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속 혼란
사와
언제나 그랬듯 변의주가 내 인생을 가로질러 걸어온다. 약 일 년 전, 성당을 분한 웨딩홀인 세인트 그레이스 대성당에서부터였다. 대학 재적 시절 늘상 밥을 얻어먹었던 동아리 선배의 결혼식으로, 그녀는 배려심 넘치게도 의주도 참석하니 구태여 오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지만. 고작 그 또한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이유만으로 따르던 선배의 결혼식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쓸모없는 오기가 작용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전화가 끊어지는 즉시. 집 앞 잡화점까지 뛰어가 미즈히키가 부착된 수려한 봉투를 성심성의껏 골랐다.
의주를 대면하는 것은 대학 졸업 이래 처음이었다. 변의주는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동아리에서 그의 송별회를 열어 주며 성대한 귀국 축하를 해 줄 때 즈음엔 그의 무엇도 아니었다. 그때의 비참했던 내 직위. 나는 결단코 의주의 친구도 아니었으며 연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니 고국으로의 합당한 회귀 본능 따위에 아쉬워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아쉬워하지 않았고. 정확히 말하면 아쉬워하지 않으려 의식한 것에 불과하지만. 다만 내 안에서 영역을 확장해 나간 세균 같은 사랑으로 하여금 그의 소실이 불시에 상기될 때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자주 아팠다. 참 이상한 경험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나를 자꾸만 해친다는 건.
존재하지 않음에도 나를 시시때때로 해하던 그가 헤아릴 수도 없는 햇수 만에 일본에 돌아온다.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잠시 머무른다‘로 정정하겠다. 아무튼 나는 그가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일본까지 와, 고작 대학 선배의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데에 심심찮게 놀라고 말았다.
의주를 맞닥뜨리는 것을 고려해 만반의 준비를 했으나 아슬아슬하게 식장에 도착했다. 몰랐는데 소수정예인 일본의 결혼식은 청첩장이 없으면 입장조차 되지 않으니 꼭 청첩장을 챙겨야만 한다고 선배에게 몇 번이고 강조 당했으나, 그런 엄중한 강조가 있으면 무심코 어겨 버리게 되는 것이 내 악습관이다. 하라주쿠쯤에서 청첩장을 놔두고 온 것을 깨닫고 다시 집까지 되돌아가야만 했다. 결국 선배 두 명에게 인사할 참으로 넉넉히 출발했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멍청한 이유 덕분에 간만에 발휘한 내 축하 의식이 부질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몰아치는 조급함과 내 자신에 대한 한심함 덕에 의주가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불우한 사실마저 잊을 정도였다. 뒤늦게 도착한 나는 아무도 없는 웨딩홀의 텅 빈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갔고. 와중에도 넥타이를 고쳐 매며 식장 안으로 출입했다. 육중한 문을 최대한 고요히 열어젖힌 난 바삐 뒷좌석에 남는 아무 자리에나 착석한다. 공간에 맞춰 자세를 최대한 정돈하고 심각한 눈으로 앞을 바라볼 때였다. 니콜라스.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의주였다. 그 또한 나만큼이나 올곧은 자세로 척추를 세우고 앉아 나를 직시하고 있었으며, 이마를 덮은 갈색 머리카락이 반쯤 곡선으로 둥글게 젖혀진 어른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잠시 그 항상적인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도로 버진 로드를 걷고 있는 선배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대꾸하지 않자, 입을 다문 의주는 식이 끝날 때까지도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다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것은 이후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피로연을 할 때로, 우리는 동아리 부원들이 모인 테이블에 배정받았다. 니콜라스 오랜만! 외친 부원들이 나를 끌어안았고. 나 못지않게 오랫동안 잠적한 의주 또한 그들의 환대를 받았다. 분명 오랫동안 일본어를 발설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발음과 억양은 이전과 동일했다. 의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왜인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빳빳한 셔츠와 넥타이가 목을 조르는 듯한 압박감을 감각해 버렸다. 나는 누가 보아도 유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셔츠를 풀어 헤쳤을 테다. 감정이 전부 얼굴에 드러나는 버릇은 전부터 고치고 싶었던 악습관 중 하나였으나, 의주의 앞에서는 도저히 바로잡을 수 없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투명하게 투시되는 인간이 된 것만 같다.
반강제적으로 의주의 곁에 착석해야만 했다. 두 사람 되게 친했었잖아. 그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발설한 부원들이 나와 의주를 끈으로 엮듯이 접합해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힌 탓이다. 덕분에 코스 요리의 맛은커녕 수시로 도주 욕구를 느껴야만 했다. 내가 미약한 부담감에 침식된 사이 부원들이 하나 둘 씩 자신의 근황을 말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이미 가정을 꾸렸거나 사업체를 창설했거나 어딘가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짊어진 채로,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성실은 의주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한국으로 귀국한 그는 공무원이 되었다가, 지금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고 일본의 한 기업에 취업했다고 답했다. 아직 이사는 하지 않았지만 지인들의 결혼식이 겹친 김에 길게 여행 겸 일본에 왔다고. 앞으로 잔뜩 놀자는 입 발린 소리를 하기도 했다. 안 놀아 줄 거잖아. 누군가 장난스럽게 발설한다. 제 뒤통수를 쓰다듬던 의주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거짓이 첨가된 말을 지적당했을 때에 굳이 정정하지 않는 점까지 그대로군. 나이를 먹었다고 무작정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도 언제나 일관적인 것처럼.
의주에게 시선이 집중된 건 기우였다. 이대로 내 자신의 근황은 묻어갈 생각이었는데, 누군가가 주스를 마시는 내게로 불쑥 물었다. 니콜라스는? 요즘 어떻게 지내? 올 것이 왔군. 나는 내게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조금 초라한 직업을 말하기 겸연쩍어 고뇌하다,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의주와 무심코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언제나처럼 답장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 그 무구한 눈에 약했다. 결국은 도내의 정신병원에서 보호사로 일하고 있다는 허름한 근황을 고지했고, 예상대로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진짜 안 어울려서 깜짝 놀랐네! 뭐야? 갑자기 의료계에서 일하고.”
의료계라고 할 수가 있나? 일이라고 해 봤자 힘없는 환자들 번쩍 들어서 옮기는 것뿐인데. 어색하게 웃은 나는 외국인이 일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없다는 딱딱한 대답을 내놓았다. 나 또한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말은 철회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대학 시절보다 배는 더 시니컬해진 것 같다. 공기를 읽지 못한 내 말로 분위기는 미미하게 경직된다. 나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 용해시켜야 할지 좀체 감이 잡히지 않아 난감한 표정으로 마저 주스를 마셨고. 그런 나를 대신 두둔해 주듯 의주의 담담한 목소리가 그 위를 횡단했다. 왜 그래요, 잘할 것 같은데. 그제야 어색하게 웃으며 화답한 이들이 장난조로 입을 열었다.
“난 절대 싫어. 니콜라스가 일하는 병원 안 갈 거야.”
정신병원이니까 병원에서 볼 일 없는 게 좋을 거야.
“그건 좀 너무한데. 저 잘하거든요.”
맨날 실수해서 잘리기 직전이긴 하지만. 경쾌하게 나온 내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린다. 의주만은 웃지 않았지만. 연애할 적부터 자학적인 농담을 싫어하던 그였다. 그 후로 대학생 시절보다도 즐겁지 않은 말들을 관성적으로 주고받으며 영양가 없는 대화를 끝냈고, 우리는 선배 부부로부터 고가의 글라스 세트를 기념품으로 받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으나, 나는 의주와 함께 예식장을 나섰다. 그는 티가 날 정도로 나를 쫓아다녔다. 나는 그를 쫓아내 버리지도, 그렇다고 말을 걸거나 의식하는 티를 내지도 않은 채로 주차장까지 가 버렸고. 말없이 주머니를 뒤져 차키를 찾는 내 옆에 선 채로 안절부절못하던 의주는 차 문에 살포시 손을 얹고 물었다. 잘 지냈어? 키가 좀체 찾아지지 않는다. 암흑 속에서 손을 빼낸 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난 잘 지냈지. 주주는?”
“…… 잘 지냈어, 진짜?”
“어. 잘 지냈어. 왜?”
잘 못 지냈으면 했어? 퉁명스레 되묻자 바람에 흩날린 앞머리를 정돈한 그는 침묵한다. 그제야 차 키를 찾아낸 나는 문을 열고 운전석에 탑승했고. 그는 그때까지도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나를 애처로운 눈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냥 같이 놀자고 하면 그래 줄 텐데. 나는 예전의 의주와도 같은 미련함에 노출되며, 일말의 한심함을 느낀 것도 같다. 결국은 먼저 차창을 내리고 차 앞에서 알짱대는 그에게로 소리쳤다.
“타! 하루만이라도 좋으면 놀아 줄 테니까.”
그제야 차 뒤로 성큼성큼 돌아온 의주가 조수석의 문을 열어젖힌 후, 그곳에 탑승했다. 비좁은 공간에 단둘이 고립되어서야 이전과는 다른 의주의 특이점을 분별해 낼 수 있었다. 그건 체취였다. 대학생 시절에는 뿌리지도 않던 향수를 뿌린 듯, 남자 향수 특유의 무거운 향이 비강을 침투했다. 차를 출발시키며 그를 흘깃댄 나는 묻고 말았다. 향수 뿌렸어? 태연하게 앞을 쳐다보던 의주가 답한다.
“응.”
“왜? 원래 잘 안 뿌렸잖아.”
“그냥 뿌리고 싶어서.”
“그렇구나.”
뭐 하고 놀래? 애써 침착을 유지한 내가 묻는다.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외국인 관광객처럼 창밖을 이리저리 쳐다보던 의주는 아무 곳이나 괜찮다는 짜증 나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지 말고 시부야면 시부야 이케부쿠로면 이케부쿠로. 말을 해. 다그치자 나를 흘깃 바라보던 의주가 무심하게 답한다.
“그럼 일단 시부야역.”
“왜? 전철 타게? 차 있잖아, 나.”
“거기 코인 로커에 짐 다 넣어두고 왔어.”
“숙소 안 잡았어?”
“응.”
“왜?”
“너희 집에서 자려고 했지…”
“우리 집에서? 왜?”
차를 세운 나는 차마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룸미러로 내 눈을 흘긋거리던 의주는 겸연쩍은 기색 하나 없이 답한다.
“보고 싶었으니까.”
“……”
“같이 있고 싶어서...”
전 애인한테 보통 이런 말을 하나. 핸들을 붙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재밌는 건 이런 발랑 까진 말을 내뱉는 의주가 영 싫지 않은 내 마음이었다. 뻔뻔하게 내게 빌붙는 의주가 괘씸하면서도, 그의 말엔 순종하게 된다. 잠자코 차를 시부야역 방향으로 돌린 내가 물었다.
“한 달 동안 숙소 예약할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거 아니야.”
“…… 주주 좀 바뀌었다. 나한테 거짓말까지 하고.”
“그런 거 아니라니까…”
“…… 우리 사귀었던 거 까먹은 건 아니지?”
“안 까먹었어. 절대.”
“……”
“한 번도 까먹은 적 없어.”
“그럼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사람 희망고문 하는 것도 아니고…”
턱을 매만지며 바깥을 쳐다보던 의주가 나직이 발설한다.
“나는…”
“……”
“나는 네가 좀 잘 못 지냈으면 좋겠어서.”
“……”
“한국에 돌아가서도 계속… 네가 잘 못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계속 나만 생각하면서 힘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못됐어.”
“너한테만 이러는 거야.”
“……”
“일본엔 너 보러 왔어. 보고 싶었어.”
“안 됐네. 난 이제 주주 안 좋아하거든…”
“다시 좋아하게 만들면 되지. 그건 상관없어. 이제 여기서 같이 있을 수 있잖아. 계속.”
“……”
“많이 보고 싶었어.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
“……”
“……”
“나도….”
그가 내뱉은 이 진실한 문장 몇 마디로. 간신히 그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나는 다시금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만큼 나를 뒤흔드는 말들이었다. 도저히 차를 운전할 정신상태를 유지하지 못한 나는, 도피하듯 근린공원에 붙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차를 정지하는 즉시. 내 얼굴을 조심히 돌려세운 의주가 키스한다. 맞닿는 감촉마저도, 잠을 몰수당한 밤마다 수시로 상기하던 그 말랑한 질감과 동일했다.
