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방랑론
山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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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계획은 어디까지 위대할 수 있을까?
변의주는 신성 모독임을 알면서도 예전부터 그것이 궁금했다. 정확히 말해 변의주에게 기생하여 변의주의 정신을 지배하는 일종의 기생충은. 그들에게는 13 은하군 가운데 열여섯 번째로 생명체가 확인된 행성의 유일 문명체(속칭 인간)처럼 뜻을 담아서 지어지는 이름 같은 것은 없었고, 전체가 하나가 되는 문양으로 명명되었기에 언어로 그들을 식별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변의주로 부름을 받은 지도 벌써 25년이다. 그것은 변의주 이 전과 더 이전에도 뜻있는 이름을 소유한 채로 성체까지 자랐고, 위대한 계획대로 사망했다. 변의주는 그것의 세 번째 일생 또는 육신이었다. 위대한 계획대로라면 변의주는 근거지 기준 6년 2개월 뒤 사망해야 했다.
변의주가 숨을 몰아쉬며 반쯤 엎어져 있던 몸을 굴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푸른 하늘 아래로 진눈깨비가 날렸다. 머리가 지나치게 멍했고, 숨이 갈수록 가빠왔다. 등허리가 뜨뜻한 피로 온통 축축했다. 거리는 조용해서, 죽어가는 변의주를 보고 달려와 그를 어떻게든 살려낼 만한 인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허전한 어금니를 혀로 핥아내자, 목구멍에서부터 역류하는 비린 맛이 느껴졌다. 변의주는 비로소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온 것을 느낀다. 벌써 두 번의 죽음과 여섯 번 정도의 임사 체험을 겪었지만 갑작스러우면서도 다시 살아날 기약이 없는 죽음은 처음이라 약간은 두려운 것 같기도 하다. 이대로 변의주가 죽게 되면 그것은 어떻게 될까. 인간이 가는 천국 혹은 지옥으로 떨어질까, 혹은 그것들의 사후세계로 가게 될까. 애당초 변의주와 그것은 얼마나 다를까? 니콜라스를 사랑한 쪽은 그것일까, 변의주일까.
그의 본명은 왕이샹이었지만, 영어 이름인 니콜라스로 더 자주 불렸다. 미국 소재 대학에 재학 중이기도 했지만, 당시까지 열 손가락이 넘는 나라에서 최소 3개월 이상 체류했던 경험이 있는 그 자신이 니콜라스라는 이름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본명은 발음이나 한자를 알려줘야 해서 귀찮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들만 본명을 불러주는 편이 더 즐겁다고 했다. 변의주는 그와 안면을 트고 한 달 만에 본명을 알게 되었는데, 니콜라스라는 이름을 오래 들어왔다는 이유로 본명보다는 니콜라스를 애용했다. 처음에는 본명 대신 니콜라스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서운한 티를 내는 것 같더니, 이후에는 입을 대지 않았다. 변의주는 그것이 단순한 수긍인 줄로만 알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체념이었다. 그런 식의 사소한 체념의 적립이 자주 있었다.
처음 니콜라스를 만났을 때 그는 오키나와현의 이시가키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대학을 휴학하고 무계획 일본행을 결정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일본에서도 거처를 여러 번 옮겨 다녔다. 도쿄에서 요코하마, 요코하마에서 오키나와, 오키나와에서도 나하로부터 이시가키까지. 변의주의 자취방이 그의 다섯 번째 거처였다. 변의주의 개강 후 몇 번 도쿄까지 힘든 발걸음을 가졌던 니콜라스가 참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방을 빼 날아온 탓이었다. 이시가키의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온종일 카비라 만 근처의 스쿠터 대여점 아르바이트를 했었다가, 신주쿠 빈티지 샵 직원으로 스카우트된 니콜라스는 날이 갈수록 하얘졌었다. 후에 관계의 파국을 선언하는 니콜라스를 말없이 바라보던 변의주는 니콜라스의 살갗이 창백하게 질려 있다고 느꼈다.
널 더 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아.
그것이 니콜라스의 최후 일격이었고, 변의주는 이때 심하게 얻어맞은 탓으로 아주 오래도록 회복하지 못했다. 종강을 한 달여 앞두고 휴학을 선택해야 했을 만큼. 변의주는 그 전의 생애에서도 계획했던 일을 감정으로 말미암아 마치지 못했던 역사가 없었다. 본인이 위대한 계획의 일부라는 것에 대한 자긍심이 그에게도 있었다. 위대한 계획이 바라는 만큼의 신앙은 아니었겠으나. 얄팍한 믿음 때문일까, 변의주는 니콜라스가 남기고 간 하잘없는 것들을 바라보는 일도 어려웠다. 고작해야 칫솔이나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노트북 받침대, 냉장고 한편의 냉동 딸기에 불과했을 뿐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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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그를 만난 것 역시 위대한 계획의 일부라고 믿었다. 외계 문명의 탐구와 체험을 존재 목적으로 계획된 그것에게 니콜라스만 한 자원이 또 있을까?
확실히 니콜라스는 그 나이대에서는 드물게도 정말 많은 정보 값을 지닌 인간이었다. 니콜라스는 다큐멘터리 감독인 아버지를 따라 중앙아시아와 남아메리카를 넘나들며 자랐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어머니를 따라 유럽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후 어머니를 떠나 시카고의 종합대학에 진학했다. 이유를 물으니 니콜라스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나중에는 어머니에게 애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또 어떤 때에는 그냥 어머니와 멀어지고 싶었다고도 했다. 미국의 대학에 와서도 그의 방랑 기질은 좀체 잦아들지 않았다. 아버지와 가장 긴 시간을 보냈던 아르헨티나에서 첫 방학을 통째로 지냈고, 두 번째 방학은 아이슬란드와 인도네시아에서 보냈다. 그러고 다음으로 맞는 방학에는 대뜸 일본으로 날아왔다. 아는 일본어라고는 아리가또와 스미마셍밖에 없을 때.
그가 변의주에게 처음 했던 말도 스미마셍이었다. 오후에 딱 하나 있던 근대 문학 교양 수업을 마치고, 인문관 앞 벤치에 멍하니 앉아 대학 동기 D의 실습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스미마셍!
뒤를 돌아보니 벤치 뒤쪽 낮은 대지에 마련된 농구장에 반쯤 몸을 걸친 제법 사나운 인상의 남자가 변의주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상의를 탈의했거나 민소매 차림의 남자들이 땀을 줄줄 흘리며 변의주를 멀겋게 쳐다보고 있었다.
“죄송한데, 농구 한 게임 하실래요? 한 사람이 비어서….”
니콜라스가 잠깐 망설이더니 눈을 조금 빨리 깜박거리며 물었다. 인상과는 달리 정중한 말투와 약간 경직된 표정이 꽤 순진해 보였다. 이것은 후의 회상이고, 당시에는 낯선 남자에게 갑작스럽게 지목되느라 적잖이 놀란 변의주는 제안을 덥석 거절해 버렸다.
“죄송한데 제가 농구를 잘 못해서요.”
“아.” 니콜라스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키가 크시잖아요.”
뭐지. 변의주는 키가 크면 당연히 농구를 잘한다는 확고한 편견의 소유자를 황당하게 올려다봤다. 변의주의 미묘한 눈빛에 니콜라스가 시선을 피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안 될까요?”
변의주는 본래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사람이었다. 미적지근하게 결정을 유예하는 것은 성실한 조사관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 양식이었으니까. 그에게 한 번 판단된 사항은 대개의 경우 원심을 따랐다. 따라서 이미 길거리 농구 참여에 아니요를 선언한 그로서는, 햇빛을 등진 채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자세로 재차 선택을 종용하는 남자로 인해 생전 해본 적 없는 길거리 농구에 끼어들게 되었던 결정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아마 니콜라스가 D의 지인이라 이전에 한 번 마주쳤던 것이 무의식중에 기억났던 건지도 모른다. 니콜라스가 변의주를 어렴풋이 기억해 내고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거절의 가능성을 감수하고 다시 한번 더 제안한 것처럼. 변의주는 위대한 계획의 신도답게 이미 이때 니콜라스와의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짐작할 수 있었다. 관계가 출발선에 섰다.
변의주는 니콜라스를 잠시 쳐다보다가 배낭을 벗어두고 천천히 일어섰다. “못해도 뭐라고 하면 안 돼요.”
니콜라스가 그때 뭐랬더라. 아마 당연한 소리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15분 동안 고작 레이업 한 번에 그친 변의주를 신나게 놀려댔고, 변의주는 황당한 감정을 금치 못했다. 이후 D가 나타나며 두 사람은 통성명을 했고, 함께 저녁 식사를 했고, 메신저 아이디를 주고받았다. 니콜라스는 오키나와로 돌아가서도 연락이 잦았다. 하루 한 번은 변의주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카비라 만의 사진을 자주 보내줬고, 가끔은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해변 사진엽서를 부치곤 했다. 그날 패션이 마음에 들면 셀피를 찍어 보냈고, 며칠에 한 번꼴로는 변의주의 얼굴을 궁금해했다. 평소에 용건이 없으면 딱히 메신저를 사용하지 않던 변의주는 니콜라스의 이런 행태에 대해 의문이 있었다. 니콜라스는 왜 항상 나를 궁금해할까. 얼굴을 맞댄 건 고작 이틀 정도였는데. 그러나 변의주 자신도 니콜라스가 시시콜콜 털어놓는 잡다한 일상에 재미를 느꼈다. 아르바이트 점장이 얼마나 깐깐한지, 출근길에 마주치는 강아지가 얼마나 귀여운지, 요즘 꽂힌 유튜브 영상은 무엇인지, 햄버거 세트를 얼마나 많이 먹을 수 있는지.
한 달간의 펜팔 친구 노릇 끝에 변의주는 개강 직전 이시가키행 항공권을 끊었다. 니콜라스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니콜라스는 대단히 기뻐하면서도 서프라이즈였다면 더 좋았을 거라며 툴툴댔다. 이시가키에 도착해 니콜라스가 한창 아르바이트 중일 카비라 만으로 향하면서 변의주는 니콜라스가 보냈던 수많은 사진을 원본에 직접 맞춰볼 수 있었다. 니콜라스가 직접 대여해줬을 분홍색 스쿠터를 탄 커플 몇이 도로를 따라 사라져갔다. 등에는 배낭, 한 손에는 녹아버린 밀크쉐이크, 다른 한 손에는 코울슬로와 치킨버거가 든 봉투를 들고 한참을 걸어온 변의주는 팝송이 크게 흘러나오는 스쿠터 대여점 안에서 대걸레를 밀고 있는 니콜라스를 발견했다. 자신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니콜라스를 보고, 변의주는 맨 먼저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진작 와볼 생각을 못 했을까, 하는 생각을.
실제로 만난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새롭게 단점이 보이지는 않았다. 외려 목소리와 표정을 입힌 니콜라스의 발화는 훨씬 다채롭게 느껴졌다. 점심을 아르바이트 처에서 해결한 후에는 관광객들 사이에 끼어서 글라스 보트를 탔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해변을 기웃대던 둘은 결국 더위에 굴복하고 니콜라스의 자취방으로 갔다.
