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살 변의주의 일상은 단조롭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여덟시 반쯤엔 침대를 벗어났다. 더블사이즈 침대와 옷장, 데스크탑을 둘 책상 하나를 놓고 나면 여분 공간도 빠듯한 컴펙트한 자취방의 좋은 점은 남향으로 통창이 나있다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암막 커튼을 걷어내고 날씨를 체크했다. 들이치는 햇볕에 미간을 잠시 찌푸리고 뻐근한 어깨를 돌려가며 천천히 욕실로 향한다. 치약은 칫솔모의 반정도 짜면 딱 좋았다. 칫솔을 입에 물고 남는 손으로 턱 언저리를 더듬었다. 까끌한 인중까지 왕복하고 나면 역시나 면도를 건너뛰긴 어렵단 결론이 난다. 그렇게 물소리가 이어진다. 목에 수건을 걸고 젖은 앞머리를 살살 털며 전신 거울 앞에 서는 얼굴이 매끈했다. 저번 달 본가에 들렀을 때 뭐라도 찍어 바르고 살라고 누나가 들려보낸 스킨 로션 세트를 적당히 두들기고 머리를 대충 말려 정리하면 여기까지가 고정된 아침루틴이다. 빠릿하게 굴지도 않았는데 시계바늘은 직각이라기엔 아직 조금 부족했다. 침대에 널부러져 있는 폰을 뒤집어 확인하니 간밤에 동기 단톡방 알림이 쌓여있다. 남들보다 일년 늦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변의주는 새내기 딱지를 단 채다. 오전에 강의가 있는 날은 월화수목금 중 화요일 하루뿐이지만 의주는 어지간히 규칙적인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좋았다.
런닝화를 갈아신으며 밑창을 확인했다. 뒷꿈치가 금방 닳아버리는 것이 걷는 모양새가 썩 좋지 않나 싶지만 습관을 교정하는 건 쉽지 않다. 무릎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주는 게 감사할 뿐이라 조급하진 않았다. 그저 신발이 소모품이라는 것이 이렇게 확인된다. 땀 흡수가 잘된다는 스포츠 브랜드의 의류를 걸쳐도 집에 돌아올 쯤엔 푹 젖어버릴 것이다. 해가 길어진 요즘 오전 오후 할 거 없이 무더위였다. 의주는 조심히, 현관문을 열어젖힌다.
천사의 주식은 딸기
숚
걷고 뛰는 것, 다리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있어 중요한 건 리듬이다. 탁 탁 탁 탁. 반복적인 리듬이 중요하다. 영유아가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익히는 심장소리와도 같은 리듬은 말 그대로 맥박처럼 공기처럼 그 안의 산소처럼 당연한 것이 된다. 너무나 익숙해서 거기에 리듬이란 게 있다는 것도 보통 알지 못한다.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의주는 매일 아침 가볍게 몸을 풀고 오른쪽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손바닥으로 살살 눌러 마사지한 뒤 빠르게 걷는다. 탁 탁 탁 탁. 리듬을 준수하려는 노력이다. 무릎이 굽어지고 다시 펴지고 인대가 늘어났다가 조여지고 근육이 이완하고 수축하는 모든 단계에 집중했다. 러닝코스는 간단했다. 직선이 많은 산책로는 심어진 가로수 종류도 나열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앞을 보고 걸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연습에서 중요한 것은 리듬이다. 규칙적인 네박자를 놓치지 않고 보폭에 맞추어 발을 옮겨두는 것.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탁...
...
"니콜.."
뜻 모를 소리를 웅얼웅얼대며 뒤를 쫓는 이를 무시하고 러닝에 몰두하는 일은 작렬히 실패한다. 일부러 신경 쓰이라고 갖은 애를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의주는 그걸 재쳐두지 못한다. 타고난 성정이 그러했고 또 바짝 뒤를 쫓아 불만스럽게 중얼대는 녀석이 도저히 무시 못할 차림새를 하고 있어서 그랬다. 고개를 조금 돌리면 곧바로 시야에 들어차는 새빨간 머리는 정말이지...
