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운세,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김 씨, 이 씨, 박 씨, 최 씨, 그리고 정 씨도 좋고, 왕 씨도 운명의 상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거 순 거짓말이네. 전부 합치면 전국 팔도 사람 다 운명이겠어. 이래서 사주 같은 건 안 믿는 건데.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주머니 속에 쑤셔 넣어둔 남자가 바지춤에 땀이 밴 손을 문질러 닦았다.

그는 발령받은 지 고작 3일 된 신입 가이드로, 남들보다 발현이 조금 늦은 케이스다. 대부분의 가이드는 2차 성징이 나타난 후 몸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고등학생 때 각자의 능력을 자각한다. 그러나 그는 스물다섯이 되어서야 자신이 가이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너랑 손잡으면 되게 기분 좋아. 처음부터 그랬어. 넌 유일무이해. 네가 내 마지막 사랑인가 봐.

그의 전 여자친구 김은 늘 속삭였다. 김은 센티넬 센터 서울지부 소속 신입 사원이었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특출난 두뇌 회전력으로 전략 부서 내에서 나름의 귀여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 운명 같은 느낌이 미약한 가이딩이었다는 걸 눈치챈 뒤로 김은 떠났다. 가이드의 수가 무한하지 않은 탓에, 신체를 갉아 먹는 전투형 센티넬이 아닌 이상 전담 가이드는 배정되지 않는다. 전투 능력이 없는 센티넬인 김이 그가 가이드라는 것을 빠르게 알아채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아 본 적이 없었으니,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은 당연히 유추할 수 없었다.

김은 운명론자였다. 나는 사랑을 바란 거지, 가이딩을 원한 게 아냐.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빼쭉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와중에도 그린 듯이 찢어진 눈매와 작은 눈동자가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 동상이몽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은 이어 말했다. 꼭 주종 관계 같잖아. 나는 그런 데 익숙해지기 싫어. 얽매이기도 싫고. 직장인의 소울 푸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던 김은 센티넬 센터 소속답게 가이드 신체검사 부서로 연결되는 전화번호를 남겨둔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이 모든 사태가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아 멍해졌고, 그다음에는 초연해졌다. 사랑은 잃었지만, 워라밸 끝내주는 평생직장은 얻었다.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슬퍼질 것 같았다.

목에 건 사원증, <변의주> 세 글자가 빛나고 있었다.

 

 

 

 

 

소방대원으로 살아남기

미파



 

 

 

 

 

“여긴 연구 2팀이고요, 연구원 대동 하에 가이딩실 들어오시면 돼요. 웬만하면 밖에 계속 있을 테니 안심하세요.”

“넵.”

“당연히 별일 없을 거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아시죠? 본능이란 게.”

과거와는 달리, 센티넬은 과한 신체 접촉을 요하지 않고도 몸을 회복할 수 있다. 더 이상 추접하게 몸을 접붙여 줄 것을 구걸하지 않아도 된다. 가벼이 손을 부여잡는 것만으로도 하루 간 문제 없이 업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충전된다. 그러면서 가이드는 워라밸 최상의 직업이 됐다. 세계 대전이 다시 발발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대강 손만 내밀고 있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 없고,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니. 이런 좋은 기회, 누구든 거절할 리 없다. 굳이 구차하게 매달릴 진로 같은 거 정해 놓지 않은 의주에게는 더욱이 최상의 직장이다.

의주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연구원의 뒤를 따랐다. 긴장을 풀 요량으로, 수능 백 일 전에도 안 하던 짓인 인터넷 사주까지 들여다봤지만 효과는 전무했다. 이놈의 센터 구조는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야. 센티넬 손 한번 잡기 참 어렵다. 국가 주요 재산이다 이건가. 그리고 뭐가 이렇게 추워? 마른 팔 위로 올라온 닭살을 쓸어내린 의주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연구 2팀 직원들은 하나같이 담요를 칭칭 두르고 있다.

“추우시죠? 다음엔 겉옷 들고 오시는 게 좋을 거예요.”

“에어컨이 되게 빵빵하네요.”

“네, 아무래도. 특성상.”

연구원이 손목에 걸린 시계를 흘끗 확인하고는 작게 읊조린다. 벌써 시간이 다 됐네. 들어가실게요. 가이딩실 도어락에 사원증을 대던 그가 문득 뒤를 돈다.

“아, 맞다. 조심하세요, 의주 씨.”

“네? 뭘요?”

동그랗게 뜨인 눈을 잠시간 응시하던 그는 매정하게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대답했다.

“오늘 만나는 센티넬, 가이드 폭행한 걸로 유명한 거 알아요? 근신 갔다 이제 막 복귀했다던데.”

저기요, 정말 빨리도 말씀해 주시네요…. 에어컨 바람에 살랑살랑 날리는 머리칼과는 대조되게 목석처럼 굳어 버린 의주가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산 넘어 산이다.

신입 가이드 교육 자료에 따르면, 서로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보통 삼 개월 주기로 가이드가 교체된다. 센터가 칭하는 ‘합의’라는 것에는 몹시 피곤하고도 귀찮은 절차가 수반된다. 오랜 관계는 유대를 초래하고 끝내 집착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센터는 주기적으로 파트너를 교체함으로써 기관 내의 불필요한 스캔들을 차단했다.

그 센티넬은 합의 없이 수십 명의 가이드를 보내고 직전 가이드를 딱 죽기 직전까지 팬 뒤 3개월 근신 징계를 받았다고 했다. 폭행 사건의 피해자인 가이드는 어떤 영문인지 본인의 의지가 강해 영영 센터로 돌아오지 않았고.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도 고작 3개월을 집에 처박혔다가 멀쩡히 복귀한 건 중요 인재라는 사실의 방증일 테다. 쓸 만하기만 하면 성격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건가. 프로야구팀의 팬인 의주는 대형 사고를 치고도 멀쩡한 얼굴로 마운드 위에 올라서는 수십 명의 선수를 떠올리고는, 땀이 송글송글 맺힌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았다.

“니콜라스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변의주입니다.”

딱 붙는 검은 셔츠 유니폼 차림의 니콜라스가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다짜고짜 가이딩 받겠답시고 손부터 들이민 줄 알았더니,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가볍게 흔든다. 의주가 벌겋게 익은 뒷목을 남은 손으로 두어 번 쓸었다. 기분 이상하네.

