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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 고리타분한 질문은 제3차세계대전 이후 가장 뜨거운 화두가 되었다. 십수년간 이어진 전쟁과 이상 기후로 인한 전염병 탓에 지구의 인구는 전쟁 시작 지점에서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핵폭탄의 영향으로 전소된 대도시도 있고, 너무 많은 사람이 죽은 바람에 직후에는 인구 다수가 PTSD와 방사선 노출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인류는 재건을 시작했다. 재난 상황에도 견뎌낼 수 있도록 지어진 벙커와 데이터 센터들, 극지의 종자 저장소, 그리고 미국이 국가 존속이 불투명했을 때도 최후까지 지켜낸 국회 도서관이 수 천 년간 일궈온 땅과, 문화, 지혜를 물려줬다. 후세의 인류는 다시 문명을 일궈 나가기로 했지만, 이제는 국가의 의미가 없어지고, 권력과 자본이 의미 없어졌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국가 대 국가, 이념 대 이념, 자본 대 자본의 싸움이 행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까. 전쟁을 모두가 똑똑히 목도했기 때문에 후세의 인류는 최우선 가치에 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두기로 했다. 인간은 개인과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산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덕분이었다. 인류에겐 사회를 번영시킬 수 있는 기술이 존재했고 전쟁 시기 동안 많은 것이 파괴되었고 화폐의 가치도 사라졌기 때문에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상태에서 재시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피와 잔해 위에 지어진 새 문명의 유지를 위해 평화조약을 맺었다. 다만 1차나 2차 대전 이후에 쓰인, 기껏해야 국제사회의 경고로 끝나는 강제성 없는 조약보다 더 강한 제재가 들어서게 되었다. 새 문명에서는 군대를 두지 않는 대신 '경비대'라는 집단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특히 핵전쟁의 여파로 후세대 개체 일부 중 유전자 변형으로 인한 초인간적 능력을 지니게 된 일부가 생긴 경우엔 특히 더. 사람들은 이들을 '센티넬sentinel'이라 불렀다. 센티넬 발현율은 전 인류 중 0.015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센티넬이 처음으로 발견되고 10년쯤 뒤에 또 다른 돌연변이 개체들이 발생했다. 센티넬의 힘을 조정하고 폭발적인 에너지 사용에서 기인하는 탈력과 부상을 치료할 수 있는 자들. 그들에게는 가이드라는 이름이 하사되었다.


종교도, 국가도 없는 인류에겐 믿을 구석이 없었다. 자기 자신과 서로 밖에는. 때로는 배신당할지라도. 하긴, 종교나 국가도 그 신도와 국민을 가끔 배신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 자체가 자신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생명체와 그 터전을 파괴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니콜라스 역시 당연하게도 그런 존재론적 질문에 당면할 때가 있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니콜라스는 누구인가. 니콜라스는 0.015퍼센트 중에서도 월등한 능력을 가진 센티넬이자, 센티넬-패트롤 센터 도쿄 지부 소속 청소년들 사이의 스타였다. 어릴 적부터 출중한 능력을 보여 프로파간다에 많이 쓰이며 얻은 유명세 덕분도 있지만, 10대 후반이 되어 다듬어진 외모와 훈련으로 다져진 슬림하고 단단한 몸 같은 걸 보고 얼굴 붉히는 소속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파견 초기 그가 일본어 하나 못 하기도 하고 은근히 낯을 가려서 말을 많이 하지 않았던 것마저도 니콜라스 연배 혹은 그보다 어린 청소년들에게는 그게 충분히 S급 센티넬의 고고함과 시크함으로 먹혀들어 갔다.

니콜라스는 능력이 좋았고, 센터에서 영웅화해 주는 만큼 몸을 아끼지 않았다. 어릴 때 제때 가이딩 받지 못해 남은 팔을 가로지르는 큰 상처 흉터는 그가 얼마나 몸을 사리지 않는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는 목숨이 아홉 개인 고양이처럼 현장에 뛰어 들어갔다.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이딩 받으면 금방 회복한다는 말을 남기고. 어린 나이의 치기이기도 했지만, 무의식적에 하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죽기보다 더하겠어? 라는 마음. 어차피 센티넬로 태어난 거, 본인은 평생 능력을 쓰다가 현장에서 죽을 터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물론 센터에서는 전력 손실을 아까워하겠지만… 그렇다 보니 그는 적응한 뒤에도 약간 무심한 얼굴을 하고 다녔다. 그 무심한 얼굴이 정복욕을 자극했는지, 그를 동경하는 마음이 이상하게 꼬였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폐쇄된 방 안에서 니콜라스와 함께 있을 기회를 노리는 가이드들이 많았다. 그리고 어쩌면, 잘되면, 니콜라스 님, 비점막 접촉 가이딩 해요. 그럼 혹시 점막 접촉 가이딩도? 하는 혹시 모를 일말의 가능성을 마음에 품으며. 그렇게 무심하고 몸이 갈려라 일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건 누구나 꿈꿀만한 일이니까.


그런 걸 니콜라스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눈을 반짝이며 휴일에 무엇을 하느냐, 밥을 먹자, 도쿄 나들이를 시켜주겠다 묻는 사람들은 양반이었고, 좀 쉬고 싶은데 니콜라스를 붙잡고 가이딩 중 스몰토크를 시도하는 가이드들도 있었다. 평상시라면 사회생활 한답시고 잘 받아주겠지만 고된 훈련 뒤나 출동 뒤에 그렇게 가이딩을 받고 있으면 말 한마디 뱉는 것조차 에너지 소모처럼 느껴져서 니콜라스는 그런 걸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끈질기게 말을 섞거나 눈빛을 보내는 가이드가 있으면 스미마셍 한마디 하고 모니터를 가리키면서 피곤함을 어필했다. 그러다 보니 니콜라스는 억울할 노릇이어도, 그가 라포도 쌓지 않고 가이딩만 빨아먹는 재수 없는 센티넬이라는 악평을 남기는 가이드도 있었다.

그래서 니콜라스는 가이딩실에 누워 어떤 가이드가 배정될지 모르고 기다리고 있다 보면 은근히 긴장하게 되었다. 상성이 맞는다든가 친하다는 이유로 가이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아서 더 그랬다. 그래도 니콜라스가 반기는 가이드가 있긴 했다. EJ. 그의 모국어는 한국어라고 했다. 본명은 모르고 센터에서 사용하는 코드네임만 알았다. 보통 센터에 들어오면 그 이전에 살던 개인은 지워지고, 코드네임 아래의 센티넬과 가이드만 남으니까. 그리고 니콜라스가 EJ가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지금처럼 가이드로 EJ가 들어올 때는.