작은 부엌이 하나 딸린 니콜라스의 자취방은 그리 넓지 않았는데, 곳곳에 옷가지가 쌓여 있고 각종 포스터와 인테리어 장식들이 붙어 있어서 더더욱 좁아 보였다. 변의주가 현관에서 주춤거리는 사이, 니콜라스는 성큼성큼 걸어들어가 앉은뱅이 탁자를 폈다. 탁자에는 이시가키섬 지도가 인쇄되어 있었다.
“방이 좁아서 그래.” 변의주가 좁은 통로를 어떻게 지나가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자 니콜라스가 삐죽댔다.
저녁으로는 니콜라스가 전날 사온 이시가키규 함바그를 구워 먹었다. 마땅한 반찬도 없고, 함바그도 썩 잘 구워진 편은 아니었으나 그런 대로 맛이 났다. 창을 활짝 열고 고기를 굽고 있으려니 변의주의 뒷목에서부터 땀이 흘러내렸다. 밖의 먹먹한 소음과 매미 울음, 고기 굽는 소리가 한데 섞여 변의주의 귓전을 때려댔다. 굽기에 집중하고 있던 니콜라스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맛있냐며 재차 확인해왔다. 맛있어, 맛있어. 변의주가 따봉을 날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니콜라스가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순전히 변의주 때문에 샀다는 과일맥주를 마시며 둘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니콜라스는 황도 통조림을 먹다 말고 자작곡이랍시고 일렉 현을 몇 번 튕기며 가사 없는 곡조를 흥얼거렸는데, 앰프에 연결되지 않아 아주 형편없는 소리가 났다. 니콜라스는 기타 피크도 분홍색이었다. 일전에 동아리에서 기타 치는 법을 배웠던 변의주도 덩달아 연습곡 몇 가지를 연주했으나, 마찬가지로 소리가 어설펐다.
침대가 놓인 벽면에는 니콜라스의 사진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변의주는 니콜라스가 침대로 쓰는 높은 매트리스에 앉아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대부분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인화한 것으로, 마음 가는 대로 셔터를 누른 듯한 느낌이었다. 무척 신경 쓴 티가 나는 인스타그램 업로드용 사진들과는 달랐다. 식욕 저하에 특효일 것 같은 음식 사진, 바닷가에서 폭죽을 쏘아 올리는 사진, 야시장을 배경으로 닭꼬치를 입안에 욱여넣고 있는 사진, 짧게 깎은 머리의 니콜라스가 허리를 굽힌 채 피아노를 치고 있는 사진, 책상에 엎드려 정신없이 자고 있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사진.
“이건 누구야?”
“친구.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
니콜라스가 손바닥으로 사진을 쓱 쓸어내리며 말했다. 니콜라스의 옆얼굴에 낯선 표정이 비쳤다 사라졌다. 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변의주는 문득 이전의 약속을 기억해 냈다.
“전에 라인할 때, 직접 만나면 본명 가르쳐준댔잖아.”
“아.” 니콜라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갑자기 부끄럽네. 왕이샹이야, 본명.”
니콜라스가 우물대자 변의주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안 들려어.”
“왕이샹이라고!”
“이샹?” 니콜라스의 급발진에도 변의주가 태연하게 되물었다. 니콜라스의 빨개진 귀끝이 고개를 따라 위아래로 흔들린다. “좋은 이름이네.”
“뜻도 모르면서.” 니콜라스가 입술을 오므리며 웅얼웅얼 쏘아붙였다.
“뜻이 뭔데?”
“이는 크다는 뜻이고, 샹은 난다는 뜻.” 니콜라스가 팔을 작게 파닥이며 말했다. 변의주는 맹하게 웃으며 오오, 하는 소리를 냈다. “의주는 뭔데?”
“의는 옳다는 뜻이고, 주는 마을이라는 뜻이야.”
“에, 옳은 마을?”
“뭐, 뭐. 어쨌든. 네 이름 좋네.”
“거짓말 같아.”
“아니거든. 애정을 갖고 지은 모든 이름은 다 좋아.”
변의주의 말에 니콜라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쳐다본다. 지나치게 감상적인 말이었나.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걸. 뜻을 단순히 개체의 식별에만 두고 순서에 따라 개성 없이 지어지는 그것의 이름을 생각해보면, 정말 그랬다. 변의주는 이름이 겹쳐서 가끔은 제 기능을 못 하는 것도 인간이 향유하는 낭만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니콜라스가 미묘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멋진 말 하네, 의주 주제에.”
“야이.”
나란히 누워 잠들기 직전 반수면 상태에서 보았던 영화는 대만의 로맨스 영화였다. 니콜라스가 고른 것으로, 변의주는 영화 시청 중에 매트리스 위에 앉아 벽에 기댄 자세로 잠이 들었다. 얼핏 니콜라스의 집중하는 옆얼굴이 기억나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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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이때부터 그것은 자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채야 했다. 인간의 중추에 기생하여 생활 방식과 행태를 습득하는 조사관에게는 객관적인 시각이 필수적이었다. 숙주의 지적 능력이 발달함에 따라 그것들은 숙주와 기생체인 자신의 피아 식별을 분명히 하고, 믿음을 기르며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때문에 성숙한 숙주를 조종하는 그것들은 대부분 실제 지구에서의 삶과는 다소 박리된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 애당초 공감 능력이나 감정보다는 이성과 합리주의에 초점을 맞춰 스스로의 군집을 진화시켜 온 그것들에게 인간은 지나치게 감성적일 수밖에 없다. 변의주를 지배한 그것도 이전 생과 그 전의 생애에서는 그러한 감상을 받았다. 인간들은 사소한 일로 감정이 통제할 수 없이 휙휙 바뀌었고, 그 감정의 상태가 삶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간혹 그것들 중에는 과거 자신들의 조상도 같은 일을 겪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도 있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진화형이 본인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대부분은 이 주장이 특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것들이 파악한 인간의 진화사에 있어 본인들과 비슷한 생활 양식을 보인 사례는 없으니까.
결국 그것은 인간과 달라야 했고, 대개의 인간은 그것을 대할 때 기시감을 느끼고는 했다. 반복된 생에서 그것의 생활 양식은 점차 인간에 가까워져 3세대쯤 되어서는 어렵지 않게 사회화에 성공할 수 있었으나, 무심하다는 평가를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것들은 기이할 만큼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 혹은 묘하게 완고하고 박정한 사람들로 인간들 사이에 섞였다. 그리고 기원부터 전혀 다른 종인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한 전적이 전혀 없었다.
변의주는 세 번째 생애 주기에서 이 모든 역사를 깨뜨린다.
변의주는 플립플랍 슈즈를 신은 니콜라스의 배웅 아래 다음날 바로 도쿄로 복귀했다. 니콜라스와의 대화는 간간이 지속되었다. 변의주는 개강을 맞았고, 니콜라스는 극성수기의 종말을 맞았다. 무더위가 차츰 내리면서 니콜라스는 며칠 휴가를 내 항공권을 예매했다. 네가 맛있다고 했던 규동 먹으러 가자! 니콜라스는 웃는 고양이 스티커를 끝으로 한동안 변의주의 라인에 답장이 없었다. 보통은 그다지 늦지 않게 답장하던 니콜라스의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에 조금 의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변의주는 밀린 과제를 처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인문학 전공이라 그것들이 이룩해낸 눈부신 문명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그때였다.
이시가키 시립 병원인데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 한국에서는 식상하게 쓰이는 놀람 내지 좌절의 표현인데, 변의주는 이를 실제로 경험하게 될 줄 전혀 몰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외려 웃음이 나올 만큼.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중추 신경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왼쪽 하반신이 아예 바퀴에 깔렸었다고. 긴급 수술에 들어갔지만 경과가 좋지 않고, 전화번호부에 가족으로 보이는 연락처가 따로 저장되어 있지 않아 가장 최근에 연락한 사람인 변의주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어떻게 이시가키까지 갔는지 모르겠다. 공항에서 반나절을 꼬박 기다려 가장 이른 비행기를 탔고,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했을 당시 막 수술실에서 나온 니콜라스는 중태였다.
이후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인간의 뇌는 트라우마를 유발할 만한 문제 상황에 대해 종종 기억을 셧다운한다는 내용을 배운 적이 있다. 그것들도 집단 기억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지만,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혼돈이 온 경우는 처음이었다. 집도의가 나타나 급하게 경위를 설명했으나 변의주에게 그런 것은 들리지 않았다. 니콜라스의 창백하고 부은 얼굴에는 산소 호흡기가 연결되어 있었고 쉭쉭 대는 소리가 났다. 할 수 있는 조치는 전부 했다는 변명 같은 호소가 귓가를 맴돌다 흩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마음의 준비를….
인간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죽기도 하나? 첫 번째 생에서는 내전이 활발한 국가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감정 이입도가 높지 않아 인간의 생사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서 불과 몇 주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었던 이가 예고도 없이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 선 변의주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러한 물음밖에 없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 살아남는 것의 비일관성, 죽음이라는 인간의 평등한 결말, 그런 것들. 변의주가 인간사로부터 충분히 분리되어 있었더라면 그런 질문 대신, 위대한 계획이 인간의 트라우마 반응을 보기 위해 설계한 상황일 것이라는 동떨어진 생각으로 떨어졌겠지만 변의주는 위대한 계획의 생각일랑 추호도 하지 않은 채였다. 신앙의 씨가 마른 순간이었다.
새벽에 갑작스러운 알림음으로 깨어난 변의주는 심전도가 아주 불행한 방식으로 요동친다는 것을 알아챘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처럼 평탄한 직선은 아니었지만, 일정한 숫자로 표시되던 맥박이나 산소포화도 부분에 물음표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모니터에 깜박거리는 그것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변의주는 떨리는 손길로 니콜라스를 마구 흔들어보았지만, 어쩐지 뻣뻣하게 느껴지는 살결의 니콜라스는 맥없이 베개로부터 머리를 떨구었다. 알림음이 이대로 계속해서 울리면 당직 간호사가 찾아올 테고, 니콜라스는 꼼짝없이 사망 선고를 받게 될 것이었다. 변의주는 잠에서 막 깨어난 상태였고, 공항에서 날밤을 새우느라 꼬박 이틀간은 잠을 자지 못했었고, 이미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사고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였다. 변의주는 니콜라스의 죽음 이상의 공포를 떠올리지 못했다.
때문에 변의주는 니콜라스를 죽음으로부터 강제로 끌어올렸다. 결심과 행위 사이에 아무런 연착이 없는 완전한 충동이었다.
그것은 변의주로서의 생이 위대한 계획에 맞게 끝나기 위해 준비된 캡슐을 니콜라스의 어금니로 밀어 넣었다. 그 캡슐은 그것의 물질대사로부터 정해진 개수만큼 만들어진다. 이번의 경우, 변의주는 단 하나의 캡슐만을 허락받았다. 그것들의 오버테크놀로지의 산물 그 절정에 있는 물질인 캡슐은 대단히 압착된 인공 미니셀과 유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생체 정보에 맞춰 손상된 부분을 메꾸거나 도려낸다. 결론적으로는 숨이 끊어진 상태에도 일정 시간 이내라면 회복하도록 하므로, 위대한 계획에 따른 수명이 다하기 전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을 때를 대비한 물건이다.