“손잡아도 되나요?”

니콜라스는 의주가 머릿속으로 공연히 그리던, 험악한 프로야구 선수들의 말투와는 상반된 얼굴로 묻는다. 양쪽 눈썹이 끝을 모르고 내려가 있는 것이, 위협적이지 않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이 여실히 보인다. 남을 때렸다길래 초장부터 무례한 사람일 줄 알고 지레 겁부터 먹은 자신이 민망해진다. 크고 두꺼운 손가락이 의주의 양손을 옭아맨다. 니콜라스는 의주의 무릎 어드메를 보고 있었다. 어색한 공기가 가이딩실을 가득 채우는 것이 느껴졌지만, MBTI I 인간인 의주는 차마 스몰 토크를 꺼낼 용기가 없어 니콜라스의 얼굴을 힐끔거리기 시작한다. 무의식적으로 눈길이 가는 얼굴이다. 짙은 눈썹과 오똑한 코가 예술처럼 빚어져 있다. 누런 조명 밑으로 그림자가 진다. 센티넬 발현이 되지 않았더라면 연예계에서 한자리했을 것 같다. 그러나 구태여 평가가 될 수 있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더 이상 얼굴을 뜯어봤다가는 변태로 몰릴 것 같아져 황급히 입을 열었다.

“혹시 노래 좀 들어도 되나요?”

“네? 아, 그게 편하시면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아. 의주가 한 손으로 니콜라스의 큰 손을 모아 쥔 채 나머지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음악 스트리밍 어플에 들어가 초면인 사람과도 감상할 수 있을 만한 유명하고 무난한 곡을 선곡했

중2 때까지 늘 첫째 줄에 겨우 160이 됐을 무렵 쓸 만한 녀석들은 모두 다 이미 첫사랑 진행 중

다고 생각했으나… 예상치 못하게 가이딩실을 울리는 노랫소리에 니콜라스는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같이 듣자는 거였어요?”

“좀 어색해서요.”

“첫 가이딩 하는데 대놓고 어색하다 하는 건 처음 보는데요.”

어이없다는 투로 말해놓고 하나도 기분 상하지 않은 얼굴로 니콜라스가 옅게 웃었다. 죄송한데 진짜 어이없으시네요. 칭찬이에요. 호선을 그린 눈이 의주를 향한다. 어쩐지 눈길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져 시선을 바닥에 처박았다.

“노래 제목이 뭐예요?”

“이 노래 모르세요?”

“네?”

“이 노래…… 모르세요?”

“저 대만 사람인데요? 애초에 이름이 니콜라스인데? 한국말 발음도 잘 못하는데?”

너무 긴장해서 상대방의 발음 같은 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고 하면 실례일까. 의주의 둥근 눈이 빠르게 깜빡인다.

“에이. 나는 벌써 이름도 외웠는데. 의주.”

“죄, 죄송…”

“주주, 나한테 관심이 없네. 그래도 삼 개월 동안 같이 있을 건데.”

가이딩 수치가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는 알림과 동시에 니콜라스가 의주의 손을 놓고 일어선다. 의주의 길고 얇은 손가락이 허공에서 꼼지락댄다.

“그래서 제목이 뭐라고요?”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이요.”

델리스파이스의 고백, 델리스파이스의 고백, 델리스파이스의 고백…. 잊고 싶지 않다는 듯 세 번 중얼거린 니콜라스가 싱긋 웃는다. 어쩐지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을 듯한 웃음이다.

 

 

 

 

 

“어땠어요?”

나이가 지긋한 또 다른 연구원이 의주를 사무실로 안내한다. 의주를 가이딩실로 데려다주었던 연구원은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니콜라스는 가이딩실 뒤편으로 연결된 훈련장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의주는 가이딩실의 구조가 어쩐지 교도소의 면회실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첫 가이딩이 끝나면 의무적으로 심리 상담을 진행하게 돼 있어요. 그냥 간단한 절차니까 부담감 갖지 마시고 어땠는지 얘기해 주세요.”

“괜찮았어요, 생각보다는.”

“이상하진 않았고요?”

“생각해 보니까, 심장이 좀 불쾌하게 두근거렸던 것 같아요.”

흠……. 키보드로 무언가를 타이핑하던 연구원의 말꼬리가 길어진다. 니콜라스 특성상 접촉 부위가 좀 뜨거워질 순 있는데, 가슴이 두근거린 건 가이딩 탓은 아닐 거예요. 그리고는 의주를 향해 뜻 모를 미소를 짓는다. 어딘가 간파당한 것 같은 예감에 의주는 눈길을 피하고 만다.

“니콜라스 말이에요.”

애써 목소리를 갈무리한 의주가 네? 하고 되묻는다.

“착한 사람이에요.”

“아, 네. 그렇구나. 그래 보이시더라고요.”

연구원이 기록을 멈춘다. 상담 끝나셨고, 수고하셨어요. 아무래도 에너지를 나누는 작업이다 보니까 피곤하실 수 있어요. 집에 가서 푹 쉬세요. 영혼이 있는 듯 없는 듯한 옅은 걱정까지 덧붙인다. 의주가 바퀴 달린 의자의 드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어정쩡한 포즈로 일어선다. 니콜라스 씨는 본인의 인생을 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냈길래, 누군가는 조심하라며 경고하고 누군가는 착한 사람이라며 인자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거지? 앞으로의 삼 개월을 생각하니 급속도로 심란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주주 혹시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물다섯 살이요.”

“동갑이네. 편하게 말하세요.”

이윽고 두 번째 가이딩 날이 왔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상대편은 이미 은근슬쩍 반말에 뜻 모를 별명까지 지은 상태라는 걸 짚어 주려다 입을 꾹 다문다. 니콜라스는 생각보다 남의 이야기를 잘 이끌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말 먼저 안 붙이면 한마디도 안 하게 생겨놓고서. 당연하지 게임도 아니고, 남정네 둘이 좁은 방에 앉아 양손을 붙인 채 꾸물거리고 있는 꼴이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라 낯설지언정, 불쾌하지는 않다. 신기한 일이다. 제아무리 손에 땀이 많은 의주라지만 평균보다 조금 온도가 낮은 니콜라스의 손은 아무리 잡고 있어도 상쾌한 기분이 든다.

“너는 뭐 하는 센티넬이야?”

“주주 그것도 모르고 내 손잡고 있는 거야?”