"왕이샹."


몇 번이고 봐서 신원 확인도 필요 없을 텐데. 그래도 꼬박꼬박 제 이름 세 글자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다. 모두가 그를 니콜라스라고 불렀는데, 그러지 않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EJ는 가이딩실에 들어오면 제가 누구인지 뻔히 알면서도 차트를 보고 왕이샹, 하고 저를 불렀다.


"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니콜라스도 요로시쿠, 하고 대답했다.

그 대화를 끝으로 그는 니콜라스의 몸과 선으로 연결된 기계의 모니터를 확인하더니, 장부에 몇 가지를 적고, 타이머를 맞춘 뒤 옆의 침대로 가 누웠다. 얼마 안 가 에너지 파장이 니콜라스에게 흘러들어왔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파장이 온몸으로 번져나갈수록 통증이 서서히 멎어 들기 시작했다. 피곤과 긴장이 풀리고 안도감이 들자, 니콜라스는 갑자기 몰려오는 졸음을 느꼈다. 잠들기 전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도 자신을 담당하게 된 가이드가, EJ여서 다행이라고.




니콜라스가 EJ를 선호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상성이 잘 맞았고. 저보다 큰 키와 단정한 얼굴, 상냥한 미소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그는 다른 가이드들처럼 니콜라스를 번거롭거나 귀찮게 하지 않았다. 너무 사무적이라 조금 섭섭하다고 할 만큼, 그는 니콜라스에게 별다른 말을 걸지 않았다. 제 이름을 부르고, 잘 부탁한다는 말에 고개를 숙이고, 가이딩이 끝나고 나서 수고하셨다고 말하고 이불을 정리하면 끝이었다. 그렇지만 섭섭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원칙적으로는 가이딩 수치가 80% 정도까지 차면 세션을 끝내도 된다. 그러니 보통의 가이드들은 80% 정도 게이지가 차면 본인들도 피곤해져서 끝내고 자기 할 일 하러 가기에 바빴다. 잠이라도 들면, 가이딩이 끝났다고 한창 단잠에 빠진 저를 깨우고서 빨리 나가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EJ는 잠을 깨우지 않는다. 다만 기다릴 뿐이었다. 혹시 잠이 들지 않더라도 EJ는 100%가 끝까지 차는 걸 꼭 보고서 나갔다. 그리고 그만큼 가이딩을 더 하면서도 지치지 않게 본인이 노력하는 것 같았다. 체력 단련실에 가면 심심찮게 러닝머신 위에서 뛰고 있거나 훈련하고 있는 EJ를 볼 수 있었다. 보통의 가이드들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니콜라스는 그게 EJ만의 노력임을 알았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도 한 쪽에서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거다. 모두가 나를 니콜라스로 아는 세상에 너는 내 이름 석 자로 불러주는데 나는 왜 EJ의 이름을 모르지?




이름을 알게 되는 계기는 빠르게 찾아왔다.


구세계의 군대처럼 활동하는 반란군은 구세계 무기인 총이나 탱크를 자체 제작해 와 반권력-평화주의적 체제를 무너트리고 일본 열도에 무력 질서를 중심으로 한 군부 국가를 세우겠다고 공표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시민들의 평화시위를 폭력으로 맞서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기본적으로 평화를 추구하고 반폭력주의를 중심으로 구성된 패트롤도 이들을 진압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무력 사용을 감수해야 했고, 무기를 사용하는 대신 센티넬들의 능력을 빌리게 되었다.

니콜라스 역시 차출이 잦아졌고, 때로는 최전선에서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무장 군대 앞에 서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니콜라스가 아무리 유능한 센티넬이라도 개인의 능력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에는 언제까지나 한계가 있었고, 커버할 수 있는 물리적 범위도 한정되어 있었다. 때로는 공격으로 인해 부상을 입거나 유명을 달리하는 시민들을 눈앞에서 보아야 했다. 휴무인 날에 숙소에 누워있어도 총성, 포탄 소리, 비명이 이명처럼 울렸다. 때로는 자다가 총알이 배에 박혀 고통 속에 깨는 꿈을 꾸기도 했다. 니콜라스의 능력이라면 반란군 수장에게 어느 정도 가까이 접근하기만 한다면 순식간에 온몸을 터트려 사지를 갈가리 찢기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명령이 떨어졌을 때 순순히 따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상대 사살이 아니라 민간인 피해 최소화를 목표로 하는 센터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스탠스를 바꾸어 그들을 사살하라고 하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도 했다. 이를 말미암아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지금의 평화가 또 깨진다면.

이맘때의 니콜라스는 현장에서의 PTSD와 걱정 때문에 스트레스성 두통과 위경련, 환청, 환시, 공황 같은 증세가 나타났다. 그러나 센티넬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고, 패트롤 활동은 바쁜 데다가, 반란군 제압까지 이어지는 중에 그런 걸 쉽게 티 낼 수는 없었다.


그날도 니콜라스는 쿠데타 지역 임무를 끝내고 가이딩실에 들어가 있었다. 들어가는 중에 안내 직원에게 '배정 가이드가 급한 일이 있어 못 오니 일단 들어가서 쉬고 있으면 다른 가이드를 불러주겠다'라는 말을 들었다. 머리에 상처가 나 피떡이 진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빨리 가이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려도 가이드는 오지 않았다. 대신 깨질듯한 두통은 멎지 않았고, 출혈 때문에 혈관이 쿵쿵 날뛰는 것 같았다. 이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눈앞이 핑 돌았다. 몸을 옹송그리고 개구호흡을 바삐 내뱉었다.


이러다간 죽는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귓가에서 포탄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저를 조준하는 총알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니콜라스는 기절했다.


사후세계를 예상하고 눈을 뜨자마자 보게 된 건 다름 아닌 팔을 주무르고 있는 EJ였다. 잔뜩 당황한 얼굴로 정신이 드냐고 묻는다. 가이딩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병원으로 이송할까요? 병원에 갈래요? 괜찮아요?

그에 니콜라스는 이상한 대답을 한다.


"EJ, 이름을 알려줘..."


그 말을 하자, 이곳이 다시 그 지루한 삶이라는 사실이 자각되면서, 갑자기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세션이 끝나고 나서 EJ는 자기 이름을 말해줬다. 덕분에 이름은 변의주라는 것도, 이번 9월이 되면 18살이 된다는 것도 알았다. 니콜라스는 말을 편하게 해달라 부탁했고 의주는 조금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도 그래, 니콜라스, 하고 답했다.







