입술을 찾았다. 어쩌면 의주가 더 허둥대고 서툴렀기에 그는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둘 중 하나라도 알고 있기에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질 수 있다는 이해에 다다른다. 마른 몸끼리 부딪힐 때 마다 깊은 숨을 뱉었다. 땀에 젖은 얼굴에는 어떠한 의문도 없었다.


그 뿐이었다. 의주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니콜라스와 잤고, 이젠 거의 일상이 된 참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싫은 기색을 비춘 적이 없었다. 딱히 유별나게 굴지도 않았다. 섹스를 하는 것 뿐이다. 평범한 동거인 사이에서 추가 된 건 딱 하나였다. 주기적으로 몸을 섞는 다는 것, 그거 하나.


남들에게 떠벌리고 다닐 만한 사실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둘 사이에선 솔직해야만 했다. 의주는 당연히 니콜라스가 싫지 않았다. 무전취식 하는 타인을 몇 달째 같은 공간에 두는 것 부터가 그랬다. 돕는답시고 어설프게 걸레질을 하거나 바닥을 물 범벅으로 만들며 설거지를 해 놓는 것도 쿨하게 칭찬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어떠한 무언가. 관계의 깊이에 대해 물으면 선뜻 대답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좋으니 섹스하고, 섹스하는 것도 좋지만 그 행위에 따라 오는 감정을 또렷이 칭하기는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귀여운 동물이나 친한 친구들을 보면 으레 들곤 하는 마음. 의주는 제가 니콜라스를 보면 그와 비슷한 것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귀엽고, 손을 잘 타지만 약간은 까다로운 고양이. 뾰족한 낯을 하염없이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고양이. 지친 몸을 끌고서 집에 돌아왔을 때 반겨 주면 속이 따뜻해지는 그런 … 고양이 정도.


남들이 들으면 미친 놈이라고 손가락질 하겠으나 의주도 나름대로의 변명이 있다. 탓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니콜라스는 늘 손쉽게 침묵을 택했다. 관계의 정의를 내리려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는 으레 애인 사이에서 하려 드는 행위를 바라면서도, 홀딱 벗고서 제 마른 등을 껴안으면서도 ... 무언가를 말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어휘력이 부족한 탓은 아니다. 종종 키스를 나누다 마주치는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니콜라스의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와 제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태도를 느낄 때마다. 의주는 그가 제게 이것저것 따져 물을 것이라 짐작했건만, 야속한 동거인은 늘 입을 꾹 다물고서 차라리 몸을 부벼오는 편을 택했다. 고로 그와의 관계는 언제나 같은 자리를 맴돌 수 밖에 없었다. 익히 말 했듯 섹스를 한다는 것을 제외 하면 처음과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사이였다. 눈이 마주치면 키스하고, 서로 어떤 체위를 가장 좋아하는 지도 알게 됐지만 그 뿐이었다.


그래서 생각이 깊이를 더하질 못 했다. 비록 지금은 제 옆에서 헐벗고 자고 있지만, 일어나면 니콜라스는 또 평소와 같이 행동 할 터였다. 주주 빵 먹어. 주주 리모콘 어딨어. 주주 마트 가자.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평범한 동거인. 그 뿐이었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그 쯤으로 받아 들이고 싶었다. 그게 정신 건강에 좋았다. 고양이를 닮은 룸메이트. 그 정도로.


니콜라스의 마른 날개 뼈를 바라보던 의주가 돌아 누웠다.







" 주주, 나 빌려줘. "

" 뭐? "

" 그 셔츠 … 이렇게. "


니콜라스가 손으로 제 상체를 비비며 말했다.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더니 비비는 손길이 더 빨라진다. 늦은 저녁으로 먹을 계란말이를 위해 양파를 다듬던 의주가 칼을 내려 놓고 니콜라스를 빤히 쳐다봤다. 아아. 그제야 옷장 한 켠에 걸려 있을 제 흰 셔츠를 떠올렸다. 매일 학원-집이나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최근에는 대부분 추리닝 차림이라 손대지 않은 옷이었다. 깨끗이 빨아서 입지 않고 그대로 두기만 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묵직한 캐리어를 가득 채우던 니콜라스의 희한한 껍데기들. 의주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옷만 고집하던 그가 어쩐 일로 갑작스레 베이직한 셔츠를 찾나 싶어서였다.


" 왜? "


그러나 니콜라스는 식탁 위에 펼쳐둔 노트북에 빨려 들어갈 기세다. 게임 렙업에 어찌나 열중했는지 의주의 노트북은 출고 이후 최대치의 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터넷 강의를 듣는 용도라 사양이 좋지 않은데도 꿋꿋이 낮은 그래픽으로 이것저것 찝쩍댔다. 매일 새벽까지 쿨러가 열심히 돌아갔다. 야아 ... 이제 자자. 자다 깬 의주가 니콜라스의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그럼 뚫어져라 노트북을 쳐다보고 있던 얼굴이 히 웃으며 위로 향한다. 솟아 오른 뺨으로 모니터의 색색이 비쳤다. 조금만 더 하고 자겠다는 소리였다.


" 나 일해. "


의주의 의아한 표정을 읽은 건지 니콜라스는 싱글싱글 미소를 띈 채 말했다. 일? 의주가 되묻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의주는 니콜라스와 스무고개 하듯 질문을 주고받았다. 오랜 질의응답 끝에야 정확히 그가 하는 일이 뭔지, 어디서 하는 건지, 얼마나 이어질 노동인지 알게 됐다. 허울 뿐인 소속사가 폭삭 망한 뒤, 임원들 마저 뿔뿔이 흩어지게 됐는데 개중 실장 하나가 여태 그를 맘에 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긴 머나먼 타국에서 반도로 저 하나 믿고 날아 온 놈을 한 순간에 내치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어쨌든 그는 뾰족한 수 없이 한국에 머무는 중인 니콜라스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줬다. 제법 인지도 있는 신생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다가올 시즌 룩북을 촬영하는데, 남자 모델로 니콜라스를 추천 한 것이다. 메인은 아니라 페이가 세지는 않아도 좋은 기회임은 분명했다.


그 촬영의 첫 미팅에 최대한 깔끔하게 가고 싶다는 것이 니콜라스의 계획이었다. 과연 그의 캐리어에는 공적인 자리에 적합한 옷이 거의 없었다. 북적이는 홍대나 이태원을 공작새처럼 꾸미고 다니기 제격이었으나, 아무래도 말끔함을 찾자면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는 보통 제 멋대로 주변을 쏘다니거나 안전한 의주의 스윗 홈에 머물렀으나 다가오는 낯선 출근길에는 적당한 단정함 역시 꼭 필요했다. 기왕이면 멋져 보이게끔.


깎아 놓은 듯한 이목구비와 보기 좋은 마른 몸을 갖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잘 할 것이다. 보아하니 젊은 남자들 타겟인 듯하니 또래의 그가 제격일 것이 분명하고. 의주가 핸드폰을 들이밀고 열심히 설명하는 니콜라스를 보며 멍해졌다. 엄청 ... 즐거워 보이네. 그런 생각이 든 탓인지 불쑥, 저도 모르게 손이 들렸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뒤통수 위로 마른 손바닥이 바삭거리는 진갈색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쓰다듬는다. 니콜라스는 이제 빨간 머리를 그만두었다. 지난 달에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의주가 직접 염색을 해줬다. 덕분에 군데군데 얼룩이 졌지만 대충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니콜라스는 제 머리카락을 흩트리는 의주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내 마주치는 길쭉한 눈이 옅게 웃는다.




니콜라스가 숨을 참는다. 의주는 직감적으로 그가 흥분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몸을 섞다 보니 발견한 버릇이었다. 니콜라스는 기분이 좋을 때마다 티 나게끔 호흡을 멈췄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숨을 먹고 버텼다. 동그란 이마가 땀 때문에 달라붙은 머리칼로 엉망이었다. 그의 허리를 붙들고 있던 의주의 손이 아래로 향한다. 꽤 거친 손길로 만지니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곧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그럼에도 니콜라스의 꼭 감은 두 눈은 그대로였다. 귓가에 헉헉대는 숨소리가 나지막했다.


" 니콜 ... "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실눈을 뜬다.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도 얼굴이 잔뜩 달아 오른 게 보였다. 의주는 그의 얼굴을 오래도록 내려다 보다가 다시 움직였다. 다시금 온 몸을 뻣뻣이 경직 하는 게 느껴졌다. 허연 가슴팍이 숨을 쉴 때 마다 가쁘게 들썩였다. 의주가 열심히 씹어 놓은 목덜미가 울긋불긋 했다. 넥라인이 깊은 티셔츠를 입으면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일 만한 위치였다. 느리게 눈을 꿈뻑이던 니콜라스의 고개가 홱 꺾였다. 의주는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제대로 이어지지 못 하는 이국의 문장이 방 안을 떠돌았다.


다시 어깨를 쥐어 잡고 입술이 맞물렸다. 막무가내로 들이댄 터라 앞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거친 키스에 고개를 틀어 피하나 싶던 니콜라스가 겨우 섞이는 혀를 받아 냈다. 입 안이 온통 축축했다. 등 뒤에 구겨진 이불이 불편해서 자꾸만 몸을 이리저리 들썩거렸다.


부쩍 표정이 부드러워진 얼굴이 새빨갛다. 의주는 그것이 민망한지 자꾸만 몸을 웅크리는 니콜라스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훅훅 숨을 들이 마시는 목덜미가 땀으로 반질거렸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의주가 빛을 받지 못 해 유달리 허연 날개뼈 틈새부터 옆구리까지 손가락으로 쑥 훑어 내렸다. 야! 하고 화들짝 놀란 니콜라스가 소름 끼친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깊은 곳에서부터 터질 것 같던 숨이 웃음으로 흩어진다.



말하지 않고 토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많이는 아니고, 조금. 의주는 가끔 니콜라스에게 유치하게 굴 때가 있었다. 보통은 니콜라스가 의주에게 장난을 많이 쳤는데 침대 위에서 종종 반대가 되었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 일종의 장난과 비슷했다. 대개 니콜라스가 완전히 지칠 때까지 마구잡이로 밀어 붙이거나 부러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등의 사소한 사건이었다. 이럴 때 마다 니콜라스는 등을 보이고 돌아 누워 입술을 삐쭉거렸다. 뜨거운 뺨을 겨우 식혀내면서,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는 의주는 무시 한 채.


" … 야아. "


의주가 여전히 등만 보이는 중인 니콜라스의 어깨춤을 쿡쿡 찌르며 불렀다. 미안해애. 귀여워서 그랬는데 ... 뒷 말은 삼킨 채로 살갗을 살살 긁듯 했다. 니콜라스가 살짝 돌아 누우며 의주를 흘겼다. 푸석한 머리카락이 낯에 엉망으로 달라붙어 있다.


" …… "

" … 삐졌어? "


단단히 심기가 꼬인 게 틀림 없는 낯으로 니콜라스는 꿋꿋이 의주를 째려본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어깨를 조심스레 문질렀다. 흉터 자국이 선명한 팔까지 조물조물 만지작거렸다. 간지러우라고 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슬슬 굳은 표정이 풀어지려 했다. 의주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꺼냈다.


" 내일 맛있는 거 사줄까? "

" … 뭐? "

" 너 먹고 싶은 거. "


니콜라스는 답을 내놓지 않고 눈만 깜빡거린다. 싫어? 되묻자 또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상체에 있는 점들을 잇듯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쉬는 날이 곧 돌아온다. 진짜 열심히 하는 애들은 쉬는 날에도 학원에 나가서 자습을 하지만 ... 사실, 의주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 하자면 할 수 없었다. 저는 다른 애들과 똑같은 시간 책상 앞에서 엉덩이 붙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버거웠다.