앞서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의주를 닮아 있었다. 예컨대 턱을 조금 치켜올려야 완연히 눈에 담기는 갈색 뒤통수와 길쭉한 신체가. 바삐 걷던 나는 공항 한가운데에 멍하니 정지해 버린다. 망각하고 있었지만 이곳은 인천 공항이다. 변의주의 모국이다.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내 뒤로, 나를 호명하는 어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뒤를 돌아보았다. 의주의 가족들이 불안에 잠식당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가갈 틈도 없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남자가 캐리어 손잡이를 빼앗듯 쥐었다.
“갑시다. 어서요.”
다급히 말한 그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아 정차한 차로 경보하기 시작한다. 나는 힘 빠진 인형처럼 그에게 끌려갔다. 그와 사귄 지 이 년, 그리고 팔 개월이 지난 지금. 처음 목도하는 의주의 부모님이었다. 내가 의주도 없이 그들과 불편하게 마주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변의주가 죽었다. 나와 함께 드라이브하던 새벽 세 시의 요코하마에서부터였다.
1
나를 짐짝 싣듯 차에 실어 담은 그들은 하필 우리의 재회를 연상케 하는 한국의 한 성당으로 향했다. 다만 웨딩홀의 화려한 인테리어와는 달리 불쌍할 정도로 허름한 성당으로, 서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구석진 곳에 위치한 데다 대문에 놓인 영문 모를 화분 더미가 그 을씨년스러움을 증폭시켰다. 다니던 병원에도 기한 없는 병가를 내고 방 안에서 시름시름 앓던 나를 밖으로 꺼낸 것은 의주 부모님의 급박한 호출이었다. 지금 당장 한국으로 와라, 비행기와 숙소는 이쪽에서 준비할 테니 부디 와 달라는 그들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해외에 갈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기에 거절했지만. 의주와 관련된 일이라는 말에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성당으로 가는 길. 핸들을 두들기던 아버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의주가 꿈에 나오지는 않던가요? 한국어로 발화된 그의 말은 휴대폰의 번역기를 통해 중국어로 번역되었다. 디스플레이를 들여다보던 나는 무심하게 답했다. 안 나왔어요. 갑작스레 튀어나온 한국어에 눈을 크게 팽창시킨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한국어 할 줄 아시네.”
“네. 조금.”
“의주가 가르쳐 줬어요?”
“네…”
“그런데… 그런데 왜 이샹 씨 꿈에는 안 나왔을까. 신기하네.”
“꿈?”
“우리는 다들 의주 꿈을 꿔서. 그것도… 자꾸만 다급한 목소리로 니콜라스를 데리고 와 달라, 할 말이 있다. 그 말만 반복해서 하더라고요.”
“……”
“정말 영혼이라는 게 있는 건지…”
“…… 어디로 가는 거예요?”
“성당. 곧 도착해요.”
그리고 차에 내려 직접 목도한 성당은 멀리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허름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기둥을 구성한 콘크리트에는 군데군데 금이 져 있었으며, 메마른 덩굴이 그것을 휘감고 있었다. 건물 뒤편의 언덕에서는 검은 새 떼가 회백색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올랐다. 흉흉한 광경을 올려다보던 나는 잠자코 성당 내부로 향했다. 검은 수단을 착의한 노인이 황급히 허리 숙이며 인사한다. 손짓한 그가 예배실 뒤편의 숨겨진 복도로 나와 의주의 가족을 이끌더니, 녹슬어 있는 철문 앞으로 인도했다. 얼마나 방치된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으며, 손도 대고 싶지 않을 만큼 불결해 보이는 외관이었다. 반쯤 녹은 초에 불을 붙인 노인이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내 얼굴을 관찰하듯 면밀히 뜯어보았고. 약간의 부담을 느낀 난 애써 미소 지으며 얼굴을 뒤로 물렀다. 한숨을 내쉰 그는 서랍을 열어 두꺼운 안대 세 개를 내밀었다.
“여기서부터는, 저기… 안대를…”
“…… 네?”
“세 분 모두.”
단호한 어조에 왜 이 안대를 해야 하는지, 지금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건지.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 순순히 안대를 착용했다. 애초에 죽을 날만 기다리던 나를 왜 한국까지 부른 걸까. 나는 이 타국의 땅을 밟은 이후 그 어떤 것에 대한 설명도 듣지 못했다. 나는 이들의 폐쇄성에 조금 진절머리를 냈다. 시야를 차단한 내 앞으로, 무거운 문이 개폐되는 소리가 들린다. 문이 젖혀지는 순간. 눈이 가려졌지만 이 안에는 문 바깥의 복도와는 확연히 다른 암흑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캄캄한 기운이 온몸에 끼쳤다. 나는 그제야 입술을 열며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대답해 주지 않은 신부가 내 등을 퍽퍽 밀어 방안에 집어넣기 시작한다. 나는 내부로 걸어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그는 원해서,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하는 와중 발이 꼬이고 말았다. 정체가 불분명한 턱에 다리를 잔뜩 부딪힌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주변을 더듬거리며 허공을 휘젓자 멋쩍게 웃은 신부가 겁에 질린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등허리께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여기… 여기는 제단이고… 아니… 거기로 가시면 안 돼요! 여기. 여기 딱 여기야. 여기 앉아.”
내 어깨를 막강한 힘으로 눌러 딱딱한 의자에 착석시킨 신부가 숨을 헐떡이며 문간으로 다가간다. 문을 완전히 닫아 버린다. 기민해진 내 청력이 그 불길한 소음을 하나하나 주워듣는다. 그사이 내 곁에 차분히 착석한 의주의 어머니가 고개를 기울여 속삭인다.
“나쁜 짓 하려는 거 아니에요. 안심해요.”
“안심할 수 없어요… 무서워요!”
“아이고…”
혀를 찬 신부가 내 품 안에 인형을 안겨 주었다. 매만져 보니 귀 두 짝이 달린 묘연한 동물 형태의 말랑한 쿠션쯤으로 느껴졌다. 내가 그것을 주무르는 동안, 무거운 구두를 옮겨 우리 앞에 선 신부가 결연한 목소리로 선언한다.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준비 되셨나요.”
“네.”
“네. 해 주십시오.”
“네? 뭘 하는 거예요?”
“니콜라스 군. 이제부터 조용히 하지 않으면 혼쭐을 내겠습니다…”
“……”
신부의 맥없는 협박에 코웃음 친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안대 바깥의 세상을 엿듣는다. 안드레아 수녀와 속닥거리던 그는 어떤 직물을 바스락거리며 만지기 시작했고, 성냥으로 무언가에 불을 점화시켰으며, 아주 고요하게 서 있었다. 체감 삼 분 정도의 짧은 방황이 끝난 이후는 그곳에 고요만 존재하는 것처럼, 그들은 인간이라면 응당 발생해야 할 인기척마저 내지 않았다. 침묵에 질린 내가 목을 꺾어 스트레칭 할 즈음에. 너무나도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니코.”
의주의 목소리였다. 반사적으로 상체를 굳힌 나는, 천 너머를 투시할 수 있을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눈앞은 여전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암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의주. 나는 소리내어 중얼거린다. 진동하기 시작한 내 손등 위로 주름진 신부의 손이 다정하게 덮인다.
“의주. 진짜 의주야? 이게 무슨…”
“미안해. 엄마 아빠도 있으니까 한국어로 잠시 말할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진짜 의주예요? 의주… 의주는…”
“엄마, 아빠. 죄송해요. 어리광 부려서. 그런데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동요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차분했다. 숨을 삼킨 나는 부르르 떨리는 손을 쿠션 아래로 감췄다. 양옆에서는 아들의 귀환을 감격한 부모들이 소리 죽여 울고 있다. 그래 의주야, 뭐든 말해! 원하는 거 전부 들어 줄게! 아버지가 외친다. 그리고 굳어 있는 내 고막으로 낯선 이의 인기척이 침투한다. 방 끄트머리를 가로질러 걸어간 그가 어딘가에 착석하는 소리.
의주다.
조그만 기척 하나로부터 창출된 첨예한 직감이 나를 가로지르고 지나간다. 나는 그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 정말 의주의 외관을 하고 있는지. 그 무엇도 알지 못하지만 눈앞에 있는 인물이 의주라는 것을 확신하고 말았다. 의주, 진짜 의주다… 죽은 의주가 살아 돌아왔어… 몸을 발작시키듯 잘게 떠는 나를 끌어안아 부축한 아버지가 숨을 고르며 강령술로 부활한 아들의 말을 기다린다.
“엄마, 아빠.”
“그래, 의주야! 엄마야! 아빠야!”
“죄송해요. 멋대로 퇴사하고 일본으로 가 버린 거… 그치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
“죽었으니까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할게요. 우선 니콜라스는 제 애인이에요. 친구라고 속였지만…”
에?
나는 당황했다. 의주의 아버지도 당황했다. 내 어깨를 애틋하게 끌어안고 있던 손에서부터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애인이라고? 어안이 벙벙해진 어머니가 애인이라는 단어를 생전 처음 들어보는 사람처럼 되묻자. 멋쩍다는 듯 웃어 보인 의주가 순순히 답한다.
“네.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있을 때 이 년. 그리고 잠시 헤어졌다가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부터 사귀었어요…”
“어머, 어머, 미쳤나 봐! 어머! 동성애자, 동성애자라고? 네가?”
“동성애자는 아닌데… 충격이 크시죠. 죄송해요. 그렇지만 전 죽었으니까 한 번만 이해해 주세요...”
“여보! 여기, 여기 물 좀 가져다줘요! 이 사람 죽겠어!”
철제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네 사람분의 아우성이 귓가를 강타했다. 하지만 내가 듣고 있던 건 오직 의주의 숨소리다. 그가 의자 위에서 부스럭대는 소리, 이쪽을 직시하는 열렬한 시선이었다. 난장판에서부터 분리된 듯한 기분을 느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짜 주주야?”
“응.”
“어떻게… 어떻게 찾아온 거야?”
“그건… 할 말이 길어. 하고 싶은 게 있어서…”
“…… 나 주주 없어서, 너무 힘들었어.”
“미안해.”
“너무너무 힘들었어. 죽고 싶었어. 주주가 나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미안해… 미안해.”
“니콜라스…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나야말로 미안해. 혼자 둬서.”
“…… 만지고 싶어. 진짜 주주라는 걸 확인하게 해 줘.”
그러자 당황스럽다는 듯한 숨소리를 내뱉은 의주가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발걸음 소리가 멎은 후. 사실적인 체온과 촉감이 내 피부로 와닿는다. 머리통을 쓰다듬는 손바닥. 머리카락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는 손가락 다섯 개. 목덜미로 추정되는 피부에서부터는 일전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뿌렸다던 향수의 향이 풍긴다. 진짜 주주다. 입을 벌린 나는 멍하니 속삭인다.
“진짜 주주야.”
내 머리통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준 그가 답한다. 의주의 목소리와 행동을 취한 이것이, 어떤 가장이나 허구가 아닌 진실한 의주라는 걸 깨닫는 순간. 평소에 겪은 적 없던 극렬한 편두통을 감각했다. 과호흡에 시달리던 나는 축 늘어진 팔을 들어 반사적으로 그를 끌어안으려 했다. 무언가 바닥을 기어 오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내 두 손을 꽉 부여잡아 구속한다. 그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외친다.
“만지면 안 돼!”
그의 애처로운 겁박과 동시에 나를 두른 압박감과 체온이 귀신같이 사라졌다. 신부는 여전히 내 손을 붙잡은 채로, 손바닥에 미치는 압력은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힘이었다. 연거푸 숨을 고르던 그는 의주의 부모님을 도로 의자에 앉혔고. 그들은 각기 다른 주술을 외며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듯했다. 십자가, 십자가. 수녀를 채근한 목사는 좁은 방을 여러 번 왕복해 걸어 다니더니, 이내 가만히 앉아 있던 의주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그 뭐냐… 목적을 말하지 못할까!”
