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재조립일지

이오   



1년여간 만났던 애인에게 메시지로 이별 통보를 받았다. 대만인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지금 하는 프로젝트가 끝나면 같이 대만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확신을 주지 못한 게 이별의 도화선이었던 거 같았다. 자고 일어나서 갑자기 이별을 맞이한 니콜라스는 모국어로 길게 작성된 메시지를 한참 곱씹다가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놨다. 마이너스 감정에 짓눌려있을 시간이 없었다. 출근은 해야 하니까. 겨우 준비하고 밖으로 나와서 뻐근한 몸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운 좋게 자리를 잡아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순간 창문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에 눈을 떴다. 비가 내렸다. 조금씩 내리던 비는 니콜라스가 내리는 타이밍이 되자 기다렸단 듯 점차 빗줄기가 굵어졌다. 니콜라스는 정류장 앞에 멈춰 서서 속절없이 쏟아져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니콜라스는 어쩐지 그 비에 갑작스럽게도 실연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순간이 슬펐던 건 아니었다. 이별 자체가 슬프다기보다는 사실 이별 통보가 슬프지 않게 느껴지는 자신이 더 슬펐다. 연애란 건 어느 순간부터 외로움을 틀어막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감정 자체가 굳은살이라도 박힌 것처럼 자극에 무뎌지고 만다. 하지만 무뎌진 감정이어도 통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안 좋은 기억들은 대부분의 경우 한순간에 발화되듯 떠오른다. 그래서 니콜라스는 찰나의 순간에 자신이 겪었던 실패를 모조리 떠올리고 만다. 그저 그랬던 연애와 몇 번의 이별에서 시작된 회상은 배드민턴을 그만뒀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 결국엔 열아홉까지 떠올리게 만들었다. 열아홉의 끝에는 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있다. 속절없이 떠오르는 기억은 니콜라스를 마구잡이로 흔들어놓는다. 니콜라스는 잠시간 비운의 주인공 역할을 일임 받은 것처럼 심란하다가 겨우 생각을 지워냈다. 일단은 출근이 더 급했다. 대충 손으로 비를 막은 니콜라스는 달릴 준비를 했다. 불평불만 쏟아놓을 상대가 아무도 없기에 쏟아지는 불행을 다 온전히 처리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 니콜라스를 자주 외롭게 했다.


비싼 옷 안 입고 나와서 다행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써 노력한 니콜라스는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기획사 건물로 향했다. 프런트에 있는 직원이 비 맞고 오신 거냐고 걱정의 멘트를 날렸다. 니콜라스는 웃으며 우산 챙기는 걸 깜빡했다고 내뱉었다. 출입증을 찍고 연습실 쪽으로 향하자 평소보다 사람이 북적였다. 뭐지, 오늘 내가 모르는 기습 평가라도 있는 건가,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꽤나 전문적인 촬영 장비들을 확인했다. 오늘 뭐 있어요? 근처에 있던 동료에게 물어보러 발을 내딛던 니콜라스는 순간 한 인영에 온몸이 굳었다. 니콜라스는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바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됐다. 그 인영이 자신을 확인하지 않길 바랐는데 안타깝게도 눈이 마주쳤다. 니콜라스를 도망치고 싶게 만들던 인물은 안타깝게도 너무 쉽게 니콜라스를 알아봤다. 그 인영이 니콜라스의 앞에 천천히 걸어왔다.


"어... 니콜라스?"

"..."

"오랜만이네."

"..."

"...아, 혹시 기억 안 나?"


기억이 안 날 리가 없었다. 자신을 붙든 건 니콜라스가 기억하는 최초의 실패였으니까.


니콜라스는 멍하니 형상화된 실패를 바라본다. 의주의 손에 들린 대본을 바라봤다. 의주에 손에 들린 게 펜싱 검이 아닌 종이 더미라는 게 다소 어색하게 다가왔다. 자신도 현재 배드민턴을 하고 있지 않으니 의주도 펜싱을 하지 않는 것이 별로 이상한 건 아니지만...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자신을 휘감았다.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의주. 그 얼굴에 내려앉은 몇 년간의 세월을 가늠해 본다.


"당연히 기억나지, 의주인데..."


내가 의주를 기억 못 할 리가 없잖아... 그렇게 내뱉지는 못했다. 아무런 말 없는 니콜라스 대신 의주가 먼저 입을 열었기에.


"진짜 오랜만이다. 몇 년 만이지?"

"..."

"아, 근데 니콜 왜 이렇게 젖었어. 비 맞았어?"


의주는 마치 어제라도 본 양 덤덤한 말투였다. 날씨를 확인 못 해서... 대충 변명한 니콜라스가 근데 의주는 왜 여기? 그렇게 물어보려는 순간 변 피디! 부르는 말에 의주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그 말에 니콜라스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기획사 측에서 데뷔 다큐 촬영 협조를 넣어서 앞으로 두 달여 간 촬영을 올 거라는 말. 관련 회의에 니콜라스는 참석하지 않았기에 촬영을 오는 인원의 자세한 구성원은 몰랐었다. 그리고... 그 촬영팀에 의주가 있는 거구나.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한 니콜라스는 고개를 들어 의주를 마주했다.


미안, 이따 얘기하자. 그 말과 함께 의주가 대본을 들고 있지 않은 왼손을 내밀었다. 니콜라스가 시선을 내려 의주의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순간 의주의 왼손에 위치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만다. 잠깐 굳었던 니콜라스가 의주의 손을 마주 잡아 악수했다. 두 사람의 손이 금방 떨어졌고 의주가 뒤돌아 촬영팀 쪽으로 향했다. 니콜라스가 발견했던 의주의 왼손 약지의 무언가. 그 위치에 자리 잡고 있던 건 누가 봐도... 커플링.


물론 니콜라스도 반지를 몇 개씩 달고 있지만, 의주의 반지는 자신의 용도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의주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근처에 있는 몰 안에 들어가면 있는 모든 스파 브랜드에서도 팔 거 같은 디자인의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는 의주였기에 반지를 단순히 패션 목적으로 끼었으리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의주가 의식된 건지, 의주의 왼손 약지가 신경 쓰였는지 정확히 뭐가 신경 쓰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러 가지가 중첩되어 니콜라스를 혼란스럽게 했다. 니콜라스는 그 반지에 자신과 의주 사이에 있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수업과 촬영을 마쳤는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 오늘 컨디션 별로예요? 다른 동료가 조그맣게 물어오는 말에 아까 비 맞고 와서 좀 그런가 보다 하고 얼버무렸다. 앞에서 연습생들 댄스 모니터링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데도 집중이 어려웠다. 그렇게 지도를 마친 니콜라스는 촬영팀에게 고개 숙여 고생하셨다고 인사했다. 의주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아오는 게 느껴졌는데 애써 무시했다. 연습실 한구석에 인터뷰 구역이 조성되는 걸 잠시간 바라보다 도망치듯 연습실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의주에게 손목이 붙들렸다. 니콜라스. 부르는 목소리에 니콜라스는 잠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곤 의주를 마주했다.


"무슨 일 있어?"

"응?"

"곧 인터뷰 예정인데, 전달 못 받았어?"

"아... 그거 나도 포함이야?"

"응, 컨디션 안 좋아? 아까 비 맞아서 그런가?"

"..."

"몸 안 좋으면 인터뷰 빼달라고 물어볼까?"

"아니, 그 정도는 아냐."

"그럼 아직 니콜 차례 아니니까 쉬고 있어, 내가 이따 네 인터뷰 차례 때 부를게."

"...알았어."

"그러면... 일단 연락할 번호 좀 줄래?"


의주는 손바닥을 바지춤에 훑고 니콜라스에게 내밀었다. 나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놔서, 일단 네 거 주라. 그 말에 니콜라스는 잠깐 굳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핸드폰 잠금을 풀어 의주에게 건넸다. 의주는 자신의 번호를 찍어 넣고는 통화버튼을 누르고 다시금 니콜라스에게 핸드폰을 돌려줬다. 핸드폰을 받아 든 니콜라스는 액정에 여전히 띄워져 있는 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익숙한 번호의 나열. 의주 번호 그대로네... 생각만 한 줄 알았는데 혼잣말처럼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아, 응. 안 바꿨어. 기다리는 연락이 있어서."


그 말과 함께 의주의 시선이 니콜라스에게 와 닿았다. 의주의 말에 별다른 주어가 없어서 기다렸다는 그 연락이 누구를 의미하는 건지 아닌지 명확히 파악이 어려웠다. 그래서 니콜라스는 굳이 그 말의 의미를 파헤치지 않기로 했다.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만약 그 말의 주체가 자신이라고 한들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의주... 나 인터뷰 전까지 조금 쉬고 싶은데. 일부러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내뱉자 의주가 파드득 한 발짝 멀어졌다. 아 미안, 빨리 쉬어. 의주의 과한 액팅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의주가 머쓱한 얼굴로 문을 열어줬다.


휴게공간에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진동이 울렸다. 연습실로 돌아가 대충 질문 안내를 받고 인터뷰를 수행했다. 니콜라스의 인터뷰가 마지막이었는지 인터뷰를 마치고 현장을 정리하는 의주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정리를 마친 의주가 니콜라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니콜라스에게 손에 들고 있는 우산을 니콜라스에게 건넸다.


"밖에 아직 비 오더라고..."

"이거 내가 받으면, 의주는?"