니콜라스는 그렇게 눈을 떴다. 짙게 내린 어둠 사이로 반들반들한 흰자위가 드러났다. 자신이 불어넣은 생명력으로 새롭게 주조된 피조물을 보고 변의주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라도 된 것처럼 크게 감격했다. 그간 느끼지 못했던 창조의 가장 심오한 신비가 있었다. 니콜라스가 억지로 목을 꺾어 변의주를 바라봤다. 투명한 호흡기에 짧고 분명한 입김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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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의주는 니콜라스를 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을 핑계로 다시 도쿄로 날아갔다. 니콜라스의 기적적 회복 사건에서 멀어져 제3자가 되고 싶기도 했고, 그날 있었던 감정적 변화를 무작정 회피하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의 니콜라스의 소식은 인스타그램과 겹지인을 통해 들었다. 거의 심정지 상태였는데 다시 살아났다더라, 진짜 걔 인생도 참 파란만장하다. 니콜라스의 인생에 억지로 변곡점을 추가한 당사자는 옆에서 허허실실 웃었다. 사고 소식에 전전긍긍하다 비행기까지 타고 날아간 사람이 아닌 척하며. 회복 이후 니콜라스로부터 라인도 몇 차례 왔다.
의주, 나 보러 왔었다며? 얘기 좀 해. 요령 없는 변의주는 티 나게 화제를 돌리거나 맥을 대놓고 끊어댔다. 낫고 있다니 다행이다, 회복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피곤할 텐데 좀 쉬어. 나도 시험이 있어서….
며칠 뒤 니콜라스의 통보가 불시착했다. 나 신주쿠. 집 비어? 수업 중에 뜬금없는 역사 사진을 전달받은 변의주가 급하게 강의실을 나왔다. 하품하던 그의 동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변의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변의주가 푹 젖은 뒷머리로 도착했을 때, 이미 니콜라스는 커다란 나이키 더플백을 메고 씩씩대며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분쇄 골절되었다던 왼쪽 다리에 반깁스가 감겨 있었지만 목발은 없었다. 하얀 얼굴은 생기와 땀방울로 빛났다.
살아 숨 쉰다. 변의주가 순간 이는 현기증에 문고리를 잡고 현관문에 잠시 기댔다. 나의 그것이 살아 숨 쉰다. 변의주의 예비 목숨을 대가로.
“왜 그래?” 내내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니콜라스가 놀라 변의주의 팔뚝을 붙잡으며 물었다.
“아니, 뛰어왔더니 좀….” 변의주가 니콜라스의 손길을 반사적으로 털어내자 니콜라스가 다시 미간을 좁혔다. “다른 데는 이제 괜찮아?”
“응. 다리도 거의 나았어. 이런 경우는 처음 본대.” 니콜라스가 왼쪽 다리를 올렸다 놓으며 말했다.
그렇겠지. 변의주가 속으로 대꾸했다.
“원래 이렇게까지 회복될 수가 없대. 이러면 안 된대.” 니콜라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만든 거, 의주지?”
결국 일은 순리대로 흐르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완전한 비밀은 없다. 두려워하던 때가 왔다. 변의주가 바짝 마르는 입안을 혀로 훑어냈다. 변명 시뮬레이션만 3주간 했으니, 남은 건 변의주의 연기력뿐이다.
“일단…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자연스럽게 더플백을 받아 들고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변의주의 등을 니콜라스가 사납게 쏘아보더니, 이윽고 힐문한다.
“의주 맞지? 의주가 살린 거지?” 니콜라스가 변의주의 등을 바싹 쫓아가며 캐묻는다. “어떻게 한 거야? 정체가 뭐야.”
“무슨 소리야.”
변의주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며 태평한 척 대꾸했다. 니콜라스가 팔짱을 끼고 위풍당당하게 서서 말했다. “나 바보 아니야. 확실히 나 죽었었다고.”
“여기 잘 살아 있는데?”
“그러니까! 너 뭘 한 건데.”
“무슨 짓. 내가 널 다시 살리기라도 했다고? 어떻게.”
“그건 네가 알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변의주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뜨는 것을 눈치챈 니콜라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왜 먼저 갔어? 병문안 왔었다며.”
“너 괜찮아진다길래 왔지. 수업도 들어야 하고.”
변의주의 간결한 답변에 니콜라스가 눈을 천천히 깜박인다. 순간 변의주의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이건 틀린 답변이다. 이유는 몰라도. 당시 변의주는 니콜라스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경험이 많지 않았으므로, 그의 기분을 맞추는 데 능숙하지 않았다. 변의주는 이시가키에서 니콜라스가 커피를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먹고 커피를 권했을 때의 반응에 한동안 쩔쩔맸던 때(커피 안 좋아한다는 걸 까먹은 게 아니라, 카라멜 마키아토니까 괜찮은 줄 알았지)를 떠올렸다. 그게 니콜라스가 서운함을 내비쳤던 최초의 경험이었고, 그런 상황 자체가 니콜라스의 애정의 척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였다. 이때는 앞선 몇 번의 실랑이로 직감이 약간 발달한 상태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수업 들어?”
니콜라스는 감정을 숨기는 데에는 서투른 주제에 자주 본의를 숨겼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속이 상했다고 한 번에 설명해 주는 일이 없이, 여러 사고의 점프를 거쳐 조각난 말의 파편만을 단서로 던져주었다. 그 나름의 자존심이지만, 변의주에게는 의미 모를 퍼즐 한 조각에 불과했기에 큰 그림을 알아맞히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수없이 많은 테스트케이스가 존재하지 않는 한.
아주 많은 대화로 서로에게 아주 많은 희미한 상처를 낸 끝에 니콜라스의 사고 패턴을 어느 정도 깨우친 현재의 변의주는, 따라서, 니콜라스의 이 질문에 대한 그럴듯한 답변을 적어도 대여섯 개는 낼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변의주는 그냥,
“그렇지…? 이제 다음 학기에 졸업하니까.”
같은 투명한 답변밖에 낼 수 없는 생명체였다. 변의주는 이때 조금 더 적절하고 다정한 대답을 내어줬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런데도 변의주에게 수없이 많은 기회를 선사한 니콜라스의 아량 혹은 참을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때 니콜라스는 참을성 있게,
“그럼 왜….”
하고는 말을 따로 잇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자 니콜라스의 정수리만 보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변의주는 이때 니콜라스가 원하는 반응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뒤늦게 해답에 도달한 변의주가 입을 열었다.
“걱정돼서….”
꽤 괜찮은 대답이었다. 니콜라스가 도쿄로 날아오는 동안 열심히 생각했을 따져 물을 것과 정립해야 할 모든 리스트를 순식간에 기억 저편으로 날려버릴 만큼. 이 기점에서 대화의 논리는 길을 잃었다. 니콜라스가 입술을 감쳐물었다.
“걱정돼?”
“응.” 변의주가 조금 황당한 표정으로 답했다. “당연하지.”
“왜 당연한데?”
“그럼 당연히 걱정되지. 내가 사고당했으면 니콜라스도 걱정할 거잖아.”
“나는….” 니콜라스가 고개를 떨구며 뭉그러지는 발음으로 어물댔다. “난, 나는 네 생각보다 더 걱정할걸.”
아하. 니콜라스의 말에 변의주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끌어올린 니콜라스의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근데 먼저 갔잖아.”
변의주는 방금 전의 대답이 약간의 업보였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번 말을 정리해 보았다. 대개 터무니없는 진심을 토로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라 생각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널 걱정하지 않아서 먼저 간 게 아니야. 자신이 없었어.”
니콜라스가 의외의 답변에 변의주의 얼굴을 멀겋게 올려다본다. 변의주는 속으로 정리해 뒀던 문장을 차근차근 말하려고 했지만 니콜라스의 눈빛을 확인하자마자 횡설수설하기 시작한다. 진심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다.
“그…. 그냥 그때 너무 엉망이었어서…너를 볼 용기가 안 났어. 걱정 많이 했단 말이야. 네가 깨어나지 못할까 봐 무서웠어. 그래서 도망쳤어, 미안해. 네가 깨어나면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어.”
니콜라스의 목울대가 잠시 드러났다 꺼졌다. “뭘 주체하지 못하는데.”
“아, 그냥…. 그냥 이런 말들.” 변의주가 거칠게 머리를 털며 대꾸했다. “뭔가 이런 감정적인 게.” 변의주가 도로 니콜라스를 쳐다봤다가 그의 표정을 목격하고 황당한 얼굴로 소리쳤다.
“너 웃어? 나는 진지한데!”
“연락 피한 것도 이래서야?”
“어어,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니콜라스가 별다른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를 좋아해?”
변의주가 퍼뜩 올려다본 니콜라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 아. 변의주의 멍한 표정을 보고 니콜라스가 입을 막으며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게 아니고. 잔뜩 더듬대는 니콜라스를 앞에 두고 변의주가 잽싸게 기회를 가로챘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기회의 여신 이름이 오카시오였나. 때에 어울리지 않게 교양 수업에서 들었던 잡다한 지식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변의주는 생에 몇 번 없는 기지를 발휘해 여신의 머리카락을 잡아챌 수 있었다. 드문 일이었다.
“응, 그런 것 같아.”
“…같아?”
“좋아해, 나도.”
*
니콜라스와 함께 있었던 2년 반쯤 되는 시간 동안 변의주는 전례 없을 정도의 다채로운 감정을 느꼈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감정을 전부 학습했다고 자부할 정도로. 니콜라스와 있으면, 밋밋한 일과는 모두 딴 세상 얘기가 된다. 수술비로 이제껏 모은 돈을 전부 써버렸다고 하긴 했지만 이를 타파하기 위한 명목으로 대뜸 도쿄로 날아와 변의주의 집을 점거해버린 것부터 시작해서, 니콜라스는 정말로 지구를 다이내믹하게 굴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연락도 없이 학교로 찾아와 선배에게 빌린 소형차를 끌고 드라이브를 나가거나, 인스타그램에서 찾았다면서 주말에 라이브 카페나 핫플레이스 같은 곳을 이곳저곳 쏘다닌다거나. 새로운 것이나 계획에 어긋난 것에 취약한 변의주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자 자극제였다. 외출하려다 신칸센을 잘못 타기라도 하면 금방 돌아가기 일쑤였던 변의주지만, 니콜라스와 신칸센을 잘못 탔다가 우연히 맛있는 라멘집을 발견했던 이후로는 점차 마음을 고쳐먹었다. 또 이전에 전자레인지를 돌렸다가 음식을 폭발시킨 이후 요리에 도전하지 않았다가, 니콜라스가 대만의 생선 요리인 송슈이를 먹고 싶다고 해서 큰맘 먹고 생선 손질에 나선 일도 있었다.
“어때?”
변의주가 군데군데 튀김옷이 벗겨져 너덜너덜한 생선을 내보이며 머쓱하게 물었다. 본래 생선에 칼집을 내어 튀겨 다람쥐 같은 모양을 만드는 것이 이상적인 요리지만, 다람쥐는커녕 설치류를 포함해 그 어떤 포유류 같지도 않았다. 니콜라스가 다소 미심쩍은 얼굴로 맛보더니 묘한 얼굴로 말했다.