갑자기 엑소시즘을 행하는군. 나는 헛웃음 쳤다. 신부의 허술한 채근에 의주는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한다고, 놀라울 정도로 무구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척을 하는 거지 별로 부끄러운 것 같진 않았다. 할 말을 잃어 벙찐 나머지 괜스레 기침하던 노인은 그 이후로 의주의 목적을 캐묻는 쓸모없는 행위를 중단했고, 일사분란하게 주변을 정돈하는 듯한 소음이 들려온다. 우리는 삼 분 간의 공백 끝에 시야를 두른 암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뻑적지근한 눈꺼풀을 비빈 나는 눈앞을 쳐다보았고. 신부가 조심스레 껴안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와 마주하게 되었다… 강아지? 강아지는 크림색 털에 접힌 채로 축 늘어진 귀를 갖고 있는 귀여운 외관으로, 동그랗고 무구한 눈이 더할 나위 없이 귀여웠다. 그는 황당해하는 내게로 가만히 강아지를 안겨 주었다. 이 조그마한 동물은 내 품에 안길 때까지도 일절 반항하지 않는 점잖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나는 우선 그 따끈한 동물을 받아 들고, 쓰다듬으며 물었다. 이 강아지는 뭐죠.
“변의주 씨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변의주 씨를 담는 그릇…”
“어쩐지 나한테 안겼을 때 개 냄새가 좀 나더라.”
“이샹 씨. 나도 한 번만 안아 보게 해 주세요…”
의주의 아버지가 울먹거리며 손을 뻗었다. 나는 강아지를 잠자코 넘겨줬지만 짧은 몸을 꿈틀거린 그것이 아프지 않을 정도의 강도로 손등을 물어뜯으며, 그에게 안기는 것을 거부한다. 헉. 충격을 받은 친부가 손을 거두자마자 내게로 낑낑대며 발을 뻗는 개를, 나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던 것 같다. 검고 둥근 동공과 그 안에 담긴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다가온 수녀가 내게로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눈에 익숙한 의주의 반듯한 일본어 필체로 쓰인 메시지.
일본에 데려가 줘. 우리가 살던 집에서, 너에게만 나를 알려 줄게.
“…… 한국 관광할 시간도 안 주는 거야? 나 두 달 만에 집 밖으로 나온 건데.”
강아지를 들어 올린 나는 속삭여본다. 혀를 내어 입가를 핥은 개는 당연하게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동물에게 말을 거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건지, 이쪽을 상당히 애처롭게 바라본 신부가 내 손 안에 방금까지 착용했던 안대와 작은 병을 쥐여 주었다.
“둘이서만 있을 때, 변의주 씨가 인간 형태로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대를 쓰세요.”
“……”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안대를 벗고 그를 쳐다보면 안 됩니다! 알겠어요? 쳐다보면 안 돼요!”
“왜요? 왜 쳐다보면 안 되는데요?”
“니콜라스 군은 한낮의 태양을 맨눈으로 관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뭔 소리야, 이게? 그리스 시인 같은 비유법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
“……”
“쳐다보면…... 죽어요?”
“저도 잘 모르지만, 죽진 않을 겁니다. 다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던데요….”
흥미로운 발언이었다. 의주가 죽은 것 이상의 불행은 내 삶에 없을 텐데.
“아무튼 알겠습니다. 이제 가 봐도 되죠?”
나는 강아지를 팔 사이에 낀 채로 성당을 나섰다. 강아지는 의주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았고, 가벼웠다. 그리고 팔다리를 꼼짝도 못 하는 것이 불편한지 줄곧 짧고 통통한 발을 흔들거렸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 듯한 걸음걸이로 열악한 도보를 걷던 의주의 아버지가 묻는다. 역시나 탈력감이 느껴지는 듯한 허망한 어투다.
“밥… 먹어야 하는데. 한국에서 먹고 싶었던 거 있어요?”
“……”
“없으려나…”
“그거….”
“네?”
“육회.”
“응?”
“육회 사 주세요.”
2
나는 애견 캐리어에 의주를 담아 일본으로 돌아왔다. 내가 잠시 일본을 뜬 사이 이미 찌는 듯한 더위가 심화되었고, 공항 밖을 나서자마자 아스팔트에 플라스틱제 애견 캐리어를 내려두는 것도 꺼려질 정도의 폭염이 닥쳤다. 대만에서 살아온 나도 일본의 여름은 싫단 말이지… 이전엔 이런 말을 하면 곁에서 땀을 주룩주룩 흘리던 의주가 동감이라고 말해 주었는데. 강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는 즉시. 캐리어를 열어 의주를 방생했다. 벌떡 일어난 개는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촉촉한 코를 킁킁거리며 좁은 집의 내부를 한 바퀴 순례했고, 이내 소파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누워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곁에 붙어 앉아 딱딱하면서도 말랑한 등허리를 두들기다, 문득 물었다.
“네가 정말 의주인 거야?”
강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천장의 전등이 길게 꺼졌다가, 다시 점화됐다. 의주가 아니라는 거지. 티셔츠를 팔락거리며 더위를 물리치려 애를 쓰던 나는 결국 에어컨 앞으로 다가갔고. 이왕 트는 거 아주 시원하게. 18도로 온도를 맞췄다. 그리고 선반에서 쓰지 않는 공책과 펜을 꺼냈다. 협탁에 그것을 펼쳐두고 허공을 향해 말했다. 하고 싶은 말 전부 해 줘. 안 볼 테니까. 그리고 협탁으로부터 등을 돌리자, 조금의 공백 후 공책의 종이와 펜촉이 마찰하며 자아내는 조심스러운 필기음이 들렸다.
돌아봐도 돼. 나를 봐.
필기음이 멎는 타이밍에 맞춰 공책을 확인하자, 의주의 필체로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한자를 헤아릴 여력은 없는지 히라가나로 작성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앞을 보는 자세를 몸을 고쳐 앉았고. 다시 한번 전등의 불이 꺼진다. 커튼을 치지 않은 방 안으로 도쿄 도심의 어지러운 빛이 침투한다. 하지만 딱 그만큼의 미미한 빛이었다. 나는 대개의 것들을 보지 못했고, 또다시 무지에 고립된 내 앞에서. 붕 떠오른 펜이 공책과 맞붙는다.
무슨 얘기를 해 줄까?
“왜 나를 찾으러 왔는지에 대해서 말해 줘.”
귀신과 접하는 건 생각보다 으스스한 경험이 아니었다. 의주라 그런가. 의주가 아니더라도 나는 귀신을 리스펙하는 편이니까. 나는 아주 담담하게 의주의 질량을 보았다. 잠시 멈칫한 펜촉은 이내 공책 위를 활주했고, 의주의 정갈한 필체로 내 앞에 드러난다. 소통된다.
걱정돼서
와 버렸어
혼자 두는 게 미안해서
계속계속 혼자 남은 널 생각하다 보니까
도저히 가만히 둘 수가 없어서
찾아와 버렸어
앞으로는 계속 옆에 있을 거야
영원히 옆에 있어 줄게
혼자 둬서 미안해
“거짓말. 하고 싶은 게 따로 있는 거지? 예쁜 여자랑 데이트하고 싶다거나. 생전에 못 이룬 걸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나는 괜스레 장난스러운 어조로 묻는다. 그러자 펜을 힘주어 쥐는 듯 펜촉 윗부분의 기둥에 둘러싸인 푸른빛의 젤리가 움푹 파여 들어갔고. 그가 아주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를 음각하듯 종이 위로 투명한 손을 움직인다.
にこらすと
けっこんしたい
결혼하고 싶다, 라.
말도 안 되게 비현실적인 요구에, 나는 언젠가 의주와 세계의 엽기 결혼식을 소개하는 주말 미스터리 프로를 본 것을 상기시켰다. 의주는 휴일, 나는 나이트 출근. 느지막이 일어난 나에게 점심밥을 차려준 그가 휴대폰을 쳐다보며 묻는다.
“오늘 몇 시에 끝나? 일.”
“새벽 2시에.”
“잘 됐다. 할 말 있으니까, 그때 데리러 갈게.”
“무슨 할 말. 헤어지자는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거든… 드라이브나 좀 하자.”
그때 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갈라 묶은 젊은 리포터가 대만의 길거리에는 영혼결혼식의 단초가 되는 붉은 봉투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서 함부로 주우면 안 된다는 민간설화를 얘기했고,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의주가 저게 진짜냐고 물어왔다. 진짜야. 남은 토스트 한 쪽을 입에 문 나는 빈 접시를 정리했다.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제 허벅지에 얹혀 있던 손을 다시 내 허리로 회귀시킨 의주가 다시금 물었다. 영혼결혼식이 뭐야?
“모르겠어. 나도 안 해 봤어.”
“해 본 사람이 있긴 해?”
“있겠지. 뭐 한두 명쯤…”
“죽은 사람이랑 어떻게 결혼하는 거지?”
“진짜 결혼이겠어? 그냥 의식이지. 아… 죽은 사람이랑 결혼하면 그 사람도 얼마 가지 않아 죽는다. 이런 말이 있긴 해.”
“……”
“전 귀신이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인간과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뭐 이런 거 아냐?”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은 의주가 손을 옮겨 내 볼을 잡아당긴다. 왜? 나는 되물었고. 좋아서. 그가 대답한다. 이전에 사귀었던 의주는 감정표현도 극히 적었으며 나에 대한 애정을 굳이 분출하지 않는 부류로, 나는 그의 폐쇄적인 행동 양상에 큰 불만을 안고 있었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해.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해! 계속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면 모르잖아. 그런 식으로 질책하면 며칠 간은 붉어진 얼굴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두어 번 정도 좋아한다고 고백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언제나의 무감한 상태로 회귀했다. 그런데 일본에 돌아와 나와 다시 교제하고부터는 그 악습관이 놀라울 정도로 완치된 상태였던 거다.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내가 없는 사이 어떤 여자가 의주에게 적극성을 심어준 걸까. 질투심이 인다. 나는 볼을 주무르는 그의 손을 떨쳐내고, 뾰족한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드라이브 어디로 갈 거야?”
“글쎄. 요코하마라거나…”
“내가 좋아하는 곳으로 데려다 줄 거야?”
“응.”
“그럼 갈래.”
일하고 나서 힘들 테니까 맛있는 것 좀 사 줬으면 좋겠다. 칭얼대자 머리통을 쓰다듬던 의주가 한껏 웃으며 답한다. 알겠어.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드라이브에서 하겠다는 말이 내게로 향한 청혼일지도 모른다. 의주는 아주 오랫동안 우리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뇌했고, 나는 좀 가볍게 결혼하면 되지 않냐고, 함께 대만으로 가서 결혼하자는 대답을 던졌던 것 같다. 영 만족하지 못한 것 같지만. 우리 관계의 유한함은 재회 전에도 그를 괴롭히는 것들 중 하나였다. 그는 나와 결혼할 수 없으며 내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간간이 화, 아니 짜증을 냈다. 딱 그 정도의 연약한 신세 한탄이었다. 그러다가 나를 떠나 버렸고. 나는 절망했고. 다시 돌아온 그가 나를 붙잡았다. 그는 그때부터 시부야구에 창설된 파트너십에 대한 얘기를 하거나 대만의 결혼식에 대해 묻는 빈도가 부쩍 잦아졌으며, 말만 가벼이 했지 정말 그와의 결혼을 추호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내가 도리어 미안해할 정도로 형체 있는 법률적 구속에 대해 고민했다. 그래서 지금은 의주에게 묻고 싶다. 그날 하려던 말이 정말 나와 결혼하자는, 그런 청혼이었어? 나와 영원히 함께 있고 싶다는 네 마음을 고백하려고 했던 거야?
하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하다. 차체에서부터 도약한 화염이 그를 지워 버렸으니까. 나를 바라보던 번쩍거리는 안구도 수없이 입 맞춘 입술도. 전부 다 없애 버렸으니까.