"우리는 차 타고 돌아갈 거라... 괜찮을걸?"

"괜찮은 거 맞아?"

"진짜 괜찮아. 다음에 돌려줘."


그 말과 함께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인사하고 다시금 팀원들에게 돌아갔다. 니콜라스는 멍하니 자신의 손에 들린 우산을 바라봤다. 회사 건물을 빠져나오자 의주의 말대로 여전히 비가 내렸다. 니콜라스는 의주가 건네준 우산을 펼쳤다. 우산 위로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집에 도착했음에도 씻을 기운조차 없었다. 옷도 못 갈아입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루가 순식간에 휘몰아쳤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는데 핸드폰이 드르륵 진동했다. 의주에게서 날아온 메시지였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로 시작된 메시지는 다소 영혼 없는 스몰톡으로 이어졌다. 니콜라스가 핸드폰을 노려보며 대화를 끝낼 각을 재고 있는데 곧바로 다른 메시지가 날아들어 왔다.


「아 그리고」

「아까 말했던 기다리는 연락」

「너 말하는 거였어」

「물어볼 줄 알았는데 안 물어보더라...ㅎㅎ」

「그냥」

「말해주고 싶었어」

「잘 자」


니콜라스는 차마 대화방을 나가지도 못한 채 그 대화방에 갇힌 상태로 가만히 붙박일 수밖에 없었다.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이 어려워서 혼란스러웠다. 의주가 던지는 말의 무게감이 어떤 건지는 니콜라스는 알기 어려웠다. 별생각 없이 뱉은 말일 수도 있었는데 받아들이는 니콜라스에게는 벅찼다. 애써 기억해 내지 않으려고 애썼던 의주의 왼손 약지가 뇌 내를 유영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오랜만에 만난 사이. 그러니까, 친구라는 단어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니콜라스의 안에서 의주는 친구라는 단순한 단어만으로 정의 내릴 수 없었다. 당연히 벅차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니콜라스의 안에서 최초의 실패 중 하나라는 말은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이라는 말의 동의어였기에. 후회가 뒤섞인 첫사랑의 기억은 니콜라스를 너무도 쉽게 뒤흔들어놓곤 했다.





니콜라스는 특정 실패가 인생 전반을 사로잡아버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뭐가 됐든 후회하지 말자, 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기에. 자신을 전담 중인 코치가 한국 고등학교의 코치 자리를 제안받아 한국에서 잠깐 일하신다는 걸 따라가 타국의 고등학교로 편입해 졸업하기로 했을 때도 큰 걱정이 있지는 않았다. 물론 사소한 걱정은 있었다. 말이 하나도 안 통해서 밥은 어떻게 먹지, 하는 것들. 하지만 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열여덟의 니콜라스는 큰 걱정 없이 모국을 떠날 수 있었다.


한국의 체고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서 마주한 게 의주였다. 의주는 펜싱을 한다고 했다. 니콜라스는 펜싱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지만 막연하게 의주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만 했고 그 생각을 의주에게 들려주지는 못했다. 애초에 서로 수행하는 종목이 달랐기에 말을 섞을 일이 많지 않았다. 근데 그건 변명이 안 되긴 했다. 안타깝게도 말을 섞을 기회가 많지 않은 건 의주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도 마찬가지였다. 한국말이 능숙하지 못해 마음 놓고 편하게 얘기를 나눌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는 엎어져 자는 척할 때도 있었다. 여느 날과 같이 점심시간에 밥도 안 먹고 엎어져 있었던 하루, 등을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툭툭 치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는데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 눈앞에 들어찼다. 그게 의주였다.


점심 안 먹어? 밥 안 먹고 자던데...


그때의 니콜라스는 그 말을 해석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대답이 좀 느렸다. 니콜라스가 대답하지 않자 의주가 다시금 덧붙였다.


음... 배 안 고파?


그 말에 그냥 적당히 괜찮아, 대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타국에서 겪어보는 다정한 말투에 어쩐지 울컥했고 투정 부리고 싶어졌다. 다정함 자체를 처음 마주한 건 아니었으나, 의주의 유독 다정한 말투와 표정, 그런 것들이 뒤섞여서 더욱 다정하게 다가왔다.


배고파.

...

근데 같이 먹을 사람 없어서, 안 먹어.


그래서 니콜라스는 의주를 올려다보며 다소 어리광 같은 말을 내뱉었다. 평소라면 처음 말 섞어보는 사이에 그런 말을 내뱉지 않았을 텐데 의주 앞에선 이상하게 그렇게 튀어나왔다. 의주는 별말 없이 니콜라스를 내려다보며 잠깐 골몰했다.


그러니까... 배고프단 거지?


다소 일차원적인 단순한 해석이었으나 니콜라스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주는 그런 니콜라스를 데리고 같이 급식실로 내려갔다. 의주는 이미 식사를 마친 상태여서 니콜라스가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의주의 다정함은 그날 하루일 줄 알았으나 의외로 지속됐다. 그날 이후로 의주는 니콜라스가 연습으로 인해 자리를 비울 때가 아니라면 자신이 속해있는 무리가 아닌 니콜라스와 함께 식사했다.


몇 번 식사를 같이하는 애매한 사이. 그래서 니콜라스는 의주에게 펜싱하는 걸 구경하러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의주와 애매한 사이, 그 이상이고 싶어서. 하지만 의주는 거절했다. 보통... 이런 거 거절하나? 니콜라스는 갑작스럽게 의주에게 차인 기분이 들었다. 의주는 나랑 친해지기 싫나?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몇 번이고 구경하러 가도 되냐고 물었고, 결국 의주는 승낙했다. 훗날 그때 거절했던 이유를 묻자 의주는 잘 기억이 안 난다는 얼굴로 어색하게 웃어 보이기나 했다. 나는 의주가 나랑 친해지기 싫은 줄 알았어. 그 말에 의주가 손을 휘적이며 아니라고 답했었다.


니콜라스는 처음 의주의 경기를 보러 간 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경기가 끝나고 마스크를 벗어 던지는 의주의 앞머리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어딘가에 깊게 몰입하는 의주의 모습. 그 모습에 니콜라스는 의주에게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상대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면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니콜라스는 의주에게만 말하는 것들이 점차 늘어갔다. 니콜라스가 꺼내는 고민이나 불만 같은 것들에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새까만 눈동자를 티 나게 도르륵 굴리는 의주의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니콜라스는 어쩐지 자신의 고민, 불만 같은 건 그다지 큰일이 아닌 거 같이 느껴졌다. 니콜라스는 그 점이 좋았다. 의주랑 있으면 자신의 특수성 같은 것들, 그러니까 타국에서 날아온 외국인이라는 속성, 이런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져서.


의주의 존재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니콜라스에게 유일해졌다. 하지만 의주에게 자신이 유일할지, 그 부분은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니콜라스는 그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니콜라스의 일상에 의주의 비중이 점점 늘어갔다. 니콜라스는 이 일상이 영원하길 바랐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니콜라스는 고등학교 졸업하면 다시 대만으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니콜라스는 한국 유학을 오기 전부터 대만의 모 체대의 스카우트 제안이 있었기에 사실상 대만의 체대에 이미 내정된 상태였다. 니콜라스는 의주와의 이별의 순간이 정해져 있다는 걸 외면하고 싶었으나 하루하루 가까워지는 걸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명확한 기간이 정해져 있는 이별에 니콜라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니콜라스는 정확히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미루고 미루다 대만으로 돌아가던 날을 기억했다. 의주는 이른 아침 비행기였음에도 자신을 배웅했다. 의주와 있던 시간이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흘러갔다. 여러 감정이 뒤엉켰다. 나중에 보자, 연락할게. 이런 가벼운 작별 인사들이 목 끝에 맺혀 내뱉어지지 못했다. 한참 망설이다 겨우 의주를 불렀다.


의주. 그동안 고마웠어.

...너무 마지막처럼 말하는 거 아냐?


그렇게 말하고 웃어 보이는 의주의 얼굴에 니콜라스는 별 대답을 하진 못했다. 가슴 한가운데가 막힌 기분이 들어서. 겨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니콜라스는 출국장 내부에 홀로 앉아 의주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렇게 대만에 돌아오고 나서 니콜라스는 돌연 잘 앓지도 않았던 여름 감기를 앓았다. 몇 년 만에 앓는 감기는 끈질겨서 제법 긴 시간 동안 니콜라스를 괴롭혔다. 멈추지 않을 것처럼 지속되던 기침이 멎어가던 즘, 니콜라스는 의주를 생각했다. 한번 떠오른 의주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니콜라스를 괴롭혔다. 돌아올 때 입고 왔던 아우터 속 주머니엔 의주가 적어준 메모가 들어있을 텐데 꺼내 보지도 못했다. 사실 그 메모가 아니었어도 의주의 번호는 니콜라스의 뇌리에 새겨지듯 박혀있었다. 하지만 의주에게 연락했다간 구체화 되지 못한 감정들이 입 밖으로 모조리 튀어나올 것 같아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니콜라스는 자신이 공항에서 느꼈던 패배감에 대한 원인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니콜라스의 패배감은 의주와 아무런 관계도 되지 못했다는 것에서 기인했다.