그 후로 니콜라스는 의주와의 세션을 은근히 더 기대하게 되었다. 의주는 여전히 제 이름 정자를 부르고 또 아무 말 없이 가이딩 하다가 나갔지만. 그쯤 되자 니콜라스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하던데 의주는 그런데 전혀 관심이 없나 보네. 물론 그게 니콜라스가 의주를 편하게 여기는 이유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서운해지기도 했다.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의주가 다정하면 다정한 대로, 또 덤덤하면 덤덤한 대로 기분이 이상했다. 자꾸 의주를 의식하게 되었다.


센티넬들은 워낙 특이 체질이라 일반인이 먹는 의약품이 몸에 잘 안 들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 수가 적고, 또 가이딩을 받으면 만사 오케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센티넬을 위한 의약품 개발은 진척되지 못하고 매우 더디게 흘러갔다. 그러나 센터에서 제공하는 정기 가이딩은 정기 순찰, 근무 후나 격한 훈련 후뿐이다. 긴급 출동이 있었고 체력 소모가 심하면 그 이후에도 받을 수 있지만 어쨌든 근무 후여야 했다. 이외의 경우에는 아는 가이드에게 알음알음 가이딩을 부탁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따로 이야기만 나눠도 뒷이야기가 나오는 센터에서, 그리고 누구든 니콜라스랑 엮여보려고 하는 상황에서 그가 누군가에게 선뜻 부탁하기는 어려웠다. 니콜라스가 배탈에 고생하면서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약도 먹지 못하고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던 중에 복도 음수대에서 마주친 의주가 먼저 니콜라스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보자마자 안 그래도 하얀 애가 오늘은 창백하네, 아픈가, 라고 생각했다.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건 가이드의 직감이기도 했고.


"니콜라스. 괜찮아?"

"으응…"

"…진짜?"

"사실…. 체한 것 같아."

"…음, 괜찮으면, 내 방으로 갈래? 가이딩 해줄게."


니콜라스는 아프면 아픈 대로 견디는 타입이었지 굳이 가이드들에게 사적으로 가이딩을 부탁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방 안에 들어선 니콜라스가 뭘 해야 할지 모르고 멀뚱히 서 있자, 의주는 침대를 팡팡 치며 누우라고 했다. 하지만 여기는 네 방인데. 니콜라스가 머뭇거리자, 의주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근데 너 아프잖아. 얼른 누워. 니콜라스는 그러면 실례할게, 하고 머쓱하게 의주의 침대 위에 누웠다. 이불까지는 덮지 못했지만. 평소 가이딩할 때처럼 눈을 감고 눕자, 의주가 바닥에 앉아 니콜라스에게 속삭였다.


그, 너 피곤할 테니까… 좀 빨리하게, 손잡아도 돼?


지부를 막론하고 미성년자 센티넬에게 센티넬-패트롤 관제센터에서 제공하는 공식적이고 유일한 치료는 방사 가이딩이다. 가이딩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원치 않는 성적 혹은 신체적 접촉, 폭력에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사회적으로 센티넬 가이드하면 사람들이 너무 당연히 점막 접촉 가이딩, 그러니까 키스나 섹스를 떠올리기 마련이라, 패트롤 차출을 싫어하는 보호자들을 위해 만들어둔 규정이기도 했다. 한 명 한 명이 간절한 센터에서는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가용 인력을 늘리려 했다. 성인이 되고서는 상대와 상호 합의, 계약을 하고 접촉 가이딩을 할 수 있으나 미성년자 때는 생명이 당장 위태롭거나, 폭주 직전이라 타인까지 해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비점막 접촉 가이드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본인들끼리 합의하에 할 때면 센터에 따라 손잡기나 포옹 정도는 암암리에 봐주는 분위기도 있었으나 센터 내 점막 접촉이 발각되면 예외 없이 지부 이동과 생활비 감액 행이었으므로 다들 주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니콜라스는 솔직히 지금까지 손을 잡아주겠다거나, 포옹을 해주겠다거나 하는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한 번 허락하면 그다음은 쉬우니까. 그런데 의주가 제 눈을 맞추고 하는 말에,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는 몰라도 의주라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어디 가서 손잡았다는 얘기를 떠벌릴 타입도 아닌 것 같았고. 의주는 조심스레 니콜라스의 손을 잡았다. 의주의 손엔 땀이 조금 배어 축축했다.


그 순간, 니콜라스는 손에서부터 시작해 몸을 한 바퀴 돌아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에너지를 신경으로 고스란히 느꼈다. 지금까지 방사 형태의 가이딩만 받아봤기 때문에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실시간으로 몸이 회복되는 것 같았다. 아, 이런 게 접촉 가이딩이구나. 자연스레 다른 물음이 따라온다. 그러면 점막 가이딩은 얼마나 좋다는 거야.


성인이 되어도 무조건 점막 가이딩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상호 동의가 있어야 했고, 센터 내규에 따라 절차를 밟고 서류 처리를 해야 했다. 상성도 맞고 성격도 맞는 파트너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니콜라스는 지금까지 점막 가이딩이라든가 고정 파트너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저와 파트너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그중 골라도 된다는 안일한 마음도 조금 있었고. 그런데 의주가 첫 접촉 가이딩을 해준 사람이라 그랬는지, 그 기분이 너무 강렬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의주가 내 가이드가 되었으면 좋겠다.


니콜라스가 혼자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의주는 한 손으로는 니콜라스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훈련일지를 뒤적이며 훈련 피드백을 복기하고 있었다. 가이딩에 약간 아드레날린이 돈 니콜라스는 그런 의주를 보고 살짝 서운해졌다. 하긴, 이게 니콜라스에게나 큰 사건이지 의주에게는 루틴화된 일상이고 업무일 뿐이다. 의주가 자신만 가이딩 해 주는 것도 아니고, 로테이션에 따라 다른 센티넬들을 맡기도 한다. 비록 살짝 떨어져 있는 싱글 침대 두 개에 나란히 누워있는 게 전부인 방사가이딩일지라도. 이렇게 저에게 덥석 손을 내주는 걸 보면, 컨디션 안 좋아 보인다고 방으로 데려와 손을 내어주는 게 처음이 아닐지도 모르고. 혹은 징계를 감수하고 더 나아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졌다. 기분이 푹 가라앉아 한숨을 쉬자, 의주가 니콜라스를 돌아봤다.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아니, 아니야."

"니콜라스, 가이딩 하는 동안에는 가이드가 센티넬의 상태를 대충 알 수 있어. 알지?"


그건 이론적으로 배운 부분이었다. 둘의 파장이 연결되어 있는 동안은 가이드가 센티넬의 신체, 심리 상태 변화를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니콜라스를 가이딩했던 누구도 니콜라스의 상태에 대해서 별 말한 적 없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냥, 속 안 좋아서."