의주 안녀엉-. 짤막한 인사를 필두로 현관문을 열자마자 들이닥친 얼굴을 밀어냈음에도 의주의 뒤를 졸졸 쫓는 녀석이었다. 오늘은 방해하지마. 단호하게 일갈하고 시작했어도 두둥실 떠서 귀언저리에 달라붙어 의주 느려-, 맨날 똑같은 곳만 걸으면 재밌어?, 아 심심해애, 의주 바보, 차라리 뛰어봐!, 오늘 너무 더운데, 나 날개에 밀랍이 다 녹을 것 같아!, 이게 운동이 돼?, 저- 기- 요- 변- 의- 주- 씨-, 의주 나 배고파- 등을 연발하는 존재는 변함이 없다. 끈질기고 유치하다. 의주는 덜컥 멈춰서서 이마와 턱끝에 달린 땀을 털어냈다. 목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훑으며 녀석을 본다. 기어코 원하는 바를 이뤄냈으면서도 여전히 불퉁한 얼굴 중인 니콜라스를. 어느 쪽도 시선을 피하지 않으니 대치 시간은 길어졌다. 의주는 스르륵 가까워지는 니콜라스를 좇다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 시간대 산책로에 사람이 없기에 망정이지. 누가 봤다면 왜 저래? 싶은 광경일 거다. 걷다가 덜렁 길 한가운데 우뚝 선채로 허공에 말을 하고, 그 어드메를 빤히 쳐다보는 이십대 남자라니. 눈 앞의 니콜라스는 새빨갛다. 태양볕을 반사하는 머리통에는 만화적 효과처럼 흰 띄 같은 게 보일 듯도 싶다. 이런 걸 엔젤링이라고 하던가.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찬란한 곡률을 응시하다 주변을 한번 훑고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의주는 이토록 선명하지만, 자신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존재를 이렇게 설명한다.
"야.. 넌 천사라는 게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고..."
"이거만 하면 딸기 사주겠다니까. 참....."
애물단지가 달리든 모르는 천사가 붙든, 의주는 어지간히 규칙적인 일상을 살아내는 게 좋았다. 원하는 만큼 사주겠다는 말을 뜯어낸 녀석은 기분이 좋아진 건지 적당한 멜로디를 흥얼대며 둥실 떠있다. 하루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발은 또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떠들지 않는 니콜라스는 정말 조용하다. 지면에서 조금 떠서 유영하듯 떠다니는 녀석은 다시금 뛰기 시작한 의주를 따라오며 빤히 지켜볼 뿐이다. 니콜라스는 발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람도 니콜라스를 스치지 못하고, 무엇과도 부딪히지 않고 단지 그곳에 존재한다. 변의주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채로. 새빨간 머리를 해서 차라리 다행이라 해야할까. 입을 꾹 다문 니콜라스도 그 존재감은 엄청나다. 의주의 성정이야 재쳐두고, 저 색감은 도저히 무시 못 한다. 몸이 기억하는 박자를 따라 발을 옮기다 그늘을 벗어나니 들이치는 햇볕이 따가웠다.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의주는 리듬을 지켜낸다. 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러던 의주의 시야에 대뜸 손바닥이 끼어든다. 뒤따르던 니콜라스가 어느새 곁에 있었다. 멈추지 않는 변의주의 속도에 맞추어 두둥실. 선행하는 거야, 선행. 나 천사잖아-. 입꼬리만 씰룩 올려웃는 우쭐한 얼굴이 동그란 시야에 애살스럽게 박혀온다. 의주는 웃었다. 그러면 눈썹을 한 번 들썩인 니콜라스도 웃는다. 뭐가 웃겨-? 작게 투덜대는 주제에 눈을 다 접고.
그 날은 수요일이었다. 니콜라스가 처음 변의주 앞에 천사라고 모습을 보인 날 말이다. 자취방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에 과일 장사하는 트럭은 일주일에 딱 한번 오기 때문에 틀림 없었다. 여느 때처럼 오전 러닝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의주는 어쩐지 골목 초입에 위치한 입간판에 커다랗게 걸린 꿀 사 과 세글자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의주는 망설였다. 바나나, 귤 같이 껍질만 까다 입에 넣으면 전부인 과일들은 왕왕 사두었지만 사과, 복숭아 같이 음식물 쓰레기가 꽤나 발생하는 과일들 잘 사지 않게 되었다. 혼자 살면서 귀찮은 것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인지, 어쩌면 꼭 그래야만 했던 것처럼, 슬금슬금 느려지던 다리가 결국에 평소와는 경로를 달리한 것이다. 과일 트럭 아저씨는 곧바로 호객 행위에 돌입했다. 사과? 사과 달지. 이번 사과는 유독 달아. 단면에 바로 꿀이 보인다니까. 괜히 꿀사과가 아니야. 학생, 한 조각 먹어볼텨? 네에. 하나 맛볼게요. 사장님 목청이 굉장하시네. 기세에 조금 질린 의주가 재빠르게 수긍했다. 사장님, 요새 사과 말고는 뭐가 잘 나가나요. 예의상 물었다. 정말 괜찮은 게 있다면 살 의향도 있었지만 거의 빈말에 가까웠다. 기껏 관심을 표했지만 정작 사장님은 뒤돌아 사과를 깎는 것에 열중이었기 때문에 공중에 산란해 묻힐 발화였다. 문제 될 게 없었다. 난 딸기가 좋은데-. 그런 목소리가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뭐라고요?.."
의주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싶게 가까운 거리에. 머리카락이 새빨간.. 그래 마치... 딸기-. 난 딸기가 좋아. 어어-? 잠깐. 너 내가 보여?