의주가 좋았다. 언제부터 의주가 좋았는지 자문한다면 특정 시점을 명확히 추려내기는 어려웠다. 니콜라스도 처음 겪어보는 사랑이란 감정이 낯설었기에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감정에게 사랑이란 이름을 붙여줄 수 없으면 그 무엇도 사랑이 될 수 없을 거 같았다. 의주의 다정함이 자신의 안에서 축적되어 어느 순간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변모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감정이 자각이 느렸던 만큼 니콜라스의 안에서 감정이란 건 순식간에 몸집을 불려 나가며 자신의 존재를 어필했다. 내가 생각보다 더 의주를 많이 좋아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니콜라스는 마무리되지 못한 채 결말을 맞이한 감정을 동정할 수밖에 없었다.


애써 의주에 대해 잊으려 했으나 의주가 너무도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니콜라스는 종종 대학 펜싱 경기 엔트리를 찾아봤다. 하지만 의주에 대한 흔적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의주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없자 펜싱 경기를 지켜보는 걸 그만뒀다. 왜냐하면 그맘때의 니콜라스도 배드민턴을 그만둔 직후였기에. 니콜라스는 의주에 대한 기억도 배드민턴과 함께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일상은 흐른다. 실패한 것들에 대한 후회가 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적어도 후회에 사로잡히진 않았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배드민턴도, 의주도 모두 그랬다고 생각했다. 길 가다 펜싱에 대한 것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의주가 이따금 떠오를 정도. 딱 그 정도로만 의주의 존재가 자신에게 새겨졌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들은 지나면 추억으로 남기 마련이니까.


니콜라스는 특정 실패가 인생 전반을 사로잡는 타입은 아니었다. 분명 그랬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실패는 후회로 남아 영원히 각인되기도 한다. 니콜라스는 그 사실을 간과했다. 잊힌 게 아니고, 잊으려 애썼던 것도 있다는 사실을. 실패한 첫사랑의 기억은 후회를 뒤집어쓰고 다양한 형태로 니콜라스를 괴롭혔다. 의주를 마주하자마자 하염없이 발화하고 마는 기억들의 그 모든 것들의 증거였다.







갑작스러운 의주와의 재회 이후, 의주를 다시 마주한 건 약 일주일 뒤 월말 평가의 날이었다. 니콜라스는 아침부터 잊지 않고 의주가 빌려준 우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연습실에 들어서자 먼저 와있던 촬영팀 속 의주가 있었다. 의주가 아주 살짝 손을 들어 인사했다. 니콜라스도 마주 인사하고 직장동료에게로 다가갔다.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직장동료가 속삭이는 말에 니콜라스는 잠깐 고민했지만, 의주와 자신을 수식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라는 걸 알았다. 저 예전에 한국 고등학교 다녔어서, 같이 다녔던 친구. 그 말에 동료가 금방 납득하고 고갤 끄덕였다. 아 두 분 친구셨구나. 그리고 더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친구라는 말은 딱 그 정도의 무게감이 있다. 친구라는 말 외에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무게감. 의주와 자신의 시간이 친구라는 단 두 글자에 담긴다는 것이 어딘가 억울하게 느껴졌다.


월말 평가가 절반쯤 끝나고 쉬는 시간, 니콜라스는 의주에게 우산을 돌려주기 위해 휴게실에 놓인 가방 속에 있는 우산을 꺼내 들었다. 연습실로 돌아가자 의주는 잠깐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니콜라스가 연습실을 빠져나와 잠시간 근처를 둘러봤으나 의주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나갔나 싶어져 밖으로 나가자 의주의 모습이 보여 다가가려다 급정지 했다. 보통 쉬는 시간에 자리 비우면 담타라는 한국에서 사회생활 하며 체득했던 사실을 떠올린 니콜라스는 갑작스레 의주와 자신 사이에 있는 몇 년간의 간극을 실감했다. 우산은 이따 퇴근 전쯤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려는데 의주와 눈이 마주쳤다. 멀찍이 있는 의주의 입 모양이 니콜라스를 부르는 거 같았다. 니콜라스가 긴가민가해 하고 있자 의주가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끄고 니콜라스 쪽으로 걸어왔다. 의주가 다가오자 니콜라스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별말 없이 의주에게 우산을 건넸다. 우산 고마웠어. 의주가 니콜라스에 손에 들린 우산을 받아 들었다. 의주가 잠시간 그 우산을 바라봤다.


"이따 줘도 되는데. 일부러 내려온 거야?"

"이따 주면 잊을까 봐. 쉬는 시간 아직 남았으니까 의주는 좀 더 있다가 와도 돼."


나 먼저 들어갈게. 그렇게 내뱉고 돌아서려는데 손목이 붙들렸다. 세게 붙들린 건 아니고 아주 조심스러울 정도의 악력. 그리고 잠깐 망설이는 듯한 얼굴을 하던 의주가 니콜, 하고 불렀다.


"오늘 끝나고 뭐 해?"

"응? 오늘?"

"응. 저번엔 상황이 바빠서 말 못 했는데, 오늘은 밥이라도 같이 먹을까 해서."

"..."

"저번에 급하게 보낸 거 같아서 아쉽기도 했고..."


니콜라스가 별말을 하지 않자 의주의 물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 식사는 내가 살게. 오늘 약속 있어? 오늘 아니면 다른 날도 괜찮은데... 언제가 괜찮아? 줄줄이 이어지는 말에 결국 니콜라스는 살짝 웃고 말았다. 니콜라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연신 이어지던 그제야 질문이 멈췄다.


"의주. 질문은 하나씩."

"네가 대답을 안 하니까 그렇지..."


의주의 억울한 표정에 니콜라스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어쩐지 갑자기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의주에 대한 감정을 자각하지 못했던 그 시기로. 잘 겹치지 않던 열아홉의 의주와 현재의 의주가 겹쳐 보였다. 그래서 니콜라스는 충동적으로 의주와의 약속을 수락했다. 나 오늘 약속 없고, 의주랑 밥도 먹고 싶어. 니콜라스가 하는 긍정의 말에 의주의 표정도 그제야 안도감이 보였다.


인터뷰가 길어졌다. 월말 평가 날이라는 걸 간과하고 저녁 약속을 잡았다는 걸 깨달았다. 니콜라스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을 먹기엔 늦은 애매한 시간대였다. 다음에 먹자고 해야 하나? 니콜라스는 여전히 인터뷰가 한참인 촬영팀을 두고 먼저 퇴근 준비를 했다. 의주에게는 1층 카페에서 기다리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카페에 앉아 인스타 피드나 하염없이 내리다가 할 게 없어져 턱을 괴고 얼음이 다 녹은 음료를 거의 마셔갈 때쯤 창밖에 의주의 모습이 보였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렸지... 진짜 미안."

"아냐, 나 얼마 안 기다렸어."

"뭐 먹기는 너무 늦었나?"

"난 괜찮은데, 나중에 먹어도 되고."

"너 괜찮으면 오늘 먹자.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차를 끌고 왔다는 의주의 말에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나 아무거나 괜찮아 그 말과 함께 의주의 차에 올라탔다. 그럼 내가 아는 곳으로 갈까? 의주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의주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고 익숙하게 차를 모는 모습을 바라봤다. 니콜라스는 장소로 향하는 내내 운전하는 의주를 몰래 훔쳐봤다. 의주가 니콜라스를 데려간 곳은 분위기가 적당한 술집이었다. 니콜라스는 어색하게 가게 내부에 앉았다. 의주가 메뉴판을 훑어보며 이 메뉴 맛있었다고 추천을 건넸다. 그 행동에 어쩐지 낯선 기분이 됐다. 익숙한 의주와 익숙하지 않은 의주가 공존했다.


그러니까, 기분이 왜 낯설고 이상하냐면... 첫 번째로는 지금까지 애써 무시했으나 누가 봐도 데이트 코스의 마무리에나 갈 것 같은 술집이었고, 두 번째로는 너무 자연스럽게 그런 곳에 데려오는 의주의 모습은 너무나도 생각해 본 적 없었기에. 의주의 그... 반지 상대와도 자주 오는 곳이었을까, 그 지점까지 뻗어나가는 생각을 니콜라스는 애써 지워냈다. 니콜라스는 최대한 의주의 약지를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정확히는 그 반지에 갇혀 있을 자신이 모르는 시간과 의주의 모습들을. 니콜라스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의주가 메뉴판에 고정한 시선을 들어 올려 니콜라스를 마주했다.


"니콜, 너 술 못 마셨지, 나도 오늘은 차 끌고 와서 안 마실 거니까 너도 안 마셔도 돼"


의주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과거의 순간을 입에 올린다. 아니, 나 마실래. 니콜라스는 충동적으로 대답했다. 술이 잘 받는 체질이 아니라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알코올의 힘에 기대고 싶어졌다. 알코올에 기대는 게 가능할지, 도리어 짐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의주가 의외라는 얼굴을 했지만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메뉴는 의주가 알아서 시켜줘. 의주가 와봤으니까. 의주는 거절 하지 않고 어렵지 않게 바로 메뉴를 주문해 냈다. 종업원에게 제일 도수 낮은 술이 뭐냐고 묻는 의주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심란한 와중 앞에 차곡차곡 차려진 음식은 맛있어 보였고, 실제로 맛있기도 했다. 적당한 알코올은 긴장감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긴 한 건지 대화는 그래도 어색하지 않게 이어졌다.