답답한 학원을 벗어나면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드물게 찾아온 자유의 낮에, 의주는 신기하게도 룸메이트의 얼굴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 밖에도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지만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니콜라스와 함께하는 코스만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없는 동안 니콜라스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다. 최근의 의주는 그에게 묘한 부채감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 제가 귀가하면 좁은 소파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을 볼 때라던가. 종일 제대로 얘기 나눌 사람이 없던 건지, 피곤한 저를 붙들고도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그를 두고서 먼저 잠자리에 들 때라던가. 가물가물 잠에 취한 시야로 니콜라스의 시무룩한 얼굴이 흐려질 때나, 결국 잠든 제게 이불을 덮어 주고서 자리를 뜨는 그 손길을 느낄 때 역시. 가슴 끄트머리부터 잉크처럼 서서히 물들여지는 희한한 죄책감을 떨쳐내려고 애쓰며 다짐하는 것이다. 내일은 조금만 더 힘내서 니콜라스의 일상을 물어 봐야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먼저 문자를 보내야지. 하루를 얘기하는 니콜라스를 귀담아들어야지 ... 하고서.


곧 니콜라스 역시 촬영이다 뭐다 일이 시작되면 함께 할 기회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의주에게 언제 쉬느냐고 몇 번이나 묻는 일은 점점 사라질 테고. 어쩌면 이제 저보다도 바빠져서 얼굴 볼 날이 드물어질지도 모른다.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할 일이 생긴 것이 기뻤으나 동시에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지기도 했다.


" 우리. ... 토요일에 어디 놀러 갈래? "


언젠가 그런 때가 오면, 지금 같은 날들을 그리워하게 될 것 같아서. 의주는 웅얼대듯이 물었다. 왠지 자신감이 없어져 입 안이 말랐다. 여태 니콜라스에게 특별히 어딘가에 가자고 먼저 제안한 적은 없었다. 시간이 비면 둘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일은 너무도 일상 같았으나, 제대로 된 목적을 가지고 특정한 장소에 가서 둘만의 시간을 보낼 생각은 해보지 못 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속에 잠들어 있던 충동은 이렇게 불쑥, 의주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만다.


말을 꺼내자마자 계속해서 토라진 상태를 유지하려던 니콜라스가 순식간에 돌아 눕는다. 부러 짜증을 꾸며내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금세 들뜬 티가 역력했다. 의주가 그에 크게 웃고 싶은 것을 참고 부러 느릿하게 되묻는다.


" 어때? "

" 완전 ... 좋아. "


어디 가? 한강? 홍대? 아, 너무 기대가 돼. 마주치며 웃는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힌다. 의주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런 질문 하나 뱉는 것에 긴장하는 스스로가 유치하게 느껴졌다.




니콜라스는 딱 의주가 짐작한 만큼 바빠졌다. 그가 좋아하는 간식도 멀리하고, 하루에 한 끼씩 먹어가며 고생해 찍어낸 화보는 금세 공개됐다. 모 쇼핑몰 사이트에 들어가서 "남자 반소매", "남자 스트레이트진" 따위를 검색하고 스크롤을 한 두 번 하면 니콜라스의 낯짝이 떡하니 드러난다. 의주는 늦은 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차창에 기대어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 본다. 희한하게 생긴 선글라스를 끼고 아래를 내려다 보는 니콜라스. 혀를 내밀고 눈을 찡그린 니콜라스. 갈비뼈가 다 보이는 티셔츠를 입고 바닥에 드러누운 니콜라스. 처음 보는 모습과 익숙한 모습이 뒤섞인 신인 모델의 면면이 의주의 속에 차곡차곡 쌓인다.


늦어

ㅠㅠ

미안해


그러나 적당히 유지되던 분주함은 빠르게 평균치를 넘어 몸집을 불려갔다. 의주는 요즘 매일 같이 니콜라스에게서 비슷한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있었다. 늦게 귀가 할 예정이니 먼저 자라는 뜻을 담은 짧은 문장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니콜라스가 촬영한 룩북 화보가 이곳저곳에 꽤나 바이럴 된 모양이었다. 개중에서도 눈길을 끈 건 니콜라스. 메인이 아니라 분량이 많지도 않았는데 각종 SNS며 커뮤니티에서 마스크가 좋다는 말이 이어졌다. 브랜드에서는 시류를 읽고 비하인드 사진이나 숏폼 영상을 거듭 업로드 하며 열심히 노를 저어댔다. 그 모든 것이 너무도 빠르고 거침 없었다. 그들은 니콜라스와 단발성 계약으로 그치려던 것을 엎고서 새로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앞다투어 연락이 들이닥쳤다.



니콜라스는 이제 아침 일찍 나가서 자정이 지나서야 돌아온다. 그렇게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면서. 평소에는 알람을 수십 개씩 맞추고서도 좀비처럼 잠들어 있으면서. 비척비척 일어나 대충 넝마 같은 걸 주워 입고서 집 앞에 도착한 택시를 타기 위해 신발을 꿰어 신는 그의 동그란 머리통. 셋팅하지 않아서 부슬부슬한 머리카락. 어느새 의주가 직접 염색해줬던 어설픈 색깔은 모두 사라지고 전문가의 손길이 닿아 근사한 금발로 변모했다. 백색에 가까운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으려면, 니콜라스가 슬쩍 고개를 들어 웃는다. 가로로 길게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이른 시간인 탓에 푹 잠겨 있다.


" 왜? "

" 아니 ...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

" 의주. 가서 자. "


눈이 피곤해. 니콜라스가 잠이 달라붙은 의주를 보며 작게 웃는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도 당장이라도 잠들고 싶어 보이는데. 의주는 하품을 꾹 눌러 참으며 살짝 몸을 숙여서 니콜라스의 어깨를 쥔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제법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주는 최근의 모의고사에서 충격적인(이대로라면 삼수가 불가피한...) 점수를 받고서 매일 자정 넘어서까지 학원에 처박혀 있다가 돌아왔다. 주말에도 저녁까지 자습실에 나가는 덕에 자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어차피 집에 돌아와 봤자 아무도 없으니 차라리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 머리 ... 예쁘네. "


신기해, 색깔이. 의주가 아직 몽롱한 채로 성큼 가까워진 니콜라스의 뺨을 응시하며 웅얼댔다. 그렇게 바빴던 탓에 금발이 되어 버린 니콜라스를 이렇게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이다. 왠지 어색하면서도 신기하다. 입술이 반쯤 벌어져서 웃던 니콜라스의 뺨이 미세하게 굳는다. 그는 잠시 의주의 표정을 살피다가 어색한 몸짓으로 엉덩이를 떼서 일어났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두었던 니콜라스의 핸드폰에 택시가 거의 다 도착했다는 알람이 반짝거린다. 그것을 흘깃 확인한 의주가 고개 돌려 하품하며 설렁설렁 손을 흔들었다. 이어 곧장 나서려던 니콜라스는 멈칫하며 고개 돌려 다시 룸메이트를 마주 본다. 의주가 상냥한 눈을 하고서 무언가 할 말을 기다렸다. 니콜라스는 여전히 평소와 같은 시원한 웃음을, 그러나 어딘지 묘하게 어색한 투로 뱉어 낸다.


" 다음에. 놀러 와. "

" 응? "

" 주주는 보러 와도 돼. 나, 일 하는 거. "


사진이랑 비디오. 니콜라스가 손을 들어서 카메라로 무언가를 찍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의주는 그제야 니콜라스가 제 촬영장에 오라고 초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긴 했으나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볼 생각은 한 적 없는 부분이었다. 의주가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정말? 하고 되묻자 니콜라스는 열심히 고개를 주억댄다. 다음에, 의주 안 피곤하면. 의주 공부 많이 안 하는 날에, 나, 일하면 ...


니콜라스가 장황하게 설명을 덧붙이려 했으나 곧장 전화가 걸려 온다. 건물 아래에 도착한 택시 기사다. 의주가 얼른 가보라며 손을 뻗어 다시 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문틈으로 훅 밀려 들어온다. 니콜라스가 계단을 밟아 내려가다 멈춰 서서 난간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 다녀온다는 인사를 짤막한 두 글자로 벙긋거린 노란 머리가 곧장 시야에서 사라진다. 의주는 그를 실은 택시일 것이 분명한 차가 묵직한 엔진 소리를 내며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현관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바쁜 탓에, 니콜라스는 말 해놓고도 바빠서 까먹었을지도 모르지만. 의주는 니콜라스의 그 제안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자습실에서 펜대를 굴리면서도 쉬는 날과 니콜라스의 촬영 일정이 언제쯤 들어 맞을지 고민했다. 도통 오르지 않는 성적이나 외워야 할 산더미 같은 단어 같은 것이 자꾸만 후순위로 밀려났다. 덕분에 의주는 니콜라스의 주말 촬영과 제 시간표의 공백기가 맞아떨어지자마자 할 일을 정했다. 오후 자습을 도중에 가방을 싸서 학원을 탈출했다. 잡는 사람이 없는데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것이 허튼짓을 하기 때문인지, 혹은 곧 니콜라스의 촬영장에 가기 때문인지 헷갈려 괜히 가슴팍을 몇 번 때렸다. 버스를 잡아 타서는 니콜라스가 아침에 제게 보내둔 문자 메시지를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애매한 시간대라 차가 막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학원에서 스튜디오까지는 멀지 않아서 예상외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종종 지나다니던 길이라 지하에 이렇게 넓은 촬영장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의주는 큼지막한 조명을 들고 철제 계단을 오르는 스태프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하고는 겨우겨우 니콜라스를 찾아 아래로 내려왔다. 희한하게 입은 모델들이 귀퉁이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조그만 몸에 비해 현저히 무거워 보이는 옷더미를 든 여자들이 종종걸음으로 의주 앞을 스쳐 지난다. 그는 난생처음 보는 풍경에 주변을 부지런히 살피며 슬그머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힐끗 의주를 보고 쟤는 누구야? 싶은 표정을 지었으나 묻지는 않았다. 워낙에 많은 인간들이 왔다 갔다 하는 중이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의주는 행여나 제가 무엇이라도 건드릴까 봐 한창 촬영 중인 스태프들 뒤로, 발걸음 소리에도 주의하며 살금살금 움직였다. 앞쪽에서 허연 플래시가 펑펑 터진다. 가죽 소파와 캐리어, 옷더미 따위가 잔뜩 널려서 촬영 현장을 꾸미고 있었다. 의주는 이런 쪽에 문외한이라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 백스테이지? 아니면 ... 탈의실? 대충 그런 ... 느낌의 컨셉인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인간들 너머의 모델을 응시했다.


니콜라스가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바스락거리던 머리는 무얼 바른 건지 윤기가 흐르고, 렌즈 때문에 눈이 회색으로 빛난다. 그가 입은 상의가 짧아서 팔을 드니 납작한 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래에 입은 바지는 위에 플리츠 스커트를 덧대서 꼭 교복 치마를 입은 것 같았다. 그 밑으로 헐렁거리는 니삭스와 굽 높은 부츠, 걸을 때마다 덜그럭 소리가 날 듯한 장신구들이 이어진다. 니콜라스가 평소 입는 옷보다도 훨씬 과한 스타일에 의주는 무어라 평가를 내리지도 못 하고 숨죽여 그를 구경하기만 했다.