"네?"
이것은 변의주의 소리고.
"학생 뭐라고?"
이것은 과일 장사 아저씨의 소리고.
내가 들려-?
이것은 웬 새빨간 머리 남자의...
어느덧 조그만 다라이에 잘 깎인 사과를 들고 온 아저씨는 희한한 걸 보겠다는 듯 학생은 뭘 혼자 쭝얼쭝얼 거려? 했다. 시선은 의주에게로 고정이었다. 기계적으로 사과 조각을 집어먹으며 너 들리네? 들리잖아-. 왜 못 듣는 척 해-. 와 신기하다! 환청이라기에는 너무나 또렷하고, 말이 많고, 시끄러운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사장님은 정말 이게 안들리시는 모양이네요... 더 덧붙일 거 없이 의주는 사과 다섯 개를 구매했다. 골목을 빠져나와 한참을 걷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귀신이세요? 기다린 침묵 끝에 나온 단어에 한참을 따라오며 떠들어대던 녀석은 벙진 듯 입을 다물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와- 곧바로 귀신 취급이라니. 너 너무 웃기다-. 남자는 과장된 몸짓으로 깔깔 대다가 눈에 힘을 주어 시선에 응수했다. 웃을 때 접히던 표정근육과는 상이한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의주는 제 앞에 둥둥 떠서 종알대던 얼굴을 바라본다. 날렵한 턱이나 동그란 귓바퀴, 눈동자 아래 여백이 도드라지는 눈을 지나 새빨간 머리카락까지. 숨길 생각도 않고 뚫어져라 보았다. ...귀신이 아니야? 의주의 멍한 얼굴을 두고 녀석은 다시 웃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스라지는 분위기를 의주는 넋 놓고 되물었다. 아니야? 아니야-. 귀신이 아니라 천사! 축하해-. 넌 천사를 본 몇 안 되는 인간인 거야. 때마침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와 의주의 앞머리를 스쳤다. 삶으로 영화를 만든다면 가장 드라마틱한 연출을 주어야할 것 같은 순간이었다. 변의주가 천사를 줍게 된 사연이다. 또한 삽십분 쯤 뒤에 다시금 과일 트럭으로 돌아가 딸기 한 박스를 구입하게 된 원인이고. 귀찮다는 이유로 과일을 기피하던 이의 쓰레기 봉지에 딸기 꼭다리 비는 일이 없게 만든 당사자다. 녀석은 여전히 멍한 의주 주변을 빙빙 돌며 말했다. 내 이름은 니콜라스-. 잘 부탁해.
그렇게 스물한살 변의주의 단조로운 일상에 천사가 불쑥 머리통을 들이민다. 천사는 염치 없고 당당하게 빈자리를 채워갔다. 의주의 냉장고에는 어느덧 본가에서 받아온 반찬, 물과 우유 그리고 캔맥주 이외에도 딸기가 적어도 세 팩은 비축되어있다. 천사가 무슨.. 음식을 먹어. 그것도 사람 돈 뜯어다... 귀가 전 마트에 들러 구매한 딸기 박스를 정리하다 어이가 없어서 말하면 니콜라스는 되려 황당하다는 얼굴로 받아친다. 맛있잖아-! 그러면 기세를 잃는 건 이쪽이다. 하물며 하늘에서 온 상대가 만고불변의 법칙을 들이대면 할말을 잃게 된다. 흐르는 물에 딸기를 씻어서 가져다주면 식탁 근처에서 대기를 타던 천사가 광대를 씰룩이며 착석했다. 흐흐-. 꼭다리를 똑 떼서 능숙하게 입에 넣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의주로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착실히 오물대던 니콜라스가 사실-... 하고 코로 웃음을 참아가며 털어놓는 이야기에는 진짜로 좀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실은! 살아가는데 음식이 꼭 필요한 건 아니기는 해. 처음 지상에 내려왔을 때 좌표를 잘못 설정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실수로 딸기 하우스에 떨어져버려서. 실수로 입에 딸기 하나가 쏙 들어와버렸는데.. 너무 너무 너무 맛있었던 거 있지! 하하. 여기 내려왔을 때 먹어둬야해-. 위에는 이런 게 전혀 없거든. 의주가 착해서 나 참 다행이야.