“못생겼는데…맛은 있다. 에, 왜지.”
“처음인데 이만하면 잘한 거지. 약간 천재.” 변의주가 우쭐한 상태로 말하자 니콜라스가 봐주는 것 없이 흠을 마구 잡아댔다.
“그 정도는 아니야. 여기 완전 새까매. 다 탔어.” 니콜라스가 시커멓게 탄 면을 까뒤집더니 약간 실망한 변의주를 보고 못내 칭찬했다. “그래도 성장하고 있어. 이제 할 수 있는 요리에 송슈이도 넣어. 그럼 이제…3개인가? 라면, 컵라면, 송슈이.”
칭찬마저도 장난으로 끝났지만.
“나 계란도 구울 줄 알거든.”
“대단하네, 주주.” 고작해야 변의주보다 요리 두세 개쯤 더 만들 수 있는 니콜라스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잠에 들기 전에는 나란히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니콜라스는 변의주가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들을 많이 했다. 인생에 있어 추구하는 가치라든가, 롤 모델 혹은 이루고 싶은 목표라든가. 조금 배고픈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다가 뜬금없이 2000년대 텍사스의 사형수라면 최후의 만찬으로 무슨 음식을 요청할지 물어보기도 했다.
변의주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니콜라스가 하도 배고프다 난리를 치길래 새벽에 일어나 레토르트 미트볼을 데워 왔다.
“난 파이널 밀 세트, 이 미트볼이야.” 니콜라스가 미트볼을 세 개째 해치우며 말했다.
“그래?” 덩달아 미트볼 두 개를 먹은 변의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내가 해줄게. 파이널 밀….”
니콜라스가 변의주를 노려보며 삐죽댔다. “진짜 못됐다.”
“야, 내가 뭐?”
어쨌든 같이 잠에 들 때마다 니콜라스가 진행하는 토크쇼가 열렸다. 니콜라스의 질문 뒤, 숙주를 옮겨 다니며 인간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 존재 의의인 그것의 대답은 늘 싱겁게 끝났고, 니콜라스는 변의주의 이야기를 경청한 이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다음 날 오후에 느지막이 일어나서는, 어제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며 머쓱해질지언정. 변의주는 니콜라스의 발화가 쓸데없다거나 재미없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새해 첫날 영국의 어떤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마셨던 핫초코가 맛있었다는 얘기도, 고등학생 때 부상으로 배드민턴을 그만둔 얘기도, 아르헨티나에서 친구와 함께 지프를 타고 빙하를 보러 갔던 일도, 자주 가던 바가 문을 닫던 날 낡은 주크박스 앞에 앉아 같은 곡을 한참이나 들었던 얘기도 전부 재밌었다. 이야기하면서 시시각각 달라지는 니콜라스의 어렴풋한 얼굴을 바라보고, 잠에 드는 순간까지도 니콜라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즐거웠다. 가끔은 니콜라스의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친구가 있으면 꽁해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니콜라스는 변의주에게 지구가 이렇게 넓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알려주기 위해 위대한 계획이 예비하신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넓은 세계에 자신이 한 축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니콜라스가 언젠가 추억할 수많은 이야깃거리와 벽에 붙은 사진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변의주는 니콜라스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변의주는 인간도 아니고, 니콜라스에게 전해줄 수 있는 넓은 세계도 없었고, 번번이 니콜라스의 감정을 따라가지 못해 실망시키곤 했으니까. 나아가서는 니콜라스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사랑했다면 더욱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고민의 존재까지도 미안했다. 그래서 변의주는 성미에 맞지 않게도 니콜라스에게 언제부터 자신을 좋아했느냐고 종종 물었었다. 니콜은 내 어디가 좋았어? 변의주가 물으면 니콜라스는 귀엽다고 웃어댔다.
처음에는 변의주의 귀여운 외모를 들었다. 동글동글한 눈이나 뺨, 은근히 올라간 입꼬리 같은 것들. 주주 귀여우니까. 아주 가끔은 뜬금없이 귀가 좋다고 했다. 뭔가 말하려 할 때 허리를 살짝 숙여서 귀 기울여 듣는 게 좋다고. 그 아래에 동그랗게 말린 뒷머리도. 어렸을 때랑 똑같이 뻗친 게 귀엽다고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른다. 변의주에게 원본 사진을 받았던 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다가 애 낳았냐는 질문을 수십 개 받았댔다. 이외에도 니콜라스가 언급한 변의주의 좋은 점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처음 좋았던 부분보다는 그때그때 발견하는 것 같긴 했지만. 자고 일어났을 때 잠기는 목소리, 큰 키, 귀여운 말투,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 같은 메뉴를 꾸준히 좋아하고 밥투정이 없다는 점, 대개 무던하고 잘 맞춰주는 부분, 매사 성실하고 요령 피우지 않는 것….
그에 반해 변의주는 니콜라스의 좋은 점을 몇 가지 뽑지 못했다. 그냥 잘생겼고. 나를 좋아하고, 가끔은 귀엽고. 안 귀여울 때도 많지만. 처음 이 질문을 했다가 돌아온 영양가 없는 답변에 니콜라스는 심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주주, 나 좋아하는 거 맞긴 하지?
변의주는 분명히 니콜라스를 좋아하지만, 둘은 온도가 묘하게 달랐다. 니콜라스는 지인의 소개로 변의주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를 유심히 지켜봤었다. 같은 유학생 처지에 이상적인 체격, 은근히 곁을 내주지 않는 무심한 성격까지. 수업 때가 아니면 좀처럼 목격할 수도 없다는 상상의 동물 같은 묘사를 듣고 처음에는 그 바운더리에 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경계를 비집고 들어가는 게 특별히 어렵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변의주도 자신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다는 게 꽤 당혹스러웠다. 농구하는 폼이 웃겼고, 띄엄띄엄 주는 답장은 어쩐지 영혼이 없어서 재밌었고, 스몰토크 주제를 꺼내려다 털어놓은 고민거리에 진지하게 상담해 주는 태도가 좋았다. 나중에는 그냥 변의주라서 좋았고.
변의주는 조금 달랐다. 그는 그것의 영향이 전부인지, 혹은 타고난 성정의 영향이 있는지는 몰라도 선이 확실한 사람이었고 매 순간 판단을 내리고 분류하면서 만사를 파악했다. 니콜라스는 변의주의 영역을 대뜸 헤집어놓았던 사람이고, 기존에 봐왔던 사람들과는 다른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처음 만났을 당시 니콜라스는 낯을 다소 가리는 편이었는데, 나중에는 변의주의 뭘 보고 달려든 것인가 의아할 만큼 변의주의 내면으로 냅다 다이빙을 했었다. 감정 기복이 심했고, 귀엽게 굴다가도 귀엽다는 말을 듣는 걸 싫어했다. 변의주는 니콜라스가 단기간 내에 보인 다양한 측면을 접하고는 수많은 가설을 세웠다 깨부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니콜라스와 마음이 얼핏 맞으면 공통 분모를 찾기 바빴다. 어떤 점이 좋은지, 같은 가치 판단을 따로 내린 적은 없었다. 일단 니콜라스에게 맥없이 허물어지고 난 다음이니까, 그게 뭐든 딱히 싫다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너라면 다 좋아, 같은 성의 없는 남자친구 답변이나 좋은 점 딱히 없다는 장난식 답변밖에는 꺼낼 게 없었다. 하긴, 그런 것도 니콜라스에게는 체념이었겠다. 좋은 점을 꼽아보랬더니 한참이나 얼타다 최악의 답을 늘어놓는 남자친구라니.
그렇지만 변의주도 니콜라스에게 틈만 나면 자신을 좋아하는 게 맞긴 하냐는 질문을 받는다는 사실이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비록 털어놓지는 못했으나, 하나 남은 목숨까지 맞바꿔 살려냈을 정도로 그것의 세 번의 생에 있어 니콜라스는 가장 열렬한 사랑이었다. 타고난 종의 한계로 니콜라스가 바라는 만큼의 애정을 표시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던 것뿐이다. 변의주가 니콜라스를 정말 사랑한 게 아니었다면, 계약 기간 남은 방을 두고 새로운 집을 알아보러 동분서주하지도 않았을 테고, 니콜라스가 먹고 싶다고 얘기했었던 대만 간식을 대량 구매하지도 않았을 테고, 니콜라스의 쇼핑 강행군에 매주 어울려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싸움은 늘 이런 곳에서 시작한다.
처음으로 크게 싸웠던 것은 사귀고 4개월쯤 지나서였다. 교제 이후 사소한 잘잘못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쌓이다 마침내 악취를 풍길 무렵, 니콜라스가 충동적으로 잠적해 버렸다. 저녁쯤 대뜸 어딜 갔다 오겠다는 문자에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대책 없이 기다리던 변의주는 자정이 다 되어서 니콜라스에게 두 번쯤 전화를 걸었다가, 장문의 메시지를 한참 썼다 지웠다. 10분 넘게 글을 고치던 변의주에게 니콜라스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순간 안도한 변의주가 덥석 전화를 받자, 니콜라스의 적반하장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내가 어디서 뭐하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뭐?” 변의주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묻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 너 어딘데? 늦어?”
“응, 늦어. 찾지 마.”
“여보세요? 야, 아니….”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에 대고 변의주가 다시 한번 크게 한숨을 쉬었다. 또 왜 이래?
그 시기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급락하고 있었다. 살 부대끼며 살아보니 서로를 실망시키는 일이 잦았고, 둘 다 각자의 일로 바빠 서로에게 그리 너그럽지 못했다. 불화가 그리 심각한 수준으로 번진 적은 없었지만, 니콜라스는 변의주가 보기에 사소한 일로 열을 올렸고 변의주는 니콜라스가 보기에 지나치게 무심했다.
변의주가 바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휴대폰은 내내 꺼져 있었다. 그럭저럭 친하게 지냈던 니콜라스의 지인들에게 즉시 전화를 돌려보았지만 다들 니콜라스가 어디론가 떠났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바로 다음 날 아르바이트와 약속이 잡혀 있는 데다, 니콜라스의 행방을 알 만한 어느 단서도 없으므로 할 수 있다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변의주는 니콜라스의 방을 뒤져 사라진 물건이 그리 많지 않다는 데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몇 시간 뒤에 공원 같은 데서 플래시를 터뜨려 찍은 니콜라스의 사진이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올라왔다. 누군가가 신경 써서 찍은 듯한 사진 속 한겨울에 가죽 재킷만 덜렁 입고 귀끝이 빨개진 모습을 보니 기가 찼다. 변의주는 몰려오는 두통을 느꼈다. 니콜라스와 마찰을 빚고 나면 항상 이런 식으로 머리가 아팠다. 어쩌면 감정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것을 위해 변의주의 신체가 다른 방향으로 스트레스를 표현하는 걸지도 몰랐다. 변의주는 빠르게 다이렉트 메시지로 항의했지만 니콜라스는 곧장 활동을 중지했고, 변의주는 혹시나 다시 접속할까 싶어 메시지를 여러 개 쌓아두었다. 구구절절 당장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쓰다가 어쩌면 이게 니콜라스가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변의주는 밤을 새워 가며 착실하게 부재중 전화를 남겨뒀다. 그냥 잠들었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노력했다. 40분 전 마지막 부재중 전화를 남기고 잠시 잠들었던 변의주는 벨소리를 가장 크게 설정했던 다이렉트 메시지 알림음에 놀라 깨어났다.