카메라를 든 스태프가 뭐라고 외칠 때마다 니콜라스는 익숙한 듯 몸을 움직인다. 무서운 표정을 하고서 소파에 삐딱하게 걸터앉는다. 목걸이를 입에 물고 이를 드러내는 이상한 표정을 짓거나, 거의 가슴팍이 다 보일 정도로 옷을 잡아 올리기도 했다. 의주는 누군가 잠시만요, 하고 제 앞을 슥슥 스쳐 지나는 데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 하고 그 자리에 붙박여서 계속해서 니콜라스만을 쫓았다.


같은 집에서 눈을 뜨고 밥을 먹는 그가 꼭 다른 세계 사람 같이 느껴졌다. 거리감이 느껴진다, 정도의 단순한 말로 표현 하기에는 복잡한 기분이다. 완벽하게 꾸며진 니콜라스는 꼭 게임 캐릭터나 만화 주인공 같아서. 의주가 잠깐이라도 한 눈을 팔면 어딘가로 사라질 것만 같다. 그저 흥미로 가득하던 의주의 심장이 듣지 못 한 소리를 내며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요즘 둘 다 바빠서 얼굴을 마주 보는 시간이 줄어든 탓에, 억지로라도 머리 밑에 묻어 두었던 생각이 다시금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낸다. 의주는 제가 이곳에 왜 오게 되었는지 생각한다. 니콜라스가 놀러 오라고 했으니까. 니콜라스가 뭔데? 룸메이트. 그냥 그것뿐?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그것 뿐? 그러니까, 좀 많이 친해서 ... 살을 섞기도 하는 ... 그런 ...


스스로와의 스무고개를 꼬박꼬박 이어가던 의주가 슬그머니 입술을 깨문다. 저는 아직까지도 니콜라스와의 관계를 정의하지 못 하고 있다.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일이다. 어떻게든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우리 섹스했으니까 이제 사귀는 거야"라고 단언해 버리기에, 의주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단순히 귀엽지만 성가신 고양이 같은 룸메이트 따위로 치부하기에는 이제 정도가 한참 지나치다.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늘 목구멍에 턱 걸려 있는 무언가가 미묘하게 거슬렸다. 니콜라스가 저를 바라보는 표정을 보면 그 찝찝함이 배가 됐다. 그는 언제나 제게 무언가 말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지 않는다. 몸을 붙이며 치대오거나 시답잖은 장난을 치는 짓은 잘만 하면서도. 언제나 알맹이를 숨긴 채 심장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의주는 그것이 미치도록 궁금했다.


" 의주! "


멍하니 생각에 잠긴 얼굴이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 깨어난다. 의주는 익숙한 목소리가 저를 불러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여있던 스태프들이 흩어지고 니콜라스가 그 틈에서 성큼성큼 다가온다. 얄쌍한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가까이 마주 보니 눈에도 무언가 잔뜩 발라서 시커멓고 입술도 체리 색으로 반질반질 빛났다. 의주는 괜히 어색해서 하하, 하 하고 바보처럼 웃었다.


" 언제 왔어? "

" 어. 어, 방금 ... "

" 봤어? 나? "

" 응. "


완전 멋져. 의주가 뻣뻣하게 엄지를 들어 보였더니 니콜라스는 얼굴을 구기며 우스워 했다. 그는 의주를 끌고 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간식과 음료 앞으로 데려갔다. 달아 빠진 맛이 나는 쿠키 하나를 쥐여 주면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촬영이 마칠 거라고 비밀스레 속삭이는 그에게서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났다. 종종 의주의 누나가 데이트를 앞두고 한껏 힘 줬을 때나 겨우 맡아 보던 것이다.


" 잘, 열심히 해. "

" 응. 고마워. "

" 여기 ... 있을게. 딱 보이지? "


금세 촬영이 재개되어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가려는 니콜라스에게 의주가 부러 쾌활한 투로 말했다. 열심히 포즈를 취하다가도 고개를 돌리면 얼핏 눈이 마주칠 수 있을 위치에 섰다. 비록 스태프들 틈에 반쯤 가려지겠지만, 다른 이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훌쩍 솟아 있는 덕에 얼굴을 볼 수는 있을 테다. 그에 살짝 긴장한 듯 뻣뻣해지려던 니콜라스의 표정이 누그러든다. 응.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덧붙인다. 볼게.


그러나 갈아입은 새 옷이 이전의 것보다 현저히 거추장스럽기 때문인지, 혹은 스태프들 사이에 간간히 벌어지던 말싸움이 문제였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니콜라스가 저를 보는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 해서인지 ... 재개 된 촬영은 쉬이 나아가지 못 하고 삐그덕댄다. 의주가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자꾸만 누군가 촬영을 끊고 가자고 소리를 질렀다. 니콜라스의 굳은 얼굴 위로 메이크업 브러쉬가 춤을 춘다. 그는 조금 더 크게 포즈를 취해 보지만 이번에도 OK 사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사진작가가 소리를 지른다. 야! 너! 하고 니콜라스의 이름을 두고 낯선 호칭을 불러댔다. 의주는 그가 당황해 서둘러 허리 접으며 유달리 또렷한 발음으로 죄송합니다, 하는 것을 가만히 쳐다 보았다. 그러나 이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걸음을 돌려 촬영장 밖으로 걸어 나와 버렸다.


다행히 의주가 근처를 서성거리고, 스탭들에게 누굴 보러 온 거냐는 질문을 듣고서 당황하는 동안 사태는 서서히 해결 되었다. 금방 촬영이 끝날 거라는 니콜라스의 말은 거짓이 아니어서 의주는 많이 기다리지 않고서 파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니콜라스가 저와 비슷한 차림을 한 모델들과 나란히 서서 열심히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어딘가에서 뜨뜻미지근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기에 의주도 덩달아 손뼉을 부딪혔다. 제 박수 소리가 제일 큰 덕에 니콜라스가 힐끗 이쪽을 보며 웃었다.




" 수고했어. "


니콜라스가 환복하고 나오는 동안 무어라 인사 해야 할까 고민하던 의주는 그와 다시 얼굴을 보자마자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그는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었지만 화장을 지우지 않아서 여전히 세상과는 붕 떠 보인다. 그러나 이내 뾰족한 눈이 둥그렇게 말려들도록 웃어 보이는 얼굴은 의주가 익숙하게 아는 니콜라스와 같았다.


" 다 끝난 거야? "

" 응. 가자. 나, 저녁 살게. "

" 갑자기? "

" 배고프지 않아? "

" 약간. ... 뭐 사주려고? "

" 뭐 좋아? "


니콜라스가 제 어깨를 툭 치고 인사하는 스태프에게 손 흔들어 인사하며 물었다. 친구예요? 스태프가 니콜라스와 의주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의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스태프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니콜라스의 등을 몇 번 더 두드린다. 짧은 대화가 이어지다 이내 그가 떠나고, 니콜라스는 다시 제 동거인 쪽으로 몸을 돌린다. 의주는 제법 친해 보이는 그 일련의 행동을 가만히 곱씹어 보다가 웅얼대듯 답했다.


" 고기 ... "

" 고기? "

" 많이 먹을 거야. "

" 갑자기? "


좋아. 니콜라스는 어딘가를 쳐다보듯 시선을 피하는 의주가 의아하다고 생각하지만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스태프들이 우르르 계단을 올라 빠져나오는 것을 지나쳐 둘이서 나란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가게로 향하는 걸음은 호기로웠으나 결국에 도착한 곳은 흔한 고깃집. 저녁 시간이 약간 지났는데도 손님으로 제법 붐빈다. 의주의 등 뒤로 벽에다 분홍색 네온사인으로 유치한 문구가 쓰여 있는 것을 니콜라스가 눈 사이를 좁히고 더듬더듬 읽는다. 인생, 은 ... 고기서 ... 고기다 ...


" 어때? "


이어 주문한 만큼 고기가 불판 위에 치이익 소리를 내며 올라가고 의주는 집게를 든 채 묻는다. 미리 나온 계란찜을 떠먹던 니콜라스가 되묻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일단 먹어. 의주는 니콜라스가 또 촬영을 위해 몇 날 며칠 식단 조절에 힘썼다는 걸 알고 있기에 자연스레 테이블 위를 턱짓했다. 평소에는 한 끼에 햄버거 여러 개를 눈 깜짝할 새에 먹어 치우면서 일을 앞두고는 거의 굶다시피 했다. 그의 예상대로 니콜라스는 몹시 허기 진 상태였기에 묵묵히 수저를 들었다. 결국 고기가 다 굽힌 뒤에는 반찬을 전부 싹 다 리필했다.


" 재밌어. "


의주가 앞에 놓아준 고기를 몇 점 집어 먹고서야 약간 혈색이 좋아진 니콜라스가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한다. 의주가 앞전에 물은 어때? 에 대한 답임이 틀림 없다. 의주는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


" 다행이네. "

" 응. 어땠어? "

" 잘 하던데. 엄청 멋있었어. "

" 얼마나? "

" 많이. "

" 응. 다행이다. "

" 사람들이 잘 해줘? 어려운 건? "

" 좋아. 없어. "


불판을 가득 채웠던 고기는 익는 대로 금방금방 사라진다. 의주가 이것저것 물으면 니콜라스가 약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낯선 타지에서 생소한 일을 하는 것에는 분명히 많은 어려움이 따르겠으나 티 내지 않으려 하는 티가 역력했다. 의주는 오랜만에 저와 마주 봐서인지, 혹은 일이 끝났다는 해방감 때문인지 묘하게 들떠서 웃음이 헤퍼진 니콜라스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그렇게 한참을 대화하다 보니 문득 처음 만났을 때보다 그의 어휘력이 월등히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며 자연스레 습득했을 것이다. 니콜라스는 이제 엉뚱한 조사를 쓰거나 뜬금없이 제게 존댓말을 하는 등의 실수는 거의 하지 않는다.


" 니콜. 이제 얘기 잘 하네? "

" 아아. 공부했지. "

" 진짜? 이제 쓰는 것도 잘 돼? "

" 조금. "


니콜라스가 무언가 보여주려는 듯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는 동시에, 누군가 두 사람의 테이블로 다가온다.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남녀 커플이다. 아까 전부터 계속해서 이쪽을 힐끗대는 것을 느꼈으나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의주는 본능적으로 긴장한 채 그들을 올려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양 팔에 타투가 가득하고 괴상한 옷을 입어서 약간 무서워 보였다. 행여나 취객의 쓸데없는 시비라면 당장에 도망치겠노라 비장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그들은 니콜라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조심스레 묻는다.


" 저. 혹시 ... "

" 네? "

" 니코 ... 맞죠? "


그러면서 작은 창이 띄워진 핸드폰을 들이민다. 희한한 차림새의 니콜라스가 포즈를 취하는 컷이 짧게 이어지는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니콜라스는 그것을 확인하더니 표정이 한층 밝아져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그 답에 커플이 꼭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난 소녀처럼 수줍은 비명을 지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곧장 카운터에서 펜을 빌려 핸드폰 뒷면에 큼지막하게 싸인을 받는다. 의주는 니콜라스가 그들과 악수하고, 브이 한 채 셀피를 남기는 것을 가만히 구경했다. 제 룸메이트는 알지 못 하는 낯선 사람들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 우와. 진짜 대박 ... "


의주는 가게를 나와서도 계속해서 같은 소리를 중얼댔다. 그만해. 니콜라스가 머쓱하게 팔뚝을 착 소리 나게 때린다. 몸에서 고기 냄새가 풀풀 풍겼다. 니콜라스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조용히 하라며 입가에 검지를 갖다 대고 있다. 그러나 의주는 지금 제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그가 왠지 색다르게 느껴져서 감탄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 신기해. 이런 거 실제로 처음 봐. "

" 나도 처음이야. "


식사를 마치고 니콜라스가 의기양양하게 카드를 내밀었더니 이미 계산이 완료 되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따져보니 아까 니콜라스에게 말을 걸었던 커플이 두 사람의 테이블까지 결제한 것이다. 당황스러운 동시에 신기했다. 니콜라스는 곤란하다는 듯 목덜미를 긁적거렸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의주에게 딱 붙어서 싱글댄다.