뻔뻔한 고백을 끝으로 윙크가 쏟아진다. 다- 다- 의주 덕분이야! 고마워! 애교스럽게 입꼬리를 씰룩대는 꼴을 지켜보다 의주도 숨을 뱉어내며 크게 웃었다. 감정을 다 게워낼 듯 웃고 나면 분위기는 부드럽게 풀린다. 굵은 직선같은 시선이 내려온다. 모르겠지만 의주는 대상을 곧고 진득한 방식으로 본다. 니콜라스는 세상 만물을 자애롭게 사랑해야한다는 높으신 분의 말씀처럼 그 눈이 단박에 마음에 들었다. 까맣고 깊은 눈동자에 생각은 읽히지 않지만. 곧 천사가 될 존재는 대번에 알 수 있다. 분명히 좋은 사람이라는 거. 곁에 있으면 이곳에 내려온 이유를 깜빡 망각할 만큼. 의주가 좋은 사람이라, 정말 다행이야. 천사의 도움 같은 거- 하나도 필요 없을 거야 의주는. 훅 둘어온 문장이 간지러웠다. 찾아온 정적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꼭 천사의 목소리 같았다. 그래. 천사가 맞댔지. 식탁을 느리게 톡톡 두들기던 의주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말해도 오늘 딸기는 그게 끝이야 니콜."
뭐? 바보 같이 벌어진 입술로 시선이 떨어진다. 의주는 비워진 접시를 가지고 싱크대로 향했다.
에에-! 의주! 치사해-.
와. 정말 치사하다. 난 좋은 얘기 해주고 있었는데-!
그래서 천사를 줍게된 후로 변의주의 일상에 강 같은 평화가 찾아왔느냐고 하면 대답은 예상가다시피 '아니'. 오히려 성인이 되고 나서 이렇게까지 투닥여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이다. 너는 천사가 되어가지고... 같은 게 말버릇이 되었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난 아직 천사가 아니라니까-? 후보생 같은거야. 후보!
지 편할대로 천사라 자칭하면서 떨떠름하게 니가 진짜 천사라고? 되묻는 의주에게는 딱 잘라 No 라고 단언하던 녀석이다. 말하자면 테스트 중인 거야-. 정식으로 천사가 되기엔 아직이래. 후보생... 멍하니 읊조리는 의주의 앞에서 니콜라스는 속삭였다. 사실 시험 내용은 나도 잘 몰라. 명확한 지시도 없어. 후보생들마다 무얼 시험 받는지도 다 다르댔어. 금지되는 행동은 있지만 뭘 해야하는지는 미궁이란 말이지-. 신이 나서 떠드는 니콜라스를 바라보던 의주의 낯빛이 흐려졌다.
"너.. 이거 천기누설,"
아 니 라 니 까 - !
놉, 놉. 아니야. 의주 참 의심 많네-. 정말로 안되는 거면 이렇게 의주 앞에 있지도 못해. 모르겠지만 신의 뜻이라는 건 대단하거든. 니콜라스가 웃었다. 가지런한 붉은 머리칼 사이로 싱긋 접힌 눈꼬리가 보였다. 베란다 난간에 앉아 태양을 등진 니콜라스의 어깨선을 타고 역광이 산란했다. 귀하고 찬란한 광경이었다. 딱히 종교를 품고 살지 않던 변의주에게도. 눈부심에서 눈을 떼는 것이 가끔 버거운 일처럼 느껴졌다. 나한테 내려온 지시는 한 줄이 다였어. 녀석은 발을 달랑이며 아이 같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유를 찾아라-. 그게 끝! 이유? 응. 이유. 이런 걸 다 들어도 되는 건지 의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니콜라스가 당당하기에 변의주는 말릴 수도 없었다. 너무.. 막연한 거 아닌가. 그치-. 의주는 말이 통한다니까. 그게 다였어. 깨달음의 순간은 도저히 모를 수 없을 거래.
그- 래- 서- 몰래 다른 후보생 지시를 훔쳐봤어.
"뭐?"
사실은-. 거기서 의주 이름을 봤어.
"..."
이번 후보생은 둘이거든. 아, 물론 나를 포함해서야.
얼굴도 잘 모르지만, 내 라이벌인거지-.
걔를 이겨야한다는 건 아닌데.
의주를 먼저 찾으면 걔보다 빨리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전달 받은 금지 사항에는 다른 후보생의 지시를 보아선 안된다는 이야긴 없었다며 니콜라스는 흥얼댔다. 얄밉도록 뻔뻔스러운 입술이 옹졸하게 모아지는 걸 지켜봤다. 의주는 한숨처럼 웃어버렸다. 그치만 니콜, 난 천사를 보는 건 니가 처음인데. 그러면 니콜라스는 퍼뜩 고개를 욺직여 눈을 반짝이는 거다. 의주! 나도 나를 보는 사람을 만나는 건 의주가 처음이야. 신기하지-? 어쩌면 데스티니일지도-. 변의주의 눈가에 일순 망설임이 스친다. 이래도 돼? 와 맞먹는 모든 질문을 다 신의 뜻이거니- 로 퉁쳐버리는 속 편한 천사(후보생)에 말려들고 마는 것이다. 그래애..
"하긴.. 미카엘, 뭐 가브리엘 이런 거 아니고 니콜라스잖아."
응?