“그럼, 먼저 물어보면 실례일 수도… 있고.”

센티넬과 가이드의 정보는 서로 블라인드 처리가 되어 있다. 관심이 없으면 이름을 제외한 모든 정보를 모른 채 넘길 수 있는 사무적인 관계다. 니콜라스가 밝힌 적 없으니 의주는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 또한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흰자 잔뜩인 눈으로 눈치 보는 듯한 얼굴을 보니 어쩐지 한없이 놀리고만 싶어진다. 니콜라스가 눈 밑을 접어 개구지게 웃는다.

“연구 2팀은 화염 센티넬이 있는 부서야. 나도 불을 쓰지. 나는 이왕이면 불보다는 순간 이동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난 잠이 많아서 아침마다 출근하기 힘들거든.”

“아, 어쩐지 올 때마다 에어컨이 세게 틀어져 있더라.”

“맞아. 화염 센티넬들은 늘 예열돼 있는 상태인 경우가 많으니까.”

니콜라스를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어쩐지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티브이에 나오는 화염 센티넬들은 대개 호탕했으며, 열정적이었고, 심장 속에 불을 끌어안은 사람처럼 굴었으니까. 니콜라스는 굳이 말하자면 한 마리의 고양이 같았다.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고의 인간. 가이딩을 받기 위해 의주 앞에 앉아 있는 자세부터 의자 등받이 위로 줄줄 녹아들어 있다. 본인의 의견 없이 대학생인 의주의 스케줄에 맞추어 가이딩실에 느적느적 나타나는 것만 봐도 불꽃 같은 인간은 아니다.

“그런데 너는 왜 이렇게 손이 차?”

가볍게 붙들고 있던 손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빈다. 니콜라스가 작게 흠칫한다. 가만 보니 웃지 않아도 입꼬리가 꽤나 올라가 있다. 얄쌍한 턱 위에 걸린 통통한 입술 끝은 위를 향한 채다.

“난 좀 갑자기 뜨거워지는 편이야.”

“남들이 오븐이라면 너는 가스레인지인 거구나.”

니콜라스가 공기 섞인 소리로 웃어낸다. 의주에게 잡혀 있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나 그러질 못해 상반신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넌 진짜 웃긴 말만 하네. 은은한 조명만이 채우고 있는 가이딩실 안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니콜라스를, 의주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로 말없이 감상한다. 청춘을 불태우는 사람은 이렇게 반짝이는구나. 그의 삶과 물러버린 손끝을 연소해 번뜩이며 빛날 전장에서의 니콜라스를 문득 떠올린다.

“그것도 있고.”

“응?”

“원래 가이딩하기 전에는 차가운 물에 손 씻고 와.”

“왜?”

“혹시라도 갑자기 손이 뜨거워지면 놀랄 테니까. 사실 딱히 도움 되는지는 모르겠어. 그냥 나 혼자만의 믿음 같은 거야.”

예상치 못한 답변이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전 가이드를 죽기 직전까지 때렸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와전된 소문은 아닐까? 근신은 사실 휴직이었던 거지. 몸이 안 좋았을 수도 있고. 그러나 의주 또한 이가 의미 없는 상상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고개를 털어 잡념을 지워낸다. 니콜라스와 재차 눈이 마주친다. 작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천천히 덮이기 시작한다. 팔자 눈썹을 한 채로 환히 웃는다. 소년 같기도, 어른 같기도 한 흰 얼굴이 근사하다.

 

 

 

 

 

 

센티넬 센터에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가면 됐다. 가이딩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학교에 갔다. 가이드가 되었다고 해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졸업까지 고작 일 년 남짓 남아 있기도 했고. 사실은 가이딩 능력이 사라졌을 때를 대비한 방어 기제이기도 하다.

센티넬 센터에 출근하게 된 이후 처음으로 가지게 된 술자리였다. 의주는 간만의 음주에 약한 어지러움을 느낀다. 소주잔은 이십 분 넘도록 비워지지 않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쏟아지는 질문에 대강으로 대답한 의주가 속으로 생각한다. 나도 초짜인데 뭘 자꾸 물어보는 거지…… 센티넬과 가이드는 일반인의 수에 비해 현저히 적은 비율로 이루어져 있다. 스무 살 넘어 발현한 돌연변이를 신기하게 보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네가 맡고 있는 센티넬은 어떤데?”

저 멀리서 물을 한 모금 따라 마시던 박이 시뻘건 얼굴로 묻는다. 좋다, 싫다, 나쁘지 않다. 세 가지 중 하나로만 대답해 버리고 넘기면 될 문제를 의주는 한참 동안 골몰한다.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만나는 센티넬, 가이드 폭행한 걸로 유명한 거 알아요? 근신 갔다 이제 막 복귀했다던데.

그렇지만 니콜라스에 대해 함부로 떠들고 싶지 않다. 의주가 잔에 담긴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고는 우물우물 대답한다. 어떻긴 뭘 어때. 취기와 함께 떠오르는 의문은 가슴속으로 밀어 넣어 두었다. 의주의 둥근 눈동자 위로 술집의 조잡하고 사이키델릭한 조명이 마구 비추어진다. 잠시만 눈 감고 이대로 있고 싶다. 의주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한껏 기댄다.

축축 처지는 몸과 함께 머리칼을 쓸어내며 가게 밖으로 나왔다. 긴 몸이 휘청거린다. 뒤집어 두어 미처 확인하지 못한 핸드폰에는 연락이 몇 개 쌓여 있었다.

 

니콜라스

[자?]

[미안]

[전화 돼? 🥲]

 

삼십 분 전에 도착한 문자에는 그 어떠한 조급함도 서려 있지 않았다. 실없는 문자도, 물론 전화도 나눠 본 적 없다. 그 짧은 문장들에 문득 막연히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조금 더 일찍 확인할걸.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연타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고 니콜라스가 전화를 수신한다.

“무슨 일 있어?”

“혹시 어디야?”

“나 잠깐 친구 만나러 나왔는데.”

“미안한데, 잠깐 와 줄 수 있어?”

와 줄 수 있어? 의견을 구하는 말꼬리가 의주가 거절하면 금방이라도 수긍할 것처럼 덧없다. 의연한 척하지만 요동치는 숨소리는 숨겨지지 않는다. 지금 많이 힘들구나. 그리고 너는 먼저 알아줘야 하는 타입이구나.