" 나 때문이지? "

" 일 할 때 쓰는 이름, 니코야? "

" 응? 나 때문? "

" 확실히 그게 더 직관적이긴 하네 ... "


아. 의주!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니콜라스가 다시 주먹으로 그를 툭 건든다. 의주가 괜히 밀려나는 척 하면서 소리 내 웃었다. 응. 니콜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둘이서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신 탓인지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허리 숙여 인사하는 퍼포먼스까지 해 보였다.


" 두 개로 줄였어. 네 개 많아, 라고 해서. "


니콜라스가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설명했다. 니코. 확실히 조금 더 예명 같은 느낌도 있고, 두 글자라 심플하니 임팩트 있다. 그러나 의주의 입 안에서는 아직 니콜라스라는 쪽이 더 익숙해서 그는 몰래 니코라는 새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지하철 역이 가까워졌지만 왠지 더 걷고 싶은 기분에 하염 없이 골목을 지난다. 중간에 마주친 편의점에 커다란 천막이 나부꼈다. 예전에 니콜라스와 1+1으로 몇 번 나눠 먹었던 아이스크림 행사를 재진행 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이후로는 따로 사 먹은 기억이 없다. 니콜라스도 의주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편의점을 가리키며 아이스크림? 하고 물었다. 의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익숙한 패키지의 아이스크림을 두 개 골라 계산했다.


" 니콜. 이러다 연예인 되는 거 아냐? "


그렇게 둘이서 묘하게 시원한 듯 후덥지근한 듯한 바람이 부는 길을 걸으며. 드문드문 마주치는 행인의 눈을 피해 가며 괜히 서로를 쿡쿡 찌르는 유치한 장난질을 늘어놓다가. 의주가 불쑥 물었다. 약간 녹은 아이스크림이 손에 묻어서 인상을 찌푸린 니콜라스가 그 말에 의주를 홱 돌아본다.


" 응? "

" 아까 싸인도 하고. 셀카도 찍고. 오늘 촬영한 것도 좀 있으면 공개되는 거잖아. 그러면 사람들이 이제 더 많이 알아보겠다. TV 광고 같은 것도 찍을 지도 몰라. "

" 그럼 ... 좋지? 싫어? 좋은 거 아냐? "

" 응? 좋다고? "

" 돈 많이 벌어서. "


니콜라스가 손으로 동그랗게 돈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킥킥 웃었다. 농담으로 넘기려는 듯한 모양새지만 의주는 왠지 묘하게 입꼬리가 뻣뻣해진다. 그의 눈 아래서는 줄곧 오늘 하루가 토막 나서 끝 없이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촬영장에서 니콜라스를 마주했을 때부터 속이 어수선했다. 그가 열심히 일하고 그에 따르는 유명세를 얻는 게 싫은 것이 아니다. 카메라 앞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말하는 니콜라스는 굉장히 근사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의주의 마음을 미묘하게 건드리는 지점은.


그가 점점 저와 멀어지고 있다는 감각. 방 두개짜리 빌라에서 까치집 지은 머리로 아침에 마주 보는 룸메이트 니콜라스와, 불특정 다수에게 얼굴이 알려진 모델 니코. 전자와는 살 부대끼며 살아 왔으나 후자는 낯설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카메라 앞에서 즐거워 보인다. 이대로라면 그가 점점 더 바빠질 테고, 앞으로 맘 편히 밥 먹고 길을 걸을 날이 얼마나 남았을 지 괜히 짐작하게 된다. 그는 의주가 모르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토록 빛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주는 문득, 니콜라스가 저의 방 두개짜리 빌라가 아니라 다른 곳에 사는 모습을 그려본다.


" 돈 많이 벌면 ... 막. 엄청 좋은 집. 연예인 돼서, 회사도 들어가고. 방송도 나가고 그러겠네. "

" 그러면 좋지. 부자 좋잖아. 돈 많은 사람, 좋은 건데. "

" 이제 연예인 친구도 많이 사귀고. 유명한 사람들이랑 놀고. "

" 그것도 좋아. 친구 많으면. "


묘하게 말투가 가라앉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니콜라스는 이것이 모두 장난이라 여기는 건지 히죽대며 잘만 대꾸한다. 의주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그 얼굴을 보며 묘하게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줄곧 제 속에서 소용돌이 치던 무언가가 돌풍처럼 들이친다. 이것은 그가 늘 골몰하던 것과 맞닿아 있다. 명쾌히 정의 내리지 못 한 관계에서 비롯 되는 묘한 거슬림이었다. 의주는 여전히 무명으로 존재하는 제 룸메이트를, 어쩌면 곧 동거인이 아니게 될 지도 모르는 남자의 허연 목덜미를 보며 충동적으로 말을 잇는다.


" 응. 그러면 이제 나랑은 잘 안 보겠네. 바쁘니까. "


그러나 문장을 뱉는 동시에 후회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스스로 들으면서 의심 될 지경이었다. 여태 실컷 아무렇지 않은 척 해놓고서는. 사실은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을 단박에 들킨 것이나 다름 없다. 이렇게 유치하게 들켜 버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낭패라는 생각에 의주는 머쓱하게 웃으며 아니, 있지, 하고 서둘러 고개 돌려 니콜라스를 내려다 본다. 그는 분명 이상한 표정을 하고서 저를 놀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다.


" ... "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니콜라스는 가만히 멈춰 서서 눈을 마주친다. 어정쩡하게 든 오른손에는 다 먹고 남은 아이스크림 막대가 덜렁 들려 있다. 그는 차마 태연하게 웃지 못 하고 바보 같은 얼굴을 한 의주를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대답한다.


" 그런 생각 안 해. "


여전히 웃지 않는 매끈한 낯이 골목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창백한 색으로 빛난다. 니콜라스가 습관처럼 입술을 축였다. 의주는 제가 든 아이스크림이 약간 녹아서 손가락을 끈적하게 더럽히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차마 움직일 수가 없다. 니콜라스가 제 뺨을 쳐다보는 눈이 꼭 송곳 같아서 가만히 붙박여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는 오래도록 혀 끝으로 말을 고르다가 아주 훌륭해진 발음으로 꼭꼭 씹어 뱉듯이 대꾸했다.


" 난. 지금 ... 좋아. "

" ... 어? "

" 의주 조금 덜 바빠면 좋겠어. 그게 끝. "


끝, 하고 말하는 동시에 마치 마법이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니콜라스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의주가 삐그덕거리며 겨우 그 뒤를 쫓아갔다. 약간 거리가 벌어지나 싶어 서둘러 따라잡았더니 니콜라스의 표정이 보였다. 그는 답지 않게 바닥만 보며 침묵하고 있다. 평소처럼 큰 소리로 웃으며 제 몸을 퍽퍽 때리거나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지 않으려나, 짐작했으나 그 어떠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탓에 애매한 침묵이 터질 것처럼 부푼다.


그리고 의주는 이 고요함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종종 니콜라스가 답지 않게 굴 때가 있었다. 이러한 순간은 특정한 상황에서 주로 찾아왔다. 편한 분위기에 긴장감이 끼어들 때. 왠지 간지러운 행동을 하거나, 투닥거리다가도 묘하게 민망해지는 찰나. 의주는 그럴 때마다 애써 제 표정을 숨기려 들면서 니콜라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싶었다. 그러면 니콜라스는 언제나 평소처럼,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눈을 하고서도 먼저 홱 고개를 돌렸다. 그것으로 손쉽게 침묵은 부서지고 시간은 흘렀다.


그렇게 가득 미뤄둔 감정이 도대체 얼마나 묵혀져 있을까. 의주는 니콜라스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지금도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역시 오늘 촬영장에서 저를 보며 시끄러운 속이 야속했을까? 간만에 마주한 얼굴을 보니 반가움에 절로 웃음이 나왔을까? 그 무엇에도 집중되지 않아 자꾸만 고개가 돌아갔을까?


니콜라스의 속이 궁금하다. 저 날카로운 눈매 아래에 깃든 생각이 알고 싶다. 거침없이 제게 돌진하는 듯하다가도 갑자기 커브를 틀어 버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을 니콜라스의 언어로는 어떻게 표현하는지,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제게 전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인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넘겨짚으며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그것은 오만일 뿐이다. 의주는 그가 애써 쥐고 있는 날것의 마음이 궁금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제 것을 먼저 내어줘야 한다. 아주 오랜 관찰 끝에야, 기나긴 탐구를 마치고서야 비로소 찾아낸 해답이었다. 의주는 이것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위태로운 짐작은 하지 않는다. 드디어 니콜라스의 문법의 첫 챕터를 읽어낸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 니콜. "


약간 앞서 걷던 니콜라스가 느리게 멈춰 선다. 말 없이 돌아보는 얼굴 위로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았다. 짙은 화장이 조금도 지워지지 않아서 눈두덩이가 시커멓다. 만지면 바사삭 소리가 날 것처럼 셋팅해둔 금발 머리카락도 완벽하다. 꼭 다른 차원에 사는 사람 같은 모습. 그러나 의주는 잘 커스텀 된 게임 캐릭터와 마주했다고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저는 그 너머, 니콜라스의 속내에 도전하고 싶은 것이니.


" 싫으면 ... "

" 응? "

" 나 때려도 돼. "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전에, 니콜라스의 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 막대가 툭 하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 맞닿는 입술에서는 무언가 덧발라 미끌거리는 화장품 맛이 느껴졌다.

… 오. 갑자기? "


그래 ...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의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저도 젓가락을 들었다. 절대 니콜라스가 제게 "핸썸"하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급한 대로 하루, 갈 데가 없다니 일주일, 길바닥에 내쫓았다 죽을까 봐 한 달. 그런 식으로 차곡차곡 쌓은 끝에 벌써 석 달이 넘어 가는 중이었다. 니콜라스는 이제 매달 전기세가 얼마 정도 나오는지, 이 집에 손톱깎이가 어디 있는지, 치약을 얼마에 한 번씩 사는지를 안다. 의주가 종종 말하는 "존나"가 무슨 뜻인지, 가끔 통화하는 친누나의 이름이 뭔지, 편의점에서 어떤 맛 삼각김밥을 사 먹는지도 알았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동거였다. 딱히 복잡 할 건 없다. 문자 그대로 "같이" 살았다. 각자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공유 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니콜라스가 얹혀사는 거지만 의주는 딱히 주인 행세를 하려 들진 않았다. 널리고 널린 2인 동거의 모습이었다.


물론, 한 없이 파고들면 예민해질 부분도 있지만. 무사 평탄한 동거에서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지점. 의주는 잠든 니콜라스만 보면 답지 않게 속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같은 침대에서 반쯤 벗고 있는 남자를 보면, 누구나 그럴 터였다.