"천사 같진 않지.. 않나? 이름 말이야."
뭔 소리야-.. 근데 의주 나 오늘 딸기 많이 사준다고 하지 않았어?
"..."
의주가 느끼기에... 천사는 입이 싸다. 니콜라스는 기본적으로 말이 많은데 떠오른 게 있으면 그 즉시 몇 년만에 만난 친구처럼 신나서 우다다 이야기를 쏟아냈다. 의주 주변을 매일 빙빙 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갑자기 얼굴을 불쑥 들이댄다거나 중력을 거스르며 어지럽게 도는 거로는 놀라지도 않는다. 다만 이 지치질 않는 수다에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는데.. 특히 반응이 좋을 때는 질문을 들었을 때다. 니콜, 그럼 너는 한국인이었어?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지? 니콜라스가 두눈을 반짝였다. 평소처럼 러닝을 뛰던 중이었다. 탁 탁 탁 탁. 알맞은 속도로 의주는 발을 옮겼고 니콜라스는 지루하단 기색을 숨길 생각도 않고 간간히 칭얼댔다. 적당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자 입을 뗀 것이 천사를 적중했다. 아니이. 니콜 나랑 말이 통하니까. 새삼 좀 신기해서. 원래 한국 사람이었나 하고. 오오오-. 눈썹을 꿈틀대며 아이 같은 표정을 한다. 키득키득 천진한 웃음 소리.
좀 달라-. 나는 소리를 내는 게 아니야. 말을 한다기보다 생각을 전하는 거야. 의주는 내 마음을 듣는 거지. 언어 같은 건 상관 없어. 의주가 어떻게 나를 듣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렇구나."
"그럼, 내 생각도 읽을 수 있어?"
아니-! 그건 명백하게 월권이야. 개체에 관여할 능력 같은 건 암만 천사라도 없어. 하하.
의주는 재밌네-! 기분이 좋아졌는지 빙빙 도는 녀석이다. 사람한테 들러붙어 매일 같이 딸기를 뜯어내는 천사만 할까 싶다. 니콜라스가 웃으면 의주로서는 도리가 없다. 천사의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시간은 다시 흘렀다. 의주- 느려어- 좀더 빨리! 재촉하는 천사를 어깨에 달고 연습은 이어졌다. 이 연습에서 중요한 것은 리듬과 호흡. 의주는 잊지 않는다. 꾸준히 나아가는 방식을 알면 멈추었다가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그렇기 때문에 지금 멈추지 않아야한다는 것도. 천사는 바람보다도 가볍게 변의주의 리듬에 편승한다. 천사의 허밍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대단할 것 없는 완주를 축하하듯이.
생전의 특징? 같은 게 하나씩 남는대. 아마 빨간색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었나봐-.
천사들은 다 그래? 이런 빨간 색 티비에서도 몇 번 못 본 것 같은데. 에 대한 답이었다. 새빨간 머리는 위에서도 나 하나였어-. 보통은 검고 갈색이고 금발이지! 그러니까 의주- 엄청 특별한 천사를 보고 있는 거야-. 원룸 오피스텔의 작은 여분 공간에 나란히 앉아 별거 없는 핑퐁을 이어가며 뜨는 시간을 죽일 때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의주가 니콜라스의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마가 뜬 사이 뭔가 말하고 싶었던 건지 입술을 달싹이다가 꾹 다물어버리는데... 역시 크고 쌔까만 눈동자는 밀도 있는 시선을 선사한다. 니콜라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면 딸기를 너무 좋아해서일지도-.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에는 너털웃음이 따랐다. 벌써 두팩 째 거덜낸 딸기 과즙이 입가에 잔뜩 문은 채다.
"분홍색이어도 예뻤겠다."
분홍색?
"응."
그래애-?
"잘 어울렸을 것 같아."
뭐야! 의외다-. 과감한 색을 이야기하네. 나 말고. 니콜라스 말이야.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알지, 알지! 그래도 의외-. 마지막 딸기를 입에 쏙 집어 넣으면서 웅얼대는 니콜라스를 두고 의주는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졸려? 의주 좀 자도 돼. 아니이.. 그런 거 아니야. 아닌데-? 하품 참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가벼운 실랑이가 오갈 때에도 분위기는 말랑말랑했다. 이제 곧 강의 가야해. 의주는 고개를 돌려 정오의 햇살이 방바닥에 사다리꼴을 그리는 걸 내려본다. 해가 많이 더워졌다. 조만간 에어컨 청소를 해야겠다는 잡념 같은 걸 굳이 끄집어 냈다. 의주가 작게 코를 훌쩍였다. 니콜라스는 그런 의주를 본다. 반뼘 만큼 열어둔 창문으로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 부스스한 갈색의 머리칼이 살랑이는 것을. 와- 평화로워-..
의주 나는-.. 살아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을 것 같아?