어떻게 지냈어? 로 시작된 말은 두 사람은 서로가 모르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의주는 대학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을 당했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우울해지기 쉬운 이야기였으나, 의주는 별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어쩐지 니콜라스는 그 지점이 굉장히 의주답다고 생각했다. 재수 후 대학 졸업 후 모 방송국의 피디로 취업 했고 아직은 막내 포지션이라는 설명까지 이어지는데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말을 끝낸 의주의 시선이 니콜라스에게 닿아왔다.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나 어쩐지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니콜라스는 얼버무리듯 배드민턴을 그만두고 춤을 시작한 뒤 지인을 통해 한국에 오게 되었다고 기계적으로 답했다.


서로가 모르는 시간을 아주 단편적으로 알게 된 이후로 두 사람은 종종 과거 얘기도 꺼내며 평범한 대화를 나눴지만, 그 외의 얘기는 나누지 않았다. 사실은 나눌 수 없다는 게 맞았다. 의주가 자신이 모르는 시간에 대해 묻는 기색을 보이면 니콜라스가 일방적으로 대화 주제를 돌렸기 때문에. 그런 대화들이 이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의주의 반지 상대에 대한 주제가 나올 것만 같아서. 도저히 알고 싶지가 않았다. 니콜라스는 명확한 이유를 파악하긴 어려웠지만, 니콜라스는 의주의 왼손 약지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정확히는 니콜라스가 알지 못하는 의주의 지난날들에게서.


그래서 니콜라스는 앞에 있는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머금었다. 의주가 주문해 준 도수 낮은 칵테일은 니콜라스의 입에도 술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술을 즐기지 않는 니콜라스도 기어코 한 잔을 더 주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도수가 낮은 칵테일이어도 술은 술이었기에, 그 결과 니콜라스는 결국 살짝 취한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술을 마지막으로 마신 게 언제라 어느 정도로 취한지는 모르겠으나 사리 분별은 됐다. 일단 니콜라스 생각은 그랬는데, 의주한테는 달랐던 거 같았다. 계산하고 가게를 빠져나오며 니콜, 괜찮아? 묻는 의주에게 고갤 끄덕였다. 의주의 왼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니콜라스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슬쩍 쓸어 넘겼다.


그 조심스러운 손짓이 니콜라스를 순식간에 휘감는다. 의주의 다정함이 사랑으로 변모하던 순간을 떠올린다. 애써 상기해 내지 않으려는 부분이었는데 생각이란 건 막을 수가 없었기에 순식간에 부유하고 만다. 의주는 어떤 여자를 만나서 연애했을까. 다정한 애인이었겠지. 니콜라스는 순간 의주가 만나왔을 사람들 사이에 자신을 끼워 넣어보다가 순간 어떤 사실을 깨닫고 만다. 니콜라스는 의주를 재회하고 느꼈던 감정들에 대하여. 의주의 약지를 보자마자 느꼈던 감정들이 모조리 후회이자 질투의 형태였다는 걸. 의주가 만나왔던 사람들, 그중 하나가 자신이면 싶었다. 의주의 다정함이 자신의 것이었길 원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갑자기 술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 정신 차리고 보니 의주가 계산 하고 있었으니까. 의주와 함께 가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늦었네. 의주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집까지 데려다줄게."

"나 괜찮은데..."

"나 너 데려다주려고 차 끌고 온 거야."

"의주, 내가 약속 거절했으면 어쩌려고."

"그럼 그냥... 차 끌고 온 사람 되는 거지 뭐."

"..."

"데려다주게 해줄 거지?"


의주는 좀... 그만 다정해도 될 거 같은데.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째려보는 니콜라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의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니콜 취했지."

"안 취했어."

"취한 거 같은데."

"어딜 보고."

"너 취하면 말 느려졌거든. 눈 깜빡이는 속도도 좀 느려지고..."

"..."

"예전에도 내가 말해줬었는데. 기억 안 나?"


그 말에 니콜라스는 어쩐지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됐다. 기억이 안 날 리가. 의주에 대한 기억은 하나하나 니콜라스의 머릿속에 새겨지듯 박혀있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처음 음주 상대가 되어줬던 게 의주였다. 니콜라스 기준 다소 무리한 음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두 배 정도 마신 거 같은 의주는 멀쩡했었다. 그렇게 술이란 건 영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던 것도 의주와 함께였고. 의주와 있으면 오래된 기억을 너무도 쉽게 퍼 올리게 됐다. 정적이 길어지자 의주가 입을 열었다.


"차 가져올 테니까 잠깐 여기 있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니콜라스에겐 의주의 다정함이 그랬다. 니콜라스는 순식간에 눈앞의 의주와 첫사랑을 동일시하고 만다. 의주의 왼손 약지를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머지않아 차를 끌고 온 의주가 니콜라스를 불렀다. 의주의 차에 올라 탄 니콜라스가 점점 풀리는 정신을 애써 바로잡으며 자신의 주소를 알려줬다. 가게에서와는 다르게 대화에 계속 마가 떴다.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 목소리만이 공간을 메웠다. 아는 곡인지 흥얼거리는 의주를 슬쩍 훔쳐봤다. 정확히는 핸들을 쥐고 있는 의주의 약지를. 의주 애인은 언제부터 만났어? 그런 말 따위가 자꾸 생각났으나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졸리면 좀 자도 돼."


니콜라스는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술기운이 점점 짙어지는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꾸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고 싶다는 생각이 니콜라스를 휘감았다. 충동이 술기운과 뒤섞였다. 그래서 니콜라스는 충동을 막아내지 못했다.


"...의주."

"응?"

"의주는 내가 떠났을 때 무슨 생각 했어?"

"..."

"너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서 니콜라스는 속절없이 풀악셀을 밟아버리고 만다. 이미 입 밖을 벗어난 말들이 멈출 생각도 없이 이어졌다. 술기운에 모든 책임을 돌려버리기로 했다. 의주는 잠시간 아무런 말이 없다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곤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대만으로 돌아갔을 때... 아무 생각 안 했어?"

"..."

"안 했어? 의주 진짜 실망."

"아니... 그게 아니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렇지..."


술기운과 의주의 다정함, 그리고 첫사랑에 대한 기억들. 그 모든 게 뒤섞여서 니콜라스를 죄 뒤흔들었다. 의주에게 다른 상대가 있다는 건 이미 뒷전이었다. 니콜라스는 의주에게서 성급한 해답을 도출해 내고 싶었다.


"나는 슬펐어. 의주한테 아무 말도 못 한 거 같아가지고... 그래서 자꾸 생각났어."

"..."

"내 감정, 그런 거 아무것도 못 말해주고 도망친 거 같아서..."


마무리되지 못한 첫사랑을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 짓고 싶다는 생각이 니콜라스를 휘감았다. 니콜라스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보상을 원하는지도 몰랐다. 어떤 형태의 보상인지는 니콜라스도 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 연락하지 그랬어..."

"..."

"나도 네 연락 기다렸는데."


의주의 대답에 니콜라스는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니콜라스가 앓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의주는 너무도 간단하게 해답을 내린다. 니콜라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주를 노려봤다.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 의주."

"아... 그래?"


그러면 무슨 얘기인데? 니콜라스는 의주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금 차 내부가 고요해졌다. 니콜라스가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자 의주가 다시금 차를 몰았다. 머지않아 익숙한 풍경들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다. 신호에 걸려 잠깐 차가 멈췄다. 어색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의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자신에게 닿아오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니콜라스는 일부러 의주를 마주하지 않았다. 정신이 약간 돌아와서 혼란스러워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내가 무슨 말을 내뱉은 거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의주가 다시금 니콜라스를 불렀다. 니콜라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니콜,"

"..."

"아까 한 말 있잖아."


의주의 낮은 목소리가 차 내부에 울려 퍼졌다. 의주가 집요하게 자신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게 느껴져 결국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 닿았다.


"내가 생각한 대로 이해해도 되는 건가?"

"무슨 이해."

"니콜라스 네가 나를..."


시선이 마주 닿자 귀에 흘러들어오는 라디오 소리가 자동으로 뮤트 되는 것 같았다. 의주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좋아했다는 거처럼 들려서..."

"..."

"...아니야?"


의주가 니콜라스에게 던지는 직구의 말에 혼미했던 정신이 그제야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의주의 약지가 니콜라스의 시선에 들어찬다. 니콜라스가 고개를 돌리며 정색했다. 빨간불은 금방 초록 불로 바뀌었다. 의주, 초록 불. 의주가 그 말에 다시금 앞으로 시선을 돌리고 운전했다. 머지않아 내비게이션에서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말이 울려 퍼졌다. 니콜라스의 집 건물 앞에 차를 멈춰 세운 의주가 차키를 돌려 시동을 껐다. 라디오가 꺼진 차내는 급격히 고요해졌다. 이 상황에서 그냥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떻게든 마무리 해야 했다. 니콜라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의주를 바라봤다. 사람들이 이래서 술을 마시는구나 싶었다. 무슨 말을 내뱉고도 술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으니까.


"오늘 나 좀 취해서... 약간 이상한 소리 한 거 같아."


그러니까... 잊어도 돼. 의주 미안. 오늘 고마웠어. 나중에 보자. 니콜라스가 의주에게서 빠르게 시선을 거두고 짐을 챙겨 들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차 문밖으로 나가려 했는데 나가지 못했다. 니콜, 부르는 의주의 목소리가 니콜라스를 붙들었다.


"나도 네 생각 많이 했어."


다소 성급하게 덧붙이는 의주의 말에 니콜라스의 몸이 덜컥 굳었다.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아..."