"가이딩 시작했는데도 그래?"


의주는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너랑 상성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방사 때는 덜 느껴지긴 하지만, 갈수록 네가… 편안해지는 게 느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

"…"

"접촉이 안 맞나… 손 놓을까?"

"아니, 떼지 마."

"괜찮아? 진짜?"

"진짜."


의주가 다시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걱정 어린 얼굴이 눈앞에 들이찼다. 그 순간 니콜라스는 이상하게도… 제가 누워있어서 못생겨 보일까 봐 걱정했다. 나머지 한 쪽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자, 의주가 묻는다. 너무 밝아서 그래? 자고 싶어? 커튼 쳐줄까? 안대는 없는데…. 오히려 가까이 들여다보며 걱정스레 말을 뱉는 의주 때문에 더 민망해졌다. 그냥 나한테 신경을 안 써주면 안 될까. 이것저것 묻는 목소리에 걱정이 배어있어서 더 민망해졌다. 그냥 빨리 가이딩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 이후로도 매번 접촉 가이딩을 하는 건 아니었다. 공식적인 세션으로 정기 가이딩을 하러 들어오는 의주는 여전히 왕이샹, 하고 제 이름 석 자를 불렀고, 기계로 상태를 확인하고, 조금 떨어진 싱글침대에 가서 누워 방사 가이딩을 했다.


의외로 패턴을 먼저 깨트린 건 의주였다. 음식점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났다는 신고 접수에 퇴근 직전에 출동했다. 하필이면 다른 센티넬들이 다 출동 중이어서 니콜라스 혼자만 출동해야 했고, 현장을 수습하고 센터에 돌아오니 늦은 밤이었다. 보통은 복귀 후 바로 가이딩을 받지만, 세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라 아침에 받으면 된다고 물리고 숙소로 가려고 했더니 행정 직원은 지금 당직인 가이드가 있으니 받고 가라고 만류했다. 아침에 또 파견을 시킬 요량이겠거니 하고 가이딩실에 갔더니, 의주가 있었다.

그날은 따로 상처나 부상이 없었다. 차트에는 긴급 출동 후 컨디션 회복을 위한 가이딩 필요라고만 적혀있었다. 의주는 가이딩실로 들어오자마자 니콜, 하고 불렀다.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응."

"괜찮은 거… 맞지?"

"…왜, 많이 안 좋아 보여?"

"음… 조금?"


니콜라스가 요즘 제 꼴이 많이 안 좋은가 고민하는 동안, 의주는 잠시 나가더니 의자를 끌고 와서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손잡아줄까. 저번처럼."

"…응."


의주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두 손으로 니콜라스의 손을 붙잡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복잡하던 머릿속이 고요해지는 것 같았다. 원래 가이딩에 이런 효능도 있었나? 물론 가이딩을 받을 때면 마음이 편해졌지만, 그건 그날의 임무가 끝나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깨끗한 침대에 누워서 편히 쉴 수 있다는 안도 덕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끄럽던 마음이,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이, 의주가 손을 맞잡자마자 전부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의주가 가이딩을 해줄 때는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 이상할 정도까지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졌다. 어쩌면 과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의주. 불편하지 않아?"

"응? 아니."

"밤늦었는데, 눕지도 못하고."

"현장 다녀온 니콜라스가 힘들지. 난 괜찮아."


니콜라스는 저렇게까지 말하니 그런가 싶다가도 문득 그러면 의주는 다른 센티넬들에게도 이렇게 손을 붙잡고 가이딩 해 주는지가 궁금해졌다. 혹은 그 이상을 하는지. 꼭 안아주거나, 점막 가이딩을 하는지도. 겨우 진정되었던 심박수가 다시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걸 묻는 건 실례 같기도 했고. 어쩌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짜증이 솟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에게나 손을 덥석덥석 내주고, 자기는 불편해도 상대를 위해 의자 위에 쪼그려 앉을 수 있는 남자, 최악. 이런 가이드를 마다할 센티넬은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서 더더욱.


의주는 그런 마음도 모르고 꾸벅꾸벅 졸았다. 손을 잡아준답시고 앉아서 머리가 떨어지라 조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의주. 너 너무 피곤해 보여. 손 안 잡아도 돼. 네 침대 갈래? 근데 이게 더 좋잖아. 요즘 많이 힘들고. 의주가 졸음이 묻어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느리게 대답했다. 니콜라스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럼 내 옆에 누울래? 침대 좁지만…. 의주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가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너 불편하잖아. 아니, 나 괜찮으니까 올라와. 응? 너 불편하게 자는 거 보면 나도 불편해서 안 돼. 의주. 올라와. 몇 번 더 단호하게 말하니 의주가 민망해하며 꾸물꾸물 올라온다. 손은 여전히 잡은 채로. 작지 않은 덩치 둘이 싱글침대 하나를 빠듯하게 채운다. 의주의 숨이 니콜라스의 목가에 와서 그대로 닿는다. 잠을 못 자겠는 저를 아는지, 의주는 니콜라스의 손을 붙잡고 도닥였다. 편하게 쉬어.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달랜다. 가이딩 덕분에 시끄러웠던 머릿속은 조용해졌지만, 마음은 더 시끄러워지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니콜라스는 의주를 눈에 띄게 의식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와서 제게 괜히 말을 걸거나, 무언가 같이 하자고 제안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근무 스케줄이 나오면 의주의 쉬는 날은 언젠지 체크하게 됐다. 의주는 도쿄를 많이 구경해봤을까, 쉬는 날에는 무엇을 할까, 센터 유니폼 말고 사복을 입을 때는 무엇을 입을까. 직장 동료끼리 사생활을 묻는 건 조금 실례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주의 경우가 자꾸 궁금해졌다. 마음은 조급해지는데, 의주를 만날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 새벽 가이딩 이후 둘은 일주일 넘게 세션을 같이 하지 않았다. 세션 전까지는 담당 가이드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그 일주일 동안 니콜라스는 가이딩실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누워있다가 의주가 아닌 사람이 들어오면 실망하곤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왜 실망하지?


의주를 마주친 건 못 본 지 열흘이 꼬박 지나고 구내식당에서였다. 의주는 다른 센티넬과 웃으며 식사하고 있었다. 니콜라스의 주위에도 사람이 많았지만, 의주가 한 번 보이자 계속 의주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저 센티넬이랑은 어떻게 친하지. 저 사람에게도 손을 잡아줬을까.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자 주변에서 한 소리 했지만, 그런 걸 살필 정신이 없었다. 의주가 일어나는 것 같길래 밥을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나 오늘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말해버렸다. 퇴식구에서 의주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마치 아주 우연인 것처럼, 어 의주 안녕, 하고 인사했다. 옆에 있는 센티넬에게도 의례적으로 아는 체를 하고.