손끝 거스러미를 만지작대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 거 나랑 말해도 되는 거야? 조심스럽게 묻자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린다. 다 된다니까-. 의주는 허리를 꼿꼿이 폈다. 나는 의주 만큼 좋은 사람이었을까. 니콜라스는 어쩐지 의주를 보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었겠지. 그랬을 거야. 그게 너무도 필사적으로 들린 탓에 비싯 웃음이 샜다. 의주-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나 그런 걸로 상처 안 받아-. 막 말해도 돼. 정말이야. 그런 걸로 마음 아프지 않아. 의주는 여전히 자신을 보지 않는 니콜라스를 바라본다.
나는 니콜 상처 못주지. 내가 어떻게 니콜 아프게 해. 단정한 목소리에는 왜인지 단단한 심지가 있고. 동그랗고 무게 있는 것들에는 제각각의 중력이 있다. 의주의 목소리는 딱 그런 힘이 있었다. 니콜라스는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진원지를 찾았다. 그러면 조금 힘이 풀린 장난스러운 얼굴이 있다. 내가 어떻게 천사를 아프게 해.. 지옥 가면 어떡할라고. 입꼬리가 깊게 파여 호선을 그리면. 천사의 마음에 적중한다.
풉, 의주.. 나 아직 천사 아니라니까-.
아하하. 하하..
하하하...
숨을 고르다가, 눈이 맞으면. 이젠 누구도 피하지 않았다.
의주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나 테스트 중이라고. 지시가 모호하다는 그거 말이야. 웃기게 뭘 해야하는지는 안 알려주면서 금지사항은 명확했거든. 뭔지 알아? ...사랑하지 않는 거야-. 자애로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되-, 아무것도 사랑하면 안된대. 어렵지? 정말 어렵지.. 깨달음이란 건 또 뭘까. 의주- 천사는 생각보다-..
더 어려운 걸지도 모르겠다.
나 천사가 적성이 아니면 어떡하지-. 니콜라스가 웃었다. 창틈으로 더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지상의 공기는 니콜라스를 만질 수 없었다. 지상의 어떤 것도.
의주의 자취방은 대학과 아주 가깝다. 후문에서 오분 조금 넘게 걸어가면 나오는 오피스텔 죽죽 늘어선 곳에 의주의 보금자리도 있다. 느긋한 이동과 뚜벅이 생활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의주에게는 꼭 맞는 방식이었다. 오후에 강의가 달랑 하나 있는 날에도 집 밖으로 나가는 것에 아쉬울 게 없다. 여유롭게 잡아도 십오분이면 귀가가 가능한 축복받은 조건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단조롭고 슴슴한 의주의 일상에서 빨간 머리 천사는 조미료 같은 거였다. 이제는 강아지마냥 어딜 가도 쫓아오는 니콜라스를 의주도 기껍게 생각한다. 벌써 두달을 꽉 채워가고 있는 천사습득에 의주는 간혹가다 너 계속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 정말 맞아? 물었지만. 당사자는 시종일관 천하태평이었다. 물론-. 다 된다니까! 깨달음 이란 건- 기다림으로 오는 거니까-. 아무렴. 그렇게 지낸 세월에 어느덧 여름을 앞두고 있다. 기말 시즌을 앞두고 바빠진 의주에 작게 투덜대는 니콜라스, 그런 니콜라스를 달래며 딸기를 약속하는 의주, 바쁜 게 끝나면 뭘 할 거냐고 묻는 니콜라스, 생각해본 적 없는데.. 얼버무리는 의주. 애매 낮시간 거리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허공에 속삭이며 걸었다.
후문을 벗어난다고 큰 길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날은 더웠다. 신경은 천사에게 쏠리었고 의주는 무언가에 집중하면 시야가 좁아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건 정말이지 작은 헤프닝에 불과했다. 고작 십 몇분 짜리 귀가길. 넓지도 않은 골목. 훤한 대낮. 중형 짜리 트럭이 골목에서 툭 빠져나와 아슬하게 의주를 스친 것은. 대단한 일기거리도 못될 일이었는데.
순간 니콜라스가 눈을 크게 뜨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의주를 스치는 광경을 눈 뜨고 코 베인 것처럼 관망하다가 공중에 떡하니 멈춰서 떨리는 눈을 했다. 야-! 너는 천사가 옆에 붙었는데.. 갑작스러운 고함에 오히려 의주가 덜컥 놀랬다. 니콜..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황망함과 놀람, 분노 따위가 얽혀 혼란했다. 왜 안 피했어. 왜 안 피하고 나만 보고 있었어-. 의주 뭐하는 거야! 아.. 미안. 의주가 황급히 눈에 띄게 흥분한 니콜라스를 달랬다. 미안해. 놀랐겠다. 이럴까봐.. 나 걸을 때 노래도 안 듣는데.