“센터로 가면 돼?”

“어어. 지금 나갈게. 미안.”

“지금 집이야?”

“…… 응.”

“집 주소 불러.”

“아냐. 주주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으니까 불러. 빨리.”

십 초간의 정적 끝에 휴대폰 너머에서 집 주소를 더듬더듬 읊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낮고 정적인 음색이 의주의 귀로 새어들었다.

 

 

 

 

 

초인종만으로는 듣지 못할까 싶어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전화가 끊긴 즉시 택시를 불러 니콜라스의 집 앞으로 달려왔다. 동기들에게는 먼저 가 볼 테니 술값을 알려 달라는 메신저를 남겨두었다. 슬리퍼 직직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허연 얼굴의 니콜라스가 현관문을 열고는 얼굴을 드러낸다. 불조차 켜지 않은 집에 보일러가 절절 끓고 있었다.

“덥지. 컨디션 안 좋으면 몸이 차가워지거든. 이러다가 갑자기 또 뜨거워져.”

갑자기 불타오르는 편이라던 니콜라스의 말을 기억해 낸 의주가 가방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유니폼은 소파 팔걸이에 있고 택배 박스는 침대 위에 있다. 아파서 정신없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집 상태가 심각하다. 짧은 틈 사이로 니콜라스의 집을 스캔한 의주가 멀뚱 서 있자 니콜라스가 한 발짝 다가선다.

“미안한데 좀 안아도 돼?”

허락을 구하는 말씨가 정중하다. 의주가 끄덕이며 니콜라스의 등 뒤로 손을 밀어 넣는다. 너는 뭐가 자꾸 그렇게 미안해? 나는 이게 일인데 왜 네가 미안해해야 해. 다른 사람들한테도 쭉 이랬어?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생각을 눌러내며 니콜라스의 어깨 위에 턱을 올려둔다. 바짝 붙어오는 가슴팍이 생각보다 더 차갑다.

“추웠겠다.”

보일러 따위의 얄팍한 온기로 나아질 냉기가 아니다. 심장 깊은 구석부터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이 의주의 몸을 덮쳐 온다. 닿는 곳마다 찌릿찌릿하다. 꼭 저온화상을 입는 듯한 불쾌한 기분에 의주가 몸을 살짝 뒤튼다.

쿵 쿵 쿵 쿵 쿵

공유되는 심장박동의 리듬이 이상하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는 건 가이딩 반응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기묘한 불협화음의 근원이 뭔지 의주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고심 끝에 니콜라스를 더욱 세게 끌어안아 보기로 한다. 차가운 니콜라스의 불을 의주의 마른 몸이 집어삼킨다. 냉기 가득했던 몸뚱아리가 서서히 정상의 범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센터에 보고할게. 야간 수당 나올 거야.”

니콜라스가 수척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이내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지 테이블에 걸터앉는다. 밀려오는 졸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는 듯했다. 삼 초에 한 번씩 하품을 하는 니콜라스의 엉덩이 옆에는 뜬금없는 선글라스가 굴러다니고 있다.

“됐어. 그거 귀찮잖아. 좀 쉬어. 돈 벌자고 온 거 아니라 걱정돼서 온 거야.”

나 간다. 연락해. 꼭! 의주가 던져놓은 가방을 집어 현관으로 나섰다. 자동 센서 전등이 의주의 머리꼭지를 환히 밝힌다. 둥근 뒤통수 너머로 니콜라스가 작게 손을 흔들어 본다. 이윽고 현관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어이쿠. 실수로 문고리를 놓쳐버린 건지 당황스러워하는 소리가 문을 뚫고 들어온다. 작은 발걸음 소리마저 사라지자 미미하게 미소 짓던 니콜라스가 웃음기를 지워낸다.

밝게 웃던 얼굴이 둥둥 떠다닌다. 의주는 빛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불빛 한 점 없이 어두운 집에서 오직 니콜라스만이 침잠하고 있었다.

 

 

 

 

 

새벽 가이딩 이후로 니콜라스는 조금 더 친근해졌다. 그는 꼭 고양이 같았다. 기본적으로 귀염성 있지만 천천히 시간을 두고 다가가면 온 마음을 열어 주는 타입. 의주는 기본적으로 수긍하는 타입이다. 근원에 대한 질문보다는 감내하는 수가 훨씬 많은 부류의 인간이다. 그러나 의주는 어쩐지 니콜라스가 늘 궁금했다. 자꾸만 질문을 던지고 싶어졌다. 이를테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 왔는지. 어떤 유형의 가이드를 좋아하는지. 잠들기 전, 양치하던 의주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니콜라스다! 입가에 양치 거품을 단 의주가 재빠르게 양칫물을 뱉고는 전화를 수신한다.

“왜 전화했어? 가이딩 필요해?”

“가이딩 필요한 게 아니면 전화하면 안 돼? …… 의주는 이런 거 좀 그래?”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당연히 괜찮지. 혹시 뭔 일 있냐 이거지.”

“그래. 그럼 얘기 좀 해.”

가끔은 본인이 원하는 걸 당당하게 요구한다는 점까지 정확히 고양이 같다. 의주가 덜 마른 머리를 털며 웃는다. 대뜸 좋아하는 것이 있냐는 니콜라스의 질문에 의주가 조근거리며 답한다. 나는 규동 좋아해. 맛있잖아. 아니면 메론빵?

“메론빵? 한 번도 안 먹어 봤어.”

“다음에 사 갈게. 같이 먹자. 근데 너는?”

“응?”

“니콜라스는 뭘 좋아해?”

휴대폰 너머의 니콜라스가 숨을 크게 들이쉰다. 여보세요? 왜 그래? 뭔 일 있어? 다급해진 의주가 묻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니콜라스가 실실 웃는다.

“아니.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가이드는 없으니까. 좀 놀랐어.”

“…… 그래?”

“나는 센티넬 센터에서 하는 일 말고는 내 일상이 별로 없잖아. 처음에는 한국말도 서투니까 그 사람들은 내가 못 알아듣는 줄 알고 내 앞에서 별말을 다 했어.”

“…”

“뭐, 정말로 못 알아듣긴 했지만… 대신 발음을 기억해 뒀다가 파파고한테 물어봤지. 욕이더라고. 덕분에 한국어 많이 늘었어.”