어떤 카페의 링크가 첨부되어 있었다. 요코하마여서 바로 간다면 그럭저럭 아침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일어나려던 변의주는 40분 정도 더 잔 다음 힘겨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나서면서 약속을 미루고, 친구에게 아르바이트 대타를 부탁했다. 도카이도선을 타는 동안 변의주는 커피를 때려 넣으며 할 말을 정리했다. 우선은 사과부터 할 작정이었다. 이를 위해 새벽 동안 써뒀던 (아마) 잘못했던 행동 리스트를 계속해서 고쳐나갔다. 사소한 것까지 적느라고 유치하고 긴 목록이 되었지만, 어쨌든 쓴 정성은 봐주지 않을까. 요코하마역에서 버스를 찾다 보니 도착지가 차이나타운 근처였다. 전에 니콜라스가 차이나타운 근처에서 살았다고 했던 게 뒤늦게 기억나서, 버스가 오기까지 니콜라스가 언급했던 식당들을 찾기 시작했다. 동시에 니콜라스의 옷도 좀 가져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잘못했던 행동 리스트에 추가. 변의주는 본인의 정신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넣자 10분 정도 지나서 니콜라스가 새로 링크를 보내줬다. 바로 뒤에 있는 넷 카페였다. 입구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졸린 기색의 니콜라스가 여전한 가죽 재킷 차림으로 느지막이 나오고 있었다. 음료수 바에서 미적대던 니콜라스가 그제야 변의주를 알아차렸다.
“일찍 왔네.”
목이 잠겨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니콜라스가 짧게 말했다. 변의주는 자신의 앞을 지나쳐 입구를 나서는 니콜라스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니콜라스가 문을 잡은 채 눈썹을 치켜뜨는 것을 보고 덩달아 넷 카페를 나왔다.
“계속 여기에 있었어?”
“아니, 별로.”
“…춥지 않아?”
“괜찮아.”
변의주가 어설프게 말을 붙여봤지만 니콜라스는 그 뒤로도 한참 단답으로 일관했다. 말을 씹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침부터 사람을 불러댔으면서 모르쇠로 뻐팅기는 행태에 불만을 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리꼭지의 히터에서 바람이 직빵으로 내리치는 좁은 카페에서 니콜라스는 빨대로 딸기 라떼를 휘저으며 말문을 텄다.
“일은?”
“친구한테 부탁했어.”
아. 니콜라스가 외마디 감탄사와 함께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지나치게 피로한 낯짝의 변의주는 낮은 의자에 몸을 미끄러트리며 한쪽 팔을 괴었다. 천천히 눈을 끔벅이는 변의주를 보며 니콜라스가 다시 입을 뗐다.
“주주.”
“응.” 변의주가 자세를 바로 하며 눈을 부릅떴다.
“연락도 없이 나간 건 미안해.”
예상했던 시나리오 중에 니콜라스가 첫 마디부터 사과하는 경우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의외로 훅 들어오는 사과에 변의주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히터 때문에 눈이 많이 건조해진 것 같았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부풀기 시작했다.
“애처럼 굴었어. 여기까지 의주를 부른 것도 그렇고.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니콜라스가 빨대로 유리컵 바닥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주주는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한 건지 알고 있어?”
이건 예상 범주다. 변의주는 시험에 아는 문제가 나와 자신만만해진 학생처럼 승리를 확신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둔 건 있어.”
“궁금하네.”
“내가 최근에…아니, 옛날부터 너를 실망시킨 일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감정적인 부분이나 이런 데에 약해서. 너 기다리는 동안 이것저것 생각해 봤는데.”
변의주는 생각나는 대로 그의 잘못한 이력들을 읊었다. 저녁 약속 같은 건을 제때 말하지 않았던 점이나, 니콜라스를 자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밥을 먹거나 잠에 들었던 점, 점점 데이트 횟수가 줄어든 점, 니콜라스가 신경 쓰지 않으면 생활 전반에 다소 나태해지는 점 같은 것. 니콜라스는 고개를 숙인 채 계속 빨대를 음료에 넣었다 뺐다 하고만 있었다. 니콜라스가 노력을 가상하게 여길 거라는 판단이 어긋났다는 것을 알아챈 변의주가 말을 멈췄다.
“주주, 내 생각에….” 니콜라스가 여전히 정수리만을 보인 채 말했다. “내 생각에, 주주는 나랑 맞지 않는 것 같아.”
“왜?” 진지해진 니콜라스에 겁이 덜컥 난 변의주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주주가 말한 것들이 전부 고쳐줬으면 하는 점인 건 맞아. 그런데 그런 것들은 아마 절대로 고쳐지지 않을 거야.”
의아한 변의주의 얼굴에 니콜라스가 눈을 맞췄다. 약간 부은 피곤한 얼굴.
“내가 부모님 이야기 자주 했었지? 그중에 안 한 이야기도 있어. 엄마가 아버지를 따라서 세계를 돌아다녔을 만큼 우리 부모님은 원래 사이가 아주 좋으셨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이혼 소송 중이었어. 그때 엄마가 나한테 세상에는 사랑으로도 변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말했었어.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좀 알 것 같아.”
“뭐가? 내가 너한테 잘 못 해줘서 그래?”
“아니, 그런 문제라기보다….” 니콜라스가 말하다 말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실은 원래 작년에 일본을 떠나려고 했거든. 대학을 언제까지나 쉴 수는 없기도 하고, 이제는 그냥 돌아가고 싶었어. 근데 의주가 좋아져서, 그리고 의주한테 떠난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또 미뤘어. 그만큼 의주랑 같이 있는 게 좋았어.”
변의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갑작스럽게 토로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떠오르는 걱정과 비난과 화해의 말들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래서 한계를 느끼나 봐. 의주가 좋다는 이유로 내가 무시해야 할 게 많아져. 내가 일본에 남아 있는 이유는 의주 하나인데, 의주가 조금만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처를 받아. 그러면 또 서로 피곤해지고, 나는 어디로 떠나버리고 싶어지는 거야.”
그냥 돌아가고 싶어.
“…어디로?”
“몰라. 딱히 오래 있어 본 곳이 별로 없어서…. 그냥 의주를 만나기 전이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이나, 그런 데로 돌아가고 싶어. 그래서 이렇게 돌아다니는지도 몰라.”
“그렇게 도망치면….”
“도망친다고 하지 마.”
니콜라스가 대번 대꾸하자 변의주가 입을 다물었다. 드디어 변의주의 분노 스위치가 올라갔다. 변의주가 니콜라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호전적인 말투로 일갈했다.
“도망치는 거잖아. 그렇게 도망치고 싶어? 다시 그냥 돌아가면 안 돼?”
“다시 이대로 도쿄로 가버리면, 뭐? 그래봤자 또 싸우게 될 텐데. 의주랑 나는 애초에 생각하는 게 너무 달라. 내가 왜 화났는지 알아? 화나서 나온 게 아니야, 나와서 화가 난 거야. 내가 어제 오후 4시부터 없었는데, 의주는 12시에 처음 전화를 했다는 게 화가 났어. 그것도 고작 두 번.”
“두 번이 아니라, 그때는 메시지 쓰고 있었어. 그리고 나중에 전화 또 했잖아?”
“내가 화내니까 전화했겠지. 그리고 원래 어제 약속 같은 거 없다고 했었잖아. 그렇게 일찍 와서 저녁도 혼자 먹었겠지. 한 12시나 되어서 내가 없다는 거 안 거 아니야?”
“문자 남겼길래 약속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그래서 계속 너 기다리고 있었어. 그럼 내가 두 시간마다 전화해야 했어?”
“이것 봐, 안 맞는다고. 그냥 생각 자체가 달라.”
“안 맞는다고 넘길 게 아니라, 물어보는 거잖아. 네가 원하면 고칠게.”
“같은 말을 벌써 몇 번째 하고 있는지는 알아? 의주가 오늘 잘못했다고 했던 것들, 원래 내가 고쳤으면 좋겠다고 전부 몇 번씩이나 말한 거잖아.”
변의주가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고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나도 말했었잖아. 내가 고쳤으면 하는 부분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언제 제대로 말한 적 있어? 항상 기분 나빠하기만 했잖아.”
니콜라스가 기가 질린 얼굴로 내뱉었다. “…너 진짜 말 못되게 한다.”
“응, 맞아. 차라리 그냥 이렇게 싸워. 떠나버리고 싶다고 하지 말고.” 변의주가 얼굴을 감싸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한 말이 진짜 못된 말인 거라는 건 알아? 장난해? 넌 진짜….”
“…울어?”
“미쳤어?” 변의주가 얼굴에서 손을 떼며 소리쳤다. 한적한 카페에서 서버의 시선이 잠시 변의주에게 꽂혔다. “아, 진짜. 너 대체 왜 그래. 내가 고치겠다고…. 네가 뭐 혼자 미국 가버리면 내가 혼자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어? 너 혼자 떠나버리면 나는?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긴 해?”
니콜라스가 벙찐 표정으로 변의주를 바라보았다. 니콜라스의 잔 속 딸기 라떼는 얼음이 죄다 녹아 원래의 높이로 돌아간 상태였다. 변의주의 앞에는 구깃하게 접힌 갈색 냅킨이 놓여 있었다. 니콜라스의 맞은편에는 변의주의 패딩이. 변의주의 눈은 히터 바람 때문인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의주.”
“내가 널 좋아하냐고 왜 자꾸 묻는 거야? 처음 물어봤을 때는 알고 있었잖아.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래, 대체. 내가 변할 건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아. 만난 지 4개월밖에 안 됐어. 4년은 만나보고 얘기해. 너야말로 날 알긴 알아?”
“내가 널 몰라?”
“몰라.”
“무슨….”
“내가 너 살린 것도 모르잖아.”
“…무슨 소리야?”
“너 사고 났을 때, 내가 너 살렸다고.”
“네가 날 어떻게 살렸는데. 네가 뭐 무슨 화타야?”
“그러니까 알아가라고. 내가 아침부터 왜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자고. 네 과거로 말고, 내가 있는 미래로.
니콜라스가 황당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변의주는 달아오른 얼굴로 웃지 말라고, 하고 말했다.
*
니콜라스는 본인이 사랑한 변의주가 사실 외계 기생체의 숙주라는 사실을 영 믿지 못했다. 하기야 변의주가 지구상의 미디어가 비추는 전형적인 외계인은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변의주의 머리통을 갈라 현미경으로만 관찰할 수 있고, 눈에서 레이저 빔이 나오거나 광속의 비행접시를 갖고 있지도 않았고 몇 개 없는 기적의 명약을 소유한 것 외에 별다른 초능력도 없었다. 다시 도카이도선을 타고 돌아가는 길에 니콜라스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럼 넌 어디서 왔는데?
“말해도 모를걸.”
“신뢰가 안 되는데.”
“우리를 기준으로 여기는 열세 번째 은하군이야. 지구가 발견하지 못한 은하군에 속한 항성계의 네 번째 행성에서 왔어. 지구보다 조금 크고 밀도는 좀 더 낮은데 생김새는 비슷해.”