경악스러운 니콜라스 면전에 의주는 담담한 말을 보낸다. 그러게.. 순간 나도 다리가 굳어서. 너 놀라게 했다. 미안. 미안해. 내리깐 눈으로 이어지는 고해에 더욱 더 최악인 전개로 천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문득 오버랩이 되는 정말 찢어질 듯 아픈 감각이 있어서. 더는 참지 못하고 무너져 심장께를 비볐다. 아 잠깐만, 의주 나-.. 나 마음이 이상해.
그만. 나. 나, 나 이상해. 정말로.. 덜덜 떨리는 천사가 불안하게 펄떡이는 가슴께를 누르자, 그 안에서 희미한 빛이 샌다. 그리고 비틀대는 니콜라스에 어쩔 줄 모르던 의주가. 새빨간 머리 천사를 볼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변의주가 가장 먼저 알아본다. 신의 뜻이라는 게 참 대단하다던 읊조림이 뇌리를 스쳤다. 원래 깨달음이란 건 이토록 허무하다는 것도.
"니콜.. 아직도 기억이 안나?"
고통으로 헐떡이는 니콜라스를 품에 안았다. 무슨 시험이 그래 니콜. 나는 알겠던데. 나도 알겠던데. 이상하지 않았어? 니콜. 세상 그 어떤 사람도 갑자기 낯선 이가 천사라고 나타나서 말을 거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어. 뭐라고?... 가슴께를 부여잡고 고개를 쳐들면 어느새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골목이다. 웅크려 앉은 니콜라스 앞에 변의주도 무릎을 꿇었다.
"안 피한 게 아니라. 실은 못 피했어. 너가 살려준 목숨인데.. 내가 관리를 잘 못했어 니콜. 나 아직 못 뛰어. 갑자기 확 무릎을 움직이는 게 잘 안 돼.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래. 남들 뛰는 만큼 잘 걸으면 되니까 나는 상관이 없는데.. 항상 미안했어 너한테. 너가 구해준 건데. 내가 이래서."
"정말 너를 내가 그 트럭에서 처음 봤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건 진짜 웃기다. 너는, 머리색이 너무 튄다니까.. 그런 머리색을 하고 못 볼 거라고 생각한 게 웃겨."
"아직도 재활 중이야. 일년을 재활에만 매달리고 아직도 사개월에 한번은 나 수술해준 의사 선생님 찾아가서 무릎 체크 받아. 처음에 너 봤을 때... 저만큼 떨어진 골목에서 너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보이는데 사실은 보자마자 달려갈 뻔했어. 몸이 먼저 나갈 것 같았어. 내가 아는 너랑 똑같아서 헛것인 줄 아는데도 다시 보고 싶었어. 한 번 보이기 시작하니까 계속 보였어."
"환시인 줄 알고 갈데까지 갔다고 생각할 쯤에.. 니가 말을 걸었어. 그래서..."
변의주 위로 니콜라스가 쏟아진다. 머리꼭지에 닿은 뺨이 뜨겁고 축축했다. 의주야, 의주야. 의주야... 목놓아 부르는 이름에 하나하나 답을 했다. 응. 응.. 나야. 그래.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너는 모르지. 너 보려고 못하는 농구 꾸역꾸역 껴서 반 애들한테 욕 먹으면서까지 농구장에서 버틴 건데. 너랑 말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우리 그렇게 만난 건데. 넌 꼭 너만 나 절절하게 좋아한 것처럼 말하더라."
"너 한국에서 대학 간대서.. 내가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너 모르지. 너랑 같이 살 줄 알고 나는... 당연히 그럴 줄 알고."
"너 떠날 때, 제대로 말 한마디 못 해줘서. 내가, 얼마나."
"꿈에도 한 번을 안나오다가. 너무 보고싶다고. 그렇게 울고 불고 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 나 이렇게 됐지만.. 너가 준 기회 안 놓고, 살아가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꿈에도 나오질 않더니."
"불쑥 이렇게 나타나서 니콜라스라고 소개하는데. 어떻게 봐도 그냥 너인데. 대학 합격만 하면 핑크색으로 염색할거라 으름장을 놓던 애가 새빨간 머리를 하고 나타나서. 아직은 후보생이라 내 눈에 보이는 거고 대뜸 천사가 될거라는데.."
의주, 그만... 그만 말해. 의주의 머리통을 껴안은 니콜라스가 애원한다. 아스팔트에 온 살갗을 갈리는 것처럼 벼린 통증이 영혼의 안팍을 긁는 것처럼 아팠다. 어렵지 않게 의주를 기억해낸다. 나의 주주. 이게, 이게 내 이유였구나. 의주가 내 이유였던 거야. 생전에 가졌던 하나가 변의주였던 거야. 무정한 신은 너를 찾아서 이곳에 두고 오라고 한 거야-. 천사가 된다는 건 이런 거구나. 전지전능께서는-. 모든 것을 사랑하기 위해. 너에 대한 사랑을 정리해야한다고 말하는 구나.