의주의 말끝이 줄줄 늘어났다. 니콜라스는 의주가 말하는 네 생각 많이 했어, 라는 말이 자신이 말한 것과는 다른 의미일 거라 생각했다. 아니, 다른 의미여야만 했다. 그런 게 당연했다. 아무리 과거에 대한 보상을 원해도 다른 사람이 있는 상대에겐 해서는 안 될 말들이 있다. 그렇기에 니콜라스는 오늘 하루를 통째로 도려내고 싶었다. 니콜라스는 자신이 기분파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나름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의 행동거지에 충격이 좀 거셌다.


"나라고 너랑 있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 아냐."

"..."

"나도... 긴장 많이 했어. 오늘 같이 밥 먹자고 한 거도 몇 번이고 고민하다가 말한 거고..."


니콜라스는 순식간에 쏟아지는 말에 눈을 질끈 감는다. 하지만 말이란 건 눈을 감는다고 회피할 수가 없기에 니콜라스의 귀에 또박또박 새겨진다.


"아, 그러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면..."

"..."

"...나도 너랑 같은 감정이었다고."


...술 먹은 건 난데, 왜 의주가 제정신이 아닌 거지?


니콜라스는 들으면 안 될 걸 들은 얼굴을 한 채 의주를 바라봤다. 순식간에 첫사랑과 현재의 의주가 분리됐다. 니콜라스는 첫사랑에 갇혀있었던 자신의 지난날들에 대하여 생각했다. 아무런 관계가 될 수 없는데 맞닿아 버리면 뭐 어쩌자는 거지. 굳이 미친 소리의 발화점을 찾는다면 자신이 먼저 시작했지만... 나는 술에 취해있었고, 의주는 한 잔도 마시지 않았잖아. 니콜라스는 애써 자신을 설득했다.


니콜라스가 의주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쫓기듯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니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깡그리 무시한 채 걸어가는데 손목이 붙들렸다. 붙드는 힘이 나약해서 충분히 뿌리치고 도망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니콜라스는 스무 살의 니콜라스와는 달라서 도피만이 정답이 아니란 걸 알았다. 결국 티 나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쉰 니콜라스가 빠르게 할 말을 정리하고 뒤를 돌아 의주를 마주했다. 미안 의주, 의주한테 그런 말 듣고 싶어서 한 말 아니니까 잊어도 돼. 그런 식으로 말하려 했는데 의주의 말이 한 발 더 빨랐다.


"너랑 어색해지려고 내뱉은 소리 아니야. 지금 당장 뭐가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

"그냥, 아까 네가 그랬잖아. 아무 말도 못 한 게 아쉬웠다고."

"..."

"너도 너처럼 아무 말도 못 한 게 아쉬워서 말한 것뿐이야."


니콜라스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안타깝게도 자신이 의주보다 조금 더 정상인 거 같다고 생각했다. 니콜라스는 의주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급속도로 차분해졌다. 잠깐 망설이던 니콜라스가 결국 입을 열었다.


"혹시 의주... 미쳤어?"

"와... 니콜 너 진짜 너무하다... 나도 나름 용기 낸 건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지금 중요한 게 뭔데?"


진지하게 이해가 안 간다는 의주의 표정에 니콜라스는 진심이냐는 얼굴을 했다. 내가 비참하게 이런 거까지 설명해 줘야 하나. 니콜라스가 한숨을 내뱉곤 결국 자신의 왼손을 들어 올려 약지를 가리켰다. 니콜라스의 약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의주의 고개가 갸웃했다. 그러다가 멍하니 아. 하고 내뱉고 자기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봤다. 한참 정적이 일다가 의주의 헛웃음이 정적을 뚫었다. 으아아... 의주가 마른세수 하며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의주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진짜 최악의 남자네... 니콜라스가 그렇게 생각할 동안 의주가 손을 내리고 다시금 니콜라스를 마주했다.


"일단... 진짜 거짓말 같겠지만..."

"..."

"나 만나는 사람 없어."

"..."

"진짜야... 그렇게 보지 마..."

"...그러면 그건 뭔데?"


니콜라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주가 손을 휘적거리며 다시금 변명했다. 그... 소개 들어오는 거 계속 거절하기가 죄송해서...? 출근할 때만 끼고 다녀. 와 진짜 변명 이상하지... 근데 진짜야... 이걸 어떻게 증명하지... 니콜라스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말이 점점 길어지는 의주를 바라봤다.


"...그럼 그 반지는 의주가 혼자 산 거야?"

"어?"

"의주가 그냥 혼자 사서 끼고 다니는 거냐고."


의주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런 질문을 할지 몰랐다는 얼굴. 의주의 새까만 눈동자가 도르륵 굴렀다. 아... 그건 아니고... 의주가 잠깐 탄식같이 내뱉었다.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랑 맞췄던 거긴 해."

"..."

"아, 지금까지 무슨 의미가 있어서 가지고 있던 건 아니고. 방 치우다 발견해서... 버리기도 뭐해서 가지고 있던 건데..."

"의주. 스탑."


의주의 입이 꾹 다물림과 동시에 양 뺨이 동그랗게 말려 올라갔다.


"일단, 알겠어."

"...일단?"


의주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봤다. 어떻게 헤어진 연인의 반지를 끼고 다닐 수 있지. 무슨 이유가 있더라도 그렇지... 니콜라스에게는 다소 이해가 어려운 영역이라 계속 그 반지를 노려만 봤다. 의주가 잠깐 눈치를 보다 자신의 왼손을 슬쩍 몸통 뒤로 숨겼다. 그제야 반지에서 시선을 떼어낸 니콜라스가 의주를 올려다봤다.


"근데 난 이해 못 해."

"..."

"내가 의주랑 그 반지 나눠 꼈던 사이였으면... 아무 의미 없다고 하면, 슬펐을 거야."


그 말에 의주의 입이 꾹 다물려서 그와 동시에 입꼬리가 도드라졌다. 딱히 변명할 말이 없었는지 아무런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나라면? 어색하게 덧붙인 니콜라스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았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니콜라스를 감쌌다.


니콜라스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던 첫사랑과 현재의 의주가 충돌한다. 니콜라스의 기억 속 첫사랑이라면 누군가랑 나누어 꼈던 반지를 아무런 의미 없이 다시금 끼고 다니는 사람일 거 같지 않았으니까. 니콜라스는 의주에 대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명확히 구체화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다소 영원 같은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던 두 사람은 빌라 건물 밖으로 담배를 피우러 나온 사람 때문에 현실로 급격히 복귀했다. 아무 말 없이 마주 보고만 있는 두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본 남자는 금방 흡연구역 쪽으로 사라졌다. 의주는 시간이 멈췄다가 풀린 사람처럼 어색하게 니콜라스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어... 나 그만 가볼까."


의주가 물음인지 뭔지 모를 어투로 내뱉었다. 니콜라스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의주가 입술만 꾹꾹 씹어댔다. 니콜라스는 그런 의주를 빤히 바라봤다. 이대로 의주를 보내야 하나? 니콜라스는 자신의 술기운이 아직 채 가신 상태가 아니라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의주의 손목을 붙잡고 홧김에 내뱉었다.


"의주, 여기 내 집이야."

"나도 아는데... 내가 데려다줬잖아."

"아니 의주. 그러니까."

"..."

"가지 말고 나랑 같이 들어가."


니콜라스는 자신의 말이 지나치게 함축적으로 튀어나왔다는 걸 알지 못했다. 니콜라스가 내뱉은 가지 마, 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 아직 얘기가 덜 끝난 거 같은데 장소가 별로이니 우리 집에서 말하고 가, 라는 의미였는데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충분히 다를 법도 했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자신의 뇌리에 박히는 정보 값이 과해서 의주의 받아들임 따위 신경 쓸 상태도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어... 왜?"


손에 닿아오는 의주의 온도가 유독 뜨거웠다. 의주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그런 미묘한 지점을 의식할 만큼 제정신인 상태도 물론 아니었다.


"왜라니. 싫어?"

"싫은 건 아닌데..."


그러면 대체 뭐가 문제냐는 얼굴을 한 니콜라스가 의주를 바라봤다. 의주는 지나치게 뭔가 잘못한 강아지처럼 자신을 쳐다봤다. 싫은 거 아니면 들어가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니콜라스는 순간 멈칫했다. 보통 자신의 공간을 넘어오는 타인은, 연인이었거나 하룻밤 상대이거나... 그랬다는 게 갑작스럽게 떠올라서. 니콜라스는 그제야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됐든 간에 서로의 마음이 엇비슷했다는 걸 확인한 다음 장면 이후,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하는 건...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걸.


싫냐고 묻는 말에 싫은 건 아니라고 답하는 의주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자신의 집에 같이 들어가자는 말을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다면, 싫지 않다면, 의주는... 정말로 친구가 아닌 그런 의미로써 나를 바라봤다는 게 되는 건가? 니콜라스는 차마 파헤치기 힘든 의문점에 도달하고 만다.


니콜라스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게 됐다. 은연중에 의주와 자신의 감정이 온전히 같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현재도 여전히 의주와 자신의 감정이 온전히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긴 했다. 의주가 자신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봤다는 뒤늦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기존의 의문이 증발한다. 의주의 행동 하나하나에 실시간으로 묻고 싶은 것들이 변경됐다.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졌다. 니콜라스의 머릿속에는 원초적인 장면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니콜라스는 생각을 애써 지워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장면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니콜라스는 갑작스럽게 의주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의주는 그런 니콜라스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몇 년 동안 써왔던 한국말이 모조리 머릿속에서 증발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해를 풀 엄두조차 나질 않았다.