학창 시절 지구과학 수업마냥 그의 행성에 대해 설명하는 변의주를 니콜라스가 졸린 눈길로 쳐다봤다.
“에에. 이름이 뭔데?”
“인간의 구강 구조상 발음할 수는 없어. 쓰기도 어렵고. 보통은 텔레파시 같은 걸로 전달돼.”
“거짓말 아니야?”
“아니거든.”
“그럼 너희 행성에 대해 말해봐.”
“나도 가본 적은 없어.”
“에? 그럼?”
“현세대 개체로는 지구로 오는 도중에 부화했고, 전세대에서는 열다섯 개의 문명을 조사했었어. 전부 멸망했지만.”
“그럼 대체 몇 살이야?”
“스물다섯.”
“아니, 인간 나이 말고.”
“…세어본 적 없어. 현세대로는 몇백 살쯤 되지 않았을까. 다시 살아나기까지 텀이 좀 있기는 하지만.”
“…진심이야?”
“못 믿겠어?”
“너 같으면 믿을 수 있겠냐.” 니콜라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잠시 말문이 막힌 변의주가 니콜라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 마디 던졌다.“뭔가 보여줄까?”
“에. 뭔가 있어?” 변의주의 말에 니콜라스가 눈을 빛내며 변의주에게로 가까이 당겨 앉았다. 변의주는 그렇다기보다는, 하고 말끝을 흐렸다.
“놀라지 마.”
변의주는 그렇게 말한 뒤, 숙주의 이른바 생명 활동을 잠시 정지시켰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니콜라스의 체감과 전철 내부의 히터 바람, 전철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뚝 끊겼다. 니콜라스에게는 변의주가 죽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것은 10초가량을 기다린 다음, 다시 숙주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촉감부터 오감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변의주의 시야가 돌아왔을 무렵에는,
“의주!”
1분 전쯤 봤던 모습과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나 있었다. 변의주가 급한 호흡을 토해내며 눈을 깜박였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앉은 허리가 뻐근했다. 변의주는 좌석이 아니라 전철 바닥에 누워 있었고, 주위에 사람이 두엇 정도 서 있었다. 그들은 변의주가 깨어난 것을 보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아마 변의주와의 연결을 끊으면서 몸이 굴러떨어진 모양이었다. 변의주의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던 니콜라스가 변의주를 감싼 채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묵직하게 눌러오는 무게에 변의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좀 일어나자. 변의주가 말했지만 니콜라스는 미동 없이 변의주를 껴안은 채였고, 결국 변의주는 어정쩡하게 전철 바닥에 앉은 채 주위 행인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어떤 중년 남성은 그러다 훅 갈 수 있으니 꼭 병원에 가보라고 말하고 떠났다. 변의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응할 즈음, 변의주는 자신의 오른쪽 어깨가 어쩐지 축축하다는 것을 느꼈다.
“…너 울어?”
세 시간만의 복수였다.
“죽은 줄 알았다고!” 니콜라스가 시뻘게진 얼굴을 들어 빽 하고 소리쳤다. “갑자기 죽는 게 어디 있어!”
니콜라스의 낯빛을 본 변의주는 니콜라스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니콜라스가 소매로 얼굴을 벅벅 문질러 닦으며 윽박질렀지만, 변의주는 전철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한참을 웃었다. 자신이 죽은 줄 알았다던 니콜라스의 얼굴이 이제껏 본 얼굴 중에 가장 얼빠져 보였는데, 그게 정말 웃겼다. 그때는 그냥 웃겨서 웃었는데, 다시 생각하면 안도일지도 모른다. 갖은 애를 써서 붙잡아낸 애인이 사실은 자신을 굉장히 사랑하고 있었다는, 예상치 못했던 애정의 징표를 불쑥 받아서 생긴 안도. 변의주는 전신에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웃어댔다. 니콜라스는 씩씩대며 변의주를 밀어대다가 너 같은 건 정말 짜증 난다며 전철에서 대뜸 내려버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변의주가 다음 역에서 내려 전 역으로 걸어갔다. 변의주는 걷는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웃어댔다.
니콜라스는 내렸던 자리 바로 앞에 있는 플라스틱 벤치에 앉아 있었다. 변의주를 보자 니콜라스는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코를 한 번 훌쩍였다. 한 번 눈물을 빼고 벅벅 닦아낸 얼굴이 무지하게 형편없었다. 변의주가 웃으며 니콜라스의 옆에 앉았다.
“미안해.”
“주주 진짜 제정신 아니야.”
“그냥 보여주려고 한 거였어. 진짜로 죽은 것도 아니고. 껍데기만 잠깐 멈춘 거지.”
“인간은 원래 껍데기가 전부야. 심장 소리가 안 들려서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 다시는 그러지 마.”
“이제 믿을 수 있어?” 변의주가 앞 광대를 빛내며 물었다. “내가 말했던 거.”
“응. 최악이야. 최악의 외계인이네.” 니콜라스가 반대편 벽에 몸을 기대며 힘없이 대꾸했다. “언제든 가사 상태가 될 수 있는 외계인 같은 게 어딨어? 진짜 별로야.”
“그래도. 그래서 너 살렸잖아.”
변의주의 말에 니콜라스가 옆을 흘낏 돌아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주주도 이랬어? 나 죽었을 때.”
“난 더 심했지.”
“보고 싶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예전에도 사람 살려본 적 있어?”
“네가 처음이야.”
“거짓말 아니고?”
“거짓말 아니고.”
“요즘 의주는 그냥 내가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것 같아. 못 믿겠어.” 니콜라스가 작게 툴툴댔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왜 살렸어? 나만?”
눈이 마주치자, 뭔가 알아차린 니콜라스가 변의주의 대답을 큰 소리로 막는다.
“모른다고 할 거면 대답하지 마.”
“네가 좋아서 그랬나 봐.”
“뭐. 주주 몇백 살 할아버지라며. 그동안 사람 많이 사귀었을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까 전에는 내가 처음이라고 했는데. 또 거짓말했네.”
“남자친구가 처음이랬지. 변의주로는 진짜 처음이야.”
“어쨌든 말이야.”
“별로 의미는 없었어.”
변의주가 딱 잘라 대답했다. 실제로도 사실이고, 니콜라스에게 수많은 전 애인들의 이야기(중추의 효율적 처리를 위해 본인의 동의하에 여러 번 포맷된 탓에 기억도 전무하다)를 하는 것보다 이편이 확실한 정답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옆 플랫폼에 머리를 박은 니콜라스의 표정은 퍽 심각했다. 변의주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나중에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 얘기할까 봐.”
니콜라스의 말에 변의주가 멍하니 니콜라스를 내려다봤다.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것이 기억하는 이래로 니콜라스처럼 종이 다른 인물을 사랑해 본 전적은 없었다. 위대한 계획을 배반하면서까지 무작정 사람을 살려본 적도 없었고, 불손하게 그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은 적도 없었다. 니콜라스는 아무래도 변의주의 행동이 얼마나 도리에 어긋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남은 모든 신앙을 걸고 니콜라스에게 맹세도 할 수 있었지만, 변의주는 겨우 한 마디를 내뱉고 만다.
“…그럴 일 없어.”
“상처받을 거야. 절대. 죽고 나서도.”
“알았어.”
“미래에 네 애인이 나에 대해 물으면 뭐라고 할 건데?”
“몰라…. 애인 같은 거 안 만들어.”
“거짓말.”
“뭐 다 거짓말이래.”
“주주 거짓말쟁이니까. 원래는 나 살린 적 없다고 했었잖아. 남자친구도 거짓말이었지.”
“아, 정말….” 변의주가 볼을 부풀리며 불평하려다 곧 납득했다. “…그러네, 미안.”
이후로도 니콜라스는 종종 변의주의 정체에 대해 묻고는 했었다. 변의주 이전에는 어떤 이를 숙주로 삼았었는지,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는지 같은 것들. 여태껏 변의주가 요령 없는 호스트, 니콜라스가 재치 있는 게스트로 출연했던 잠들기 전 토크쇼에서 변의주에게도 마이크가 긴 시간 주어졌다. 불행히도 이미 개체를 갈아타느라 이전의 기억들은 집단 기억 데이터베이스에 옮겨놓은 변의주는 전해줄 말이 딱히 많지 않았다. 니콜라스에게 자신들의 생활 양식을 설명해 보기도 했지만, 솔직히 변의주의 말재주로 이해시킬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집단이자 곧 개인이었다. 개체 하나하나는 중요하지 않았고, 군집의 발전과 의식의 확대를 목표로 삼아 머릿수를 늘려나갔다. 자신의 안위를 중시하는 개체주의자들은 먼 과거, 즉 그것들이 행성을 벗어나기도 전에 도태된 상태였다. 그것들은 집단의식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공통된 교리인 위대한 계획을 공유했다. 위대한 계획, 그것은 그들 공동체 전 세대의 모든 숙원을 관통한 단 하나의 존재였다. 그것들의 문명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속적으로 인식하는 일에 골몰해 있었고 그것이 위대한 계획의 집필로 이어져왔다. 그것들의 집단의식에서 잉태된 초지능인 위대한 계획은 예언서이자 역사서였고 결코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것들은 위대한 계획이 써 내려가는 동시적인 역사를 신봉했고, 위대한 계획 아래 나고 죽었으며 부흥하고 쇠락했다. 그것들은 개별적인 사건을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변의주가 몇 번째 문명을 거쳐 왔든, 어떤 껍데기를 뒤집어썼든, 그의 생애에서 어떤 일을 겪었든, 그 모든 것은 하등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것들이 공유하는 의식에는 그러한 사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게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위대한 계획이 예언하고 기록했던 그 순간들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었다.
“그럼 의주가 이렇게 사는 것도 전부 계획된 거야?” 니콜라스가 수박을 먹다 말고 물었다. “지금은 뭐 하고 있다고 적혀 있는데?”
“니콜라스랑 같이 수박 먹고 있다고.”
“진짜?”
니콜라스의 놀란 표정을 보고 변의주가 웃음을 터뜨리며 휴지를 뽑아줬다.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는 몰라. 물론 위대한 계획은 알고 있겠지만, 그런 것까지 다 담다간 위대한 계획을 의식에 담을 수 없어지니까. 그냥 모든 게 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돼. 나도 위대한 계획의 내용을 전부 알 수는 없고.”
“싫은데, 뭔가.”
“나도 가끔 모르겠어.”
“나는 전혀 모르겠어.”
니콜라스가 입 끝을 늘어뜨리며 어깨를 으쓱이는 바람에 변의주가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수박 더 자를까?
*
관계는 빠르게 평탄해졌다. 니콜라스도 떠나버리겠다는 말은 그다지 하지 않았고, 걱정된 변의주가 말을 몇 차례 꺼내면 당분간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지금은 의주랑 있는 게 좋아.”
그렇게 말하면 ‘지금’이 얼마나 지속될지도 모르는 주제에 변의주는 배시시 웃었다. 니콜라스의 사소한 행동이나 말로 감정이 마구 널뛰는 나날들이었다.