생각해 볼게
성의 없이 공책에 답변을 써 내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의 불을 다시 점화했다. 방 안이 밝아지는 것과 동시에. 공중에 떠 있던 펜이 아래로 낙하하며, 탁자 끄트머리로 굴러떨어졌다. 그 허망한 소리로 다시금 실감했다. 의주의 육신은 소멸되었다는 것. 내가 보고 있는 건 내 비참한 애도가 자아낸 환상이거나 엑소시즘의 산물, 어느 쪽이든 나를 괴롭게 만드는 가상이라는 것을. 갑작스레 닥친 정신적 고통에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벽지를 노려보던 나는, 차라리 자리에서 일어나 의주의 그릇이라고 일컫던 강아지를 쓰다듬는 길을 택했다. 잠들어 있던 강아지는 내 손길에 화들짝 놀라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가, 내 쓰다듬게 도로 몸을 이완시키고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대로 거실을 뜬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고 (투명한 의주가 어딘가에 걸터앉아 내 나체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망상이 날 괴롭혔다) 집 근처 단골 카페에 딸기 라떼를 구매하러 큰마음 먹고 외출했으며 (주문 시 말을 더듬은 것을 의주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수치심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딸기 라떼를 마시며 의주의 죽음 이후 보지 않고 있던 애니메이션을 몰아보았다 (곁에 있는 의주가 1.5배 배속으로 바꿔두는 상상을 했다)
일본으로 돌아와, 이전의 삶으로 잠시나마 돌아가 보니 알겠다. 일상을 영위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콘크리트제의 안온한 성벽 밖으로 나가. 언제나처럼 인간들 사이에 섞여 도보를 걷다가도 자주 주저앉고 싶어졌다. 내가 내 힘으로 자립해 걷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 두 팔과 다리가 온전히 달려 있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나도 괴롭게 만든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죽음의 원인은 나다. 그 사실을 통감할 때마다, 나는 나를 해하고 싶은 충동에 몸부림치게 된다. 의주의 드라이브 요청을 반려했다면, 아니, 그가 나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와 사귀지 않았더라면, 동방 구석에 홀로 앉아 있던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나를 만나지 않은 세계의 의주가 자신의 모국에서 금 가지 않은 일상을 살고 있을 거라는 예감. 내 손으로 의주의 완벽하고도 영구한 삶을 망가뜨렸다는 죄악감이.
나를 살 가치가 없는 하등한 인간으로 전락시킨다. 이제 무력함은 내 먹이고 기반이 되었다. 의주의 죽음이 나를 그렇게 학습시켰다.
남은 딸기 라떼를 하수구로 몽땅 흘려버린 나는, 조금 긴장하면서도 일하고 있던 병원의 원장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다음 주부터 일 나가도 될까요. 대뜸 말하자, 그는 안 그래도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반색하며 나의 복귀를 환영해 주었다. 전화를 끊은 나는 오랫동안 꺼진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다가, 조금 이르게 침실로 돌아갔다. 그가 죽은 이후엔 침실이 내 행동반경의 전부였다. 온종일 잠만 잤다. 일정한 공식에 따라 영원히 깨지 않는 날을 죽음으로 점친 수학자처럼, 내 무기력한 수면이 언젠가는 내 삶을 몽땅 앗아가기를 염원했던 날이 있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으며 이 이상의 생명 연장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적도 수십 번이었다. 나쁜 일은 전부 잊고 나아가는 편이 낫다고, 그편을 의주가 더 기뻐할 것이라는 건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지만. 나는 내 과신보다도 훨씬 더 무력한 인간이었다.
습관화된 수면 덕에 잠드는 것이 전혀 힘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현실 도피의 일환으로 행한 짧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분명히 눈을 떴음에도, 온 시야가 새까맸다. 나는 언제나 조그만 전등을 켜놓고 잠든다. 혼자 잠드는 건 무섭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중에 깨어났을 때 보이는 이 새까만 암흑이 나를 더할 나위 없는 두려움에 고립시키는 건 당연했다. 실명인가. 실명이다! 나 실명한 거야?! 허공을 휘적거리며 그렇게 고함을 치자, 따스한 체온이 두 볼에 맞닿는다. 내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매만지던 그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한다. 니콜라스.
“미안해. 안대 씌웠어.”
“…… 깜짝 놀랐잖아.”
“벌써 자? 아직 저녁밖에 안 됐는데. 내가 일찍 자라고 할 때는 그렇게 내 말 안 듣더니.”
“오자마자 잔소리…”
“방이 이게 뭐야. 왜 이렇게 더러워. 살은 왜 이렇게 많이 빠졌고. 걱정되게.”
“방 청소해 주는 사람도 없고, 밥 먹으라고 해 주는 사람도 없고… 여름이라 입맛도 없어서.”
“……”
“보고 싶어… 안대 벗으면 안 돼?”
“안 돼. 아직은.”
“왜 안 되는 건데?”
“누, 누가 배우자한테만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해서…”
네가 무슨 에로스도 아니고. 나는 조소하고 말았다.
“거짓말이지?”
“응…. 어떻게 알았어?”
“몰라, 바보야! 나 이거 벗고 주주 볼 거야. 보고 싶단 말야.”
“니콜라스, 안 돼.”
“……”
“미안해. 그런데 조금만 기다려 줘.”
“……”
“생각은 해 봤어? 결혼…”
“…… 아니. 생각 안 했어.”
“하기 싫어?”
“그건 아닌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아직.”
“그래…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주주… 나 다시 자도 돼? 미안. 좀 피곤해서.”
“……”
“……”
“나 무서워하지 마… 아직도 좋아해서 이러는 거야.”
“……”
“계속 옆에 있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 내가 다시 살아날 수는 없잖아.”
이미 죽었는데. 나는 그렇게 속삭이는 기척이 내 코앞까지 접근한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남들 앞에서는 공연히 개 냄새가 난다고 했지만, 실제로 개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고. 그의 가짜인지 진짜인지 그 진위가 묘연한 육체서부터 풍기는 건 내 기억을 착실히 따르는 익숙한 체향이었다. 나는 앓고 있는 비염의 영향으로 꽃향기를 나무 열매 향으로 오인하거나 나무 냄새와 머스크를 대개 구분하지 못했지만, 의주의 향만큼은 유일하게 구분했다. 특출나게 특이하거나 기억에 남는 향은 아니고, 내가 언제나 구매하는 슈퍼의 플로럴 바디워시를 기반으로 기분에 따라 뿌리는 향수의 향이 얹혀 있다. 사람에 따라 묵직한 꿀 향으로도 담배 냄새로도 느껴지는 향수인데 내게는 달큰한 향기만 풍긴 것은 기우일지도… 아무튼 죽은 의주의 비정상적인 신체에서도 비슷한 향이 났다.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나는 티 나게 그의 향을 맡았다. 그가 머쓱한 듯이 상체를 뒤로 물렀고, 괜스레 자세를 고쳐 누운 나는 결혼에 대한 주제를 돌려 버렸다. 너 진짜 주주 맞아?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해…”
“그야 난 모르잖아. 눈도 가려져 있고, 만질 수도 없고… 나쁜 귀신이 주주 행세를 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 아니야. 그런 거. 나는 진짜야.”
“확인하고 싶어.”
“확인?”
“만지게 해 줘.”
“그게 목적이었구나…”
“당연하지. 외로웠거든. 다른 남자랑 잘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니콜라스.”
“안 잤어, 안 잤어.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어.”
“만지면, 나인지 알아?”
“그럼 주주는 몰라? 눈 가린 채로 날 만진다고 생각해 봐. 나인 줄 알 거 아냐.”
“흉터를 만지면 알 것 같아. 그런데 난 흉터가 없어서…”
“만져도 돼, 안 돼? 얼른 대답해.”
“……”
“…… 안 돼?”
“돼.”
그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팔을 뻗은 나는 내 위로 드리워진 그의 가슴팍을 만졌다. 맨살이 닿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옷을 착의하고 있다. 면 재질의 부드러운 티셔츠 표면이 만져진다. 어떤 메커니즘으로 인간의 형태가 되는 걸까. 옷은 기본적으로 빙의 시 수반되는 걸까? 손을 옮긴 나는 그의 목을 더듬었고, 더 타고 올라가 턱, 콧대, 눈두덩이까지 매만져서야 그가 진짜 의주라는 확신을 다시금 확립하게 되었다. 확신하고 나서도 쉬이 손을 떼지 못한 건 그에 대한 애달픔, 혹은 동정이 작용해서다.
“불쌍해.”
“……”
“불쌍해… 주주. 나 때문에 계속 여기에 있고…”
“……”
“산 사람이 보고 싶다고… 내 옆에 계속 붙어서…”
불쌍하다고 생각하면, 그냥 결혼해 주면 안 돼? 내 손목을 잡아 내린 그가 속삭인다. 의주답지 않은 직설적임이었다. 드문 어조에 내 안에서 피어오르는 일말의 미심쩍음을 억눌러야만 했다. 생각해 본다니까.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입술을 더듬는다. 귀엽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도. 몇 분 후 다시 강아지로 돌아간 의주가 까끌한 혀로 내 하관을 마구 핥았고, 나는 안대를 벗었다. 좁고 초라한 내 방은 언제나 그랬듯 고요했다. 처음부터 나 이외의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3
“오늘부로 복직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허리 숙여 말하는 즉시. 좁은 차지실에 삼삼오오 모인 간호사 선배들이 성의 없는 박수를 깔짝인다. 그리고는 썰물처럼 열린 문밖으로 와르르 방출되었다. 잠자코 이전날의 차트를 읽는 내게로 수간호사가 다가온다. 그녀가 문밖을 가리키며 명령한다. 잘 왔어요. 저기 저 하미자와 씨 좀 반대편 베드로 옮겨 줄래?
의주가 회생한 지 이 주 정도가 흘렀다. 나는 복직했다. 살이 너무 빠졌는데? 괜찮은 거 맞아? 그렇게 말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흘겨보던 원장도 인력난에 못 이겨 나의 회복에 대해 캐묻기를 그만두었고, 나는 나마저도 상태가 괜찮은지 묘연한 상황에서 환자들의 뒤치다꺼리 현장에 투입되었다. 근방에 하나 있는 정신 병동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프고 기민한 사람이 잔뜩 들어왔지만 개중 나를 가장 반기는 것은 노인으로. 몇몇 장기 입원 중인 이들은 가느다란 팔을 힘겹게 들어 나의 복직을 축하해 주기도 했다. 자만하고 싶진 않지만 나는 가장 인기가 많은 보호사였다. 하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가 이전까지와는 아주 상반되게 뒤바뀐 이도 있었다. 404호의 이토다.
스이미 씨의 라운딩에 동참해 병실을 함께 순례하고 있을 때다. 창가에 앉아 바깥을 보고 있던 이토에게 인사할 참으로 다가갔고, 이토 씨, 하고 그녀를 호명하는 내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언제나의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지만. 내 얼굴을 확인한 즉시 본 적 없는 짙은 절망과 두려움이 얼굴에 끼치기 시작했다. 황급히 병상에서 일어난 그녀가 얼굴을 막듯이 은닉하며 내게로 소리쳤다.
“안 돼! 그런 짓을 해선 안 돼요!”
“……”
액팅 아웃인가. 아닌가. 내가 잠시 자리를 뜬 스이미 씨를 부를까 말까 고뇌하는 사이, 내 손을 잡아채 꽉 붙잡은 이토가 애처롭게 소리쳤다.
“왜 죽은 사람이랑 결혼을! 안 돼요, 그것만은 절대 안 돼! 무카사리는 안 돼!”
순간 소름이 끼친 나는 그녀의 손을 세게 떨구고 말았다. 벽에 부딪힌 이토는 흐느끼며 병상으로 돌아갔고, 침대 주변으로 거칠게 커튼을 쳤다. 나는 바람에 따라 너울지는 커튼을 향해 멍하니 발설했다. 죄송합니다. 때마침 방으로 돌아온 스이미 씨가 내게로 묻는다. 무슨 일? 고개를 휘저은 나는 도망치듯이 병실을 빠져나갔고, 그 후로도 나를 눈여겨보던 그가 휴게 시간에 맞춰 나를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괜찮아? 몸은 좀 어때.”
병에 담긴 딸기우유를 건넨 그가 꾸며낸 듯한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갑작스러운 배려에 놀란 나는 층계참에 기대 있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조금 얼떨떨하게 병을 받아들였다.
“괜찮아요. 멀쩡해요.”