“…”

“그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아. 내가 궁금하지 않으니까. 몇 개월 후면 치워버릴 센티넬 중 하나니까. 나도 이해해.”

이내 니콜라스는 그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휴대폰 너머의 누군가는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들을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손끝에 불을 내서 소시지를 구워 먹었다가 집을 홀랑 태울 뻔했던 것, 센티넬이 되지 않았다면 가수가 되었을 것 같다는 것, 친한 사람에게는 하소연이나 수다가 많아진다는 것, 요즘 델리 스파이스의 고백을 좋아한다는 것, 사실 그의 본명은 왕이샹이라는 것…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상기된 목소리로.

꼭 어린아이 같다고, 모든 이야기를 가슴 속에 아로새기며 의주는 생각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니콜라스와의 대화를 복기해 보았다. 그를 이루는 또 하나의 이름을 생각해 냈다. 왕이샹. 왕이샹. 왕이샹. 세 번쯤 입안에서 그를 굴렸을 때는 갓 입사했을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올해의 운세,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김 씨, 이 씨, 박 씨, 최 씨, 그리고 정 씨도 좋고, 왕 씨도 운명의 상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니콜라스가 얼굴을 훅 가까이 댄다. 정신없는 틈을 타 장소는 금세 다시 가이딩실로 변한다. 의주 뭔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 의주가 괜히 입을 꾹 다문다. 갑자기 그 사주가 생각난 이유는 뭘까. 하필 니콜라스의 이름이 왕 씨라서? 그가 운명적인 사람 같아서? 그러나 아무리 날마다 손을 맞잡고 교감을 나눈다고 해도, 의주는 지금껏 남자 친구를 만들어 본 적은 없다. 지금도 센티넬 센터에서 두어 번 마주친 전 여자 친구와 니콜라스가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지만. 그러니 마음의 화살은 편견에 가로막혀 궤도를 달리하고, 괜히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와 똑 닮은 피붙이가 존재하는지.

“너 왕 씨라고 했지?”

“응. 왕이샹. 왜?”

“너 혹시 누나나 여동생 있어?”

“누나 있어. 이 근처 A 대학교로 유학 왔어. 서로 바빠서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휴학하고 펑펑 놀다가 올해 갑자기 다시 열심히 다니던데. 웃기지.”

“어? 나도 A 대학교 다니는데?”

“…… 그으래?”

“응. 다음에 놀러 와. 근처에 맛집 많거든. 금요일에 시간 있어?”

“…… 시간 있어.”

니콜라스는 어쩐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어쩐지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아 하는 듯하기도 하다. 검은 구둣발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산만한 몸짓에 의주가 양 허벅지로 그의 다리 한쪽을 속박한다.

“그런데 주주 우리 누나는… 왜 물어봤어?”

“그냥. 니콜라스 누나도 니콜라스처럼 귀여울지 궁금해. 나는 누나랑 똑같이 생겼거든.”

“뭐?”

당황하는 법이 별로 없는 니콜라스가 입을 떡 벌린다. 잡혀 있던 손이 꿈틀거리더니 그의 허벅지로 되돌아간다. 허공에서 손을 쥐었다 핀 의주도 손을 물린다.

“아직 가이딩 다 안 됐는데에…”

“주주. 혹시 이거 누구에 대한 플러팅이야?”

“응?”

“아, 아냐 됐어. 대답하지 마. 대답하기만 해 봐.”

니콜라스가 급히 짐을 챙겨 일어난다. 옆에 놓인 모니터에 둥둥 떠다니는 회복률은 여전히 79%에 멈춰 있다.

“아직 가이딩 다 안 됐다니까?”

“됐어! 따라오지 마. 금요일에는 시간 있으니까… 연락할게. 안녕.”

눈앞에서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힌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는데. 가이딩실 안에는 영문 모를 표정의 의주만이 남았다.

 

 

 

 

 

“뭐 해?”

“어 주주 안녕. 빨리 가자. 뭐 먹을래?”

“아니 왜 이렇게 숨어 있어? 정문에 있으라고 했잖아.”

“식당 어디야?”

“니콜라스 아침 안 먹었어? 배고파?”

니콜라스는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한 급박한 손길로 의주를 잡아끈다. 쫓긴다고 하기엔 너무나 요란한 차림새가 의주를 긴가민가하게 만들었지만. 평소 학교에 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코디한 의주와는 다르게, (물론 아침에 십 분 정도 머리를 만지는 데에 시간을 소요하기는 했다. 괜히 어울릴 법한 목걸이를 매칭해 보기도 했지만 결국 차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니콜라스에게는 평생 비밀이다.) 그는 질질 끌리는 바지 위에 치마를 두른 채다.

뭐야? 왕이샹! 너 왜 여기 있어?

“의주, 가자.”

“니콜라스. 뒤에서 누가 너 부르는데?”

왕이샹! 저게 내 말을 무시해? 야!

“주주우. 이따 말해줄 테니까 가자고.”

야!”

저 뒤에서 누군가가 무섭게 달려오더니 니콜라스의 등을 강타한다. 니콜라스 얼굴에 머리만 긴 버전의 그는 가타부타 설명 없이도 누구나 니콜라스의 친누나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아아, 네. 안녕하세요. 웨노, 네 친구야?

친구 아냐. 남자 친구야. 눈독 들이지 마.

진짜?

니콜라스와 키가 엇비슷한 그가 가자미눈을 뜨고는 의주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그러는 동안 의주는 멍청히 서서는 니콜라스의 대만어 억양이 한국어 억양보다 몹시 애교스럽다는 감상평을 떠올리고 있었다.

“데이트 방해하는 건 취미 아니니까 이만 갈게요. 재미있게 노세요. 웨노, 너는 연락 좀 제때 받아!”

“훈련하느라 바쁜 거야. 그리고 매일매일 전화하니까 됐잖아…”

니콜라스는 툴툴거리더니 뒤돌아 걷기 시작한다. 의주가 그의 빠른 걸음을 따라 종종걸음 한다.

“네가 왜 웨노야?”

“어렸을 때 별명이야.”

“누나랑 한국말로도 대화해?”

“응. 가끔. 옆에 한국 사람 있으면.”

“글쿠낭.”

눈 깜짝할 사이 의주를 앞질러 선 니콜라스가 그의 앞에 멈추어 섰다. 별생각 없이 걷던 의주가 니콜라스와 추돌했다.