그해에 니콜라스는 배드민턴 레슨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친구를 일주일에 한두 시간 봐주던 것이 점점 늘어나서, 2 대 1로 진행하는 수업이 너덧 개쯤 되었다. 본래 낮 시간대에 빈티지 샵에서 일하던 니콜라스의 일과는 조금 더 늘어나,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변의주는 그다지 좋지 못하게 배드민턴과의 끝을 맺은 니콜라스가 다시 배드민턴을 시작하고 활기를 되찾은 것이 좋았다. 생각보다 벌이가 쏠쏠해서 월말에 니콜라스가 실실 웃으며 과일을 박스째로 사 오거나, 쇼핑할 때 씀씀이가 약간 더 커진 것도 좋았다. 변의주 먹으라고 귤을 무한히 까주는 것도. 그때 귤을 까먹으면서 봤던 영화도 재미있었다. 딱히 영화 보는 데 취미가 없는 변의주였지만 당시에 봤던 이터널 선샤인은 좋았다. 사귀기 전 니콜라스가 좋아하는 영화를 물었을 때 머리를 긁적이며 너의 이름은, 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서, 니콜라스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이터널 선샤인으로 바뀌었다고 말하자 니콜라스는 그런 거 물어본 적 없다는 표정으로 그래? 하고 말았다. 니콜라스는 액션 영화를 좋아해서, 좋아하는 영화로는 대개 성룡 영화나 제이슨 본,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꼽았다. 니콜라스가 귀가해서 함께 아이스크림이나 과일을 퍼먹을 때쯤에는 영화 채널에서 그런 영화를 많이 틀어주었으므로 일주일에 한두 번은 그런 시간을 가졌다. 둘 다 영화에 집중한 적은 많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니콜라스가 레슨을 하는 캠퍼스 근처에서 볼일을 마쳤던 변의주가 니콜라스를 데리러 간 적이 있었다. 배드민턴 코트를 빙 두른 철망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수업 중인 니콜라스가 보였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의 수강생들이 라켓을 잡은 채 굳어 있었고, 니콜라스는 자세를 잡아주며 웃다가 수강생들을 상대로 랠리를 시작했다. 퍽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계속해서 변화하지 않고서야 배기지 못하는 듯한 니콜라스에게 이만큼 관성적인 구석이 있었다는 것을 변의주는 실감한다. 니콜라스의 얼굴 위로 근처 운동장의 눈부신 조명 불빛이 내렸다. 변의주는 학생 때 배드민턴 클럽에 들었다가 각종 대회까지 출전하며 배드민턴 선수로서의 꿈을 그렸던 니콜라스의 모습이 저러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변의주를 만나기 전, 방랑자처럼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기 전,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막 정착하려던 그 시기 즈음의 모습을 변의주는 짐작해 보았다. 멀리서도 오른팔의 선홍빛 흉터가 조명에 잠깐 빛났다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 수강생의 스매싱을 여유롭게 받아낸 니콜라스가 셔틀콕을 잡으며 랠리를 끝냈다. 수업을 막 마친 니콜라스가 변의주를 알아차리고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덩달아 손을 흔들며 변의주도 웃었다.
변의주에게 니콜라스가 뭐든 능숙해 보였던 시기가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기죽지 않고, 뭐든 자신감 있게 행동하고. 일본어 단어를 까먹는 일이 잦아도 자신감이 넘쳤고, 그밖에 할 줄 아는 언어도 다섯 손가락을 넘어갔다. 본인 말로 스페인어는 인사말밖에 할 줄 모른다고 했지만, 변의주가 스페인어 교양 수업을 수강했을 당시 니콜라스의 덕을 톡톡히 봤다. 개성이 확실하고 과감한 스타일도 도전하는 점도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시부야에서 사진이 찍혀 금주의 스트리트 패셔니스타로 잡지에 실렸던 적도 있고. 변의주를 따라 한국에 두어 번 갔을 때는 되레 변의주에게 맛집을 추천했던 적도 있었다. 사람을 잘 끌어들이는 것도, 감정에 솔직해도 됨됨이가 발라서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일이 없다는 것도, 도전 정신이 충만한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경험의 다양성 면에서 니콜라스는 변의주 자신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변의주는 니콜라스보다 훨씬 오래된 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니콜라스를 알고 나서 그만큼의 열의나 흥미를 갖고 살아본 기간은 오히려 짧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지나서야 니콜라스도 미숙한 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감해 보이지만 실패에 취약하고, 자립적인 것 같아도 변의주의 동의가 없으면 미묘하게 불안해했다. 사교적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낯가림이 심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가끔 불확실한 미래와 연약한 기반을 버거워했고, 감정적인 부분에서는 무던한 변의주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언어도 오랫동안 연습하지 않으면 잘 나오지 않는다며, 처음에는 할 줄 아는 언어가 여섯 개랬다가 나중에는 네 개로 깎아 말했다. 경험이 많아서인지 각종 기억이 자주 섞였고, 비자를 재발급하거나 돈을 관리하는 것 같은 실무적인 일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무언가를 좋아했다가도 쉽게 질려했고 참을성이 부족한 편이었다. 여러 일로 니콜라스가 골머리를 썩이거나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변의주는 니콜라스가 취약한 부분을 자신에게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게 기쁘다가도 안타까웠다. 스노우 볼처럼 굴러가 호감에서 애정으로 변한 감정은 연민을 만나 끝없이 커져만 갔다.
배드민턴을 치는 니콜라스의 모습은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니콜라스가 끝내 자신을 버리던 순간에도, 변의주는 니콜라스가 미래에 저런 표정을 하길 바랐던 것 같다.
*
행복했던 시간은 순간으로 떠오르지만, 불행했던 시간은 따분한 영화처럼 한없이 늘어진 채 상영되는 경향이 있다. 변의주는 니콜라스와 헤어지고 이별의 순간을 머릿속에서 하염없이 재생하며 세월을 보냈다. 꽤 좋은 상태를 유지했던 관계가 갑자기 기울기 시작했던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것이 그간 전송한 모든 기록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체크포인트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변의주는 너무 많은 후회를 했다. 당연히도, 평소에는 좀처럼 후회하지 않는 편인데도. 변의주는 니콜라스와 지냈던 모든 순간을 떠올리며 기억 속 자신에게 의미 없는 업데이트를 실행하곤 했다. 평소에 니콜라스에게 저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처음 만났을 때 좀 더 다정하게 대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입에 붙었다는 이유로 니콜라스라고 부르지 말고, 가끔은 이샹이라고 불러보기도 할걸. 니콜라스가 입버릇처럼 주주라고 말하는 바람에 바깥에서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떠오르면, 왜 한 번도 니콜라스를 샹샹이라고 부를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면 또 만 4년 동안 변의주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꽤 많은 것을 견뎠던 니콜라스가 한없이 불쌍하기도 하고, 변의주가 왜 인간 변의주가 아니라 감정놀음에 젬병인 불순물이 섞인 괴이한 생명체여야만 했는지 원망스럽기도 했다. 좀 더 자주 표현할 걸 싶다가도, 그런 것으로 니콜라스가 쉽사리 잡혔을까 싶기도 하고. 아마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과 부대끼고 사는 것이 자유분방한 니콜라스에게는 고역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니콜라스가 들려줬던 다양한 이야기의 절편을 끌어다가 니콜라스가 자신과 있었을 때 불행했을지 아닐지 점쳐보기도 하고.
널 더 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아.
그런 말을 하고 무작정 집을 나가 버린 니콜라스는 처음 보는 그의 친구와 함께 나흘 뒤에 돌아와 말없이 짐을 싸고 도로 나갔다. 이미 그때는 니콜라스가 여러 번 캐리어에 짐을 풀었다가 쌌다가 했기 때문에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변의주는 소파에 앉아 니콜라스가 집안을 들락거리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짐을 싸는 것을 도와줄 만큼 너그럽지는 않았다. 현관문 밖의 주차 공간 바로 앞에는 그의 친구가 트럭 운전석에 앉아 릴스를 보고 있었고. 변의주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더 생각해 봐.”
“이미 여러 번 생각했어.” 니콜라스가 이삿짐 박스를 현관 쪽으로 밀며 말했다.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해 봐.”
변의주의 재촉에 니콜라스가 뒤를 돌아보며 볼품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 지금 너무 힘들어. 자꾸 그러지 마.”
“힘들면 이사는 내일 해.”
“이미 비행기 표도 끊었어.”
“취소해. 돈 물어줄게.”
“말은 쉽네.”
“가지 마.”
변의주의 형편없는 목소리에 니콜라스가 신발을 신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잘 있어.”
“넌 내가 살렸잖아.” 변의주가 일어서서 현관으로 성큼성큼 향했다. “그냥 이번만 내 뜻대로 해주면 안 돼? 내가…. 내가 너 살렸잖아. 큰 것도 아니잖아. 예전 일 기억해 봐. 사랑한다고. 그러면 되는 거 아니야?”
“…가볼게.” 니콜라스가 약간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울지 마.”
아마 변의주가 구질구질하게 붙잡는 바람에 니콜라스가 꼼꼼히 짐을 싸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니콜라스는 본래 적어도 2년에 한 번은 거처를 옮겨 다녀서 짐을 싸고 푸는 데 익숙한 사람이니까. 어쨌든 니콜라스가 남긴 흔적은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 함께 산 지 오래되다 보니 함께 쓸 물건이라고 구매한 것들도 많았고, 오롯이 니콜라스의 것인데 두고 간 것도 있었다. 그의 집은 꼭 변의주가 매일매일 니콜라스의 흔적을 열어볼 수 있도록 니콜라스가 남겨둔 선물 상자 같았다. 잔인한 일이었다. 변의주는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며칠 전, 몇 주 전을 떠올렸다. 세이브 포인트로 끊임없이 돌아가 지금 닥친 재앙을 상상으로라도 파훼하고 싶었지만, 변의주도 니콜라스가 본인 상상대로 흘러간 적 없는 인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생각으로라도 게임이 클리어되는 일은 없었다. 변의주는 다시 문제의 그날로 돌아간다.
한창 냉전 중이었던 터라 변의주가 퇴근하고 나서 니콜라스가 불 꺼진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변의주는 거실의 불을 켜며 뭐해, 하고 운을 뗐다. 니콜라스는 놀라우리만치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처음 크게 싸우고 얼굴을 마주했던 날처럼. 파리한 안색의 니콜라스가 자신의 옆을 툭툭 치며 앉으라고 말했다.
“그만하고 싶어.”
문장의 의미를 뚜렷이 알아챘으면서 변의주는 우선 한 템포 쉬어가기로 한다. “뭘.”
“너랑 나.”
니콜라스는 태클 걸 힘도 없는 사람처럼 축 처진 어깨로 대꾸했다. 변의주는 수습할 방안을 떠올려본다. 니콜라스는 늘 중요한 순간 져줬으니까, 확신은 없어도 자신은 있었다. 당장의 관계를 유예할 방안 같은 것. 변의주가 참을성 있는 목소리로 묻는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유는 항상 똑같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을 것 같고.”
“돌아가고 싶다고?”
“응.”
“…미국으로 돌아갈 거라면 굳이 끝내지 않아도 괜찮잖아. 작년에도 잘 끝내고 돌아왔었잖아. 앞으로 반년이고.”