“그래도 교통사고잖아. 친구분 일은… 참 유감이야.”
“……”
“진료는 좀 받아 봤어?”
“네? 네… 경미한 타박상만…”
“아니, 그게 아니라. 정신과 상담 말이야.”
“……”
“정신병동 보호사가 기분 나빠 하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가 보려고 했어요. 시간이 나면.”
“이토 씨랑 무슨 얘기 했어?”
“이토 씨랑… 아무 얘기도…”
“정말?”
“…… 스이미 씨.”
“응.”
“무카사리가 뭐예요? 인터넷에 검색하려고 해도 한자를 모르겠어서.”
“아, 그런 얘기 한 거야?”
“네?”
“영혼결혼식의 일종이야. 도호쿠에서 한다나… 그건 갑자기 왜? 이토 씨 말 흘려들어. 원래 그렇게 의미 없는 말 자주 하시는 분이잖아.”
“아, 네……”
“…… 전보다 더 위축된 것 같다. 살도 많이 빠지고. 예전엔 환자들이 무서워하는 거 싫다고 자주 웃었는데, 요즘은 웃지도 않네.”
“……”
“힘내.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도울게.”
“감사합니다.”
“친구분도 니콜라스가 힘차게 나아가는 걸 원하고 있을 거야.”
정말 그럴까요… 멋쩍게 대답했다. 이렇게 직접적인 응원은 물론 고맙지만. 고작 말 한마디에 괜찮아질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이 나를 또다시 괴롭게 만든다. 뜯지 않은 병의 입구를 매만지고 있을 때. 허리를 접으며 매섭게 기침한 스이미 씨가 불현듯 우유가 담긴 병을 떨어뜨렸다. 병은 입구서부터 쏟아지는 분홍색 궤적을 남기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지참하고 있던 손수건으로 그의 가슴팍을 더듬어 닦아 주었고, 쿨럭대며 내 손을 만류한 그는 호흡을 되찾아서야 제 손수건으로 끈적한 손이며 옷자락을 닦았다. 식은땀이 배어 나온 이마를 두들기던 그가 석연찮은 듯이 말한다.
“아니… 이상하네. 누가 갑자기 내 손을 탁 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손날을 왕복해 매만진 그가 중얼거린다. 그의 말로 하여금 내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험악하게 구겨졌고, 의주를 질책하는 눈빛을 담아 허공을 쏘아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의주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 피로에 절여져 퇴근한 나는 습관처럼 나누던 의주와의 대화 시간을 넘겨 버리고 곧장 잠들어 버릴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해명이 듣고 싶었다. 침대에 파묻었던 몸을 도로 일으켜, 허공을 향해 소리쳐 보았다.
“주주.”
“……”
“주주!”
주변은 고요했다. 그러다가도 마루에 촉촉한 발바닥이 부딪혀 챱챱거리는 깜찍한 소리가 들리더니, 강아지가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손을 휘저었다. 아니아니 너 말고. 유령 주주 말이야. 유령 주주 데리고 와. 그러자 정말 의주가 왔다. 강아지의 발걸음 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소리로 다가온 그가, 문 너머에서 소극적으로 말한다. 안대… 써 줘.
도대체 내 시야의 차단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태양을 맨눈으로 볼 수 있냐는 뜬구름 잡는 설명과 더불어서 말이지. 나는 조금 거칠게 안대를 뒤집어썼고, 방 안으로 들어온 의주가 당황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곧장 비뚤어진 안대의 평행을 고쳐잡아 주었다. 나는 곧장 떨어져 나가려는 그의 손을 낚아채고 소리쳤다. 너 왜 자꾸 내 주변에서 사람들 겁주는 거야? 끙끙대며 내 손 안에서부터 빠져나가려 애쓰던 의주도 결국엔 팔에 힘을 풀고 나로부터의 도주를 포기한다.
“대답해, 왜 그러냐니까!”
“그냥… 그냥 조금 짜증 나서.”
내 손등을 어루만진 그가 풀죽은 목소리로 대꾸한다. 나는 놀랐다. 의주는 짜증 난다는 시답잖은 이유 하나로 남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람이 아니다. 팔을 붙잡아 끌어당긴 나는 그를 겁박했다.
“…… 너 진짜 주주 맞아?”
“맞다니까...”
“진짜 주주는 너처럼 못되게 굴지 않아! 가짜지? 주주인 척만 하고 있는 거지?”
“니콜라스… 난 원래부터 이랬어. 나 이제 죽었으니까 남들 생각 안 하고, 조금 이, 이기적으로 굴 수도 있는 거 아냐?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거잖아.”
“역시 가짜구나. 주주는 그런 생각 안 해! 주주인 척만 하는 거였어. 그래서 안대도…”
“아니야. 진짜 나라고!”
“거짓말 치지 마.”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야!”
두 손에 붙잡힌 얼굴이 불쑥 위로 들리는 것과 동시에, 의주가 큰 소리를 냈다. 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동공을 돌리며 암흑 너머의 그를 관측하려 애썼지만. 의주의 눈도, 코도. 입술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유추하는 건 가능했다. 격양된 목소리로 그가 드물게 분노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 계속 네 옆에 있을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해.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나를 방해하잖아.”
“…… 너 이상하다, 주주…”
“나도 이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거야! 갖고 싶은 건 전부 가질 거야!”
“……”
“미안해… 겁주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
“가끔 나도… 죽은 게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나 무서워하지 마…”
“…… 안 무서워. 하나도.”
“안 무서워?”
“응. …… 귀여워.”
내게로 안긴 의주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나는 의주가 이상해졌음을 알았어도, 그를 분리시키지 못했다. 그 대신 팔을 뻗어 세게 끌어안아 주었다. 언제나의 따뜻한 체온이 판판한 가슴팍에 스민다. 나는 의주의 구불거리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결심했다. 이토 씨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이토 씨와 대면하는 건 바로 다음 날의 일으로, 나는 그녀의 양해를 구한 후 선배들을 요령껏 피해 이토 씨를 복도 구석의 창고로 모셨다. 창고라지만 너른 창을 통해 햇빛이 밝게 들어오는 곳으로. 이 정도 고립이라면 그녀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대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이토 씨. 애써 밝은 목소리로 발화하자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나를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올려다본 그녀가 앞질러 갔다. 지금은 말 못 해요.
“네? 왜요?”
“뒤에 자꾸… 자꾸 붙어 있으니까… 무서워서 아무 말도…”
“……”
“죽은 사람이랑 결혼하면 안 돼요… 그 사람 이샹 씨를 해칠 거예요… 데리고 갈 거예요…”
“잠깐만, 귀 좀.”
그녀에게로 다가간 나는 고개 숙여 속삭였다. 사실은 요구받고 있는 거예요. 결혼을. 이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뇌하듯이 기다랗게 늘어진 병원복 소매를 쥐어뜯던 그녀는 결연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 거면, 미이가 잘 알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환자에게 개인적인 도움을 받아선 안 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으니까. 나는 자정 즈음의 별관 창고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고, 창고의 문을 열어 이토를 방생시켜 주었다. 그 후로 쉴 틈 없이 일하며 이토의 말을 되새기는 데에만 전념했다. 의주가 나에게 해를 끼친다. 나를 데리고 가려 한다. 대만에서도 죽은 사람과 결혼하면 얼마 안 가 영혼 배우자가 나를 동행자로 삼는다는 미신이 만연하지. 하지만 의주가 내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차마 믿을 수 없었다. 의주는 내게 죽기보다 살라고 말할 인간이고. 내가 그를 따라 죽는 것보다도 새로운 삶을 걸어 나가는 길을 원하는 인간이다. 언젠가 그가 아픈 사람들을 돕고 회복시켜 주는 내 직업의 고결함을 칭송하며, 내게 직업적 자부심을 가지라 핀잔주었던 적도 있었다. 나는 그저 돈이 필요해서 일했을 뿐이고. 외국인이 자격증을 따기 용이해서 의료업에 뛰어든 것뿐이다. 그런 내게 손수 자부심을 지어 준 의주다.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아야 해. 난 그런 니코가 멋지다고 생각해.
죽고 싶은 게 당연하다. 영원의 안식으로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나는 그가 멋지다고 생각한 삶을 지속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의주가 만일 나와 함께 죽고 싶다고 해도, 그 요청은 수리하지 못한다.
내 삶을 제 본위대로 끝내 버리고 나와 함께 죽는 것. 그것이 의주가 바라는 진실한 종말인 걸까….
자정이 되자마자, 바삐 타자를 두들기는 스이미 씨에게 들키지 않은 채로 데스크를 빠져나갔다. 곧장 어두운 복도를 달음박쳐 별관의 창고로 향한 나는, 더러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토와 눈이 마주쳤다. 허공을 삿대질한 그녀는 곧장 입을 벌렸다.
“엄청 화가 났어요. 그런데 얼굴이 귀여워서 하나도 안 무서워…”
남의 남자친구한테 얼굴이 귀엽다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지만 지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앞에 주저앉았고. 그제야 모아 앉은 다리를 풀어 편한 자세로 만든 이토가 착의하고 있던 가디건의 주머니를 부스럭거렸다. 랜턴을 찾는 내 앞에서 보란 듯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고. 기함한 나는 단번에 그녀의 담배를 앗아갔다.
“뭐 하는 거예요. 병동에서는 담배 금지!”
“무서워서… 이거라도 피우면서 마음 풀려고 했어요.”
“뭐가요? 주주가?”
“계속 이샹 씨 뒤에 붙어서 나를 견제하고 있어요.”
“주주, 제정신이야? 이렇게 어린… 심지어 남자애도 아닌 여자애한테… 내가 흑심을 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공중을 휘저으며 쏘아붙이자 재밌다는 듯 웃어 보인 이토가 내 앞에 오마모리 하나를 내밀었다. 그즈음 방치된 랜턴을 찾아 불을 켠 나는 교통안전이라고 새겨진 자수를 백색 빛에 유심히 비춰 보았다. 열어 봐요. 이토가 속삭인다. 매듭을 연 나는 그 안에 꼬깃하게 접혀 들어간 이토의 사진을 보았다. 정확히는 짙은 화장의 이토와 온몸을 문신으로 점철한 남자의 사진… 창백한 낯에 빼빼 마른 데에다 음울해 보이는 현재와 같은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기 넘치는 외관이었다. 이토 씨? 사진을 들여다보던 내가 물었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이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으로서 상상하기 어려울지는 몰라도, 미이 사실 엄청 양키였어서. 고등학교 다닐 때는 우리 마을에서 알아주는 폭주족 주장이랑도 사귀었었어요. 료헤이, 라고 하는 남자애인데. 제 인생 마지막 남자친구거든요.”
“헤에… 양키였구나. 전혀 몰랐어요.”
“료헤이는 지금 없어요. 그게 제가 여기 들어와 있는 이유.”
“응? 귀신을 봐서가 아니라?”
“그건 양키 전에도 종종 봤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료헤이 말인데요. 미이랑 같이 바이크 타고 드라이브하다가, 화물 트럭에 치여서 그만… 죽어 버렸어요. 그때 헬멧이 하나뿐이었어서, 자기 헬멧을 저한테 줬거든요. 여자애는 보호하는 게 당연하다! 뭐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정말 저를 보호해 주고… 가 버렸어요.”
“…….”
“료헤이는 죽었고, 저는 살았고. 저는 그래도 료헤이가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거야! 하면서 회복한 이후에는 나름대로 잘 살았는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부터 료헤이가 제 방에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
“미이는 언제나 료 군이라고 부르는데요. 하루는 자고 있었는데 료 군이, 미이, 일어나! 네가 기다리던 료 군이 왔어! 그렇게 외치는 거예요. 꿈인 줄 알고 대꾸를 안 했더니 저를 돌려세웠고. 근데… 신기한 점이. 만졌을 때 닿는 촉감이나 목소리나 전부 료 군인데. 안대를 씌우고 자기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게 하더라고요.”
“……”
“물어보니까 약속이 돼 있대요. 미이도 그런 기운 있으니까 잘 알지 않냐고, 자기 모습을 보고 싶으면 자기랑 결혼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러면서 끈질기게. 자꾸 결혼하자고.”
“결혼, 했어요?”