한참을 껴안고 니콜라스는 의주를 느꼈다. 따뜻하고, 살아있고, 생생한 변의주를. 그렇게 또 한참을 울다가 뱉어낸다. 놀아난 기분이야. 의주한테 더 잘했을거야. 의주는 웃었다. 너 충분히 잘했어. 헤어짐을 직감하는 능력은 세포가 기억하는 트라우마처럼 날카롭고 벼린 감각으로 남았다. 의주는 또 본능처럼 느낀다. 이게, 니콜라스와의 마지막이야. 그래서 웃었다. 꼴사납게 질질 우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여줬던 것이 정말이지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었어서. 나 니콜 덕에 많이 웃었어. 천사라길래, 난 또 나한테 착한 일 해줘야하는 건 줄 알고. 니가 나한테 무슨 말만 해도 웃었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의주 앞에서 니콜라스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알았으면, 의주 방해 안했을거야. 좋았어 나는. 니콜이 항상 곁에 있어줘서. 힘이 다 빠진 주먹이 의주의 어깨를 친다. 의주한테 왜 그렇게 느리냐고, 맨날 똑같은 거 하면 재밌냐고, 그런 바보 같은 말 안했을거야. 정말.. 그러지 않았을거야. 감정이 격해졌는지 들썩이는 어깨에 손을 올리자 눈물이 툭 떨어진다. 더 많이 안아줬을거야. 왜 좀 더 밝게 살지 않냐고, 사람도 만나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행복하라고 했을거야. 갑자기 천사라고 나타나서 귀찮게 따라다니는 거 다 받아주고 있냐고, 너 진짜 바보냐고 했을거야. 너 귀찮았던 적 한번도 없어. 다 좋았다니깐.. 눈밑이 시뻘개진 천사가 미련하게 서있는 인간을 노려본다.
"사랑한다고 했을거야."
"그건.. 안되지, 니콜.."
"주주는.. 진짜 바보야."
안타깝게 눈물을 뚝뚝 떨구는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벌벌 떨리는 손이 여전히 볼품없지만 서럽게 울고 있는 니콜라스는 모를거였다. 이렇게 닿아도 되는 줄 알았으면 몇번은 만져볼 걸 그랬어.. 아쉽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새빨간 머리를 한 천사를 변의주가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쇠파이프를 가득 싣은 트럭이 미끄러져 덮칠 때 변의주를 구해낸 왕이샹을 잊을 수 없다. 헤드폰을 끼고 걷느라 뒤에서 자신을 애타게 불렀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과오를 지울 리 없다. 변의주 대신 제 몸의 두배는 족히 넘을 쇠파이프들에 깔려 피투성이가 된 채로도 변의주를 걱정하던 이샹을. 숨 넘어가게 울면서 늘어진 이샹을 끌어안는 의주를 잡아주던 커다란 손을. 너 머리에 피가 많이 난다고, 새빨갛다고 덜덜 떠는 의주에게 울지 말라고, 안 아프다고, 주주 나 빨간 것도 잘 어울리지- 하던 얼굴을. 영원히 잊고 싶지 않다.
마지막으로. 이름으로 부르게 해줘. 어깨를 꼭 붙든 이샹의 귓가에 의주가 속삭였다. 으응.. 울음인지 대답인지 모를 소리에 결 좋은 새빨간 머리칼로 입술을 내린다.
니콜라스. 왕이샹. 이샹, 나는..
네가 있어서, 가장 강한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삶에 질 것 같은 시기가 또 찾아와도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 끝이 아니라 시작일 거니까.
그럼 나.. 정말 최강 아냐?
너는 마지막까지. 이렇게 나를 살려줘 이샹. 네가 천사가 아니면. 누가 천사를 할 수 있겠어..
그리고 부서지는 빛과 함께. 의주는 눈을 감는다.
고개가 푹 숙여졌다. 갈비뼈의 결대로 의주의 무엇도 조용히 찢어졌다. 갈기갈기 찢어졌다. 두번째라고 쉬울 리 없었다. 또 한번 사랑하는 존재를 세상에서 지우는 일은. 주저 앉아 가슴을 쳤다. 무너질 것 같은 몸으로 리듬을 상기시켰다. 살아가기 위한 연습을.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탁.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생명의 감각을 곱씹는다. 의주는 잊지 않는다. 꾸준히 나아가는 방식을 알면 멈추었다가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그렇기 때문에 지금 멈추지 않아야한다는 것도.
한참을 견디다 돌아온 작은 집에는 작은 사이즈의 딸기 한 팩과, 다 마른 딸기 꼭다리만이 남아있었다. 바보 같이 조그만 앞니 자국이 남아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