“우리 누나 어때?”

“으잉?”

“우리 누나. 실제로 보니까 어떠냐고.”

“어떻기는… 그냥 니콜라스 누나구나 싶은데.”

“나랑 닮았어? 그래서 귀여워?”

“똑같이 생겼어. 근데 내가 귀엽다는 말 함부로 해도 돼?”

“저번에 이미 비슷한 말 했잖아.”

“그거랑 이건 좀 경우가 다르지. 감상평이 되는 거잖아.”

“솔직하게. 말 안 전할게.”

“…… 나한테는 웬만한 사람들 다 귀엽게 보이는데? 아무래도 다들 나보다는 작으니까…”

이내 니콜라스가 머리를 감싸고는 풀썩 가라앉는다. 깜짝 놀란 의주가 덩달아 무릎을 쪼그리고는 그의 옆에 앉아 눈높이를 맞춘다.

“니콜라스의 행동은 정말 예측이 안 돼.”

“이래서 소개해 주기 싫었는데!”

“그래서 아까 빨리 가자고 한 거야?”

“그래. 맞아. 누나랑 주주랑 만나는 거 싫어.”

이거 누구에 대한 플러팅이야? 니콜라스의 물음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잡념들은 심장의 온기가 되어 의주의 귀를 붉힌다. 목까지 시뻘게진 의주가 조용히 속삭인다.

“안 만날게.”

니콜라스가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이유에 대해 짐작 가는 무언가는 있지만, 의주는 그것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한다. 무르익지 않은 마음의 껍질을 억지로 까내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겼으므로.

 

 

 

 

 

 

 

 

 

 

 

손에 꼽지 못할 만큼의 가이딩이 진행되는 동안 웃음이 늘었다. 누군가의 가이드가 되어 보는 건 처음이지만, 이대로라면 계속 같이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도 편안한 사이라는 게, 진짜 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상대방이라는 것이 의주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동그란 눈은 시도 때도 없이 반으로 접혔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실타래 하나가 의주의 심장 속에서 끊임없이 커져가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정말 본인의 가이드를 폭행했는가.

의주가 니콜라스를 내려다본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확연히 둥글어진 눈매가 화답하듯 눈을 맞춰 온다. 그는 먼저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다. 의주가 모른 채 눈을 돌리면 의도를 파악하듯이 끈덕지게 달라붙어 온다. 주문 제작한 것처럼 꼭 맞는 유니폼이 근사하다. 목이 답답한지 맨 윗단추를 풀어내는 큰 손에 눈길이 간다. 삼십 분 전까지 가이딩을 명목으로 그 손을 실컷 붙잡고 있었음에도 빤히 쳐다보게 된다. 니콜라스는 여러모로 눈길이 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초보 가이드 의주가 몰랐던 사실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눈길이 가는 사람이라는 것은 무리 내에서 비정상적으로 튀는 사람이라는 의미와 같다. 둘째, 폐쇄적인 센티넬 사회는 그런 것을 배척한다.

“뭐야? 근신 끝났어?”

“…”

정은 니콜라스와 같은 연구 2팀 관할의 화염 센티넬이다. 의주의 표현대로 니콜라스의 불이 가스레인지라면, 정의 불은 오븐이다.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것을 불태워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니콜라스와는 다르게 정의 불은 예열될 시간이 필요하다. 효율성 낮은 자원은 가차 없이 2순위로 분류된다. 고로 니콜라스의 존재만으로 정은 만년 2순위가 됐다.

의주가 굳이 묻지 않아 센터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정의 이야기도 꺼낸 적 없다. 지겨운 이야기를 할 바에 의주에 대해 알아가고 싶었다. 의주가 눈을 크게 뜨고는 니콜라스를 내려다보았다.

“대답 안 해?”

“… 내가 왜 대답해야 돼?”

“너 분노조절장애 있잖아. 수틀리면 막 패고 다닌다며. 아, 수틀린다는 말 모르나? 외국인이라.”

“화내기 싫으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비켜.”

“가이딩 제대로 안 해 준다고 지 가이드나 패고 다니는 새끼가 나한테 화낼 자격 있나?”

정이 니콜라스의 발치에 레쓰비 캔을 구겨 던지고 뒤돌아 떠났다. 니콜라스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멈춰 있었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니콜라스의 어깨춤에서 옅은 찬기가 돌기 시작한다. 한 손에 버려진 캔을 주워 든 의주가 급히 니콜라스의 손을 쥔다. 괜찮으니 빨리 돌아가자고, 사색이 된 의주의 어깨를 두드려 주려 니콜라스가 손을 들었다. 그러나 의주의 몸은 그 손을 보고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고 만다. 질끈 감은 눈을 떴을 때 니콜라스는 절망, 실망감, 분노, 그 모든 것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의주는 생각한다. 그것을 화형당하는 자의 얼굴이라고.

“아, 그게 아니고.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니야. 나는 그냥, 놀라서……”

니콜라스가 한쪽 손을 쥔 채로 한 발짝 물러선다. 의주는 다가서지 못한다.

“의주. 내가 무서워?”

“…”

“내가 막 너도 때릴 것 같아?”

“…”

“미안해. 그래 내가 미안해. 놀라게 해서 미안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몰랐어.”

“니콜라스, 내가. 그게 아니라. 내 말 좀 들어 봐.”

“센터에 가이드 바꿔 달라고 할게.”

“…”

“고마웠어.”

그게 아니라고, 나 좀 알아 달라고 소리치는 환청을 들었다. 그러나 현실의 니콜라스는 말없이 뒤를 돈다. 이내 긴 복도를 걸어 나간다. 슬로우 모션처럼 그의 뒷모습이 느리게 재생된다.

먼저 끊어낸 건 니콜라스인데, 어쩐지 자꾸 그를 불가에 버려두고 온 기분이 들었다.

 

 

 

 

 

니콜라스는 더 이상 의주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가이딩을 요청하는 일도 없었다. 센티넬이 추가 근무를 요청하지 않는 이상 가이딩은 이 주에 한 번씩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센티넬이 그만큼의 공백을 버티지 못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꼴로 센터에 방문하는 것이 평균이다. 특히 니콜라스와 같이 신체 에너지를 태우는 유형의 센티넬은 더욱 그러하다.