마치 일상 같았다.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운 행동의 연속이었다. 조금의 알코올이 들어가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세상이 조금 느리고 축축했다. 니콜라스와 맥주를 나눠 마셨다. 잘 못 된 미디어의 영향이 컸다. 스트레스 받으면 겁 없이 알코올로 정신을 마비 시키는 인간들이 TV 너머로 매일 같이 등장했으니. 몇 년이고 처박아 뒀던 공부를 뒤늦게 따라잡기 위해 종일 학원에 갇혀 혹사 당하는 재수생 변의주는 그야말로 온 신경이 아주 뾰족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딱 하루 주어지는 쉬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하원길에 치킨을 사서 돌아오다가. 4캔 만원이라는 편의점 앞 큼지막한 글씨가 그날따라 유달리 뇌리에 박혀서.


보는 눈도 없는데 이깟 보리 음료 좀 마신다고 하늘이 두 쪽 날 리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홀짝이고 나니 제법 머리가 둔해졌다. 니콜라스 역시 그런 듯했다. 까만 눈을 느리게 나풀대면서 맞닿은 살에도 가만히 있었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운데 꼼짝도 않고 시선을 마주했다. 입술이 부딪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표정이었다.


키스를 시작으로 끝을 모르고 고조 된 분위기를 타고 침대로 향했다. 정신이 없었다. 벗은 살을 부대끼는 게 어색해 허둥대지 않도록 조심했다. 의주는 연습생 생활 중에 잠깐 만나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사실 제대로 몸을 섞었다기보다는 서로를 더듬고 끝 없이 입술을 맞댄 정도였지만. 어쨌든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숨이 차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 저 멀리 떨어져 있던 두 몸이 하나로 뭉치는 듯한 착각.


똑같았다. 니콜라스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의주를 받아 들였다. 자연스레 목에 팔을 감고 입술을 찾았다. 어쩌면 의주가 더 허둥대고 서툴렀기에 그는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둘 중 하나라도 알고 있기에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질 수 있다는 이해에 다다른다. 마른 몸끼리 부딪힐 때 마다 깊은 숨을 뱉었다. 땀에 젖은 얼굴에는 어떠한 의문도 없었다.


그 뿐이었다. 의주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니콜라스와 잤고, 이젠 거의 일상이 된 참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싫은 기색을 비춘 적이 없었다. 딱히 유별나게 굴지도 않았다. 섹스를 하는 것 뿐이다. 평범한 동거인 사이에서 추가 된 건 딱 하나였다. 주기적으로 몸을 섞는 다는 것, 그거 하나.


남들에게 떠벌리고 다닐 만한 사실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둘 사이에선 솔직해야만 했다. 의주는 당연히 니콜라스가 싫지 않았다. 무전취식 하는 타인을 몇 달째 같은 공간에 두는 것 부터가 그랬다. 돕는답시고 어설프게 걸레질을 하거나 바닥을 물 범벅으로 만들며 설거지를 해 놓는 것도 쿨하게 칭찬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어떠한 무언가. 관계의 깊이에 대해 물으면 선뜻 대답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좋으니 섹스하고, 섹스하는 것도 좋지만 그 행위에 따라 오는 감정을 또렷이 칭하기는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귀여운 동물이나 친한 친구들을 보면 으레 들곤 하는 마음. 의주는 제가 니콜라스를 보면 그와 비슷한 것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귀엽고, 손을 잘 타지만 약간은 까다로운 고양이. 뾰족한 낯을 하염없이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고양이. 지친 몸을 끌고서 집에 돌아왔을 때 반겨 주면 속이 따뜻해지는 그런 … 고양이 정도.


남들이 들으면 미친 놈이라고 손가락질 하겠으나 의주도 나름대로의 변명이 있다. 탓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니콜라스는 늘 손쉽게 침묵을 택했다. 관계의 정의를 내리려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는 으레 애인 사이에서 하려 드는 행위를 바라면서도, 홀딱 벗고서 제 마른 등을 껴안으면서도 ... 무언가를 말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어휘력이 부족한 탓은 아니다. 종종 키스를 나누다 마주치는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니콜라스의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와 제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태도를 느낄 때마다. 의주는 그가 제게 이것저것 따져 물을 것이라 짐작했건만, 야속한 동거인은 늘 입을 꾹 다물고서 차라리 몸을 부벼오는 편을 택했다. 고로 그와의 관계는 언제나 같은 자리를 맴돌 수 밖에 없었다. 익히 말 했듯 섹스를 한다는 것을 제외 하면 처음과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사이였다. 눈이 마주치면 키스하고, 서로 어떤 체위를 가장 좋아하는 지도 알게 됐지만 그 뿐이었다.


그래서 생각이 깊이를 더하질 못 했다. 비록 지금은 제 옆에서 헐벗고 자고 있지만, 일어나면 니콜라스는 또 평소와 같이 행동 할 터였다. 주주 빵 먹어. 주주 리모콘 어딨어. 주주 마트 가자.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평범한 동거인. 그 뿐이었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그 쯤으로 받아 들이고 싶었다. 그게 정신 건강에 좋았다. 고양이를 닮은 룸메이트. 그 정도로.


니콜라스의 마른 날개 뼈를 바라보던 의주가 돌아 누웠다.







" 주주, 나 빌려줘. "

" 뭐? "

" 그 셔츠 … 이렇게. "


니콜라스가 손으로 제 상체를 비비며 말했다.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더니 비비는 손길이 더 빨라진다. 늦은 저녁으로 먹을 계란말이를 위해 양파를 다듬던 의주가 칼을 내려 놓고 니콜라스를 빤히 쳐다봤다. 아아. 그제야 옷장 한 켠에 걸려 있을 제 흰 셔츠를 떠올렸다. 매일 학원-집이나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최근에는 대부분 추리닝 차림이라 손대지 않은 옷이었다. 깨끗이 빨아서 입지 않고 그대로 두기만 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묵직한 캐리어를 가득 채우던 니콜라스의 희한한 껍데기들. 의주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옷만 고집하던 그가 어쩐 일로 갑작스레 베이직한 셔츠를 찾나 싶어서였다.


" 왜? "


그러나 니콜라스는 식탁 위에 펼쳐둔 노트북에 빨려 들어갈 기세다. 게임 렙업에 어찌나 열중했는지 의주의 노트북은 출고 이후 최대치의 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터넷 강의를 듣는 용도라 사양이 좋지 않은데도 꿋꿋이 낮은 그래픽으로 이것저것 찝쩍댔다. 매일 새벽까지 쿨러가 열심히 돌아갔다. 야아 ... 이제 자자. 자다 깬 의주가 니콜라스의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그럼 뚫어져라 노트북을 쳐다보고 있던 얼굴이 히 웃으며 위로 향한다. 솟아 오른 뺨으로 모니터의 색색이 비쳤다. 조금만 더 하고 자겠다는 소리였다.


" 나 일해. "


의주의 의아한 표정을 읽은 건지 니콜라스는 싱글싱글 미소를 띈 채 말했다. 일? 의주가 되묻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의주는 니콜라스와 스무고개 하듯 질문을 주고받았다. 오랜 질의응답 끝에야 정확히 그가 하는 일이 뭔지, 어디서 하는 건지, 얼마나 이어질 노동인지 알게 됐다. 허울 뿐인 소속사가 폭삭 망한 뒤, 임원들 마저 뿔뿔이 흩어지게 됐는데 개중 실장 하나가 여태 그를 맘에 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긴 머나먼 타국에서 반도로 저 하나 믿고 날아 온 놈을 한 순간에 내치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어쨌든 그는 뾰족한 수 없이 한국에 머무는 중인 니콜라스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줬다. 제법 인지도 있는 신생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다가올 시즌 룩북을 촬영하는데, 남자 모델로 니콜라스를 추천 한 것이다. 메인은 아니라 페이가 세지는 않아도 좋은 기회임은 분명했다.


그 촬영의 첫 미팅에 최대한 깔끔하게 가고 싶다는 것이 니콜라스의 계획이었다. 과연 그의 캐리어에는 공적인 자리에 적합한 옷이 거의 없었다. 북적이는 홍대나 이태원을 공작새처럼 꾸미고 다니기 제격이었으나, 아무래도 말끔함을 찾자면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는 보통 제 멋대로 주변을 쏘다니거나 안전한 의주의 스윗 홈에 머물렀으나 다가오는 낯선 출근길에는 적당한 단정함 역시 꼭 필요했다. 기왕이면 멋져 보이게끔.


깎아 놓은 듯한 이목구비와 보기 좋은 마른 몸을 갖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잘 할 것이다. 보아하니 젊은 남자들 타겟인 듯하니 또래의 그가 제격일 것이 분명하고. 의주가 핸드폰을 들이밀고 열심히 설명하는 니콜라스를 보며 멍해졌다. 엄청 ... 즐거워 보이네. 그런 생각이 든 탓인지 불쑥, 저도 모르게 손이 들렸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뒤통수 위로 마른 손바닥이 바삭거리는 진갈색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쓰다듬는다. 니콜라스는 이제 빨간 머리를 그만두었다. 지난 달에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의주가 직접 염색을 해줬다. 덕분에 군데군데 얼룩이 졌지만 대충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니콜라스는 제 머리카락을 흩트리는 의주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내 마주치는 길쭉한 눈이 옅게 웃는다.




니콜라스가 숨을 참는다. 의주는 직감적으로 그가 흥분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몸을 섞다 보니 발견한 버릇이었다. 니콜라스는 기분이 좋을 때마다 티 나게끔 호흡을 멈췄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숨을 먹고 버텼다. 동그란 이마가 땀 때문에 달라붙은 머리칼로 엉망이었다. 그의 허리를 붙들고 있던 의주의 손이 아래로 향한다. 꽤 거친 손길로 만지니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곧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그럼에도 니콜라스의 꼭 감은 두 눈은 그대로였다. 귓가에 헉헉대는 숨소리가 나지막했다.


" 니콜 ... "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실눈을 뜬다.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도 얼굴이 잔뜩 달아 오른 게 보였다. 의주는 그의 얼굴을 오래도록 내려다 보다가 다시 움직였다. 다시금 온 몸을 뻣뻣이 경직 하는 게 느껴졌다. 허연 가슴팍이 숨을 쉴 때 마다 가쁘게 들썩였다. 의주가 열심히 씹어 놓은 목덜미가 울긋불긋 했다. 넥라인이 깊은 티셔츠를 입으면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일 만한 위치였다. 느리게 눈을 꿈뻑이던 니콜라스의 고개가 홱 꺾였다. 의주는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제대로 이어지지 못 하는 이국의 문장이 방 안을 떠돌았다.


다시 어깨를 쥐어 잡고 입술이 맞물렸다. 막무가내로 들이댄 터라 앞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거친 키스에 고개를 틀어 피하나 싶던 니콜라스가 겨우 섞이는 혀를 받아 냈다. 입 안이 온통 축축했다. 등 뒤에 구겨진 이불이 불편해서 자꾸만 몸을 이리저리 들썩거렸다.


부쩍 표정이 부드러워진 얼굴이 새빨갛다. 의주는 그것이 민망한지 자꾸만 몸을 웅크리는 니콜라스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훅훅 숨을 들이 마시는 목덜미가 땀으로 반질거렸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의주가 빛을 받지 못 해 유달리 허연 날개뼈 틈새부터 옆구리까지 손가락으로 쑥 훑어 내렸다. 야! 하고 화들짝 놀란 니콜라스가 소름 끼친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깊은 곳에서부터 터질 것 같던 숨이 웃음으로 흩어진다.