“……”
“……”
“료 군, 지금도 미이 옆에 있어.”
“…….”
“미이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어요. 노는 거 좋아하고 친구도 많았는데. 료 군 때문에 전부 끝나 버렸어… 료 군이 진짜 미이를 죽인 거예요.”
“……”
“그래도 결혼했으니까, 료 군이랑은 평생 함께야. 아하하… 미이는 료 군 거야. 그치?”
“……”
“그렇지만 이샹 씨는 더 자유롭게……”
밝게 빛나던 랜턴이 한순간에 점멸한다. 뭐야. 당황한 내가 스위치를 만지는 동시에, 굳게 닫아둔 철문을 누군가 거칠게 두들긴다. 뒷목에 무더운 여름답지 않은 오한이 끼친다. 숨을 들이 삼킨 나는 경직되고 말았다. 비명을 지른 이토가 내 품으로 달려든다.
“료 군, 료 군이다! 미이를 데리러 온 거야! 미이를!”
나는 그녀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패닉에 빠진 이토는 통제할 수가 없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고. 매서운 노크 소리는 수 분간 이어지다, 이윽고 문이 벌컥 열렸다. 으악! 눈을 질끈 감은 나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려 빛이 새어 나오는 복도를 내다보았을 때엔, 스이미 씨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니콜라스… 너… 이토 씨랑 뭐 하고 있던 거야?”
입술을 벌린 그가 황망한 어투로 주억거린다. 온몸에 팽배하던 한기가 가시는 것과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기립한다. 창고 안으로 침입한 스이미는 과호흡으로 헐떡이던 이토를 일으켜 세웠다. 나를 한심하다는 듯 흘겨본 그가 명령한다. 나가서 베드나 정리해. 멍하니 창고를 나선 나는 그렇게 했고. 이토를 잠재우고 돌아온 스이미는 나를 이끌고 다시 차지실로 향했다. 문을 걸어잠근 그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어깨를 우선 두들겨 주었다. 이토 씨랑 뭐 하고 있었는지만 솔직하게 말해 봐. 솔직하게 말해 보라고 해 봤자 정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허술한 답변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상담할 게 있어서…”
“정신병동 보호사가, 환자한테 상담할 게 있어?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하아… 내가 보기엔 넌 지금 복직할 타이밍이 전혀 아니야. 아니어도 한참 아니야.”
“……”
“예전엔 이런 문제로 구설수 한번 없었잖아. 환자들이며 선생님들한테 싹싹하게 잘하고.”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 니콜라스. 이거.”
애처로운 눈빛으로 다가온 그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정신과 전문의의 이름과 연락처가 새겨져 있었다.
“진지하게, 상담 한 번 받아 봐. 너를 헐뜯을 의도로 하는 말이 전혀 아닌 거 알지. 그냥 업계 종사자로서, 지금 네 상태가 너무 걱정돼.”
“……”
“머리 좀 식히고 와. 남은 일은 내가 전부 끝낼 테니까, 데스크 돌아와서 차트 작성한 다음에 퇴근해 보고.”
“네. 감사합니다.”
“원래의 긍정적인 니콜라스로 돌아왔으면 좋겠어.”
나를 다독여준 그는 그대로 차지실을 나섰고. 깔끔한 폰트로 기입된 이름을 몇 번이고 되새긴 나는 또다시 무력감에 침범당했다. 구석에 위치한 의자에 착석해 편두통을 식히다가도,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스이미 씨는 내가 원래의 니콜라스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지금의 나도 원래의 니콜라스다. 나는 필연적으로 나를 손상시킬 수밖에 없는 사건을 맞았고. 그 파동이 나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 낸 것뿐이다.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이 상태일 것이다. 영원히, 영구히. 의주에게 시달리며.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인 채로 살아갈 것이다.
쫓겨나듯 퇴근했다. 고된 몸을 씻고, 해가 뜨기 시작한 도심을 내다보다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모르겠다. 그때만큼은 의주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보고 싶었다. 료헤이가 이토 씨를 지켰듯 의주도 나를 지켰다. 앞에서부터 돌진하는 차를 보았다면 대개의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핸들을 자신의 쪽으로 꺾어, 교통사고의 사상자는 대부분 조수석에 탑승한 사람이다. 그런데 변의주 씨는 그러지 않았단 말이죠. 오히려 당신을 보호하는 것처럼 운전석을 차 앞에 위치시켰어… 심각한 피해를 입을 거라고 분명 직감했을 텐데도. 사건을 브리핑하던 형사가 무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었다. 의주가 나를 의식적으로 보호했다는 사실이 그를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의주를 사랑했고. 죽어서도 내 곁에 있는 그가 애처로웠으며. 동시에 의주가 없는 텅 빈 도쿄가 전가한 쓸모없는 생존욕에는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의미가 없어.
살고는 싶지만, 살 의미가 없어.
그러면 죽어야 하잖아!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방 귀퉁이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강아지를 조심스레 치켜올렸다. 주주. 그에게 말을 걸어 보았지만 통통한 눈꺼풀을 끔뻑거리던 강아지는 다시 잠들어 버렸다.
“주주, 일어나 봐.”
“……”
“나 결심했어. 나 이제…”
“……”
“나 주주랑 결혼할래. 너랑 평생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
강아지는 끝까지 깨어나지 않았다. 그 조그만 육체에 의주가 수육되어 내 앞에 나타나는 일도 없었다. 의주가 내게 질려 버린 줄 알고 조금 흐느끼던 나는 강아지 곁의 찬 바닥에서 그대로 잠들었고, 깨어났을 때엔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눕혀져 있었다. 나를 이곳까지 운반해 준 이의 신상이 너무나도 명확하다. 무슨 짓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애정이란 참 힘들구나. 나는 조금 웃어버렸다.
일어나서는 스이미가 조달한 명함을 불에 태웠고, 먹고 싶었던 음식을 배달해 먹었다. 생각해 보면 의주가 죽은 이후에도 밥은 잘 먹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살이 왜 이렇게 빠졌을까. 그 후로 누워서 틱톡을 보거나 다시 잠에 들거나 티브이를 볼 때도 의주가 나타나는 일은 없어서, 나는 아주 심심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이 나 인터넷에 영혼결혼식의 절차를 공연히 검색해 보았다가, 인간 대 인간의 결혼식도 모르는 주제에 이걸 왜 보나 싶어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결혼이라는 행위 자체가 내게 기묘한 환희를 가져다주었는데. 왜냐하면 나는 언젠가부터 결혼을 포기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단코 연애를 못 해서 자기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나를 거쳐 간 연인들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며, 사랑하지 못하고, 그런 주제에 속박하려 든다는 경험 바탕의 딜레마를 고수해 왔고, 그 악의적인 사상은 시간이 지나고 타인과의 만남과 결합이 거듭될수록 견고해졌다. 이런 생각을 하는 주제에 법률적으로 누군가에게 속박될 수 있을 리 없지.
그래도… 아주 가끔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식을 올리는 상상을 하곤 했다. 나는 색색의 빛이 투과한 엄숙한 스테인드글라스 앞에 기립한 채로 운명의 상대를 마주 본다. 그 사람의 얼굴은 페인트로 가려진 것처럼 얼룩덜룩하고, 턱시도를 입고 있는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지마저 묘연하다. 하지만 키스를 하고 부모님은 환희의 눈물을 흘리며 친구들의 박수갈채가 울려 퍼지니까, 상대의 얼굴은 아무래도 좋은 정도였다. 이 상상 나열의 가장 안타까운 점은 나의 경험 부족인데. 내게 결혼식에 가 본 경험이 거의 부재했기에 상상 속의 결혼식은 왜인지 당연하게도 DJ 부스가 설치되어 있으며 내가 커다란 단상 위에 올라가 신나게 춤을 추는 슈르한 장면으로 귀결되었다. 역시나 신원이 묘연한 DJ는 유이의 롤링스타와 린토시테시구레의 신곡을 리믹스한 기상천외한 노래를 교회풍의 결혼식장에 내놓는다. 끝.
“주주, 결혼식에 DJ 불러도 돼?”
그건 좀… 하고 말끝을 흐리는 의주의 목소리가 왜인지 환청처럼 들려온다. 허공을 향해 웃어 보인 나는 소파에 기대 잠들어 버리고 말았고. 눈을 떴을 때엔 또다시 눈가를 두른 천의 압박감과 동시에 어깨를 감싸 안은 팔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의주가 나타났음을 감지한 나는 황급히 상체를 세운 후. 무거운 눈꺼풀을 움직이며 물었다.
“…… 언제부터 있었어?”
“응? 난 계속…”
“그게 아니라, 언제부터 이 모습이었냐고.”
“…… 너 깨기 삼십 분 전부터.”
“안 심심했어?”
“안 심심했어.”
“그동안 뭐 했는데.”
“너만… 보고 있었지. 그냥.”
나는 장난을 칠 생각이었다. 생각해 봤는데, 결혼식에 DJ 부르게 해 주면 결혼해 줄게. 그렇게 말하고, 언제나처럼 의주의 고요한 웃음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그를 대면하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언어적 표현보다 신체적 표현이 낫다는 판단하에, 나는 먼저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의주의 몸은 쉽게 내게로 끌려온다. 나는 등을 두른 팔에 힘을 주어 그를 구속하다시피 안았고. 언제나 그랬듯 조금 높이 위치한 귓가에 속삭였다.
“계속 나만 보고 있었어?”
“응.”
“계속계속 나만 보고 있었지? 그렇지?”
“응… 계속 니콜라스만 보고 있었어.”
“……”
“…… 니콜라스, 어제는 내가…”
“나 의주가 너무 좋아.”
“……”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 내가 널 두고 어떻게 혼자 살아.”
“……”
“어떻게 의주를 두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길거리를 걷고, 혼자 웃을 수가 있어. 내가 어떻게 그래.”
“……”
“결혼하자. 많이 좋아해.”
“…… 그래. 고마워.”
“얼굴도 보여 줄 거지? 결혼하면.”
“응. 당연하지.”
“다행이다… 주주 얼굴 보고 싶었어. 이토 씨만 보는 건 너무해. 나도 보고 싶단 말이야.”
“……”
“이젠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네.”
의주는 반사적으로 웃어 보였지만 아주 기쁘지는 않아 보였다. 당연한 건가. 내가 힘없이 피식대고 있을 때. 조심스레 맞붙은 상체를 분리한 그가 내 손을 붙잡고는 주억거렸다. 줄 게 있어. 잠깐 방에 들어갔다 올게. 그리고는 거실을 훌쩍 떠나 내가 필사적으로 비가시화했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자코 그를 기다릴 뿐이었다. 원래의 자리로 다시 회귀한 의주는 그사이 침체된 내 기분을 헤아리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방이 깨끗하더라. 안 들어갔어? 나 그렇게 되고 나서부터…”
“응.”
“…… 왜?”
“그냥. 들어가면 죽고 싶어질 것 같아서…”
안대를 착용하고 있음에도 의주의 표정이 면밀히 읽힌다. 그는 입술을 약간 벌린, 애틋함과 황당함이 혼재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을 테다. 나를 서툴게 위로하듯 손을 뻗어 내 손가락을 어루만진 의주가 덧붙인다.
“니콜라스…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는데.”
“그래?”
“엄청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나 같은 건 금방 털어 버리고 잘 살 줄 알았어.”
“몰라. 약해졌나 봐.”
“걱정돼.”
“그래서 데리러 온 거야? 옆에 두고 계속 돌봐주려고?”
“…… 미안. 나 이기적이지.”
“응. 이기적이야. 엄청!”
“미안해…”
습관적으로 사죄한 그가 협탁에 조그마한 물체를 달그락거리며 두는 소음이 들린다. 이제 나는 갈 테니까, 이거 꼭 확인해 줘. 고개를 치켜든 나는 가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조금 더 오래 있어 달라고. 왜 언제나 네 마음 내킬 때 마음대로 왔다가 사라지는 거냐고. 그러나 입술을 달싹거렸을 때엔 이미 의주는 모습을 감춘 후였다. 강아지가 내 손을 핥는다. 나는 안대를 벗고, 그가 협탁에 둔 물체를 바라보았다. 정사각형의 조그만 케이스로, 뚜껑을 젖히자 반지 두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광채를 직면하는 순간, 할 말을 잃은 나는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짧은 팔다리를 협탁에 뻗어 낑낑거리던 강아지가 케이스 아래 깔린 쪽지를 끄집어냈다. 역시나 전문이 히라가나로 적혀 있었고. 근래에 작성된 것으로 보였다.