"의주, 바빠?"


의주는 시계를 한 번 보더니 다음 세션까지 시간 좀 있어, 하고 대답하고 눈을 맞춰온다. 언제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는 친절한 얼굴. 니콜라스는 괜히 거짓말을 한다.


"나 머리 조금 아파… 가이딩 해줄 수 있어?"

"음? 그래."


의주는 옆에 있던 센티넬을 먼저 보내고, 라운지로 가 편한 의자에 앉았다.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곳이라 손을 잡기는 좀 그래서 의주는 은은히 방사 가이딩을 했다.


"많이 아파? 스트레스인가? 요즘 바쁘지."


니콜라스는 으응, 그런가 봐, 하고 대답하다 물었다. 그런데 너 다른 센티넬들이랑 많이 친해?


"아, 아까 그 친구는 교육 기수가 같았어."

"그랬구나…. 의주는 몇 살 때 발현했어?"

"나는 2년쯤 됐나?"

"오."

"니콜라스는?"

"나는 아주 어렸을 때."

"맞다. 나도 어릴 때 니콜라스 TV에서 봤어."

"아…"

"아, 미안. 이런 얘기하지 말까?"


싫은 건 아니고 부끄러웠다. 니콜라스는 어릴 때부터 언론에 노출되어 사생활이 별로 없었다. 학교도 센터 내에 있는 교육원 과정으로 중학 과정까지만 마쳤다. 더 큰 대의가 있다는 이유로. 물론 그 뒤에 가려진 진짜 이유는 그 시간마저 아깝다는 어른들의 욕심이었지만.


"의주는 그럼… 발현 전엔 뭐했어?"

"나는 그냥, 평범하게 학교 다녔어."

"그것도 재밌었겠다. 공부 잘했어?"


의주가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 아니 전혀. 나도 스포츠 했거든. 펜싱했어.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자, 의주가 웃는다. 왜? 의외야?


"아니, 그건 아니고. 멋져서."

"그냥 조금 했어. 공부하기 싫어서."

"지금은?"

"가이드 되고, 특히 일본 온 다음에는… 뭐. 교육원 가서 수업 듣다가, 가이딩했다가, 숙소 가서 쉬고."

"진짜? 밖에 안 다녀?"

"저번에 나갔다가 길을 잃었거든."


니콜라스는 문득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음에 나랑 같이 놀러 가자."

"니콜라스 요즘 바쁜 거 아냐?"

"그래도 휴일은 있어."

"그래, 재밌겠다."

"그럼 연락할게."


의주는 조금 웃었다. 왜 웃어? 하고 물어보니 이렇게 답한다. 음, 사실 좀 신기해서… 니콜라스 너무 어릴 때부터 뉴스에서 봤으니까.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그 말을 듣자 의주는 눈을 크게 뜨며 니콜라스를 마주 봤다.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랗게 니콜라스의 시선을 맞춰온다.


"센티넬이라서가 아니고, 니콜은 특별한 사람이야."

"..."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 평화를 지키고… 능력이 있는 모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사실 안 그래도 되는 건데. 니콜라스는 그런 사람 중에서도 언제나 제일 먼저 앞에서 사람들을 돕잖아? 그렇게 뛰어들 수 있는 건 니콜라스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이야."


니콜라스가 혼자 민망해하고 있는데, 의주가 시계를 보더니 곧 가이딩 세션이 있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니콜라스는 손을 붕붕 흔들고 인사한 뒤 멀어지는 의주의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너는 특별한 아이라는 말은 어릴 때부터 오래 들어왔던 말이지만, 능력이 아니라 니콜라스가 포기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 자체로 특별하게 여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주 단위로 나오는 스케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의주의 휴무 패턴을 분석하던 니콜라스는 그다음 주 휴무를 신청하며 의주와 휴일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 스케줄이 나오자마자 니콜라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의주에게 연락했다.


"의주, 다음 주 목요일에 뭐 해?"

[나 오프.]

"괜찮으면 놀러 나갈래?"

[음…]

"싫어?"

[아냐. 나가자.]


먼저 제안한 건 니콜라스였지만 그 이후로 연락해서 무엇을 하자 하는 말은 하지도 못했다. 그 연락을 한 이후로 매일같이 쿠데타 진영의 활동이 격해지면서 매일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온 뒤 기절한 상태로 가이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의주가 들어왔는지 확인할 새도 없었지만, 깰 때 늘 혼자였거나 누군가가 깨워서 깨어났던 걸 생각하면 의주와 스케줄이 한 번도 안 겹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속 전날인 수요일에도 그렇게 곯아떨어졌다. 수요일 자정이 조금 되기 전에 복귀해서 가이딩실에 누가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가 일어나보니 의주가 옆에 앉아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헉."

"니콜, 깼어?"

"어… 의주 어떡해, 오늘 휴무인데."

"괜찮아. 나도 오래 잤다가 방금 일어났어."


의주가 그럴 리 없다는 걸 니콜라스는 알았다. 민망해서 앓는 소리를 내자 의주가 웃는다. 괜찮다니까아. 다정한 목소리가 괜히 더 부끄럽게 만든다.


"오늘 밖에 나가자고 했잖아. 너 많이 피곤하면 쉴까?"

"아, 아니 나가자. 나도 나가고 싶어. 씻고 올게."

"그러면 씻고 연락해."


방으로 돌아와서 얼굴을 보니 얼굴이 한껏 부어있었다. 민망함에 거울에 대고 머리를 박았다. 오늘은 좀 멋지게 나가고 싶었는데… 의주 시간도 다 잡아먹고, 얼굴은 부어서 못생겼고… 최악이다 왕이샹. 이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북북 긁었다.


어쨌든 얼른 씻고 나가야 했기 때문에 급하게 샤워하고 옷을 골라 입었다. 의주에게 메시지를 남기자 곧 나오겠다는 답이 온다. 일할 땐 잘 뿌리지도 않는 향수까지 뿌리고 정문으로 나가자, 의주가 단정한 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데님 셔츠에 검은 바지. 반면 어딜 가든 사람들이 알아보긴 해도 차라리 모자로 가리지 옷을 평범하게 입는 건 거부하는 쪽이라 색도 화려하고 바지도 온통 찢어져 있었다. 둘이 너무 스타일이 다른가 싶어서 민망해하고 있을 찰나에 의주가 인사하고는 니콜라스, 옷 멋지게 입었네, 하고 근사하게 웃었다. 괜한 걱정이 무색해지리만큼.


"의주도 멋진데."