말하지 않고 토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많이는 아니고, 조금. 의주는 가끔 니콜라스에게 유치하게 굴 때가 있었다. 보통은 니콜라스가 의주에게 장난을 많이 쳤는데 침대 위에서 종종 반대가 되었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 일종의 장난과 비슷했다. 대개 니콜라스가 완전히 지칠 때까지 마구잡이로 밀어 붙이거나 부러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등의 사소한 사건이었다. 이럴 때 마다 니콜라스는 등을 보이고 돌아 누워 입술을 삐쭉거렸다. 뜨거운 뺨을 겨우 식혀내면서,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는 의주는 무시 한 채.


" … 야아. "


의주가 여전히 등만 보이는 중인 니콜라스의 어깨춤을 쿡쿡 찌르며 불렀다. 미안해애. 귀여워서 그랬는데 ... 뒷 말은 삼킨 채로 살갗을 살살 긁듯 했다. 니콜라스가 살짝 돌아 누우며 의주를 흘겼다. 푸석한 머리카락이 낯에 엉망으로 달라붙어 있다.


" …… "

" … 삐졌어? "


단단히 심기가 꼬인 게 틀림 없는 낯으로 니콜라스는 꿋꿋이 의주를 째려본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어깨를 조심스레 문질렀다. 흉터 자국이 선명한 팔까지 조물조물 만지작거렸다. 간지러우라고 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슬슬 굳은 표정이 풀어지려 했다. 의주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꺼냈다.


" 내일 맛있는 거 사줄까? "

" … 뭐? "

" 너 먹고 싶은 거. "


니콜라스는 답을 내놓지 않고 눈만 깜빡거린다. 싫어? 되묻자 또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상체에 있는 점들을 잇듯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쉬는 날이 곧 돌아온다. 진짜 열심히 하는 애들은 쉬는 날에도 학원에 나가서 자습을 하지만 ... 사실, 의주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 하자면 할 수 없었다. 저는 다른 애들과 똑같은 시간 책상 앞에서 엉덩이 붙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버거웠다.


답답한 학원을 벗어나면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드물게 찾아온 자유의 낮에, 의주는 신기하게도 룸메이트의 얼굴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 밖에도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지만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니콜라스와 함께하는 코스만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없는 동안 니콜라스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다. 최근의 의주는 그에게 묘한 부채감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 제가 귀가하면 좁은 소파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을 볼 때라던가. 종일 제대로 얘기 나눌 사람이 없던 건지, 피곤한 저를 붙들고도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그를 두고서 먼저 잠자리에 들 때라던가. 가물가물 잠에 취한 시야로 니콜라스의 시무룩한 얼굴이 흐려질 때나, 결국 잠든 제게 이불을 덮어 주고서 자리를 뜨는 그 손길을 느낄 때 역시. 가슴 끄트머리부터 잉크처럼 서서히 물들여지는 희한한 죄책감을 떨쳐내려고 애쓰며 다짐하는 것이다. 내일은 조금만 더 힘내서 니콜라스의 일상을 물어 봐야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먼저 문자를 보내야지. 하루를 얘기하는 니콜라스를 귀담아들어야지 ... 하고서.


곧 니콜라스 역시 촬영이다 뭐다 일이 시작되면 함께 할 기회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의주에게 언제 쉬느냐고 몇 번이나 묻는 일은 점점 사라질 테고. 어쩌면 이제 저보다도 바빠져서 얼굴 볼 날이 드물어질지도 모른다.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할 일이 생긴 것이 기뻤으나 동시에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지기도 했다.


" 우리. ... 토요일에 어디 놀러 갈래? "


언젠가 그런 때가 오면, 지금 같은 날들을 그리워하게 될 것 같아서. 의주는 웅얼대듯이 물었다. 왠지 자신감이 없어져 입 안이 말랐다. 여태 니콜라스에게 특별히 어딘가에 가자고 먼저 제안한 적은 없었다. 시간이 비면 둘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일은 너무도 일상 같았으나, 제대로 된 목적을 가지고 특정한 장소에 가서 둘만의 시간을 보낼 생각은 해보지 못 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속에 잠들어 있던 충동은 이렇게 불쑥, 의주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만다.


말을 꺼내자마자 계속해서 토라진 상태를 유지하려던 니콜라스가 순식간에 돌아 눕는다. 부러 짜증을 꾸며내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금세 들뜬 티가 역력했다. 의주가 그에 크게 웃고 싶은 것을 참고 부러 느릿하게 되묻는다.


" 어때? "

" 완전 ... 좋아. "


어디 가? 한강? 홍대? 아, 너무 기대가 돼. 마주치며 웃는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힌다. 의주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런 질문 하나 뱉는 것에 긴장하는 스스로가 유치하게 느껴졌다.




니콜라스는 딱 의주가 짐작한 만큼 바빠졌다. 그가 좋아하는 간식도 멀리하고, 하루에 한 끼씩 먹어가며 고생해 찍어낸 화보는 금세 공개됐다. 모 쇼핑몰 사이트에 들어가서 "남자 반소매", "남자 스트레이트진" 따위를 검색하고 스크롤을 한 두 번 하면 니콜라스의 낯짝이 떡하니 드러난다. 의주는 늦은 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차창에 기대어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 본다. 희한하게 생긴 선글라스를 끼고 아래를 내려다 보는 니콜라스. 혀를 내밀고 눈을 찡그린 니콜라스. 갈비뼈가 다 보이는 티셔츠를 입고 바닥에 드러누운 니콜라스. 처음 보는 모습과 익숙한 모습이 뒤섞인 신인 모델의 면면이 의주의 속에 차곡차곡 쌓인다.


늦어

ㅠㅠ

미안해


그러나 적당히 유지되던 분주함은 빠르게 평균치를 넘어 몸집을 불려갔다. 의주는 요즘 매일 같이 니콜라스에게서 비슷한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있었다. 늦게 귀가 할 예정이니 먼저 자라는 뜻을 담은 짧은 문장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니콜라스가 촬영한 룩북 화보가 이곳저곳에 꽤나 바이럴 된 모양이었다. 개중에서도 눈길을 끈 건 니콜라스. 메인이 아니라 분량이 많지도 않았는데 각종 SNS며 커뮤니티에서 마스크가 좋다는 말이 이어졌다. 브랜드에서는 시류를 읽고 비하인드 사진이나 숏폼 영상을 거듭 업로드 하며 열심히 노를 저어댔다. 그 모든 것이 너무도 빠르고 거침 없었다. 그들은 니콜라스와 단발성 계약으로 그치려던 것을 엎고서 새로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앞다투어 연락이 들이닥쳤다.



니콜라스는 이제 아침 일찍 나가서 자정이 지나서야 돌아온다. 그렇게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면서. 평소에는 알람을 수십 개씩 맞추고서도 좀비처럼 잠들어 있으면서. 비척비척 일어나 대충 넝마 같은 걸 주워 입고서 집 앞에 도착한 택시를 타기 위해 신발을 꿰어 신는 그의 동그란 머리통. 셋팅하지 않아서 부슬부슬한 머리카락. 어느새 의주가 직접 염색해줬던 어설픈 색깔은 모두 사라지고 전문가의 손길이 닿아 근사한 금발로 변모했다. 백색에 가까운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으려면, 니콜라스가 슬쩍 고개를 들어 웃는다. 가로로 길게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이른 시간인 탓에 푹 잠겨 있다.


" 왜? "

" 아니 ...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

" 의주. 가서 자. "


눈이 피곤해. 니콜라스가 잠이 달라붙은 의주를 보며 작게 웃는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도 당장이라도 잠들고 싶어 보이는데. 의주는 하품을 꾹 눌러 참으며 살짝 몸을 숙여서 니콜라스의 어깨를 쥔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제법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주는 최근의 모의고사에서 충격적인(이대로라면 삼수가 불가피한...) 점수를 받고서 매일 자정 넘어서까지 학원에 처박혀 있다가 돌아왔다. 주말에도 저녁까지 자습실에 나가는 덕에 자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어차피 집에 돌아와 봤자 아무도 없으니 차라리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 머리 ... 예쁘네. "


신기해, 색깔이. 의주가 아직 몽롱한 채로 성큼 가까워진 니콜라스의 뺨을 응시하며 웅얼댔다. 그렇게 바빴던 탓에 금발이 되어 버린 니콜라스를 이렇게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이다. 왠지 어색하면서도 신기하다. 입술이 반쯤 벌어져서 웃던 니콜라스의 뺨이 미세하게 굳는다. 그는 잠시 의주의 표정을 살피다가 어색한 몸짓으로 엉덩이를 떼서 일어났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두었던 니콜라스의 핸드폰에 택시가 거의 다 도착했다는 알람이 반짝거린다. 그것을 흘깃 확인한 의주가 고개 돌려 하품하며 설렁설렁 손을 흔들었다. 이어 곧장 나서려던 니콜라스는 멈칫하며 고개 돌려 다시 룸메이트를 마주 본다. 의주가 상냥한 눈을 하고서 무언가 할 말을 기다렸다. 니콜라스는 여전히 평소와 같은 시원한 웃음을, 그러나 어딘지 묘하게 어색한 투로 뱉어 낸다.


" 다음에. 놀러 와. "

" 응? "

" 주주는 보러 와도 돼. 나, 일 하는 거. "


사진이랑 비디오. 니콜라스가 손을 들어서 카메라로 무언가를 찍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의주는 그제야 니콜라스가 제 촬영장에 오라고 초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긴 했으나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볼 생각은 한 적 없는 부분이었다. 의주가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정말? 하고 되묻자 니콜라스는 열심히 고개를 주억댄다. 다음에, 의주 안 피곤하면. 의주 공부 많이 안 하는 날에, 나, 일하면 ...


니콜라스가 장황하게 설명을 덧붙이려 했으나 곧장 전화가 걸려 온다. 건물 아래에 도착한 택시 기사다. 의주가 얼른 가보라며 손을 뻗어 다시 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문틈으로 훅 밀려 들어온다. 니콜라스가 계단을 밟아 내려가다 멈춰 서서 난간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 다녀온다는 인사를 짤막한 두 글자로 벙긋거린 노란 머리가 곧장 시야에서 사라진다. 의주는 그를 실은 택시일 것이 분명한 차가 묵직한 엔진 소리를 내며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현관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바쁜 탓에, 니콜라스는 말 해놓고도 바빠서 까먹었을지도 모르지만. 의주는 니콜라스의 그 제안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자습실에서 펜대를 굴리면서도 쉬는 날과 니콜라스의 촬영 일정이 언제쯤 들어 맞을지 고민했다. 도통 오르지 않는 성적이나 외워야 할 산더미 같은 단어 같은 것이 자꾸만 후순위로 밀려났다. 덕분에 의주는 니콜라스의 주말 촬영과 제 시간표의 공백기가 맞아떨어지자마자 할 일을 정했다. 오후 자습을 도중에 가방을 싸서 학원을 탈출했다. 잡는 사람이 없는데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것이 허튼짓을 하기 때문인지, 혹은 곧 니콜라스의 촬영장에 가기 때문인지 헷갈려 괜히 가슴팍을 몇 번 때렸다. 버스를 잡아 타서는 니콜라스가 아침에 제게 보내둔 문자 메시지를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애매한 시간대라 차가 막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학원에서 스튜디오까지는 멀지 않아서 예상외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종종 지나다니던 길이라 지하에 이렇게 넓은 촬영장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의주는 큼지막한 조명을 들고 철제 계단을 오르는 스태프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하고는 겨우겨우 니콜라스를 찾아 아래로 내려왔다. 희한하게 입은 모델들이 귀퉁이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조그만 몸에 비해 현저히 무거워 보이는 옷더미를 든 여자들이 종종걸음으로 의주 앞을 스쳐 지난다. 그는 난생처음 보는 풍경에 주변을 부지런히 살피며 슬그머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힐끗 의주를 보고 쟤는 누구야? 싶은 표정을 지었으나 묻지는 않았다. 워낙에 많은 인간들이 왔다 갔다 하는 중이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의주는 행여나 제가 무엇이라도 건드릴까 봐 한창 촬영 중인 스태프들 뒤로, 발걸음 소리에도 주의하며 살금살금 움직였다. 앞쪽에서 허연 플래시가 펑펑 터진다. 가죽 소파와 캐리어, 옷더미 따위가 잔뜩 널려서 촬영 현장을 꾸미고 있었다. 의주는 이런 쪽에 문외한이라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 백스테이지? 아니면 ... 탈의실? 대충 그런 ... 느낌의 컨셉인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인간들 너머의 모델을 응시했다.