"아니야."

"뭐가 아니야?"

"나 마음 변했어. 의주 가도 돼."


그래서 결국 니콜라스가 선택한 건 현재 상황에서의 도피였다. 사고회로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의주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미안 의주... 나 취해가지고 머리 아파. 쉬어야겠어. 니콜라스가 취기를 핑계 삼았다. 괜찮아?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라도 사다 줄까? 하는 의주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냥 쉬면 될 거 같다고 내뱉었다. 니콜라스의 변명을 그다지 믿는 투는 아니었지만, 의주는 니콜라스를 현관 앞까지 배웅해 줬다. 니콜라스는 겨우 의주에게서 벗어나 집 안으로 홀로 들어섰다. 신발장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의 상황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몇 년 만에 우연히 만난 첫사랑, 그리고 어린 시절의 그 누구 하나라도 용기를 냈다면 맞닿을 수도 있었다는 걸 깨닫는 씬.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로맨틱하고도 이루어지지 못한 관계와 지나버린 시간이 안타까운 장면일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충분히 또 다른 시작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니콜라스에게는 현재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니콜라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간단할 수가 없었다.


기억은 미화되는 구석이 있다.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의 경우 당연히 더 심할 수밖에 없다. 니콜라스의 경우 그 사실을 간과했다. 니콜라스는 첫사랑이라는 환상과 현재의 의주 사이에서 큰 간극을 마주하고 만다.


어떠한 형태로도 마무리되지 못한 사랑은 후회 같은 다양한 감정들을 집어삼키며 몸집을 불려 나가다 결국 성역이 되고 만다. 그건 니콜라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니콜라스의 안에서 의주의 존재는 너무나도 거대한 성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플러스가 있으면 당연히 마이너스적인 측면도 있는 게 사람인데, 자신의 뇌 내의 환상에 절여진 의주는 그러지 않았다. 심층적으로 이루어진 미화의 늪에서 니콜라스는 막연히 궁금해졌다. 자신이 의주의 첫사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모습도 의주의 안에서 미화된 채 자리 잡고 있을지, 차라리 재회하지 않은 채 서로의 안에서 애틋한 감정으로 남아있는 게 나았을지.







며칠 만에 마주한 의주의 왼손에는 반지가 없었다. 그게 두 사람의 관계에 무슨 유의미한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촬영이 중단되고 잠시 쉬는 시간, 바람을 좀 쐬다가 연습실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다 말고 다시금 문이 열렸다. 그리고 보이는 건 의주의 모습. 의주는 별말 없이 니콜라스의 옆에 나란히 섰다. 니콜라스는 슬쩍 의주를 흘겨봤다. 반지가 없는 의주의 왼손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 꽤나 오래 끼고 다녔는지 반지가 없음에도 반지를 꼈던 부위만 하얗게 바래져 있었다. 사라진 반지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니콜라스의 시선이 자신의 왼손에 있다는 걸 의식한 의주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까 네 말대로 상대방한테 매너가 아니었던 거 같아서..."

"...버렸어?"

"아니 아직."


의주가 의문 어린 얼굴로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버릴까? 니콜라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의주 알아서 해. 엘리베이터는 금방 연습실이 있는 층에 도달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내려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오늘 촬영은 별다른 이슈 없이 무난하게 끝이 났다. 의주도 일이 바쁜지 니콜라스에게 다가오는 일은 없었다. 정신없이 일하는 의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도망치듯 퇴근한 니콜라스는 금요일이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집으로 직행했다. 「잘 들어갔어?」 핸드폰을 꺼내 들자마자 보이는 의주의 메시지. 「ㅇㅇ 의주도 잘 가」 빠르게 답장한 뒤 핸드폰을 멀찌감치 두고 뒤집었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내내 의주에 대한 생각들이 니콜라스를 괴롭혔다.


첫사랑에 대한 감정들이 순수하고 깨끗했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아니었다. 꿈속에서 나타나는 의주의 형태는 지나치게 다양했다. 툭 까놓고 의주와의 섹스를 상상해 본 적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어떤 지점이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건지 니콜라스는 골몰했다.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있어서 늘 가능의 영역이었는데, 의주도 그렇다는 게... 니콜라스에게는 믿기지 않았다.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에 가까웠다.


그래서 니콜라스는 충동적으로 지운 지 오래된 데이팅 어플을 다시금 설치했다. 외로움을 잊기 위한 수단으로는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알았음에도. 침대에 드러누운 채 끊임없이 상대를 스와이프했다. 한참 동안 마땅한 매칭 상대를 찾지 못했다. 결국 서울 전역으로 범위를 확대한 채 다시금 무한 스와이프 지옥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순간 한 프로필 사진에서 멈췄다. 도드라지는 목젖이라거나 마른 몸. 자연스럽게 의주가 상기됐다. 어떻게 생각하면 의주에게서 도피하기 위해 시작한 데이팅 어플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의주와 비슷한 구석을 자꾸 찾게 된다는 걸 니콜라스는 의식하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니콜라스가 그 상대에게 매칭 요청을 보냈다. 그 외에도 계속 상대를 찾아 헤맸으나 눈에 차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몇 분 지났을 무렵 매칭 요청을 보낸 상대와 매칭되었다는 알람이 떴다. 우리 집으로 오라거나 처음부터 숙박업소로 오프 약속 잡는 미친놈이면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인사를 나눴으나 다행히도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상대방과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빠르게 다음 날인 토요일 오후 시간대에 오프 약속을 잡았다. 토요일 당일, 니콜라스는 무슨 옷을 입을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최대한 과하지 않게 차려입고 약속 장소에 나갔고 상대를 만났다. 상대방을 마주하자마자 순간적으로 든 생각. 의주보다는 키가 좀 작은가? 니콜라스는 의주에 대한 생각을 지워내려 애썼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됐다. 누군가를 만나면서 타인을 생각하는 건 상대에게도 실례라는 걸 알았으니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근처 바에 들어가 얘기를 나눴다. 상대와의 대화는 괜찮았다. 동갑이었고, 관심사도 비슷했기에 대화가 자연스러웠다. 평소와 같았다면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다음 만남을 잡거나, 돌아가기가 아쉬워진다면 하룻밤을 같이 보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만남 이후 이름 없는 관계에 특정 이름을 붙이게 될 수도 있었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의주의 존재가 자꾸 걸렸다. 의주에게 벗어나길 원했는데 실상은 하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의주에 대한 생각들이 자꾸 니콜라스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니콜라스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결국 어영부영 술자리가 마무리됐다. 다음에 볼 수 있냐는 상대의 말에 니콜라스는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니콜라스는 그간의 연애에 대해 생각했다. 겉보기에는 다 멀쩡한 연애 같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온전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던 것만 같았다. 첫사랑과 연애했으면 이런 이유로 싸웠을까? 좀 더 괜찮은 연애이지 않았을까. 무의식중에 늘 그런 생각들을 했던 것도 같았다. 이어지는 생각들의 끝에서 니콜라스는 결국 어떤 사실을 마주하고 만다.


니콜라스는 비로소 자신의 안 좋은 습관을 깨닫는다. 모든 연애들을 첫사랑과 비교하는 습관을. 그걸 넘어서 모든 연애 상대에게 첫사랑의 존재를 덧씌웠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연애들이 모조리 첫사랑의 레플리카 같은 연애였다. 모든 연애 상대에게 첫사랑의 환상을 덧씌웠으나 실상은 레플리카도 되지 못했다. 니콜라스의 안에서 성역이 되어버린 첫사랑이라는 존재를 대체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습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지속된 습관은 의주의 존재마저도 집어삼키고 만다. 니콜라스는 현재의 의주에게조차 첫사랑의 존재를 덧씌웠다. 니콜라스가 키워낸 첫사랑의 환상처럼 움직여주지 않는 의주에게서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서 니콜라스는 의주의 본질을 온전히 들여다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니콜라스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택시 너머로 수도의 빛이 흩어졌다. 한국으로 들어왔을 때를 떠올려본다. 의주에 대한 생각이 아예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으나 늘 상상하던 재회는 확실히 현재와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현실이라는 건 대체로 상상했던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주에 대한 생각이 깊어질 무렵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드르륵 진동했다. 애써 무시하려고 했는데 끊임없이 진동해서 결국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니콜라스는 액정에 띄워진 이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의주]


전화를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고민하던 사이 도착했다는 택시 기사의 말에 급하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지갑을 꺼내 들어 택시비를 지불했다. 택시에 내려서 집으로 돌아가려던 니콜라스는 순간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 속에서 여전히 진동하는 핸드폰과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


모르고 싶어도 차마 모를 수가 없었다.


익숙한 뒷모습이 뒤를 돌았다. 니콜라스에게는 그 모든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내린 의주가 니콜라스의 존재를 인식한다. 결국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만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약 2년 동안 의주를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데, 한 번 마주치고 난 이후로는 너무 허무할 정도로 자주 마주치게 된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의주가 니콜라스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니콜. 부르는 의주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나지막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의주에게서 은은한 알코올 향이 번져왔다. ...의주 취했어? 묻는 말에 의주가 파드득 손을 휘저어가며 부인했다. 나 진짜 얼마 안 마셨어. 니콜라스는 의주의 그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시긴 마셨는데, 취하진 않았어. 진짜로... 의주가 작게 내뱉었다. 두 사람 사이에 한참 동안 정적이 일었다. 니콜라스의 눈이 의주를 거의 노려보기 시작하자 의주가 변명의 말을 늘어놨다.