좋아해. 미리 주지 못해서 미안.
이런 걸 샀으면 끼워 주기라도 하지…
내가 손쓸 수 없는 상태에 한탄하며 우는 행위에는 이골이 난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울고 말았다. 울면서도 내 자신에 대한 한심함을 주체할 수가 없다. 나는 이 이상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약해질 바엔 차라리 망가졌으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다음 날 출근한 나는 이토 씨가 밤사이 성대한 액팅 아웃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최악이다. 이제는 더 나빠질 상황도 없다. 나를 보호하려는 목적인지 의외로 밤사이의 밀회를 보고하지 않은 스이미 씨 덕에 내 기행이 다른 동료들에게 질책당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토와 나의 동질감에 대해서는 우리만 안다는 뜻이다. 나는 유니폼으로 환복하는 즉시 그녀의 방에 들렀고. 맥없이 누워 있는 이토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던 이토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핏기가 가신 손바닥에는 료헤이의 사진이 담긴 푸른 오마모리가 동아줄처럼 쥐어져 있었다.
4
대학생 시절 얘기를 꺼내 볼까 한다. 나는 그의 일본어 선생 자격으로 취임했다. 같은 외국인이고 동갑이니까, 일본어 많이 가르쳐 줘. 표현 그대로, 캠퍼스에서 포획해 온 의주를 부원들에게 인사시키던 동아리 선배가 말했고. 아니 난 외국인인데… 제가요? 내가 반문한다. 진지하게 내뱉은 말이었으나 웃어넘긴 선배들이 너 일본어 잘한다며 치켜올려 줬고. 우리의 대화를 열심히 해석하는 듯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의주는 발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치켜 올라간 입꼬리와 볼살이 귀여웠다. 나는 그때부터 빌린 고양이처럼 앉아만 있는 커다란 남자애를 아주 신경 쓰게 되었다. 연애의 시초는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일상적이었다. 함께 소란한 신주쿠 번화가를 걷다가 내가 먼저 그에게 고백했고. 그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다. 나는 그러라고 했다. 고백의 답장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도착했는데. 의주는 술을 마신 듯이 알딸딸한 목소리로 연거푸 자냐고 물었고, 당시 고백을 망쳤다는 생각에 기민해져 있던 나는 네 전화 받은 거면 안 자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조금 짜증을 내 버렸다. 한참이나 침묵하던 의주가 답했다. 지금 만나러 가도 돼?
“왜?”
“그냥… 보고 싶어서.”
보고 싶다.
그리고 이 간결한 어절이 지하에 처박힌 내 기분을 다시 끄집어 올려 주었다. 의주가 완곡하게, 네 고백이 망한 게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당연히 반색하며 얼마든지 날 보러 와도 된다고, 지금 생각하면 조금 부담스러울 만치 그를 환대했고. 이십 분 후 의주가 내 자취방 앞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 앞의 어린이 놀이터를 빙빙 돌며 대화를 나눴다. 술 마셨어? 나는 물었고. 의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왜? 많이 마셨어?”
“과 회식이야. 안 가려고 했는데, 다들 오라고 해서.”
“많이 마셨구나.”
“나 원래 잘 안 취하는데.”
“그래? 의외네. 주주 술 엄청 못 먹을 것처럼 생겼는데.”
“너보단 잘 먹거든.”
“나도 마실 땐 잘 마셔!”
“아니야… 안 돼. 술 많이 마시지 마.”
“…… 왜?”
“너 술 마시면 귀여워지잖아… 그러니까 마시지 마.”
헉. 달갑지 않은 간질거림에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선 나는 가만히 의주를 노려보았다. 붉어진 얼굴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멋쩍게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참지 못한 나는 의주를 놀이터 구석으로 마구 밀어냈다. 의주는 내가 미는 대로 밀려나 주었고. 그의 앞을 막아선 나는 결연한 어투로 말했다. 손잡아도 돼?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의주가 먼저 팔을 뻗어 내 손을 쥐어왔다. 처음 잡아 보는 의주의 손은 아주 따뜻했다. 손이 맞닿자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이성마저 전부 끊어지고 말았다. 그에게로 더더욱 상체를 가까이 붙인 난 요구했다.
“츄 해도 돼?”
“어느 정도의… 츄인데?”
“이정도.”
어린애 같은 뽀뽀였다. 고개 숙인 나는 그의 알코올 향 나는 입술에 내 입술을 짧게 맞부딪혔고, 입술이 떨어져 나가는 즉시 몽롱한 얼굴의 의주가 느릿하게 말한다.
“더 해도 돼.”
“더?”
“더 심한 츄…”
응? 반문하는 즉시, 내 허리를 감싸안은 그가 키스한다. 분명 키스할 거라고 직감했는데도, 왜 이렇게 놀라울까. 변의주가 내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 후 의주와 교제하는 2년간은 눈물이 날 정도로 즐거웠다. 의주가 싫어졌거나 마음이 식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의주또한 그런 적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 우리를 떨어뜨려 놓은 것은 나와 그가 무슨 수를 쓰든 해결되지 않는 고착화 된 문제였다. 그의 교환 학생 기간이 끝날 즈음부터는 매일같이 싸웠으나, 귀국까지 머지 않았을 때엔 오히려 모든 것을 포기한 나머지 싸우는 것마저 그만둘 수 있었다. 나는 의주를 순순히 보내 주기로 마음먹었고. 우리는 대외적으로 헤어진 상태가 되었다. 많이 울었다. 좁은 자취방에서 숨죽여 우는 날이면 한숨을 내쉬고 상체를 일으킨 의주의 손바닥이 내 뒤통수부터 등허리까지를 어루만져 주었고, 그의 손길에 안주한 나는 비로소 잠들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음 날의 태양을 두려워했다. 앞으로 조금이면 의주가 사라진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잠에 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가 귀국하는 날, 나는 수업을 빼먹으면서까지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 주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손을 잡아 보고, 얼굴을 만지면서. 이 감각을 평생 기억하자고 마음먹었다. 도착하면 연락해. 힘없이 발화된 내 말에 의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 근방을 안절부절못하지 못하고 돌아다니던 나는, 종내엔 걸어가는 그를 붙잡고 크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나 없이 잘 살 수 있어?”
의주의 동공이 미끄러진다. 아래를 내다보며 머뭇거리던 그는, 내가 이전까지 본 적 없는 견고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어 도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모르겠어. 일단은… 견뎌 봐야지.”
“…… 나 잊어버리면 안 돼.”
“응. 절대 안 잊어버려.”
“의주!”
“응?”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 줘.”
나를 쳐다보는 의주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는 슬픔으로 변질된다. 캐리어의 손잡이를 탁 놓아 버린 그가 내게로 달려왔다. 팔을 활짝 벌려 있는 힘껏 나를 끌어안아 준 의주는 속삭였다. 마지막 아니야. 다음에 일본 오면 또 안아 줄게. 많이 안아 줄게… 결국 난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자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의주가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 연락을 주고받자고 했으나 연락의 텀이 점점 길어지면서 결국엔 아예 연락을 하지 않는 날들이 생겨났다. 그 공백은 점차 몸집을 부풀려 한 달, 일 년, 삼 년이 되었고. 정신 차려 보니 나는 그의 근황을 전혀 모르는 무지의 상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이 너무 바빠서 그런가? 생각보다는 연락의 공백이 아주 슬프지는 않았다. 나는 평범하게 다른 사람과 교제했고, 헤어졌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났다. 다만 의주는 내가 진심을 다해 사랑한 유일한 상대다. 그런 상대는 평범하게 일상을 영위하다가도 아무런 언질 없이 내 뇌 내를 침범한다. 그리고는 한나절 내내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마땅한 행위가 배제된, 그 존재 자체로도 말이다. 그리고 내 전언대로 나를 전혀 잊지 않은 의주는 나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고작 2년간 재미 삼아 체류했던 외국을, 내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주거지로 삼았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가 애인도 친구도 아닌 상태로 복귀해서야 그가 내게 지닌 사랑의 크기를 깨달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의주가 나만큼이나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오해에 봉착해 있었고, 그가 그 오해를 해명하지 않은 채로 떠나는 바람에 심화한 생각이 나를 수시로 푹푹 찔렀다. 의주는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나를 가로질러 왔다가, 나를 잘게 난도질하고는 떠난다. 내 몸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새기고 사라진다. 더 오래 알아가고 싶었는데. 내가 없는 동안 한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면밀히 알고 싶었는데. 의주의 전부를 알고 싶었는데…
그러니까 따라갈게.
원활히 소통되는 세계에서 너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
나는 누워 있는 이토의 상체를 조심히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혼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고. 나는 쪼그려 앉아 이토와 시선을 맞추고 선언했다.
“나 오늘 새벽에, 주주랑 결혼할 거예요.”
“……”
“하객으로 와 줄래?”
“음… 그때 안 자고 있으면. 근데 미이는 여기서 못 나가잖아요. 환자라서.”
“여기서 할 거야. 이토 씨가 봐주면 좋겠어서.”
“이샹 씨 인생도 끝이구나…”
“……”
“여기 입원만 하지 마요. 기분 이상할 것 같아요…”
“…… 난 입원해도 대만 정신병원에 입원하지 않을까?”
“듣고 보니 그렇네. 똑똑하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닫고 복도로 나섰고. 문간에 서 있던 스이미 씨가 거칠게 벽을 두들기며 내 시선을 돌렸다. 그가 차가운 어조로 읊조린다. 꿀 발라 놨냐? 이토 씨 병실에 들락날락하고. 누누이 말하지만 환자랑 사귀는 건 안 돼! 나는 차마 황당하다는 표정을 갈무리하지도 못했다. 정도를 넘은 황당함에 드물게도 삐딱한 어투로 답해 버리고 말았다.
“제가 진지하게 이토 씨한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뭐… 너무 어린애긴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일 일절 없으니까. 스이미 씨야말로 이토 씨한테 관심 있어요? 계속 여기만 쳐다보고 있고.”
“뭐라고? 너 내가 아무리 편해도 그렇지, 직장에서 말투가…”
앗. 벽에 머리를 콩 박은 스이미가 얼얼한 이마를 마구 문지른다. 모로 보아도 부자연스러운 타박상이었다. 주주 장난이 참 심해졌단 말이지… 선배로부터 등을 돌린 나는 통쾌함에 소리죽여 웃었다.
그 후 조금의 편법을 이용해 강아지를 병원 옥상에 묶어두었다. 복도를 지나치지 않고 층계참만을 이용해 오르는 데에 시간이 꽤나 걸렸지만… 퇴근 후, 나는 병원 밖으로 나가는 대신 옥상으로 향했다. 문을 여는 즉시, 보란 듯이 병실 탈출에 성공한 이토가 내게 활발한 브이를 내보였다. 예이. 그녀가 속삭인다. 예이. 나 또한 그녀의 말을 따라 했다. 오랜만에 맞는 바깥 공기에 깔깔 웃던 그녀는 곧장 담배를 꺼내 들었고. 나는 그녀의 흡연을 만류하지 않았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주황빛의 불티와 담뱃재가 이리저리 흩날린다. 하체를 움직여 내가 착석할 자리를 만들어 준 이토가 묻는다.
“후회 안 해요?”
“안 해. 이토 씨도 살아는 있잖아?”
“…… 응. 미이는 살아 있어요.”
“나도… 살아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아. 그렇게 생각이 바뀌었어.”
“주주 씨가 너무 좋으니까?”
“응.”
“미이도 료 군이 너무 좋아서 결혼해 버렸어요. 지금도 너무너무 좋아.”
“……”
“료 군, 얼굴도 귀엽고 잘생겼어.”
“응. 그렇더라.”
“그런데 주주 씨는 별로 기뻐 보이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는데…”
“…… 뭐?”
“료 군은 엄청 좋아했는데. 아, 잠시만! 어디 간다!”