니콜라스가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바스락거리던 머리는 무얼 바른 건지 윤기가 흐르고, 렌즈 때문에 눈이 회색으로 빛난다. 그가 입은 상의가 짧아서 팔을 드니 납작한 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래에 입은 바지는 위에 플리츠 스커트를 덧대서 꼭 교복 치마를 입은 것 같았다. 그 밑으로 헐렁거리는 니삭스와 굽 높은 부츠, 걸을 때마다 덜그럭 소리가 날 듯한 장신구들이 이어진다. 니콜라스가 평소 입는 옷보다도 훨씬 과한 스타일에 의주는 무어라 평가를 내리지도 못 하고 숨죽여 그를 구경하기만 했다.


카메라를 든 스태프가 뭐라고 외칠 때마다 니콜라스는 익숙한 듯 몸을 움직인다. 무서운 표정을 하고서 소파에 삐딱하게 걸터앉는다. 목걸이를 입에 물고 이를 드러내는 이상한 표정을 짓거나, 거의 가슴팍이 다 보일 정도로 옷을 잡아 올리기도 했다. 의주는 누군가 잠시만요, 하고 제 앞을 슥슥 스쳐 지나는 데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 하고 그 자리에 붙박여서 계속해서 니콜라스만을 쫓았다.


같은 집에서 눈을 뜨고 밥을 먹는 그가 꼭 다른 세계 사람 같이 느껴졌다. 거리감이 느껴진다, 정도의 단순한 말로 표현 하기에는 복잡한 기분이다. 완벽하게 꾸며진 니콜라스는 꼭 게임 캐릭터나 만화 주인공 같아서. 의주가 잠깐이라도 한 눈을 팔면 어딘가로 사라질 것만 같다. 그저 흥미로 가득하던 의주의 심장이 듣지 못 한 소리를 내며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요즘 둘 다 바빠서 얼굴을 마주 보는 시간이 줄어든 탓에, 억지로라도 머리 밑에 묻어 두었던 생각이 다시금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낸다. 의주는 제가 이곳에 왜 오게 되었는지 생각한다. 니콜라스가 놀러 오라고 했으니까. 니콜라스가 뭔데? 룸메이트. 그냥 그것뿐?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그것 뿐? 그러니까, 좀 많이 친해서 ... 살을 섞기도 하는 ... 그런 ...


스스로와의 스무고개를 꼬박꼬박 이어가던 의주가 슬그머니 입술을 깨문다. 저는 아직까지도 니콜라스와의 관계를 정의하지 못 하고 있다.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일이다. 어떻게든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우리 섹스했으니까 이제 사귀는 거야"라고 단언해 버리기에, 의주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단순히 귀엽지만 성가신 고양이 같은 룸메이트 따위로 치부하기에는 이제 정도가 한참 지나치다.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늘 목구멍에 턱 걸려 있는 무언가가 미묘하게 거슬렸다. 니콜라스가 저를 바라보는 표정을 보면 그 찝찝함이 배가 됐다. 그는 언제나 제게 무언가 말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지 않는다. 몸을 붙이며 치대오거나 시답잖은 장난을 치는 짓은 잘만 하면서도. 언제나 알맹이를 숨긴 채 심장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의주는 그것이 미치도록 궁금했다.


" 의주! "


멍하니 생각에 잠긴 얼굴이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 깨어난다. 의주는 익숙한 목소리가 저를 불러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여있던 스태프들이 흩어지고 니콜라스가 그 틈에서 성큼성큼 다가온다. 얄쌍한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가까이 마주 보니 눈에도 무언가 잔뜩 발라서 시커멓고 입술도 체리 색으로 반질반질 빛났다. 의주는 괜히 어색해서 하하, 하 하고 바보처럼 웃었다.


" 언제 왔어? "

" 어. 어, 방금 ... "

" 봤어? 나? "

" 응. "


완전 멋져. 의주가 뻣뻣하게 엄지를 들어 보였더니 니콜라스는 얼굴을 구기며 우스워 했다. 그는 의주를 끌고 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간식과 음료 앞으로 데려갔다. 달아 빠진 맛이 나는 쿠키 하나를 쥐여 주면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촬영이 마칠 거라고 비밀스레 속삭이는 그에게서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났다. 종종 의주의 누나가 데이트를 앞두고 한껏 힘 줬을 때나 겨우 맡아 보던 것이다.


" 잘, 열심히 해. "

" 응. 고마워. "

" 여기 ... 있을게. 딱 보이지? "


금세 촬영이 재개되어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가려는 니콜라스에게 의주가 부러 쾌활한 투로 말했다. 열심히 포즈를 취하다가도 고개를 돌리면 얼핏 눈이 마주칠 수 있을 위치에 섰다. 비록 스태프들 틈에 반쯤 가려지겠지만, 다른 이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훌쩍 솟아 있는 덕에 얼굴을 볼 수는 있을 테다. 그에 살짝 긴장한 듯 뻣뻣해지려던 니콜라스의 표정이 누그러든다. 응.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덧붙인다. 볼게.


그러나 갈아입은 새 옷이 이전의 것보다 현저히 거추장스럽기 때문인지, 혹은 스태프들 사이에 간간히 벌어지던 말싸움이 문제였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니콜라스가 저를 보는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 해서인지 ... 재개 된 촬영은 쉬이 나아가지 못 하고 삐그덕댄다. 의주가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자꾸만 누군가 촬영을 끊고 가자고 소리를 질렀다. 니콜라스의 굳은 얼굴 위로 메이크업 브러쉬가 춤을 춘다. 그는 조금 더 크게 포즈를 취해 보지만 이번에도 OK 사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사진작가가 소리를 지른다. 야! 너! 하고 니콜라스의 이름을 두고 낯선 호칭을 불러댔다. 의주는 그가 당황해 서둘러 허리 접으며 유달리 또렷한 발음으로 죄송합니다, 하는 것을 가만히 쳐다 보았다. 그러나 이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걸음을 돌려 촬영장 밖으로 걸어 나와 버렸다.


다행히 의주가 근처를 서성거리고, 스탭들에게 누굴 보러 온 거냐는 질문을 듣고서 당황하는 동안 사태는 서서히 해결 되었다. 금방 촬영이 끝날 거라는 니콜라스의 말은 거짓이 아니어서 의주는 많이 기다리지 않고서 파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니콜라스가 저와 비슷한 차림을 한 모델들과 나란히 서서 열심히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어딘가에서 뜨뜻미지근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기에 의주도 덩달아 손뼉을 부딪혔다. 제 박수 소리가 제일 큰 덕에 니콜라스가 힐끗 이쪽을 보며 웃었다.




" 수고했어. "


니콜라스가 환복하고 나오는 동안 무어라 인사 해야 할까 고민하던 의주는 그와 다시 얼굴을 보자마자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그는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었지만 화장을 지우지 않아서 여전히 세상과는 붕 떠 보인다. 그러나 이내 뾰족한 눈이 둥그렇게 말려들도록 웃어 보이는 얼굴은 의주가 익숙하게 아는 니콜라스와 같았다.


" 다 끝난 거야? "

" 응. 가자. 나, 저녁 살게. "

" 갑자기? "

" 배고프지 않아? "

" 약간. ... 뭐 사주려고? "

" 뭐 좋아? "


니콜라스가 제 어깨를 툭 치고 인사하는 스태프에게 손 흔들어 인사하며 물었다. 친구예요? 스태프가 니콜라스와 의주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의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스태프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니콜라스의 등을 몇 번 더 두드린다. 짧은 대화가 이어지다 이내 그가 떠나고, 니콜라스는 다시 제 동거인 쪽으로 몸을 돌린다. 의주는 제법 친해 보이는 그 일련의 행동을 가만히 곱씹어 보다가 웅얼대듯 답했다.


" 고기 ... "

" 고기? "

" 많이 먹을 거야. "

" 갑자기? "


좋아. 니콜라스는 어딘가를 쳐다보듯 시선을 피하는 의주가 의아하다고 생각하지만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스태프들이 우르르 계단을 올라 빠져나오는 것을 지나쳐 둘이서 나란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가게로 향하는 걸음은 호기로웠으나 결국에 도착한 곳은 흔한 고깃집. 저녁 시간이 약간 지났는데도 손님으로 제법 붐빈다. 의주의 등 뒤로 벽에다 분홍색 네온사인으로 유치한 문구가 쓰여 있는 것을 니콜라스가 눈 사이를 좁히고 더듬더듬 읽는다. 인생, 은 ... 고기서 ... 고기다 ...


" 어때? "


이어 주문한 만큼 고기가 불판 위에 치이익 소리를 내며 올라가고 의주는 집게를 든 채 묻는다. 미리 나온 계란찜을 떠먹던 니콜라스가 되묻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일단 먹어. 의주는 니콜라스가 또 촬영을 위해 몇 날 며칠 식단 조절에 힘썼다는 걸 알고 있기에 자연스레 테이블 위를 턱짓했다. 평소에는 한 끼에 햄버거 여러 개를 눈 깜짝할 새에 먹어 치우면서 일을 앞두고는 거의 굶다시피 했다. 그의 예상대로 니콜라스는 몹시 허기 진 상태였기에 묵묵히 수저를 들었다. 결국 고기가 다 굽힌 뒤에는 반찬을 전부 싹 다 리필했다.


" 재밌어. "


의주가 앞에 놓아준 고기를 몇 점 집어 먹고서야 약간 혈색이 좋아진 니콜라스가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한다. 의주가 앞전에 물은 어때? 에 대한 답임이 틀림 없다. 의주는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


" 다행이네. "

" 응. 어땠어? "

" 잘 하던데. 엄청 멋있었어. "

" 얼마나? "

" 많이. "

" 응. 다행이다. "

" 사람들이 잘 해줘? 어려운 건? "

" 좋아. 없어. "


불판을 가득 채웠던 고기는 익는 대로 금방금방 사라진다. 의주가 이것저것 물으면 니콜라스가 약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낯선 타지에서 생소한 일을 하는 것에는 분명히 많은 어려움이 따르겠으나 티 내지 않으려 하는 티가 역력했다. 의주는 오랜만에 저와 마주 봐서인지, 혹은 일이 끝났다는 해방감 때문인지 묘하게 들떠서 웃음이 헤퍼진 니콜라스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그렇게 한참을 대화하다 보니 문득 처음 만났을 때보다 그의 어휘력이 월등히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며 자연스레 습득했을 것이다. 니콜라스는 이제 엉뚱한 조사를 쓰거나 뜬금없이 제게 존댓말을 하는 등의 실수는 거의 하지 않는다.