"나 오늘 근처에서 약속이 있어가지고... 생각해보니까 여기 근처가 너희 집이었던 거 같더라고. 자주 오는 동네 아니니까 온 김에 잠깐 얼굴이나 볼까 싶어져서... 전화했는데, 너 안 받고..."

"..."

"미안, 사실 다 변명이고 그냥... 보고 싶어서 왔어."


그런 말을 내뱉고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의주의 얼굴을 한참 동안 마주하다 보니 순간 억울함이 몰려왔다. 의주의 다정함과 솔직함이 좋았다. 의주의 존재가 다시 만나도 녹슬지 않은 채 니콜라스에게 닿아왔다. 근데 거기서 끝나는 감정이 아니었다. 몇 년 동안 쌓아온 감정들이 현재를 가로막았다.


"...의주는 뭐가 그렇게 다 간단해? 다 쉬워?"


의도한 건 아니지만 투정 어린 말투로 튀어 나갔다. 의주가 슬쩍 웃었다. 왜 웃어 의주. 니콜라스가 의주를 노려봤다. 미안... 의주가 작게 사과했다.


"...너는 내가 어려워?"

"의주, 내가 먼저 질문했잖아."

"그건 그런데..."

"..."

"나는... 어렵게 생각하다가 놓친 게 너무 많은 거 같아서, 쉽게 생각하려고 하는 거야."


의주의 시선이 니콜라스를 향했다. 니콜라스는 아무런 종용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첫사랑의 시선을 한참 동안 마주했다. 사실 의주는 처음 순간부터 명확했을지도 몰랐다.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 있을지도 몰랐다.


니콜라스는 특정 실패가 인생 전반을 사로잡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어떤 실패는 평생 뇌리에 박혀 잊혀 지지 않기도 했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최초의 후회이자 실패가 의주였음을 안다. 의주는 늘 똑같았는데 자신만이 혼자 기대했고 또 실망했다. 그 지점을 무시한 채 첫사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과거의 감정에 대한 보상으로써 의주랑 어떤 관계가 된다면, 그 관계는 자신의 실패를 온전히 끌어안고 구원할 수 있을까. 니콜라스는 애초에 일방적 구원을 필요로 하는 연애가 괜찮은 방향으로 진전될 리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내가 네 감정에 내가 무슨 해답을 줄 순 없지만... 답을 내릴 때까지 같이 있는 건 가능한데."

"..."

"그냥 같이 있는 건 안 될까?"


하지만 의주는 니콜라스를 구태여 구원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렵다는 말에 쉽게 생각하면 안 되냐는 말 대신 어렵지 않아질 때까지 같이 있어 준다는 말을 건넨다. 니콜라스는 어쩐지 그 모습에 과거의 의주를 떠올리게 됐다. 의주랑 있으면 불명확한 모든 게 다 녹아내리는 느낌. 의주를 좋아하게 되는 건 니콜라스에게는 늘 불가항력의 영역이었다.


"...의주."

"응?"

"갈 거야?"

"...늦었으니까 가야지?"


제 멋대로 덧씌운 환상이 조금씩 녹아내린다. 니콜라스는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의주의 일방적인 구원만이 자신의 실패를 치유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니콜라스는 그제야 비로소 의주를 실패한 첫사랑이 아닌 현재의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가지 마."


니콜라스가 그 말과 함께 의주의 손목을 붙들었다. 의주의 귓가가 금방 빨갛게 익어갔다. ...의주 지금 이상한 생각 하고 있지. 니콜라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주를 바라봤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의주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니콜라스와 눈이 마주쳤다.


"이상한 생각... 하면 안 돼?"


의주의 말에 최대한 현재 상황을 어색하지 않게 만들려고 했던 니콜라스의 노력이 금방 물거품처럼 증발했다. 니콜라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의주의 손목만 붙들고만 있다가 천천히 자신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정말로, 의주와 함께.







꽤나 길었던 데뷔 다큐 촬영이 오늘부로 마지막이었다. 데뷔 조 아이들은 곧 데뷔 한다는 고양감에 젖어 들었고, 니콜라스와 다른 디렉터, 프로듀서들은 드디어 한 프로젝트가 1차 결말을 맞는구나, 하는 성취감에 젖어 들었다. 다큐 촬영이 마지막이라는 건, 의주와 이 공간에서 마주하는 것도 오늘부로 마지막이라는 뜻이었다. 첫날에는 이날만을 기다렸는데 막상 다가오니 어쩐지 아쉽게 느껴졌다. 니콜라스는 모니터링 화면을 바라보는 의주의 동그란 뒤통수를 슬쩍 바라보다가 다시금 연습생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 촬영 날이라 인터뷰가 길어질 예정이었기에 새벽부터 촬영팀과 함께였다. 오늘은 촬영이 모두 끝나고 회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한국 사회에 녹아든 몇 년 동안 대부분의 직장인이 기피하고 싶어 하는 게 회식이라는 걸 습득한 니콜라스였으나 눈물과 땀이 담긴 프로젝트의 마무리 단계여서 그런지 평소랑은 느낌이 좀 달랐다. 그래서인지 다들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마지막 촬영본은 스튜디오에서 데뷔곡 프로모션 영상을 촬영하는 단계였다. 애들아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힘은 좀 빼도 될 것 같아. 니콜라스의 말에 다들 고갤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행히 프로모션 영상 촬영과 인터뷰는 회식 예약 시간에 맞춰서 종료됐다. 촬영팀 소수 인원은 장비들을 사무실에 놓으러 떠났다. 당연히 막내였던 의주도 그중 하나였다. 니콜라스는 다른 선생님들과 먼저 회식 자리에 도착해 저녁 식사를 했다. 다른 촬영팀과 수고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데뷔 조 아이들도 니콜라스의 테이블로 음료를 들고 감사 인사를 전하러 왔다. 니콜라스에겐 첫 번째 데뷔 조 애들이었기에 애착이 깊었기에 이것저것 얘기를 건네고 있는데 가게 문이 열리고 의주가 들어왔다. 의주는 잠시간 니콜라스에게 시선을 던지다가 자신의 촬영팀 테이블로 향했다. 회식 시간 내내 애매하게 타이밍이 맞지 않아 같이 자리하지 못했다.


그다지 늦은 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새벽 스케줄에 맞지 않는 무리한 음주로 테이블이 하나둘 전멸했다. 슬슬 술자리가 파할 분위기가 되자 알아서 집에 가자는 얘기가 오갔다. 하나둘 자리가 비어갔다. 그제야 타이밍이 맞아서 의주가 비어있는 니콜라스의 옆으로 다가왔다. 니콜 수고했어. 담배를 태우고 왔는지 의주에게서 살짝 담배 냄새가 배어왔다. 니콜라스 테이블의 인원들에게 몇 가지 질문 세례를 받는 의주를 바라봤다. 겨우 대화 화제가 의주에게서 벗어나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의주가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의주가 니콜라스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니콜, 우리 잠깐 나갔다 올까?


"에, 밖에 덥잖아."

"그렇긴 한데... 니콜 너 괜찮아?"

"뭐가? 나 오늘 콜라만 마셨는데?"

"아... 그러면 내가 취한 거로 할 테니까 나갔다 오자."


니콜라스가 의주의 말에도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의주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의주가 니코올... 하고 채근하듯 작게 내뱉었다. 결국 웃음을 터트린 니콜라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주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에어컨 풀가동되어 있는 가게에 있다 밖으로 나오니 순식간에 온몸으로 습기가 달라붙었다. 두 사람은 가게 앞에 구비되어있는 조그마한 벤치에 앉았다. 덥잖아 의주. 투정 어린 말에 의주는 그냥 웃기만 했다.


"왜 나오자고 그랬어."

"같이 있고 싶어서?"

"뭐야, 의주 느끼해."


두 사람은 여전히 현재의 관계에 정확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상태였다. 며칠 전 그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니콜라스의 집 안으로 함께 들어간 두 사람은 각자 샤워를 했고, 배고프다는 니콜라스의 말에 야식을 시켜 먹었다. 새벽 늦은 시간까지 드라마를 봤고, 졸린 눈을 겨우 뜨고 거울 앞에서 같이 양치질을 했다. 그리고 두 편 정도 남은 드라마를 보다가 스르륵 잠들었다. 늦은 점심이 되어서야 잠에서 깼고, 집 근처 밥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부쩍 습해진 공기를 머금은 바람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니콜라스는 비로소 의주의 모든 걸 알고 싶어졌다. 자신이 외면했던 의주의 모든 시간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옆의 의주를 바라봤다.


"우리도 갈까?"

"어디를? 집?"

"아니?"

"그럼 이 시간에 어디 가게."

"어디든. 싫어? 아, 의주 막내라서 먼저 가면 안 되나?"