“뭐? 주주, 어디 가는 거야! 내가 여기 있는데!”
“이샹 씨! 안대 써요.”
이토가 허겁지겁 내 눈 위로 안대를 뒤집어씌웠다. 잠깐만, 이토 씨는 안 해도 돼? 다급히 묻자 그녀가 태연한 목소리로 답한다. 네에. 미이는 손으로 가리고 있을래요. 손으로 가리고 있겠다는 말은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윽고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와아… 이토가 감탄한다.
“키가 엄청 크시네요.”
“감사합니다… 근데 누구시죠…”
안 본다면서. 손으로 눈 가린다면서? 나는 그렇게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의주를 호명했다. 의주, 멋대로 불러서 미안. 근데 나 어떻게든 지금 결혼하고 싶어서…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내 멱살을 틀어쥔 의주가 소리친다.
“정신 차려, 니콜라스!”
“…… 뭐?”
“정신 좀 차려.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뭐? 아니, 도대체…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 건데…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거야?”
갑자기 훈계질하고 싶은 기분이라도 든 거야? 내 비아냥을 흘려들은 의주가 옷자락을 쥔 손을 고쳐잡는다. 꺄아! 이토는 영문 모를 추임새를 넣었다.
“함부로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마. 왜 그러는 거야, 속상하게!”
“…… 너 때문이잖아.”
“뭐?”
“네가 안 죽었으면 내가 이런 생각 안 해도 되잖아? 다 네 탓이잖아.”
“그건……”
“너도 날 그냥 죽여 버리고 같이 있을 생각으로 결혼하자고 한 거지? 나 이토 씨한테 다 들었거든? 이토 씨도 그런 사람이야! 이 바보야!”
“맞아요. 미이는 료 군이랑 결혼해서, 료 군이랑 평생 함께하기로 했어요.”
“처음엔 그랬지. 그런데… 도저히 못 하겠어. 못 하겠다고.”
“나랑 결혼을 안 하겠다는 거야?”
“안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 안 해! 아니, 못 해!”
씩씩거리던 의주가 불현듯 내 안대 위로 손을 얹었다. 아. 탄식하는 것과 동시에, 천이 벗겨진다. 그리고 의주가. 내 눈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얼굴은 애처롭게 일그러져 있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싫어. 네가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도 이렇게 망가진 게 더 싫어.”
“……”
“예전처럼 자주 웃어 줘.”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웃냐고… 어떻게 전처럼 돌아가? 네가…”
“그래, 내가 없으니까 힘들겠지. 다 알아.”
“……”
“그러니까 이제 포기할 거야. 나 없이 잘 살 수 있게, 보내 줄 거야.”
“……”
“내가 뭐라고 네 인생을 망쳐…”
부탁이야, 니콜라스.
제발 나만큼이나 네 자신을 다시 사랑해 줘.
돌변한 의주의 태도에 나는 잠시 아연해졌다. 온몸을 비틀어 그의 포옹에서부터 빠져나갔고, 자리에서 기립했다. 갈 길을 잃은 손바닥을 쥐었다 펼친 의주는 한숨을 내쉬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울대가 울렁거린다. 그가 내 어깨 위로 손을 얹었고. 나는 그의 손길을 매섭게 뿌리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일갈하자 의주의 표정은 더더욱 짙은 절망에 침식당했다.
“항상 네 마음대로네. 살고 싶을 땐 죽이려 들고, 죽고 싶을 땐 살리려 들고…”
“……”
“이기적이야. 나한테 바뀌었다고 훈계하지 마! 너도 바뀌었어! 엄청, 완전 이상해졌다고. 너 완전 미쳤다고! 내가 너를 위해 같이 죽어 주겠다잖아! 같이 있어 주겠다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싫다고 해? 내가 싫어?”
“싫을 리가 없잖아…”
“그럴 거면 찾아오지나 말지. 맨날 그렇게 우유부단하게…”
“네가 이렇게… 이렇게까지 힘들어할 줄 몰랐어. 미안해.”
“뭐?”
“네가 날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어. 솔직히, 금방 새로운 남자랑 사귈 줄 알아서… 나는 그냥 그게 너무 싫어서…”
대체 뭐라는 거야! 미친 거 아니야?
참지 못한 나는 의주의 멱살을 틀어쥐고 말았다. 으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낸 의주의 허리가 내 힘을 따라 아래로 꺾인다.
“내가 널 왜 안 좋아하냐고! 이 나이 먹고 이런 문제로 너랑 싸워야 돼?”
“아니, 니콜라스. 오해야. 그런 게 아니라…”
“너랑 그냥 헤어진 것도 아니고, 네가 죽었는데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냐고…”
“……”
“난 이제 못해.”
“……”
“난 이제 평생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할 거야. 사랑해서도 안 되고. 그런 인간이 돼 버렸어.”
“…… 그러니까, 나랑은 더더욱 헤어져야 하는 거야.”
“……”
“그렇지만 영원히 헤어지는 건 아냐.”
“그렇겠지. 내가 죽으면 언젠가…”
“그런 뜻이 아니라고.”
“그럼?”
“난 네가 더 강해지면 다시 찾아올 거야. 무조건.”
“……”
“네가 나를 이겨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을 때. 다시 나타나서 너를 뺏어 버릴 거야.”
“……”
“그때쯤이면 넌 그 사람 덕분에 많이 웃었을 거 아니야. 내가 모르는 재밌는 일도 많이 겪었겠지. 그래야 안심하고 너한테 갈 수 있어.”
“누가 뺏겨 준대?”
“뺏겨 줄 거잖아.”
“……”
“니콜라스. 우리는 약혼한 상태인 거야.”
“……”
“그러니까, 결혼할 때까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잔뜩 사랑하는 연습을 해. 길 건너 단골 카페에서 딸기 라떼도 사 먹고, 밥도 많이 먹어. 가끔은 산책을 나가거나 모르는 사람이랑 농구도 해 봐.”
“……”
“환자들이랑 웃으면서 대화도 나누고, 선배 간호사들한테 커피도 돌리고. 연락이 끊긴 대학교 동창들한테 한 번씩 안부 문자도 해 보고, 친구랑 같이 놀러 나가 봐. 좋아하는 영화도 한 편씩 챙겨 보고.”
“……”
“나는 그거면 돼. 내가 너무 주제넘은 생각을 했던 거야. 이제 정말 그거면 될 것 같아…”
재회했을 때엔 내가 평생 자기를 되새기며 괴로워했으면 좋겠다던 의주가, 이제는 내가 괴로워하는 게 싫어서. 내가 본래의 삶을 영위했으면 해서. 나를 스스로 놓아주려고 한다. 나는 그의 옷깃을 틀어쥔 손에서부터 힘을 빼 버렸다. 그제야 접힌 허리를 간신히 들어 올린 의주가 내게로 팔을 활짝 벌리고 섰다. 한 번만 안아 줘. 의주답지 않게 당당한 어조로 요구한다. 실없이 웃어 버린 나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언제나 그랬듯 판판한 등에 팔을 감아, 빈틈 하나 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안길 때면 상체 전체를 뒤덮는 온기와 전가되는 그의 심장박동이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온기가 없다. 활기차게 움직이는 심음도… 마지막인 거야?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애써 억제한 나는 그의 뾰족한 어깨에 얼굴을 묻고 물었다. 마지막 아니야. 의주가 단호한 어조로 나를 다독여 주었다.
“다시 만나게 되면 또 안아 줄게.”
“많이 안아 줄 거야?”
“응. 많이 안아 줄게.”
“그때쯤이면 강아지도 많이 자랐겠다…”
“니콜라스도 많이 자랐을 거야.”
“……”
“많이 사랑해. 앞으로도 평생 사랑할 거야.”
“나도…”
“계속 옆에 있을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 계속 옆에서 스이미 씨 때리고.”
“응. 스이미 씨 때리고.”
“샤워하고 있는 내 몸 훔쳐보면서, 내 옆에 있을 거지?”
“뭐? 그런 건… 안 봐…”
“봐도 돼.”
“안 본다니까… 그것보다 이거.”
반지를 꺼낸 그가 내 손을 조심스레 쥐어온다. 방황하던 그는 왼손 약지 대신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고. 나는 잠시 오른손을 들어 반지가 위치한 약지를 들여다보았다. 애틋한 표정으로 접근한 그는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내 두 눈을 가린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키스했다. 우리의 첫 키스를 연상시키는 짤막한 키스였다.
“이제 가 볼게. 잘 지내.”
“……”
“행복하게 살아야 해.”
“행복하게 살게. 네가 금방이라도 다시 올 수 있게.”
“내 얼굴 안 봐줘서 고마워. 안대 불편했지?”
“촛농이 네 어깨로 떨어져서, 아파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사실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보지 말라고 한 거지만…”
“뭐?”
“좀 부끄러웠어. 그리고 누가 이러는 게 좋다고 해서…”
“아니, 도대체 누가?”
“료헤이 군이. 잘 있어, 니콜라스. 아, 강아지도 잘 키워 줘. 내가 보기엔 사료를 조금 더 영양가 있는 걸로 바꿔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인터넷으로 봤는데 이제 슬슬 배변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료, 료헤이? 료 군? 그런 카르텔이 있는 거야? 아니, 마지막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어디 있는데?”
“가 볼게.”
결국 의주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불친절한 소멸을 감행했고. 내 눈두덩이를 덮은 상냥한 감촉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층계참을 다급히 뛰어오르는 공허한 소리가 울렸다. 문을 걷어차다시피 개폐한 스이미 씨가 이쪽을 보고 고함을 질렀다. 니콜라스! 멍하니 앉아 있던 이토도 흠칫 놀랄 만큼의 거대한 데시벨이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가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너 이토 씨랑 대체 뭐 하냐니까? 내 멱살을 틀어쥐고는 험악한 어조로 소리쳤다. 환자 앞에서는 동료를 질책하지 않는다는 불문율까지 잊은 정도라면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고. 그럼에도 스이미 씨가 다른 보호사들보다도 나를 편애한다는 걸 아니까, 위기감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 딴청을 피우던 나는 그를 쳐다보며 발화했다.
“스이미 씨.”
“뭐?”
“전에 주신 명함, 한 장 더 받을 수 있을까요. 죄송해요. 잃어버려서…”
“…… 니콜라스, 너… 괜찮아?”
“괜찮아요.”
“……”
“진짜 괜찮아졌어요.”
“니콜라스… 아니, 아. 이게 문제가 아니라, 너 진짜!”
“이제야 더 제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
스이미 씨는 양껏 벌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분노로 붉으락푸르락 상기되어 있는 상태였고. 아무 말 없이 나를 쏘아보던 그는 우선 헤벌레 입을 벌리고 박수를 깔짝이는 이토를 일으켜 세웠다. 이토 씨를 대동해 옥상의 철문으로 향하면서 쏘아붙였다. 너 아래에서 다시 얘기해. 문이 폭력적으로 닫힌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여유롭게 철조망으로 몸을 돌린 나는 가만히 고요한 도쿄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인력난은 인력난인가 봐. 이렇게까지 해도 안 잘리네. 사실 잘려서도 안 되지만. 왜냐면 내게는 이제 적당히 고른 이 직업을 유지해야만 하는 사명이 생겼기 때문이다. 삶을 이어가야 할 이유를 되찾은 건 덤이다.
그러니까 언젠가 세인트 그레이스 성당에서 의주를 다시 마주할 때까지 살아 나가야만 한다. 무명의 개를 끌어안은 나는 병원 밖으로 나섰다. 혼자 걷는 것이, 두 다리로 자립해 있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웃으며 지나가는 행인이 밉지 않다. 멋대로 타인의 완연한 삶을 망상하며 그들의 상처받지 않는 견고한 일상을 질투하는 짓도 그만두었다. 망가진 내가 의주로 하여금 이룩한 첫 번째 발전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의주를 위해. 언젠가 원래의 나로 수복될 때까지 나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길 끄트머리에 서 있는 의주를 다시 만나. 그에게 잔뜩 안기고 싶었다. 더운 체온과 더불어 나와 닿을 때면 요란하게 증폭되는 심음을 느끼고 싶었다. 지금은 그뿐이다. 그러니까 살아남아야 한다. 아주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