"나는 진짜 잘 몰라서…."

"아냐 의주는 스타일이 좋아."


니콜라스가 없는 칭찬을 하는 건 아니었다. 의주는 정말 키가 커서 센터 유니폼만 입어도 근사하긴 했다.




둘은 버스를 타고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무엇이 먹고 싶냐는 질문에 지나가듯 고향 음식을 먹고 싶다고 말한 니콜라스 때문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도 이야기를 나눴다. 의주는 서울에 있을 땐 뭐 하고 놀았어? 음 서울에서는…. 보통 게임을 하거나. 그냥 친구들하고 놀았어. 사실 그때도 훈련하거나 공부하느라 바빴지만…. 니콜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주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주가 살던 동네는 서울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는 점, 부모님, 누나와 함께 가족여행을 가던 이야기, 학교에서 하는 건강검진에서 갑자기 가이드 발현을 확인하게 되고, 유학 겸 도쿄지부로 온 얘기까지. 니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는 어릴 때부터 센터에만 있었어. 첫 기억이 센터로 나를 데리러 온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집에 가던 거야. 할아버지가 나를 업어줬거든. 이라고 답했다. 사실 니콜라스의 과거는 인터넷에만 검색해도 끝이 없이 나왔다. 이미 열다섯 살 때는 그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까지 세상에 나왔으니까.


"그럼, 니콜라스는 평생 센티넬로 살고 싶어?"

"음…."


니콜라스는 창문 밖을 바라보다가 답했다.


"잘 모르겠어."

"어렵지."

"전에는 평생 하고 싶었거든."

"응."

"근데 요즘은 가끔 그런 생각 하거든. 이건 왜 하는 거지? 나는 뭘 하고 있지? 이런 거."

"…그렇구나."

"가이딩 받는다고 해도 다치면 아프기도 하고… 소모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전엔 그냥 죽으면 죽는 거지, 생각했는데."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게 자기 속마음이 줄줄 나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언론 인터뷰에서도, 다큐멘터리에서도, 센티넬 선후배에게도 한 적 없는 말들이었다. 그런데 저 말을 하자 의주가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죽으면 죽는 게 어딨어."

"그럴 수도 있잖아."

"죽지만 말고 센터에 돌아와. 내가 어떻게든 가이딩해서 살릴게."

"…"

"나도 갑자기 가이드가 됐을 때… 당황스러웠거든. 나는 어릴 때 꿈이 많았는데. 가이드 발현하면 그대로 가이드로 살아야 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갑자기 일본 와서, 언어 배우는 것도 어려웠고. 근데 사실… 니콜라스 너도 그렇고, 센티넬들이 생명을 구했다거나, 사고를 막았다는 기사를 보면… 세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

"니콜라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잖아. 그렇지만 그만큼 힘들고 아픈 거 알아. 그래서 가이딩 해줄 때는, 최선을 다해서 해주고 싶어."

"고마워."

"니콜라스가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면, 내가 죽지 않게 도와줄게. 그러니까 살아서 돌아와야 해."


조곤조곤 말하는 의주의 목소리가 작고 낮았다. 니콜라스는 그 얘기를 듣는데 괜히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 저번에도 그렇고, 의주는 자꾸 마음을 후벼파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의주는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주겠다는 듯이, 꼭 잡고 있던 손이나 잠자리를 지키고 있던 피곤한 얼굴이나 제 기운을 나눠주겠다고 좁은 침대에 웅크려있던 몸이나. 그런 걸 니콜라스는 알았기 때문에.


"그치만, 가이딩 해주기 전에도 다치면 아플 테니까…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의주는 니콜라스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려놨다. 가이딩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다른 기능적 목적이 있는 게 아닌 산뜻한 접촉이었다. 니콜라스는 그 손의 온기를 떼어놓고 싶지 않았다.




둘은 이른 저녁으로 딤섬과 우육면을 먹고, 니콜라스를 알아본 가게 주인에게 사인을 해주고, 가까운 지하철역 근처 쇼핑몰에 갔다. 쇼핑몰에 볼링장이 있어 볼링을 두 판 쳤다. 의주가 족족 거터에 공을 떨구자, 니콜라스가 마구 웃었고 의주는 너 염력으로 내 공 옮긴 거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위층에 있는 가라오케에 가서 한 시간동안 노래를 불렀다. 의주가 랩을 하자 니콜라스가 또 와하학 소리 내 웃었다. 의주가 '나 그렇게 못 해?'라고 묻자, 니콜라스는 '의주 얼굴 착하게 생겼는데 랩 무섭게 해. 재밌어.'하고 답했다.


니콜라스의 취미가 쇼핑이니만큼 두 사람은 옷 가게에도 들렀다. 의주, 이런 거 입어봐, 하는 니콜라스에게 의주가 당황하며 난 이런 거 못 입어, 라고 하자 니콜라스는 멋대로 옷을 계산해 의주에게 안겨줬다. 그렇게 가게를 몇 군데 돌자 의주의 양손이 무거워졌다. 이거 다 받아도 돼? 하고 묻자, 니콜라스는 어차피 돈 벌어서 쓰는 데도 없다고 답했다. 버스를 타기 전, 둘 다 저녁을 잔뜩 먹은 게 무색하게도 배가 다 꺼졌다. 버스를 타러 돌아가는 길에 크레페 집을 보고 니콜라스는 크레페를 하나 시켜 먹고, 의주는 편의점에서 바나나우유를 사서 마셨다.


"의주, 오늘 재밌었어."

"나도."

"나 오랜만에 많이 웃었어."

"다음에 또 나오자."

"좋아."

"오늘 사준 옷 입어."


그 말을 하자 의주가 니콜라스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니콜라스는 그 순간 조명에 비친 의주의 얼굴이 참 근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실로 오랜만에 마음껏 웃고, 좋아하는 걸 잔뜩 하고, 정신없이 웃고…. 한여름의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의주의 앞머리가 조금 살랑이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열여덟에 변의주가 있어서 다행이다. 쿠데타가 일어나도,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도, 매일같이 부상을 달고 와도. 왕이샹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불러주는, 환각에 시달리는 나를 붙잡고 정신을 차리라 말해주는, 자기 몫 이상의 친절을 기꺼이 내어주는, 외국어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 자기 마음을 또박또박 말하는, 변의주가 있으니까.


평생을 명분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삶의 이유를 찾는 건 너무 큰 숙제였다. 센티넬이니까. 인류의 평화를 지켜야 하니까. 전쟁을 예방해야 하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능력의 축복이 있으니까. 모든 사람이 니콜라스에게 고마워하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니까. 하지만 그건 행동의 명분이지 존속의 명분이 아니었다. 나는 왜 계속 살아야 하는지.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는지.