" 니콜. 이제 얘기 잘 하네? "

" 아아. 공부했지. "

" 진짜? 이제 쓰는 것도 잘 돼? "

" 조금. "


니콜라스가 무언가 보여주려는 듯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는 동시에, 누군가 두 사람의 테이블로 다가온다.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남녀 커플이다. 아까 전부터 계속해서 이쪽을 힐끗대는 것을 느꼈으나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의주는 본능적으로 긴장한 채 그들을 올려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양 팔에 타투가 가득하고 괴상한 옷을 입어서 약간 무서워 보였다. 행여나 취객의 쓸데없는 시비라면 당장에 도망치겠노라 비장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그들은 니콜라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조심스레 묻는다.


" 저. 혹시 ... "

" 네? "

" 니코 ... 맞죠? "


그러면서 작은 창이 띄워진 핸드폰을 들이민다. 희한한 차림새의 니콜라스가 포즈를 취하는 컷이 짧게 이어지는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니콜라스는 그것을 확인하더니 표정이 한층 밝아져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그 답에 커플이 꼭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난 소녀처럼 수줍은 비명을 지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곧장 카운터에서 펜을 빌려 핸드폰 뒷면에 큼지막하게 싸인을 받는다. 의주는 니콜라스가 그들과 악수하고, 브이 한 채 셀피를 남기는 것을 가만히 구경했다. 제 룸메이트는 알지 못 하는 낯선 사람들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 우와. 진짜 대박 ... "


의주는 가게를 나와서도 계속해서 같은 소리를 중얼댔다. 그만해. 니콜라스가 머쓱하게 팔뚝을 착 소리 나게 때린다. 몸에서 고기 냄새가 풀풀 풍겼다. 니콜라스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조용히 하라며 입가에 검지를 갖다 대고 있다. 그러나 의주는 지금 제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그가 왠지 색다르게 느껴져서 감탄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 신기해. 이런 거 실제로 처음 봐. "

" 나도 처음이야. "


식사를 마치고 니콜라스가 의기양양하게 카드를 내밀었더니 이미 계산이 완료 되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따져보니 아까 니콜라스에게 말을 걸었던 커플이 두 사람의 테이블까지 결제한 것이다. 당황스러운 동시에 신기했다. 니콜라스는 곤란하다는 듯 목덜미를 긁적거렸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의주에게 딱 붙어서 싱글댄다.


" 나 때문이지? "

" 일 할 때 쓰는 이름, 니코야? "

" 응? 나 때문? "

" 확실히 그게 더 직관적이긴 하네 ... "


아. 의주!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니콜라스가 다시 주먹으로 그를 툭 건든다. 의주가 괜히 밀려나는 척 하면서 소리 내 웃었다. 응. 니콜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둘이서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신 탓인지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허리 숙여 인사하는 퍼포먼스까지 해 보였다.


" 두 개로 줄였어. 네 개 많아, 라고 해서. "


니콜라스가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설명했다. 니코. 확실히 조금 더 예명 같은 느낌도 있고, 두 글자라 심플하니 임팩트 있다. 그러나 의주의 입 안에서는 아직 니콜라스라는 쪽이 더 익숙해서 그는 몰래 니코라는 새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지하철 역이 가까워졌지만 왠지 더 걷고 싶은 기분에 하염 없이 골목을 지난다. 중간에 마주친 편의점에 커다란 천막이 나부꼈다. 예전에 니콜라스와 1+1으로 몇 번 나눠 먹었던 아이스크림 행사를 재진행 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이후로는 따로 사 먹은 기억이 없다. 니콜라스도 의주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편의점을 가리키며 아이스크림? 하고 물었다. 의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익숙한 패키지의 아이스크림을 두 개 골라 계산했다.


" 니콜. 이러다 연예인 되는 거 아냐? "


그렇게 둘이서 묘하게 시원한 듯 후덥지근한 듯한 바람이 부는 길을 걸으며. 드문드문 마주치는 행인의 눈을 피해 가며 괜히 서로를 쿡쿡 찌르는 유치한 장난질을 늘어놓다가. 의주가 불쑥 물었다. 약간 녹은 아이스크림이 손에 묻어서 인상을 찌푸린 니콜라스가 그 말에 의주를 홱 돌아본다.


" 응? "

" 아까 싸인도 하고. 셀카도 찍고. 오늘 촬영한 것도 좀 있으면 공개되는 거잖아. 그러면 사람들이 이제 더 많이 알아보겠다. TV 광고 같은 것도 찍을 지도 몰라. "

" 그럼 ... 좋지? 싫어? 좋은 거 아냐? "

" 응? 좋다고? "

" 돈 많이 벌어서. "


니콜라스가 손으로 동그랗게 돈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킥킥 웃었다. 농담으로 넘기려는 듯한 모양새지만 의주는 왠지 묘하게 입꼬리가 뻣뻣해진다. 그의 눈 아래서는 줄곧 오늘 하루가 토막 나서 끝 없이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촬영장에서 니콜라스를 마주했을 때부터 속이 어수선했다. 그가 열심히 일하고 그에 따르는 유명세를 얻는 게 싫은 것이 아니다. 카메라 앞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말하는 니콜라스는 굉장히 근사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의주의 마음을 미묘하게 건드리는 지점은.


그가 점점 저와 멀어지고 있다는 감각. 방 두개짜리 빌라에서 까치집 지은 머리로 아침에 마주 보는 룸메이트 니콜라스와, 불특정 다수에게 얼굴이 알려진 모델 니코. 전자와는 살 부대끼며 살아 왔으나 후자는 낯설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카메라 앞에서 즐거워 보인다. 이대로라면 그가 점점 더 바빠질 테고, 앞으로 맘 편히 밥 먹고 길을 걸을 날이 얼마나 남았을 지 괜히 짐작하게 된다. 그는 의주가 모르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토록 빛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주는 문득, 니콜라스가 저의 방 두개짜리 빌라가 아니라 다른 곳에 사는 모습을 그려본다.


" 돈 많이 벌면 ... 막. 엄청 좋은 집. 연예인 돼서, 회사도 들어가고. 방송도 나가고 그러겠네. "

" 그러면 좋지. 부자 좋잖아. 돈 많은 사람, 좋은 건데. "

" 이제 연예인 친구도 많이 사귀고. 유명한 사람들이랑 놀고. "

" 그것도 좋아. 친구 많으면. "


묘하게 말투가 가라앉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니콜라스는 이것이 모두 장난이라 여기는 건지 히죽대며 잘만 대꾸한다. 의주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그 얼굴을 보며 묘하게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줄곧 제 속에서 소용돌이 치던 무언가가 돌풍처럼 들이친다. 이것은 그가 늘 골몰하던 것과 맞닿아 있다. 명쾌히 정의 내리지 못 한 관계에서 비롯 되는 묘한 거슬림이었다. 의주는 여전히 무명으로 존재하는 제 룸메이트를, 어쩌면 곧 동거인이 아니게 될 지도 모르는 남자의 허연 목덜미를 보며 충동적으로 말을 잇는다.


" 응. 그러면 이제 나랑은 잘 안 보겠네. 바쁘니까. "


그러나 문장을 뱉는 동시에 후회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스스로 들으면서 의심 될 지경이었다. 여태 실컷 아무렇지 않은 척 해놓고서는. 사실은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을 단박에 들킨 것이나 다름 없다. 이렇게 유치하게 들켜 버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낭패라는 생각에 의주는 머쓱하게 웃으며 아니, 있지, 하고 서둘러 고개 돌려 니콜라스를 내려다 본다. 그는 분명 이상한 표정을 하고서 저를 놀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다.


" ... "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니콜라스는 가만히 멈춰 서서 눈을 마주친다. 어정쩡하게 든 오른손에는 다 먹고 남은 아이스크림 막대가 덜렁 들려 있다. 그는 차마 태연하게 웃지 못 하고 바보 같은 얼굴을 한 의주를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대답한다.


" 그런 생각 안 해. "


여전히 웃지 않는 매끈한 낯이 골목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창백한 색으로 빛난다. 니콜라스가 습관처럼 입술을 축였다. 의주는 제가 든 아이스크림이 약간 녹아서 손가락을 끈적하게 더럽히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차마 움직일 수가 없다. 니콜라스가 제 뺨을 쳐다보는 눈이 꼭 송곳 같아서 가만히 붙박여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는 오래도록 혀 끝으로 말을 고르다가 아주 훌륭해진 발음으로 꼭꼭 씹어 뱉듯이 대꾸했다.


" 난. 지금 ... 좋아. "

" ... 어? "

" 의주 조금 덜 바빠면 좋겠어. 그게 끝. "


끝, 하고 말하는 동시에 마치 마법이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니콜라스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의주가 삐그덕거리며 겨우 그 뒤를 쫓아갔다. 약간 거리가 벌어지나 싶어 서둘러 따라잡았더니 니콜라스의 표정이 보였다. 그는 답지 않게 바닥만 보며 침묵하고 있다. 평소처럼 큰 소리로 웃으며 제 몸을 퍽퍽 때리거나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지 않으려나, 짐작했으나 그 어떠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탓에 애매한 침묵이 터질 것처럼 부푼다.


그리고 의주는 이 고요함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종종 니콜라스가 답지 않게 굴 때가 있었다. 이러한 순간은 특정한 상황에서 주로 찾아왔다. 편한 분위기에 긴장감이 끼어들 때. 왠지 간지러운 행동을 하거나, 투닥거리다가도 묘하게 민망해지는 찰나. 의주는 그럴 때마다 애써 제 표정을 숨기려 들면서 니콜라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싶었다. 그러면 니콜라스는 언제나 평소처럼,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눈을 하고서도 먼저 홱 고개를 돌렸다. 그것으로 손쉽게 침묵은 부서지고 시간은 흘렀다.


그렇게 가득 미뤄둔 감정이 도대체 얼마나 묵혀져 있을까. 의주는 니콜라스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지금도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역시 오늘 촬영장에서 저를 보며 시끄러운 속이 야속했을까? 간만에 마주한 얼굴을 보니 반가움에 절로 웃음이 나왔을까? 그 무엇에도 집중되지 않아 자꾸만 고개가 돌아갔을까?


니콜라스의 속이 궁금하다. 저 날카로운 눈매 아래에 깃든 생각이 알고 싶다. 거침없이 제게 돌진하는 듯하다가도 갑자기 커브를 틀어 버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을 니콜라스의 언어로는 어떻게 표현하는지,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제게 전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인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넘겨짚으며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그것은 오만일 뿐이다. 의주는 그가 애써 쥐고 있는 날것의 마음이 궁금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제 것을 먼저 내어줘야 한다. 아주 오랜 관찰 끝에야, 기나긴 탐구를 마치고서야 비로소 찾아낸 해답이었다. 의주는 이것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위태로운 짐작은 하지 않는다. 드디어 니콜라스의 문법의 첫 챕터를 읽어낸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 니콜. "


약간 앞서 걷던 니콜라스가 느리게 멈춰 선다. 말 없이 돌아보는 얼굴 위로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았다. 짙은 화장이 조금도 지워지지 않아서 눈두덩이가 시커멓다. 만지면 바사삭 소리가 날 것처럼 셋팅해둔 금발 머리카락도 완벽하다. 꼭 다른 차원에 사는 사람 같은 모습. 그러나 의주는 잘 커스텀 된 게임 캐릭터와 마주했다고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저는 그 너머, 니콜라스의 속내에 도전하고 싶은 것이니.


" 싫으면 ... "

" 응? "

" 나 때려도 돼. "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전에, 니콜라스의 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 막대가 툭 하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 맞닿는 입술에서는 무언가 덧발라 미끌거리는 화장품 맛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