학교에 가서도, 집에 오는 길에도 니콜라스가 못내 신경 쓰인다. 힘들진 않은지, 아픈 건 아닌지. 식탁 위의 선글라스는 치웠는지.

혹시 내가 보고 싶진 않은지.

전화번호가 있음에도 마음처럼 쉽게 연락해 볼 수도 없다. 니콜라스의 마지막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안 그래도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쥐어짜는 꼴이 될까 의주는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채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의미 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던 강의 교안 파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가이드가 된 이상 기말고사 따위는 의미 없는 일정이 된 지 오래였지만, 이런 것이라도 붙잡지 않는 이상 미쳐버릴 것만 같다. 며칠째 잠을 못 잤다. 꼭 가이딩 못 받은 센티넬처럼 마음이 불안정해져서 그랬다. 센티넬이 되지 않았더라면 가수가 되고 싶었다던 그가 떠올랐다. 센티넬이 되지 않았더라면. 자유로운 삶 속에서 자신만의 가사를 그려 나갈 수 있었을 어린 그의 얼굴이 환각처럼 떠나지를 않았다.

분리불안장애도 아니고 이게 뭐야? 반투명한 벽에 비친 꼴이 말이 아니다. 풀려버린 신발 끈을 묶을 힘도 없다. 잠시 쉬었다 할 요량으로 아이패드 화면을 껐다. 의주의 둥근 눈이 스르르 감긴다. 라운지의 조명이 의주의 부슬부슬한 머리칼 위로 부서진다. 벽에 머리를 쿵쿵 박는 소리가 옅게 울린다. 진짜로 가이드 변경 신청… 했을까.

그때, 신의 계시처럼, 어두워진 실내에서 의주의 핸드폰이 짧게 점등한다. 이내 의주의 눈이 크게 뜨인다.

[의주]

[갑자기 미안해.]

[너무 뜨거워서 못 참겠는데]

[나 좀 안아 줄 수 있어?]

니콜라스, 넌 뭐가 그렇게 맨날 미안해. 넌 왜 못돼먹은 나한테까지 자꾸 미안해해.

의주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아니, 오천만 개의 선지가 남아 있다고 해도,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풀린 신발 끈을 묶을 틈도 없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한다.

 

 

 

 

 

니콜라스는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무리하게 가이딩을 피하다 보니 약한 수준의 폭주가 온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뜨거운 몸의 니콜라스는 처음 본다. 차가운 손만 쥐다가 열이 잔뜩 배어난 손바닥을 만져 보니 생경한 기분이 든다. 허락조차 구하지 않은 채로 침대 위로 올라가 니콜라스를 꾹 끌어안는다. 불에 덴 것처럼 온몸이 화끈거린다.

니콜라스는 그 자신을 화형하고 있었다.

아득한 정신 속에서 니콜라스가 의주의 등을 힘껏 끌어안는다. 화재 현장에 몸을 던진 듯하다. 이번에는 정말 살갗이 전부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의주는 몸을 물리지 않는다. 그 내면의 화염까지 전부 끌어안고 싶었다. 니콜라스를 아프게 하는 모든 것들을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설령 그게 의주 자신일지라도.

의주가 니콜라스의 입술을 집어삼킨다. 그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의주의 혀를 받아들인다. 니콜라스의 혓덩이를 세게 빨아들이자 의주의 숨이 니콜라스의 입으로 옮겨진다. 채 삼키지 못한 것들이 입술 밖으로 줄줄 흐른다. 퉁퉁 불은 입술이 잘게 닿을 때마다 푹신한 쿠션감이 느껴진다. 평생 이 입술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의주의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바지 버클에 손을 댄다.

“잠시만. 됐어 이제.”

“거짓말하지 마.”

“정신 차렸으니까 됐어. 고마워, 갑자기 와 줘서.”

“너 하나도 안 괜찮잖아!”

풀린 눈의 니콜라스가 문득 정신을 차린 듯한 표정을 짓고는 의주를 올려다본다. 눈을 힘껏 세모꼴로 뜨려고 해 보지만 여전히 동그라미 같은 얼굴로 의주가 일갈한다.

“지금 하나도 해결된 게 없잖아. 가이드 부르는 것도 머뭇거리는 애가 뭔 사람을 때려. 자 준다고 해도 쳐내는 애가 왜 사람을 때려! 그거 거짓말이지. 다 뻥치는 거지 나한테. 이거 다 오해지. 가이드 바꾸지 마. 나 말고 다른 애 손잡지 마. 나 아니면 이 시간에 너 안으러 누가 달려와.”

바보야, 네가 너무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다고……

제어할 수 없는 눈물이 턱을 타고 흐른다. 입술이 밉게 삐죽 튀어나온다. 니콜라스가 경악한 듯한 얼굴로 의주의 등을 두드린다. 응, 미안해 주주. 내가 잘못했어. 울지 마. 위로라기보다는 구역질하는 사람 등 두들기는 것에 가깝다. 목덜미에 파고드는 뜨끈한 신체를 감지하며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니콜라스가 망설인 끝에 입을 연다.

주주, 근데… 나 진짜 전 가이드 때린 거 맞아.

 

 

 

 

 

 

차라리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니콜라스는 당시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한다.

나름 성실한 센티넬 축에 들었다. 가이드와의 관계도 건조하지만 원만했고 상부 명령에 잘 따르는 편이었다. 늦잠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한 적이 많았지만, 그게 다였다. 문제 될 만한 행동은 일절 하지 않으려 했다.

니콜라스의 전 가이드 최는 30대 남성이었다. 그는 고리짝 적 가치관인 가이드 우상주의를 답습하고 있는 인간이었다. 집안 모두가 가이드 출신이며 몇몇은 센티넬 센터에서 고위직을 맡고 있다며 묻지도 않은 정보를 나불거렸다.

그렇지만 최는 정작 그의 표현으로 ‘한 따까리’ 하지 못하고 ‘비범하지 못한’ 센티넬의 가이딩 따위에만 전전하고 있었다. 최는 늘 본인이 아직 고위직 인사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 일색이었다. 과거의 악습이 미미해졌다 한들 인간의 인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은근슬쩍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 뱀의 혀 같은 말에도 분노하지 않았다. 외국인이라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거냐고 하면 정말 못 알아듣는 척해 줬다. 화내는 것도 에너지 낭비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몇 개월만 참으면 전부 끝이다. 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수긍하는 척했다. 허연 얼굴이 의미 없는 끄덕임을 지속했다. 눈은 비상구에다 둔 채였다.