돌아가는 길에, 니콜라스의 어깨에 기대 잠든 의주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 같은 순간들이 살다 보면 가끔 찾아오고, 그걸 놓치면 안 되니까 나는 계속 살고 있구나. 문득 니콜라스는 의주가 손을 잡아준다면 평생 센티넬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런 행복은 아주 가끔 찾아오고 금방 사라지듯, 혹자는 현세 인류가 이룩한 평화가 모래성 위에 지은 집 같다고 평했다. 아무리 인류가 절멸 직전에 다녀왔어도, 그래서 여러 장치로 강제성을 띤 평화를 만들어놨어도, 사람에겐 욕심이 있고 역사는 반복되므로.

그 말이 영 틀린 것도 아닌 게, 세계 곳곳에서 분쟁은 크고 작게 일어났다. 그중 가장 큰 것이 지금 도쿄에서 일어나는 쿠데타였고. 군부는 도쿄 외곽에 베이스를 두고 세력을 확장해 갔지만, 센티넬들의 진압으로 작전이 늦어지자 도쿄 지부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센티넬들이 센터를 방어하느라 시간을 쏟는 동안, 시내의 치안이 느슨해졌다. 평상시보다 훨씬 많은 사건 사고, 범죄 신고가 접수되었지만 센터를 지키느라 상주하는 인력이 늘어 출동이 늦어졌다. 센티넬들이 제 잇속을 챙기느라 그렇다, 센터를 과잉보호한다고 하는 말이 많았다. 쏟아지는 출동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근무 시간이 늘었다. 센티넬 가이드 가리지 않고 센터의 모두가 과로 중이었다. 의주와 니콜라스가 잡았던, 다음 휴무 때도 같이 놀러 가자는 약속은 무한정으로 미뤄졌다. 의주가 니콜라스를 봐도 대부분은 곯아떨어져 자는 중이었고, 의주는 전처럼 니콜라스가 깰 때까지 기다려 줄 새 없이 다음 세션을 하러 가야 했다.


니콜라스가 의주의 얼굴을 까먹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니콜라스의 커뮤니케이터에 메신저가 왔다. 의주로부터였다. <니콜라스, 오늘 시간 있어?> 이어서 문자가 몇 개 더 왔다.


<많이 바쁘겠지만>

<오늘 자정 전에>

<시간 되면 잠깐 볼 수 있을까>


의주가 니콜라스를 찾는 건 처음이라, 니콜라스는 바로 답장했다.


<지금 저녁 먹는 중인데 먹고 잠깐 봐도 돼>

<그럼 내 방으로 와줘>


니콜라스는 괜히 들떠 먹던 밥을 다 버리고 기숙사로 향했다. 의주의 방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제 방으로 돌아가 양치도 했다. 방금 밥 먹었으니까.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시계를 보니 아직 여섯 시 이십 분이었다. 저녁 쉬프트는 일곱 시 반부터니까 한 시간 남짓이 남았다. 의주의 방문 앞에 서서 똑똑, 두드리자, 의주가 문을 열고 니콜라스를 맞이했다. 그런데 방이 너무 어수선했다.


"의주. 무슨 일 있어? 이게 다 뭐야?"

"니콜라스. 나… 서울로 돌아가."

"서울로… 돌아간다고?"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왜? 요즘 정말 바쁜데? 도쿄 생활이 힘들었나? 무슨 일이 있나? 물론 의주가 언젠가는 떠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긴 했지만, 그 시간이 이렇게 빨리 올지는 몰랐다. 그렇지만, 이렇게 빨리… 의주의 생일 전에. 아무리 바빠도 의주의 생일이 오면, 혼자만의 계획이긴 하지만, 맛있는 걸 먹으러 나가자는 핑계로 한동안 못 쓴 휴가를 신청할 생각이었다. 작은 선물도 준비하려고 했다.



"미안해, 니콜라스. 혼자 가서."

"근데… 왜?"

"나중에 알려줄게."

"지금은 안 돼?"

"응."

"알겠어."


니콜라스는 더러운 방 한가운데에 의자를 끌고 와서 털썩 앉았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내려다보며 얘기했다. 나 너랑 요코하마 간 거 정말 좋았는데. 오랜만에… 가이드 되기 전 같았어. 정말 재밌었어.


"나도 재밌었어. 의주 생일 되면 또 놀러 가려고 했는데."

"내 생일을 기억해?"

"내 생일 거꾸로거든, 나는 7월 9일."

"뭐야! 지났잖아, 말하지."


그때쯤엔 의주랑 그렇게 친해질지 몰랐으니까. 일방적으로 의주한테 호감을 품고 있었을 때니까. 그런 말을 속으로 하며, 니콜라스는 그저 웃었다.


"언젠가 서울 놀러 가면 같이 놀아줘."

"당연하지."

"아쉽다."

"나도."

"의주가 가이딩 해주면 좋았는데."

"고마워."

"나, 사실… 손잡는 가이딩 처음이었어."


갑자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없었던 용기가 막 생기고, 진실의 입이 열린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고 헤어질 거라면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 거 아닐까.


"그래? 어땠어?"

"그냥 누워있는 것보다 훨씬 좋았어."

"다행이다."

"의주는 그런 거 많이 해봤지."


니콜라스가 눈을 흘기며 말하자 의주가 당황하며 웃었다. 너 나를 뭐로 보는 거야! 니콜라스는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의주 너무 자연스럽게 손잡던데.


"나 아무한테나 그런 거 안 해."

"…. 진짜?"

"사실, 우리 누나가 센티넬이어서. 그래서 해줘 봤어. 손잡는 게 훨씬 좋대."


의주가 너무 자연스럽다고 괜히 심술부린 게 너무 민망해졌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럼 나한텐 왜 해준 거야?"

"그건…. 네가 내 이름을 물어봐서."


니콜라스가 고개를 들어 의주를 보자 의주의 양 뺨도 발그레하게 물들고 있었다.


"도쿄에서 내 진짜 이름을 물어본 건 네가 처음이었거든."

"의주도 내 진짜 이름으로 불러주잖아. 그래서 물어봤어."

"그건… 글쎄, 나도 외국인이라 그런가.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니까. 가이드 EJ만 있고 사람 변의주는 아무도 모르잖아."

"…"

"일본어 쓰는 애들은 가끔 서로 자기 원래 이름이나 성으로 부르는데. 친하면. 근데 너한테는 사람들이 그렇게 안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너를 평생 니콜라스로 알았고."

"…"

"그래서 불러주고 싶었어… 싫었던 건 아니지?"

"싫지 않았어."