니콜라스는 이미 작년에 학교로 돌아가 한 학기를 지내고 다시 돌아온 상태였다. 졸업까지는 딱 한 학기가 남아 있었다. 변의주는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니콜라스는 꺼리는 기색이어서 가끔 스카이프를 하는 것으로 보냈다. 니콜라스는 학기 중에 두 번인가 일본에 왔었고, 변의주는 그해 초에 취직한 터라 휴가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본래 계획했던 미국행이 한 번 어그러지고, 니콜라스는 다시 일본으로 왔다.
“의주는 작년이 괜찮았어?”
“좋지는 않았지만, 참을 수는 있었어.”
“응.”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지만 올해는 못 할 것 같아. 그냥 미국으로 떠나면 그대로 거기서 살고 싶어.”
“…왜?”
“몰라, 도망치고 싶나 봐.”
“나한테서?”
“비슷해.”
“내가 싫어졌다거나 그런 거야?”
“아니, 그렇기보다는 그냥 좀 지쳐. 널 좋아하는 데 노력이 너무 많이 들어.”
“…잘 해내고 있었잖아.”
“이제 포기하고 싶어. 사실 너한테 별로 설명하고 싶지도 않아.”
“…내가 미국으로 가면?”
“오지 마.”
“왜? 작년에도 오지 말라고 한 이유가 뭐야?”
“내 바닥을 보여주기 싫어서.”
“바닥이라니.”
“너한테서 안전한 곳이 있었으면 좋겠어서. 넌 자꾸 나를 침범하잖아. 성격이나 취향 같은 거.”
“나도 마찬가지야. 너는 그게 싫어?”
“뭐든 과하면 좋지 않다고 생각해. 그리고 네가 나한테 실망하게 될까 봐 무서워.”
“난 실망 같은 거 안 해.”
“언젠가는 하게 돼. 인간은 전부 그래.”
“…난 아니야.”
니콜라스가 고개를 돌리며 변의주를 똑바로 쏘아봤다. 안방에서부터 초침 똑딱이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블라인드 틈 사이로 스며들던 태양 빛이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춰 거실은 완연히 어두컴컴해졌다.
“실망 안 해, 그런 걸로. 얘기를 하자, 통보를 하지 말고.”
“그럼 의주는 내가 미국에 간다고 하면 따라올 거야?”
“네가 떠난다면 그렇게 할 거야.”
“미국에 같이 갔는데도 싸워서 헤어지면? 그냥 버린 인생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런 거 아무래도 상관없어.”
“외계인이니까?” 니콜라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비꼬듯이 말했다. 그림자가 드리운 니콜라스의 얼굴을 변의주가 한참 뜯어보다가 한마디 했다.
“…왜 이래?”
“네가 외계인인 게 싫어.” 니콜라스가 짓씹듯이 내뱉었다. “내가 화낼 때마다 남처럼 쳐다보고 있는 것도 싫고, 네가 당연히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구는 것도 싫어. 우리는 항상 똑같아. 내가 먼저 못 참고, 의주가 달래고. 의주는 지금 이 순간만 넘기면 되니까. 항상 얘기하자고 하지만, 의주가 바라는 건 항상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잖아. 더 나아지는 게 아니라. 의주의 미래도, 나의 미래도 생각해 본 적이 없잖아. 의주는 의주가 언제 죽는지 알고 있댔지. 죽을 때까지 나 붙잡고 있으려고? 의주가 죽으면 나는? 나를 왜 사랑하는지도 모르겠어. 지금 사는 집에도 정이 없으면서, 나의 무엇이 좋은지 정확히 설명하지도 못하면서. 의주는 의주가 외계인이라는 걸 증명하는 건 죽는 척 하나뿐인 줄 알지?”
네 사랑은 껍데기뿐이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변의주는 여태껏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에 직면하느라 머릿속이 새하얘져 있었다. 어둠에 잠긴 거실에서 니콜라스의 흰자위가 유독 반들거렸다. 우는 걸까. 변의주는 평균적인 자극에 반응하는 자신보다 눈물의 역치가 낮은 편인 니콜라스를 떠올린다. 눈물은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우는 걸 무척이나 창피하게 여긴다는 사실도. 슬픈 영화를 함께 보다가 니콜라스가 대뜸 화장실에 한 시간이나 틀어박혀 있었던 적도 있었는데. 눈앞의 니콜라스는 입 안쪽을 씹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버린다.
“나를 사랑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 니콜라스가 한참 입을 달싹이다가 몇 문장을 덧붙인다. “내가 볼 때 의주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냥, 의주가 그래야만 하기 때문인 것 같아. 의주가 나를 사랑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를 정말 왜 사랑하는지 대답할 수 있어?”
순간 변의주는 예상외의 질문에 대답을 고르느라 필요 이상의 시간을 소비하고 만다. 변의주는 평소 니콜라스를 정말 왜 사랑했는지 같은 질문에 대응할 방안이 몇 개쯤 준비되어 있긴 했지만, 어떤 답변으로도 니콜라스의 결핍을 채워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길어지는 간극에 니콜라스의 표정에 예상했던 절망이 서린다. 변의주는 카운트다운이 막바지로 향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체 입을 떼지 못했다.
“…그게 중요해?”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데도 한참 애를 먹던 변의주는 결국 최악의 답변을 내놓았다. 니콜라스가 그간 제공했던 수많은 테스트 케이스를 학습하고도, 변의주는 니콜라스를 푸는 데 실패했다. 도리어 고장 나고 말았다. 아마 변의주가 그것의 숙주로 남아 있는 한, 평생 풀어내지 못할 불멸의 난제일 것이다. 니콜라스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 위로 체념이 가득했다. 주주.
“널 더 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아.”
변의주의 패착은 사랑에 대한 몰이해였다.
얄팍한 속임수 같은 것으로는 니콜라스를 잡아낼 수가 없었다. 니콜라스는 처음부터 변의주의 진심에 약했는데, 변의주는 니콜라스를 좀 구슬려 보겠답시고 얕은 수를 쓰다 시답잖은 버릇이 들어버렸다. 그래서 한참 잘못된 길을 걸어가던 변의주는 자신의 패배를 직감한 탓에 너무 이르게 백기를 들어버렸고, 자충수를 뒀다. 덕분에 감정적인 면에서는 변의주 앞에서 항상 약자를 자처하던 니콜라스는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었고, 니콜라스는 그 보상으로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변의주는 위대한 계획에 짓눌려서 하지 못했던 말들을 가능하다면 편지로라도 부치고 싶었다. 니콜라스가 처음 변의주에게 했던 것처럼 메시지를 꼬박꼬박 보내고 싶었다. 그 뒤로 변의주는 항상 문장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들이 자기들끼리 집단의식 내에서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 의사소통하는 것과 달리, 잘 정제한 문장으로만 전할 수 있는 진심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변의주가 니콜라스를 사랑한 것은, 그의 말대로 위대한 계획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의 언어로는 위대한 계획이고, 인간들의 언어로는 운명인 그것에 의해. 변의주가 자신조차 모르는 이유로 한 번 거절했었던 농구 제안을 다시 받아들인 것도, 니콜라스가 짧은 만남 이후에도 변의주를 기억해 뒀다가 말을 걸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위대한 계획 속에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 번도 인간을 사랑해 본 역사가 없었던 변의주가 설명할 수 없는 패닉 상태에 빠져 니콜라스를 살려낸 것도, 니콜라스가 바라던 변의주의 자유 의지 덕분이 아닐 수도 있다. 이후 니콜라스에게 좋아한다고 말해버린 것도,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느끼고 감정에 호소하고 니콜라스를 붙잡은 것도. 변의주는 니콜라스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지구에 오기도 전에, 그것이 탄생하기도 전에 예정되어 있었던 일일 수도 있다. 그것의 의의 자체가, 의미 없었던 인생의 끝에 니콜라스를 만나고 마음을 빼앗기는 것일 수도 있고. 변의주는 자신이 니콜라스와의 시차를 맞추기 위해 오랜 기간 방황해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변의주가 위대한 계획에 따라 니콜라스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더없이 낭만적인 말이다. 니콜라스는 변의주의 사랑이 껍데기뿐이라고 했지만, 언젠가 니콜라스도 인간은 껍데기가 전부라고 했었던 적이 있었다. 운명에 의해 니콜라스를 사랑하는 것이든, 니콜라스를 사랑하기 때문에 운명이 되었던 것이든 변의주에게는 결국 같은 일이다.
니콜라스에게 자신의 진심을 가능한 원본에 가깝게 전하기 위해, 변의주는 떠오르는 모든 감정을 한참이나 정제했다. 이제까지의 모든 생애 주기가 니콜라스에게로 달려가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니콜라스를 사랑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 그런 일이라고. 모든 위대한 계획의 목적이나 다름이 없다고. 공식적인 사망을 6년 2개월 앞둔 변의주의 최종 변론은 낭만적이다 못해 단내 끼치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지금 이렇게 죽는 것도, 니콜라스와의 관계가 끝났기 때문일지도.
위대한 계획은 어디까지 위대할 수 있을까. 가능한 가장 위대했으면 좋겠다. 변의주는 남은 신앙심을 짜내어본다. 이윽고 변의주의 호흡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변의주의 껍데기 안에서 죽는 것도 괜찮은 일이리라. 니콜라스는 변의주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어떤 반응일까. 처음 변의주의 사망을 보여줄 때처럼 슬퍼했으면, 아주 엉망이라면 좋겠다. 어쩌면 니콜라스는 변의주가 또 새로운 사람의 몸에서 깨어났으리라 믿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최대한 일찍 눈을 뜨고 싶다. 최단기간이 14년이었으니까, 그쯤 태어난다고 가정하면 겉보기에는 서른 살 이상 차이가 날 텐데. 그렇게 된다면 니콜라스를 할아버지라고 놀려야지. 금방 화낼 게 뻔해서 몇 번 놀리지도 못하겠지만. 죽음의 감각이 목전으로 닥쳐왔다. 니콜라스에게 사후세계에 대해 한 번 물어봤으면 좋았겠다 하는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시야가 점차 까맣게 물들어간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저녁으로 항상 먹던 규동이 아니라 미트볼을 먹을 걸 그랬다. 마지막 식사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니콜라스의 파이널 밀 세트가 미트볼이라면 변의주도 파이널 밀 세트로 미트볼을 요청할 거라고 항상 말하고 싶었는데.
변의주는 죽어가는 찰나 동안 이제껏 하지 못했던 말과 실천하지 못했던 행동, 고치고 싶었던 부분과 그가 사랑했던 니콜라스에 대해 아주 오래 생각했다. 변의주를 한참이나 괴롭혔던, 아주 길게 늘어진 슬픈 순간들의 시퀀스는 변의주의 의식을 마지막까지 붙잡아주는 것으로 그 효용을 다했다.
변의주는 문득 잔뜩 흐릿해진 시야에서 니콜라스를 목격했다. 어쩌면 그가 눈꺼풀 안쪽에 니콜라스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 마침내 성공한 것일지도 모르고. 다만 변의주는 니콜라스가 자신이 목격한 대로, 자신의 죽음에 슬퍼해준다면 기쁠 거라고 생각했다.
<끝>