니콜라스가 조그맣게 속삭이자 의주가 헛웃음을 냈다. 니콜 진짜 한국사람 다 됐네... 우리 회사 그렇게 꼰대 아니야... 그 말에 니콜라스의 고개가 잠시 갸웃했다.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니콜라스의 말에 의주가 알겠다고 고갤 끄덕였다. 가게 안으로 다시 돌아간 두 사람은 짐을 챙겨 인사하고 밖으로 나아서 아무 말 없이 여름밤을 걸었다. 근데 니콜 우리 진짜 어디가. 묻는 말에 잠깐 고민하던 니콜라스가 시선을 돌려 의주를 바라봤다.


"의주, 배드민턴 치러 갈까."

"...니콜 취했어?"

"나 술 안 마셨다니까?"

"근데 왜 갑자기 배드민턴을?"

"그냥, 우리 배드민턴 예전에 많이 쳤잖아. 어때. 과거 생각나고 좋지."

"아니 니콜... 일단, 우리 지금 라켓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


니콜라스는 자연스럽게 과거를 상기한다. 대개의 경우 이런 어이없는 제안을 하는 건 니콜라스였고, 곤란하다는 얼굴을 짓고 있는 게 의주 포지션이었으니까. 이런 황당한 제안에도 결국 응해줄 의주라는 걸 니콜라스는 알았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한숨을 쉰 의주가 핸드폰을 꺼내들어 라켓을 팔만한 근처 잡화점을 써치했다. 여기 아직 열었다. 근데 곧 닫으니까 빨리 가야 해. 니콜라스가 앞장서서 걷는 의주의 뒤를 쫓아갔다. 잡화점의 문이 닫히기 십 분 전 겨우 세이프 한 두 사람은 만 원도 하지 않는 라켓과 셔틀콕 세트를 구매했다. 그리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근처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물가에 도착하자 더욱 습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으나, 불어오는 강바람은 한결 시원했다. 무작정 배드민턴 코트가 있는 곳으로 걸었고, 몇 분쯤 걸었을 무렵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 위치한 배드민턴 코트를 발견했다. 의주가 건네는 배드민턴 라켓을 받아 들었다. 니콜라스가 늘 사용하는 것보다 당연히 조악하고 가벼운 형태였으나, 몇 년 만에 만져보는 라켓의 감각이 니콜라스의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네트를 가운데 두고 자리를 잡았다. 니콜라스가 의주에게 갑작스러운 서브를 넣었다. 의주는 자동 반사적으로 라켓을 휘둘렀다. 야 갑자기 이러는 건 반칙이지... 갑작스럽게 시작된 랠리가 제법 길어지자 의주의 앞머리가 땀으로 젖어갔다. 의주가 스매시를 한답시고 라켓을 휘둘렀으나 라켓은 허공을 가르기만 했고 의주의 옆으로 셔틀콕이 살포시 떨어졌다. 의주가 입술을 살짝 내밀고 웃고 있는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아직 몸이 안 풀려서 그래. 의주가 변명의 말을 내뱉으며 셔틀콕을 주워들었다.


"의주, 내기라도 할까."

"무슨 내기?"

"아, 의주랑 내기는 좀 그런가?"

"와... 니콜 은근 나 무시한다?"

"무슨 무시야아."

"너랑 나는 수준이 안 맞는다?"

"...의주, 나 갈까?"

"아아, 알았어 알았어. 가지 마."


두 사람은 어떤 기준으로 내기할거냐 오랜 설전 끝에 의주는 10점, 니콜라스는 20점 먼저 내기로 타협을 본 뒤 경기를 시작했다. 내기 상품도 딱히 걸지 않은 채로 시작된 랠리는 의외로 죽기 살기로 셔틀콕을 살리는 바람에 꽤나 길어졌고, 니콜라스도 무의식적으로 괜찮은 각으로 날아오는 셔틀콕에는 스매시를 꽂게 되어서 의주가 건네는 비겁하다는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본능이야 본능. 그렇게 변명해도 의주는 여전히 배신감 어린 표정이었다. 생각보다 긴 시간 끝에 결국 니콜라스의 승리로 경기가 끝났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졌다. 나름 시원하던 강바람도 흐르는 땀을 막아내진 못했다. 니콜라스가 티셔츠를 끌어 올려 땀을 대충 닦아냈다. 강바람이 젖은 앞머리를 간질였다. 게임에서 진 의주가 결국 근처 자판기에서 이온 음료를 뽑아와 건네며 니콜라스의 옆에 주저앉았다. 의주의 얼굴은 이미 땀범벅으로 촉촉해져 있었다. 니콜은 진짜 못 이기겠다... 두 사람은 나란히 이온 음료로 목을 축였다.


"근데 갑자기 왜 배드민턴이야."

"응? 그냥, 옛날 생각나고 좋잖아."

"니콜 진짜 충동적이다..."


니콜라스는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올려다봤다. 새까만 서울 하늘에는 별 하나 없었다. 잊고 있었던 감각이 니콜라스를 채워나갔다.


오랫동안 자리 잡은 안 좋은 습관을 고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일단 마주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인정하지 못하는 습관을 고칠 방법은 없으니까.


니콜라스는 마주하지 않으려 애썼던 과거를 마주하려 노력해 본다. 의주와의 타임라인이 니콜라스의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흩어진다. 쉽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거지. 의주가 했던 말이 귓가에서 리피트됐다. 니콜라스는 자신이 모르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의주의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본다. 니콜라스가 몸을 일으켜 의주를 마주했다.


"의주, 지금까지 몇 번 연애했어?"

"...지금? 이렇게 갑자기?"


의주의 표정이 곤란함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굳건했다. 빨리 대답. 종용하는 말에 의주가 결국 말없이 손가락을 펴 보였다. ...세 번? 진짜? 니콜라스가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자 의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몇 번 연애했다고 생각했길래..."


니콜라스는 눈앞의 의주를 마주했다. 의주도 니콜라스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괜히 고개를 숙여 노려보는 니콜라스의 행동에 의주가 웃어 보였다.


"그러면, 연애할 때 내 생각 했어?"

"...니콜."

"나는 했어."

"..."

"엄청 엄청 많이. 지금 만나는 게 의주였으면 어땠을까... 맨날 상상했어."

"..."

"그러니까 의주도 내 생각 했는지... 어떤 연애 했는지 궁금해. 다 알고 싶어."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다. 의주가 자신에게 어떤 답을 강요하지 않는 게 사랑의 형태이기도 했고, 니콜라스처럼 상대의 모든 걸 다 알고 싶은 게 사랑의 형태이기도 했다. 서로의 형태를 이해하는 게 사랑의 시작이었다. 니콜라스는 아무런 이물감 없이 매끈한 의주의 왼손 약지를 매만졌다. 여전히 희미한 반지 자국이 남아있는 의주의 왼손 약지. 의주가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네 생각 했어."

"얼마나?"

"...첫 연애는 그거 때문에 차일 정도로?"


의주와 어떤 관계가 되는 게 두려웠다. 첫사랑의 모조품 같던 연애들처럼 의주와의 연애도 그렇게 비슷하게 끝맺음 될까 봐.


"의주랑 나, 진짜 최악."

"그러게... 진짜 별로다 우리..."


물론 그런 끝맺음이 아예 아닐 거라고 백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었다. 성역이 되어버린 첫사랑은 의주와 연애하면서도 불현듯 떠올라 니콜라스를 괴롭힐 수도 있었다. 의주와 어이없고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로 싸울 수도 있고, 의주와의 연애를 후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건 니콜라스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니콜라스는 현재의 의주를 모조리 겪어보고 싶어졌다.


"의주."

"응, 니콜."

"이번에는 반지 없네."

"당연히 없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의주는 그 뒷말을 잇지 못했다. 뒷말이 니콜라스의 입안으로 모조리 먹혀들어 갔기에. 의주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의주의 손이 니콜라스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침범해 왔다. 의주와의 키스는 아까 먹었던 이온 음료의 맛이 났다. 짧은 키스 후 두 사람의 입술이 서서히 떨어졌다. 코가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멈춘 니콜라스가 의주를 바라봤다. 의주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아주 오래된 고백을 이제야 뱉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거 알아 의주?"

"..."

"의주가 내 첫사랑이야."

"아... 그래?"

"뭐야 그 반응?"

"아니,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 했어서..."

"와 뭐가 당연해. 의주 좀 재수 없어."

"아니, 나도 네가 첫사랑이니까..."

"..."

"당연히, 너도 그럴 줄 알았지."


의주의 뒷말이 점점 페이드아웃 되듯 작아졌다. 니콜라스가 결국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니콜, 왜 웃어... 니콜라스가 답하지 않고 의주의 품으로 와르르 안겨들었다. 의주가 다소 벅차게 니콜라스를 받아 들었다. 서로 가슴팍이 밀착되었다. 의주의 심장박동이 니콜라스에게 천천히 번져왔다. 너무 오랫동안 후회로 남겨졌던 기억들에 대해 떠올려본다.


안 좋은 습관을 이해한다 해도 그것을 완전히 고치기는 어렵다. 첫사랑의 흔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으니까. 오래된 기억은 뇌리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아도, 기억을 재조립할 수는 있다. 니콜라스는 비로소 첫사랑을 재조립해 낼 결심이 들었다. 성역 같던 첫사랑은 또 다른 형태를 갖춰간다. 그렇게 재조립된 첫사랑이 정확히 어떤 형태일지는 니콜라스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두렵지는 않았다. 의주와 함께라면 어떤 형태로 재조립되어도 괜찮았을 거 같았으니까.





 

첫사랑재조립일지 終

I just wanna say "Dive baby, d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