싫을 수가 없지. 오히려 좋았다. 니콜라스는 의주의 배려와 다정이 좋았다. 말하지 않으면, 오래 관찰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라서 더욱. 의주가 궁금하지 않았더라면, 호감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니콜라스는 손을 내밀었다. 의주가 예의 동그랗게 뜬 눈을 하자 니콜라스가 손잡아줘, 하고 투정 부리듯 말했다. 의주가 손을 잡으며 조금씩 가이딩을 해줬다. 조금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도 같았다.


"갑자기 떠나게 됐지만,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어."

"나도… 의주 보고 싶었어. 바빠서 계속 못 봤잖아."


그리고 한 번 더, 니콜라스는 용기를 내본다.


"있지 의주, 열아홉부터는 공식적으로 점막 가이딩도 되잖아."

"그렇지."

"그럼 너… 점막 가이딩은 해봤어?"

"…아니."

"나 사실, 궁금했거든."

"…"

"의주가 손잡았을 때… 손만 잡아도 좋은데 점막 가이딩은 얼마나 좋을까."

"…"

"일 년 남았네. 언제 기다리지."


왜냐하면, 의주는 조금만 봐도 니콜라스가 원하는 걸 금방 알아채는 사람이니까.


"궁금하면…."


니콜라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다행히 그 소리는 의주가 조심스레 묻는, 지금 해볼래? 라는 말에 묻혔지만.







1년 1개월 뒤


니콜라스는 지난 일 년간 열심히 근무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인명피해를 내지 않으면서도 도쿄 쿠데타 진영의 베이스캠프를 쑥대밭 내는 전략을 짜서 시행한 덕이었다. 본거지와 무기, 전략 데이터 등을 잃은 군부는 항복을 선언하고 하나씩 재판에 회부되었다. 의주가 떠나던 날 저녁 근무에 무단결근하는 바람에 징계를 받을 뻔했지만 니콜라스는 거의 센터의 얼굴이나 다름없고 지금까지 (사람들은 생긴 것만 보고 니콜라스의 행실에 대해 의심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매우 성실했던 행동거지가 정상 참작되어 간부진도 경고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그걸 무마하기 위해 크게 한 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조금 과감한 결단을 내렸던 것도 있지만.

어쨌든, 남은 열여덟 살을 센티넬 활동 이후 제일 열심히 했던 건 갑자기 욕심이 생겨서였다. 타이베이에서 근무하던 저를 어린 나이에 도쿄로 옮겨놓은 건 어른들의 결정이었지만, 니콜라스는 열아홉이 되며 성년 자격을 얻었다. 성년이 되고 나서도 접촉 가이딩은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대신 자기 마음대로 발령지를 신청할 수 있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저번 주에 인사이동 안내가 나왔다.

도쿄 지부에서는 환송회를 해줬다. 니콜라스의 추종자들이 이제 니콜라스 없으면 도쿄 지부는 어떻게 하냐고 우는소리를 했다. 니콜라스는 마지막이니만큼 모두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니콜라스가 지부 이동을 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한동안 기사가 여럿 떴다. 도쿄 쿠데타 진압의 공이 니콜라스에게 있었으니, 계속 도쿄에 남았으면 초고속으로 간부 승진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니콜라스는 어드밴티지도 포기하고, 페널티도 감수하고 지부를 옮기는 거였다. 말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공항 입국장에도 취재진이 몰려있었다. 카트를 끌고 나오다가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고 니콜라스는 깜짝 놀랐다. 지부 이동의 이유를 묻는 취재진에게 니콜라스는 웃으며 답했다.


"서울에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취재진을 조금 헤치고 나오자, 서울 지부에서 나왔다고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고개를 들어 보자 서너 명 되는 직원들 사이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솟아있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웃고있는 익숙한, 그렇지만 그리운 얼굴.


"주주!"


직원들은 제 짐을 받아 주차장으로 길을 안내했다. 그들을 뒤따라가던 니콜라스를 보고 의주는 대열에서 빠져나와 니콜라스 옆에 와서 섰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니콜. 보고 싶었어."

"나도."

"오는데 피곤하진 않았어?"

"아니, 비행시간 짧아서."

"음… 그렇구나."

"응."

"그럼 가이딩도 필요 없겠네."

"어?"


의주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그제야 니콜라스가 의주를 보고 팔을 퍽퍽 때렸다.


"아냐. 나 엄청 피곤해. 도착하자마자 가이딩 해줘. 막 지금 쓰러질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의주는 니콜라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유 그럼요 가이딩 해드려야죠. 그거 받으러 서울까지 오셨는데. 니콜라스는 고개를 돌려 취재진이 아직 남아있는 걸 보고 의주에게 눈치를 줬다. 의주가 팔을 내렸다. 그래도 얼굴의 웃음기는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전쟁이 일어나든, 신과 국가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든, 도시가 깡그리 사라지든, 인류의 절반 이상이 생을 마감하든, 죽지 않는 한 삶은 계속된다. 처절하게 망가진 세계에서 남은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왜 존속을 선택해야 하는가. 왜 삶은 재건되어야 하는가. 조금 더 지엽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무엇 때문에 인간은 영원한 안식이라는 죽음 대신 절망 속에서도 삶을 선택하는가.

종교가 아직 건재하던 구세계 시절, 지상에 내려왔던 천사는 한 소설가의 입을 빌려 본인이 찾은 답을 내놨다. 인간은 사랑으로 사는 것이라고. 니콜라스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는 아니지만, 니콜라스가 찾은 답도 비슷했다. 금방 죽어도 좋을 것 같은 사람을 붙잡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 덕분에, 죽음의 공포에 내몰려있을 때 저를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사람 덕분에, 아무도 보지 못하는 외로움을 알아주는 사람 덕분에 그래도 살 수 있다고. 그리고 그 행동들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물론 의주와 함께 있어도 니콜라스의 삶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여전히 사건이 일어나고, 출동해야 하고, 때로는 자다가도 불려 갈 것이며, 유명세에 시달릴 것이고, 무례한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고, 전투는 다 끝났어도 기억 속에 남은 총성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행복의 순간은 짧을 것이고 삶은 지루할 만큼 길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게 삶을 버릴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걸 니콜라스는 이제는 안다. 전쟁 속에서도 평화를 위한 노력이 헛되지 않듯, 욕심 많은 사람이 세상을 망친다고 해도 누군가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하는 선행 하나가 의미 없어지지 않듯.

어떤 절망에 부딪혀도 달려와 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때마다 기꺼이 옆에 있어 줄 사람이 있으니까, 니콜라스는 더 이상 오늘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집에 돌아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잡아줄 사람을 생각한다. 그것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