당시 센터에서는 인력 부족으로 외국인 센티넬을 꾸준히 들여오던 시점이었다. 어릴수록 적응력이 높다는 근거를 바탕으로, 타국으로 팔려 오는 것은 주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센티넬들이었다. 니콜라스는 해당 사업의 1세대 센티넬이었고, 점점 그보다 어린 외국인 센티넬들이 자리를 채워 갔음에도 불구하고 은은한 차별은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알았다. 이 먼 땅에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그를 걱정한 누나가 한국으로 와 주었지만, 그는 어쨌든 돌아갈 사람이다. 그에 반해 니콜라스는 평생 이곳에 묶여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전장에서 죽지 않는 이상. 무력감이 온몸을 덮쳤다. 그러나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 주제에 단합이랍시고 몇 달에 한 번씩은 빼기 곤란한 술자리가 잡혔다. 술을 전혀 할 수 없는 니콜라스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은은한 강요로 한두 잔 받아 마셨더니 눈이 금세 뻑뻑해졌다. 테이블에 사람이 듬성듬성하다. 최 또한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알코올 섞인 한숨을 푹 쉬고 테이블을 지지대 삼아 일어났다. 바람이라도 좀 맞아야겠다 싶었다.

저 너머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센티넬 특유의 신체 능력을 타고나 버린 탓에 귀가 밝은 그가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발소리를 죽인 채로 다가갔다.

“인사 안 해? 어? 너희 나라에서는 인사법도 안 가르치냐?”

“…”

“이래서 외노자는 안 된다니까, 씨발…”

최가 신입 센티넬의 이마를 꾹꾹 누르며 윽박지르고 있었다. 둘에게는 니콜라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충분히 모른 체하고 지나갈 수 있었지만, 니콜라스는 이름 모를 그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건지, 정말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잔뜩 주눅 든 얼굴을 보았을 때, 이젠 참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는 더 이상 비겁해지지 않기로 했다.

의주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그는 실로 근본부터 화염 센티넬다운 인간이다.

니콜라스가 최의 멱살을 쥐어 채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피해자가 니콜라스를 위해 고위직 인사들에게 익명 제보를 남기고는 휴직계를 썼다. 최의 친인척들은 니콜라스에게 정당방위로 인정해 줄 테니 이 일을 덮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가이드의 몸에 손을 댄 건 위법 사항이니 근신을 피할 수는 없다고 했다. 니콜라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은 고위직 인사들과 니콜라스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됐다.

그는 그 무엇도 해명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으니 설명할 일도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억울할지라도 창피하지는 않았으니.

 

 

 

 

 

“왜 아니라고 안 해? 그런 거 아니라고 하자. 사건에 대해 밝히지 않더라도…”

“주주. 사람들은 생각보다 뭐가 진짜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어.”

“…”

“주주가 알아줬잖아. 그럼 됐어.”

허어… 눈물을 대롱대롱 단 의주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주주 우는 거 귀엽다. 니콜라스가 히히 웃는다.

“너 그렇게 안 생겨서 진짜 바보 같다.”

“주주는 맨날 나한테 처음 듣는 소리만 해.”

“웃음이 나와 지금?”

“어 웃겨. 주주랑 있으면 막 웃음 나.”

“됐어. 너 진짜.”

“그래서 주주만 진짜 같아.”’

“…”

“주주는 나를 징그러워하지도 않고, 걱정 인형처럼 생각하지도 않고, 나랑 얘기해 주고, 나를 궁금해하고, 진심으로 웃어 주니까… 그리고 나도 주주를 보면 진짜로 웃게 되니까.”

“…”

“다른 건 전부 가짜고, 주주만 진짜야.”

맞다, 엄마 아빠 누나 빼고… 빼쭉한 눈매 밑의 작은 눈동자를 굴리며 니콜라스가 의주의 어깨에 슬쩍 얼굴을 기댄다. 바보! 그를 작은 소리로 꾸짖은 의주가 장난으로 어깨를 튕기자 흰 볼이 이리저리 눌린다.

“근신하는 동안 뭐 했어?”

“두 달 동안은 집 안에서 노래만 들었고, 다른 날에는 열심히 돌아다녔어. 오랜만에 쉬니까 좋던데.”

“어떤 노래 들었는지 말해 줘.”

“으응. 자고 일어나서 말해 줄게. 지금은 기억 안 나. 정신없어서.”

“어디 돌아다녔는지도 내일 말해 줄 거야?”

“사진 보여 줄까?”

니콜라스가 주섬주섬 휴대폰을 끌고 와 앨범 어플을 켰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선글라스를 걸친 채로 그가 행복하게 웃고 있다. 쉬는 게 좋았다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나 보다. 안심이 돼서 그제야 웃음이 나온다.

“여긴 일본인데, 해마다 불꽃놀이 축제를 해. 다음에 꼭 같이 가자.”

삼 개월마다 서로를 갈아치우는 센티넬과 가이드 생태계에서 다음을 약속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가 모를 리가 없다. 가이드를 바꾸지 말라는 말에 은유적으로 대답해 준 것이라는 걸 알았다. 넌 가수가 됐어도 정말 낭만적인 가사를 썼겠구나. 의주는 생각한다.

심장의 심지에 불을 붙인 것처럼, 어쩐지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가이드인 의주의 심장에는 불이 붙을 리 없는데도 불구하고. 꼭 그와 하나가 된 것만 같다.

“좋아. 같이 가 줄게. 대신 라이터 말고 네 손가락으로 불붙이는 거 보여줘.”

“하하하, 그래. 알았어.”

니콜라스가 상기된 볼로 웃어낸다. 그러고는 닿지 못할 말을 속으로 곱씹는다.

주주. 나는 아마 너를 내내 기다렸나 봐. 불길 속으로 가라앉으면서도 구태여 소리치지 않은 건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나를 알아봐 주길 바라서였나 봐. 너라면 기꺼이 손을 내밀어 줄 것 같아. 타오르는 화염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온몸을 던져 줄 것 같아. 그렇지만 그렇게 두지 않을게. 나는 네가 좋으니까. 처음으로 내 옆에 누군가를 잡아두고 싶어졌으니까.

살려줘서 고마워. 내 안의 불티를 없애 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말이야, 너도 나와 같다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